2024년 5월 8일 (수)
(백)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진리의 영께서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가톨릭 교리

우리 시대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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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3-27 ㅣ No.1588

[특별기고] 우리 시대의 부활


욕망 버리고 십자가 지는 삶, ‘섬김과 내어줌의 길’ 따라야

 

 

- 독일 베를린 국립미술관에 있는 조반니 벨리니의 작품 ‘그리스도의 부활’.

 

 

요즘 언론이나 방송을 통해 들려오는 국내외 소식들은 한결같이 어둡고 암울한 소식뿐이다. 그래도 간간히 들려오는 아름다운 소식도 있다. 이런 소식은 우리에게 여전히 삶의 의미를 부여해주고 희망을 갖게 한다. 얼마 전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으로 통하는 호세 무히카 우루과이 대통령에 관한 일화를 접하게 되었다. 재임 중 평범한 시민의 평균소득에 맞추어 살기 위해 월급의 상당 부분을 기부했고, 호화로운 대통령 관저 대신 평범한 시민의 생활을 느끼기 위해 자신의 농장에서 머무른다고 했다. 그리고 아직까지 1987년형 자동차를 직접 몰고 있다고 한다. 어떤 부호가 이 차를 100만 달러에 사겠다는 제의를 했지만 단호히 거절했다고 한다. 그가 한 다음 말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삶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이다.”

 

이런 지도자를 둔 국민은 얼마나 행복하며, 또 그를 뽑은 국민은 얼마나 현명할까 하고 생각해 본다. 

 

이마에 재를 받은 지 엊그제 같은데 어느 새 부활 대축일이다. 지난 3월 초, 원고 하나를 어렵게 탈고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막 봄기운을 맛보고 있는데 느닷없이 연락을 하나 받았다. 부활을 맞이하여 ‘우리 시대의 부활’이란 주제로 글을 써 달라는 청탁이었다. 수락을 하고 나니 막상 부활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는지 고민이 많이 되었다. 그래서 그냥 평소 생각하던 바를 나누려고 한다.

 

그리스도인에게 부활은 신앙의 토대와도 같다. 예수의 부활이 없었다면 그리스도교 신앙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온갖 수모와 고통을 당하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던 예수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다. 이것은 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악에 대한 선의 승리, 어둠에 대한 빛의 승리, 죽음이 생명으로 건너갔음을 확증해주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의 부활은 단순히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난 놀라운 기적과는 천지 차이다. 

 

메시아로 믿고 따랐던 스승의 치욕스럽고 비참한 죽음 앞에 슬픔과 불신, 절망과 좌절에 사로잡혀 있던 제자들에게 어느 날 스승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제자들의 반응은 놀람과 기쁨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들은 비로소 예수의 수난과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뜻하는 바를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예수의 부활은 불신과 두려움에서 확신과 용기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대반전의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바로 부활이 지닌 의미 때문이었다. 

 

예수의 부활은 겸손과 섬김을 통한 그분의 낮아짐, 수난과 죽음을 통한 내어줌의 길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입증해주었다. 부활은 바로 그 길이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진리의 길(요한 14,6 참조)임을 확신시켜준 사건이었다. 예수는 말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태 9,35) 또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 

 

예수는 이 말들을 당신 부활로써 증명해 주었다. 빈 무덤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빈 무덤은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라는 것과 예수처럼 죽어야만 산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가 진정 우리 자신에 죽을 때, 즉 아래로 내려와 우리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줄 때 더 이상 죽음을 상징하는 무덤에 있지 않고 부활하게 될 것이다.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의 밝은 면만을 보려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부활은 죽음을 통해 가능하다. 죽음 없는 부활은 환상이다. 부활이란 말에는 죽음이 전제되어 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인 파스카 신비는 십자가와 죽음을 통한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신비이다. 그리스도인 삶은 바로 이 파스카 신비에 동참하는 삶이다. 예수는 말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자기 포기와 십자가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일상의 시련과 고통을 용감히 마주하려면 자신을 부단히 내려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를 수 없다.     

 

예수 부활이 지닌 이 깊은 의미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늘 되새길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의 길을 따르라는 것이다. 그 길은 겸손하게 남을 섬기는 ‘내려옴의 길’,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놓는 ‘내어줌의 길’이다. 이 길은 곧 ‘사랑의 길’이다. 하느님은 우리에 대한 당신 사랑을 예수를 통해 내려옴과 내어줌으로 구체적으로 보여주셨다. 그리고 우리 모두를 이 사랑의 길로 초대하고 계신다. 하지만 이 길을 따르기는 결코 쉽지 않다. 세상의 길과는 완전히 반대의 길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길은 올라가 섬김을 받는 길, 자기 안으로 모으는 길이다. 반면 우리가 초대받은 길은 내려옴으로써 올라가고, 생명을 내어줌으로써 얻는 역설의 길, 바보의 길이다. 이 길은 예수를 만난 자만이 기꺼이 갈 수 있다.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의 모습은 180도로 바뀌었다. 실의와 좌절, 슬픔과 두려움에서 기쁨과 희망, 용기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들에게 더 이상 두려움이란 찾아 볼 수 없었다. 사람들의 비난과 조롱, 시련과 박해, 심지어 죽음 앞에서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떻게 한 순간에 이런 변화가 가능한지 의아할 정도이다. 변화의 분기점은 바로 부활 체험이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모든 것이 변화되었다. 그들의 생각도 태도도 삶도 모든 것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부활 체험은 중요하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온갖 시련과 역경, 고통을 극복하게 해주는 원동력과도 같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날 때 우리는 삶의 온갖 어려움을 용기 있게 마주하게 될 것이고, 자신을 낮추고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의 길을 가게 될 것이다. 

 

부활의 삶은 복음적 가치에 따른 새 인간의 삶이다. 이 삶은 세속적 가치에 따른 옛 인간의 삶에 대한 죽음을 전제한다. 옛 인간을 지배하는 자기애와 세속적 가치에 죽는 삶이다. 탐욕과 이기심, 온갖 인간적 욕망을 내려놓는 삶이다. 세례를 통해 우리는 모두 옛 인간에 죽고 새 인간으로 부활했다. 세속적 가치가 지배하던 옛 삶에서 복음적 가치가 지배하는 새 삶으로 건너왔다. 하지만 여전히 탐욕과 이기심에 찌든 옛 인간, 세속적 가치를 따르는 옛 삶으로 되돌아가곤 한다. 그리스도인이 옛 인간의 삶으로 회귀할 때 부활의 참된 의미는 빛을 잃고 세상은 더욱 어둡고 암울해질 것이다. 

 

부활을 산다는 것은 예수의 부활이 가져다 준 희망과 기쁨을 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희망과 기쁨을 주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사회에 어떻게 비쳐지고 있는가? 희망과 기쁨을 주는 존재가 아닌 절망과 슬픔을 더 하는 존재로 비쳐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부활의 삶은 복음적 가치에 따른 새 인간의 삶, 즉 겸손과 섬김, 자기희생과 나눔의 삶이다. 이 삶은 온갖 인간적 욕망을 내려놓고 일상의 십자가를 용기 있게 질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이 부활의 삶을 통해 바보의 길, 사랑의 길이 결코 패배와 실패의 길이 아니라 승리의 길임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가 부활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살아갈 때 우리 시대에 희망과 기쁨을 주게 될 것이다.

 

요즘 우리 사회 곳곳에는 절망과 슬픔이 가득하다. 이런 시기에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앞서 소개한 무히카 우루과이 대통령과 같은 사람이 부활을 살아가는 참된 그리스도인일 것이다. 삶의 여러 가지 문제로 실의와 좌절에 빠진 사람들, 삶의 의미를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 희망을 놓아버린 사람들에게 부활을 사는 참된 그리스도인은 고통과 시련을 딛고 다시 일어나 살아갈 힘과 용기를 줄 것이다. 부활은 희망이요 기쁨이기 때문이다. 예수 부활을 축하하며 부활이 가져다주는 기쁨과 희망이 우리를 통해 우리 사회로 퍼져나가기를 희망한다.

 

[가톨릭신문, 2016년 3월 27일, 허성석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분도출판사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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