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일)
(백) 부활 제5주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종교철학ㅣ사상

동양고전산책: 동양의 덕목으로 풀어 본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2)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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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4-12 ㅣ No.279

[최성준 신부와 함께하는 동양고전산책] 천상의 것을 추구하는 데서 오는 기쁨

- 동양의 덕목으로 풀어 본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 ② 기쁨

 

 

“예수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기쁨으로 가득 찬 부활 시기를 맞았습니다. 이제 겨울의 매서운 추위도 물러가고, 새싹이 돋아나고 꽃이 피는 계절을 맞았습니다. 전례력으로도 부활 시기가 시작되어 우리 삶이 기쁨으로 가득한 때입니다. 이번 달에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기쁨’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한국 가톨릭 대사전』은 성령의 열매로서의 기쁨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의 열매로서의 기쁨은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 그분의 현존을 체험하면서 느끼는 기쁨이다. 이 기쁨은 기뻐할 일이 없어도 마음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샘솟는 기쁨이며, 성령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삶의 태도이기에 고통 중에서도 기뻐할 수 있다.” 기뻐할 일이 없어도 샘솟고 고통 중에서도 흘러나오는 기쁨이라니, 인간적인 것에서 나오는 기쁨이라면 이런 경지까지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이 기쁨은 성령께서 맺어 주시는 열매이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기쁨’은 전적으로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선물입니다.

 

‘기쁨’을 표현하는 한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기쁠 희(喜), 즐거워할 락(樂), 기쁠 열(悅)과 같은 단어입니다. 이 가운데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쾌락이나 기쁨이 아니라 오랫동안 지속되는 좀 더 차원 높은 수준의 기쁨을 표현하는 한자는 락(樂)입니다. 유가(儒家)철학에서 ‘기쁨’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가장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말은 “공안낙처(孔顔樂處)”일 것입니다. 공자와 안연(顔淵)의 즐거움이라는 뜻입니다. 공자의 제자인 안연은 비록 가난했지만 항상 인(仁)을 실천하는 것을 마음의 즐거움이요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공자는 안연의 이런 태도를 늘 칭찬했지요.

 

“어질구나, 안회(안연)여! 한 그릇의 밥을 먹고 한 표주박의 물을 마시고서 누추한 거리에 사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디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않으니 어질도다. 안회여!”1)

 

여기서 나온 말이 “단표누항(簞瓢陋巷)”입니다. ‘밥 한 대그릇, 물 한 표주박, 그리고 누추한 골목’이라는 뜻으로 안연이 얼마나 가난한지를 보여 주는 말입니다. 안연은 공자가 가장 사랑한 제자였습니다. 무척 가난했지요. 간신히 끼니를 연명할 정도였고 달동네 같은 곳에 있는 허름한 집에 살았습니다. 하지만 안연은 공자의 제자로서 스승의 가르침을 듣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삼았습니다. 안연은 하나를 배우면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물러가서 직접 행동으로 실천했습니다. 앎과 행동이 다른 위선적인 태도를 결코 보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공자가 칭찬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스승인 공자가 추구한 기쁨과 즐거움은 어떠했을까요?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팔을 굽혀 베개를 삼을지라도 즐거움이 또한 그 가운데 있도다. 의롭지 않으면서 부유하고 귀한 것은 나에게 뜬구름과 같으니라.”2)

 

아무리 부유하고 귀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 부귀가 의롭지 않은 데서 나온 것이라면 자신에게는 뜬구름처럼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비록 거친 밥을 먹고 물 한 잔밖에 마실 수 없는 형편이라 하더라도, 훌륭한 이부자리는커녕 베개조차 없어 팔을 베고 누울지라도, 진리를 찾고 실행하는 나의 즐거움을 다른 이가 빼앗아 가거나 나의 의지를 바꿀 수 없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공자와 안연이 가난하고 누추한 삶 그 자체를 즐기고 기뻐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어지러운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과 타협해 불의한 부귀영화를 누리기보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진리를 추구하며 살아가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현일 것입니다. 소신껏 세상을 살아가는 데 비록 가난과 일신의 누추함이 따라오더라도 기꺼이 감내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기쁨으로 여기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공자와 제자 안연이 추구했던 이런 기쁨과 즐거움의 경지를 북송시대 유학자 주돈이(周敦 )는 “공안낙처(孔顔樂處)”라는 말로 표현하고 그 경지에 이르려고 노력했습니다. 후대의 유학자들도 세상이 주는 부귀영화 같은 것에서 기쁨을 찾지 않고, 공자와 안연이 추구한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즐거움을 추구하려고 힘썼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삶의 기쁨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어디에서 즐거움을 찾습니까? 돈입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의 가치가 최고입니다. 돈이 하느님의 위치에까지 올라와 버렸습니다. 돈이 된다면 남을 속이는 것은 물론이고 불의한 일도 서슴지 않고 저지릅니다. 멋진 자동차, 편리한 가전제품, 최신 전자기기 같은 과학의 발전과 물질문명이 가져다 준 풍요로움에서 기쁨을 찾습니까? 하지만 이런 것들이 주는 기쁨은 덧없이 지나가 버립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우리는 지상의 것을 추구하지 말고 천상의 것을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콜로 3,1-2 참조) 진리 추구, 사랑의 실천, 용서와 화해, 이런 것들이 천상의 것이겠지요. 진리를 찾아 공부하면서 알게 되는 즐거움은 무엇과도 비길 수 없습니다.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누리는 가슴 벅찬 기쁨도 말할 수 없이 크겠지요. 나에게 잘못한 이가 용서를 청해 와 화해를 한다든지 가난한 이에게 가진 것을 나누어 줄 때의 기쁨도 이루 형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천상의 것을 추구하는 가운데 찾아오는 기쁨은 성령께서 베푸시는 선물입니다. 무엇보다 기쁨의 가장 완전한 형태는 사랑 안에서 하느님과 하나 되는 상태입니다. 성령의 열매인 기쁨은 덧없이 지나가 버리는 허망한 것이 아니라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며 주님의 사랑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1) 『논어(論語)』 「옹야(雍也)」 9장. “賢哉, 回也! 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 改其樂. 賢哉, 回也!”

2) 『논어(論語)』, 「술이(述而)」, 15장. 子曰, “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不義而 富且貴, 於我如浮雲.”

 

* 최성준 신부는 북경대학에서 중국철학을 전공하고 현재 대구대교구 문화홍보실장 겸 월간 <빛> 편집주간으로 있습니다.

 

[월간빛, 2016년 4월호, 최성준 이냐시오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실장 겸 월간 <빛>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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