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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봉헌 생활의 해, 완전한 사랑12: 작은 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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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4-26 ㅣ No.517

[봉헌 생활의 해 - 완전한 사랑] (12) 작은 형제회

800년 이어온 가난의 정신, 오병이어의 밥상을 차리다



백형기 수사 신부가 노숙자들의 식판에 밥을 담아주기에 앞서 막 뜸 들인 밥을 주걱으로 고르고 있다.


작은 형제회는 탁발수도회다. 탁발(托鉢)은 걸식을 통해 얻은 음식을 담은 바리때에 목숨을 맡긴다는 뜻으로 ‘얻어먹는다’는 의미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세상을 수도원으로 삼아 살면서 탁발을 통해 복음을 선포하던 형제들이 머무르던 곳을 ‘수도원’이라고 부르지 않고 ‘거처’나 ‘집’, ‘장소’로 불렀을 만큼 탁발 정신을 철저하게 살았다. 그로부터 800년 넘게 가난의 정신으로 수도생활에 정진해온 작은 형제회가 운영하는 프란치스코의 집을 찾았다.

서울 제기동 약령시장 9번 입구 맞은편에 있는 프란치스코의 집(책임자 황보성윤 수사)은 빈민 식당. 성 프란치스코수도원(수호자 김형수 신부)을 겸한 건물이다. 밥값 200원만 내면 누구나 ‘당당한’ 손님이 될 수 있다. 게다가 소박한 밥상엔 훈훈한 사랑이 담겨 있다. 작은 형제회 회원들이 사랑의 후원을 받아 운영하는 식당이니 탁발의 정신에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사도직도 없을 듯하다. 밥을 퍼주는 수도자도, 요리하거나 배식하는 봉사자도, 식탁에 앉아 한 끼를 해결하는 노숙자나 무의탁 어르신도 ‘정’으로 급식소를 찾는다. 해서 1988년 문을 연 이래 28년 동안 수도형제들은 계속 바뀌었지만, 한 번도 문을 닫지 않고 지금까지 가난한 이웃들의 목숨줄 같은 사랑과 연대의 터전이 돼 왔다.

정오부터 2시간 30분간 이뤄지는 급식 이용자는 많을 땐 하루 400명, 적을 때도 300명을 훌쩍 넘긴다. 이들이 소비하는 쌀 소비량만 하루 60∼80㎏이니 쌀값으로 20만 원이나 된다. 부식비까지 포함하면 하루 40∼50만 원을 넘나든다. 그런데 한 번도 쌀이나 부식이 떨어진 적이 없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마태 14,17-19)의 기적이 따로 있지 않다. 다 후원자들 덕이다.

백형기(레오) 수사신부는 ‘밥 짓기’가 주전공. 하루 13~15번가량 밥을 짓고 푸다 보면 허리가 아플 법도 하건만 아직 꼿꼿하다. 올해 ‘칠순’ 고령인 백 수사는 후배 수사들과 함께 기쁘게 주방을 지킨다. 서울 노량진 수산시장성당 주임으로 있다가 2009년 자청해 프란치스코의 집 주방 보조로 눌러앉은 지 7년째다. 백 수사는 “몸이 허락하는 한 땀 흘리는 삶을 통해 가난한 이들에게 한 끼 밥을 선물하며 사는 삶을 살겠다”고 말한다.

프란치스코의 집 책임자 황보성윤 수사가 주방 뒷편에서 국거리용 부식을 준비하고 있다.


그 곁에서 빙그레 웃는 임용련(바실리오) 수사는 배식 담당. 쌀과 반찬을 식판에 담아내는 솜씨가 이만저만 숙련된 솜씨가 아니다. 때로는 계속해서 식판을 가져와 3판, 많게는 5판까지 달라는 이용자들에게도 늘 넉넉한 미소와 함께 막 조리한 음식을 건넨다.

주방 한쪽에서 두 시간 넘게 설거지만 하던 민웅기(실바노) 청원자도 “일주일에 한 번씩 사도직을 체험하고자 오고 있다”면서 “힘겨울 때도 있지만 프란치스칸으로서 정말 행복하다”고 고백한다.

다들 이렇게 주방에서 일하는 게 재밌고 보람이 크다는 반응이다. 특히나 수도자들은 프란치스칸으로서의 삶을 ‘몸으로’ 살기에 더욱 즐겁다고 전한다.

급식을 마치면, 상당수는 2층 프란치스코 쉼터로 올라간다. 하루 이용자는 대체로 150명 수준. 매일 상담ㆍ목욕 서비스 제공과 함께 이발(월ㆍ화), 한방 치료나 침술ㆍ향기 치료(목ㆍ금), 투약(토) 등 프로그램이 이어진다.

쉼터 책임자 신석기(베드로) 수사는 “어찌 보면 집도 절도 없이 얻어먹으러 다닌다는 점에서는 우리와 똑같은데, 다만 이분들은 하느님을 모르고 우리는 하느님을 안다는 게 차이일 뿐”이라며 “그래서 탁발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프란치스칸들에게 무료 급식은 고유한 사도직”이라고 전한다.

누추하고 추레한 공간이지만 이곳 급식소를 통해 프란치스칸들은 오늘도 행려자나 무의탁 어르신들을 작은 예수님으로, 작은 프란치스코로 섬기며 예수님을, 복음을 온몸으로 증거하는 삶을 살아간다.


작은 형제회

1209년(1210?)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1181/1182?∼1226, 사진)가 설립한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우리말 표기. 작은 형제회(O.F.M.)의 영성은 ‘작음’과 ‘형제애’를 바탕으로 한 복음적 삶에 있다. 작음의 정신을 기초로 회원들 서로 간의 형제애를 중시했고, 수도회라는 말 대신 형제회의 개념을 강조함으로써 형제들의 공동성을 표현했다. 이어 1211년에는 관상 수녀회로 2회인 클라라회를, 1221년에는 3회인 재속 프란치스코회를 세워 많은 형제자매가 대가족을 이루게 됐다.

국내에는 1937년 9월 캐나다 성 요셉 관구 선교사 출신의 도요한, 배쥐스탱 선교사가 부산에 도착함으로써 시작됐다. 이듬해 12월 대전 목동에 수도원을 설립, 국내 첫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이 세워졌다. 1940∼50년대엔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으로 일시 현존이 끊겼다. 1955년에 수도원을 복구했고, 1963년 프란치스코 법인이 설립됐으며, 1969년 한국 순교복자 준관구로 승격된 데 이어 1987년 관구로 승격됐다.

현재 한국관구(관구장 호명환 신부) 회원 수는 종신서원자 137명과 유기서원자 16명 등 153명이다.

[평화신문, 2015년 4월 26일,
글 · 사진=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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