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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과학과 신앙: 노벨상의 마흔한 번째 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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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3-17 ㅣ No.278

[과학과 신앙] 노벨상의 마흔한 번째 의자

 

 

노벨상 수상 자격

 

노벨상 수상은 모든 과학자의 꿈입니다. 2014년에 이어 지난해에도 일본 학자가 노벨 물리학상을 받자 우리 언론이 들쑤셔졌습니다. “역시나 일본….” 하는 부러움과 함께, 일본 과학계를 조명하는 분석 기사가 넘쳐났습니다.

 

더구나 지난해엔 외국 대학 소속이 아닌, 중국 본토 학자로서 사상 최초로 중국 대륙에 노벨 생리 · 의학상을 안겨준 한 여류학자 소식에, 우리는 모두 놀라움을 넘어 경이로운 눈으로 중국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나라 학자 가운데 누군가가 하루빨리 노벨상을 받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자랑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신의 전공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겨야 노벨상 수상이 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수상에는 어느 정도 운도 따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연구업적이 아무리 뛰어나도 발표 당시 생존해야만 수상의 영광을 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해당 분야의 공헌도를 따져 세 사람까지만 상을 받을 수 있으므로, 아무리 공헌도가 크더라도 기여도 면에서 세 번째 안에 들지 못하면 노벨상 수상과는 영원히 인연이 없게 됩니다.

 

실제로 우리나라 학자 가운데 몇 분은 충분한 수상 자격을 갖추고서도 안타깝게 노벨상 수상의 기회를 놓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국력이 약한 것도 그 한 가지 이유라는 게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수상자들 출신 국가의 경쟁력에 따라 수상여부가 결정된다고들 합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아무리 뛰어난 학자이며 역사적인 연구 성과를 남겼다 하더라도 물리학자, 화학자, 또는 생리 · 의학자 이외의 학자들은 평생 과학 분야의 노벨상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노벨의 유언 때문이지요. 가령 수학자나 지질학자 등은 제아무리 뛰어난 업적이 있다 하더라도, 죽었다 깨어나도 노벨상은 받지 못합니다. 그런가 하면, 세기적 연구를 하고서도 여러 가지 이유로 노벨상을 받지 못한 경우도 허다합니다.

 

 

노벨상의 뒤안길

 

과학사에 따르면, 안타깝게 노벨상 수상의 영광을 놓친 대학자들이 많습니다. 수소, 산소, 철, 금, 은 등 이 세상에 존재하는 원소들의 원자량이나 기본 성질들에는 어느 정도 규칙성이 있습니다. 이런 규칙성을 알기 쉽게 표로 만들어 놓은 것을 주기율표라고 합니다.

 

주기율표를 만든 사람은 러시아 화학자인 멘델레예프(D. I. Mendeleev, 1834-1907년)입니다. 주기율표 덕분에 화학을 배우는 학생들은 원소의 기본 성질을 알기 쉽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후학들에게 새로운 원소를 발견하는 위대한 업적을 남기도록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역사적으로 과학발전에 이바지한 바가 대단히 크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는 노벨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화학의 기본 원리를 이해하는 데 깁스(J. W. Gibbs, 1839-1903년)만큼 자주 등장하는 이름도 없을 것입니다. 그는 화학의 기본인 에너지에 관한 이론과 통계역학 등의 기초를 세운 학자인데 노벨 화학상과는 인연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분들이 노벨상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엑스선의 발견으로 노벨상을 받았던 뢴트겐이나 삼투압 이론 등으로 노벨상을 받은 발스 같은 동시대의 학자들보다 결코 학문적인 탁월성이 뒤떨어졌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그들이 탁월한 연구 성과에도, 노벨상을 받지 못한 불운을 겪은 것은 노벨상 선정위원회의 여러 가지 규정에 따라 제약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멘델레예프는 두 차례(1905년과 1906년) 후보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론은 “자연의 이치로 확고한 기초가 되는 것으로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최종 노벨상 후보에서 제외되었습니다. 대신 1905년에는 염료와 유기화합물 합성으로 유명한 바이에르에게, 또한  1906년에는 순수 불소를 제조하고 전기로를 개발한 므와상에게 5대 4의 표차로 노벨 화학상을 양보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1907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생존한 학자에게만 노벨상 수상 자격이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그의 생애 말기에 이르러서는, 그의 업적이 “너무 오래된” 내용이었기 때문에 노벨상 후보에서 제외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미국의 라우스는 1911년 악성종양이 바이러스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걸 발견하고서도 1966년 노벨 생리 · 의학상을 받을 때까지 56년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 사이 세상을 떴으면, 그는 영원히 노벨상 수상의 영광을 놓쳤을 테지요.

 

노벨상 선정위원회의 선정과정은 철저히 미공개를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과학사가들의 집요한 노력으로 선정과정에서 “수상할 만하다.”고 판정했으면서도, 최종 단계에서 수상이 유보된 학자들의 이름들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물론 깁스를 들 수 있습니다. 그의 업적은 어떻게 보면 갈릴레오나 뉴턴의 업적에 필적한다고 평가됩니다. 그래서 노벨상 수상이 당연함에도, 그의 생전에 한 번도 후보로 추천된 일이 없다는 것은 정말 역사의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추천만 되었으면 당연히 받았으리라 생각되는데도…. 깁스가 후보로도 추천되지 못한 데에는 분명 과학 이외의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안타깝게 노벨상을 놓친 대학자들

 

만약 노벨상이 1870년대나 1880년대에 있었더라면, 멘델레예프도 틀림없이 상을 받았을 것입니다.

 

에이버리는 디엔에이(DNA)가 유전의 담당체라는 것을 최초로 발견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업적은 너무나 “혁명적”이었기 때문에 보수적인 당대의 학자들에게 외면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노벨상 선정위원회에서 “더 많은 것이 알려질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겠다.”는 평가와 함께 유보되었던 것입니다.

 

불행히도 그는 노벨상 후보자 명단에만 머물다가, 1955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에이브리 덕분에 DNA에 관한 노벨상은 1959년에 오초아와 콘버그에게, 1962년에는 왓슨과 크릭에게 돌아갔습니다. 만약 그가 4년을 더 살았더라면, 노벨상을 받았을 것임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이 밖에도 많은 학자가 노벨상 수상 직전에 좌절하였습니다. 별의 구조와 관련된 기체 구(gas sphere)를 발견한 엠덴은 1923년 후보로 추천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2인 이상의 공동수상 금지 규정 때문에 아깝게 노벨상 후보에만 머물고 말았습니다. 살세균소의 활동 양태에 관한 코언의 연구업적은 “상을 탈만하지만 공헌자가 많아, 상 하나로는 선택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노벨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그의 동료와 후예 중 일부 학자는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1931년에 애스카임과 존덱은 임신 검사법의 개발로 거의 노벨상을 탈 뻔했습니다. 하지만 1973년 다시 후보로 추천되었을 땐 “이미 새로운 발견이 아니었기 때문에” 상을 놓쳤습니다. 생리학자인 쿠인케는 1909년과 1918년 두 차례 후보로 올랐습니다. 1918년에도 거의 마지막 수상 후보로 고려되었습니다. 하지만 “상을 받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다.”는 이유로 안타깝게 최종 순간 탈락하였습니다.

 

 

노벨상의 마흔한 번째 의자

 

프랑스 학술원 회원수는 40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프랑스 학술원 회원이 된다는 것은 대단한 영예임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학자들이라도 40명 안에 선정되지 못하면 학술원 회원의 의자에 앉을 자격을 얻지 못합니다. 이에 빗대어 노벨상 수상자에 버금가는 업적을 남겼으면서도 여러 가지 이유로 노벨상을 받지 못한 학자들을 종종 “노벨상의 마흔한 번째 의자에 앉았다.”고 말합니다.

 

노벨상을 받은 학자들이 대단히 탁월한 분들임엔 틀림없습니다. 그렇지만, 노벨상의 마흔한 번째 의자에 앉는 분은 물론이고, 마흔두 번째, 마흔세 번째 의자에 앉는 분들도 노벨상 수상 여부와는 관계없이, 나름대로 우수한 연구 성과를 내고자 엄청난 땀과 눈물을 흘렸고, 또 지금도 흘리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노벨상의 백 번째, 천 번째 의자에 앉으면 어떻습니까? 우리는 과학자 한 분 한 분에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존경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그분들의 성과가 하나씩 쌓여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로써 인류의 생활이 더 나아지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톨릭교회가 이룬, 2000년 동안의 성장도 노벨상에 비유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가톨릭교회의 발전은 아우구스티노와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과 같은 교부들과 프란치스코와 베네딕토 성인과 같은 위대한 수도자들의 헌신 덕분임은 물론입니다. 하지만 목숨으로 신앙을 증언한 전 세계의 수많은 순교자의 공로 또한 결코 작은 공헌이 아니지요. 순교자들의 피가 없었다면 오늘날처럼 이토록 하느님 제단이 영화롭게 꾸며질 리가 없었겠지요?

 

 

요셉 성인과 모퉁이의 머릿돌

 

해마다 3월이 되면 저는 특히 ‘의로운 사람’(마태 1,19 참조) 요셉 성인에 대해 많이 묵상합니다. 우리 신앙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에 비해, 성경 말씀의 마흔한 번째 의자에 겨우 앉으셨던 분입니다(마태오 복음에 따르면 실제로 요셉 성인은 아브라함의 사십일 세 후손입니다). 하지만 성모님과 함께 예수님의 강생에 결정적으로 협조하며 묵묵히 하느님 사업에 참여했던 요셉 성인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저는 노벨상의 만 번째 의자에 앉을 자격도 없는 학자입니다. 하지만 그 의자에 초대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절대 실망하지는않습니다. 제 연구실에서 발표한 연구 성과도 인류의 과학기술 발전에 조금은 도움을 줄 것이라는 희망 때문입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시편 118,22)라는 성경 말씀처럼 연구 성과가 하찮게 보이는 것일지라도 언젠가는 저 같은 사람을 노벨상의 백 번째 의자에 앉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연구에 정진합니다. 누가 압니까?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할 테니까요(마태 19,26 참조).

 

* 하창식 프란치스코 - 부산대학교 고분자공학과 교수. 부산가톨릭문인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호주 퀸즐랜드대학교 명예교수, 한국접착 및 계면학회 회장, 부산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 회장 등을 지냈다.

 

[경향잡지, 2016년 3월호, 하창식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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