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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사목] 분단 70년, 이 땅의 변화: 70년 남한사회의 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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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6-17 ㅣ No.837

[경향 돋보기 - 분단 70년, 이 땅의 변화] 70년 남한사회의 흐름



한국사회를 분석하는 이론과 방법론은 다양해서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결과를 내놓기란 어려운 일이다. 사회분석 이론이란 사회를 설명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아 시대와 사회적 특성에 따라 큰 차이가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자본론」으로 유명한 마르크스(Marx, Karl Heinrich)를 본보기로 들어보자. 그의 사회 분석력은 탁월했다. 하지만 그의 이론은 국가사회주의를 거치면서 역사적 시행착오로 끝났다. 그렇게 된 오류는 무엇일까? 마르크스는 사회를 계급이라는 조직으로 보고 ‘자본가는 악, 무산자는 선’으로 보았다. 인간은 자본가나 무산자나 가릴 것 없이 유사한 유전적 요인을 지닌 존재라는 것을 그는 몰랐던 것이다. 당시 인체생리학의 수준이 그랬기 때문이다.

사회진화론이 힘을 잃으면서 현대 자본주의 이후의 체제변화에 대해 학자들은 입을 다물고 있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상한선 없는 욕망과 변화무쌍한 변덕을 추진 동력으로 삼고 있는 체제다. 인간의 속성이 변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자본주의가 영속한다는 결론을 피하기 어려운 것인가?

이런 질문과 함께 제기되는 또 다른 의문이 있다. ‘21세기의 과학은 인간과 사회, 우주를 제대로 판단할 만큼 발달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다. 답은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한다. 천체물리학자 대부분이 종교에 귀의하고 인류의 유래에 대해 창조론과 진화론이 공존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인간은 절대자 앞에 티끌보다 못하다는 종교와, 모든 인간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종교가 공존한다. 인간과 자연 등 모든 것은 대단히 복잡하고 다양한 설명력을 지닌 그런 존재로 규명되면서 ‘알 수 없어요.’라는 불가지론은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단군 이래 최상의 풍요로운 사회?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이 “이것이 바로 유일한 최상의 이론이요, 진리다.”라고 큰소리칠 수 없는 상황에서 한국사회를 분석하는 작업은 주관적인 것을 벗어나기 어렵다. 긍정적인 분석과 부정적인 분석이 공존한다. 세계 2백여 개국 가운데 한국은 경제력이 13위라서 단군 이래 최상의 풍요로운 사회로 평가된다. 지구촌에서 포교활동을 가장 활발히 하는 나라로도 손꼽힌다. 또한 교육열이 무엇보다도 높은 나라 가운데 하나이고, 한류문화가 지구촌으로 확산되는 나라다.

그러나 경제가 장기적으로 저성장 단계에 들어서고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비정규직과 저소득층이 양산되는 21세기 자본주의적 그늘이 짙어지고 있다는 점도 분명하다. 수출은 늘어도 일자리 창출은 없고, 같은 노동을 하고도 불평등한 처우를 강요당하면서 노동 현장의 노예가 양산되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에 강행하여 재벌을 앞세운 경제성장 정책은 ‘한강변의 기적’을 이루었다지만, 수많은 구조적 문제가 중첩되는 말기증상을 나타내고 있다. 앞으로 누가 정권을 잡더라도 현재의 경제구도를 개선할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 않는다.

분단 70년 동안 한국사회는 엄청나게 변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일제의 조국 강탈을 자력으로 해방시키지 못하고, 외세가 점령군으로 들어와 친일 세력이 정부를 수립하였다. 그 뒤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우리 사회는 엄청난 비극을 겪었고, 기나긴 군사독재로 민주주의는 피를 토하며 신음하였다.

1980년 ‘5·18 민주화 운동’과 1987년 ‘6월 항쟁’을 거치면서 평화적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 뒤 다시 보수 정권이 들어서서 민주주의 시계는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 세계 최장의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지 못한 비극 속에 남북은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을 실천하지 못한 채 ‘천안함 사고’ 등으로 교류협력의 길이 차단되었다.

현재는 과거의 연장이라 할 때, 분단 70년 동안의 변화를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것이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는 십인십색일 것이라서 필자의 주관에 따라 선정된 것들을 소개한다.


70년 한국사회의 민낯

남북 간에 전쟁이 일보 직전까지 가는 긴장과 대결의 일상화, 자살률 세계 정상급, 출산율 세계 최저, 인구 소멸 가능성이 제일 높은 국가로 분류되는 데도 무감각한 비정한 사회가 분단 70년 한국사회의 민낯이다. 출산율 하락이 지금처럼 방치되면 2100년 한국의 인구는 지금의 절반도 되지 않는 2천만 명으로 줄어들고, 2300년이 되면 사실상 소멸단계에 들어간다는 최근의 연구 결과는 충격적이다.

분단 상황에서 경제개발은 정치군인들의 승공통일 차원에서 추진되면서 ‘개발독재는 정의로, 경제정의 주장은 사회주의 추종이나 종북(從北)’으로 매도되었다. 오늘날 절대적 빈곤 대신 상대적 박탈감이 확산되면서 양극화 심화, 빈곤층과 비정규직 양산의 비극은 구조적 현실이 되었다.

같은 민족의 배고픔도 남북대립이라는 거대 장벽에 막혀 외면되는 실정이다. 북한 주민의 80%는 만성 영양부족의 상태라고 국제연합(UN)이 발표하였지만, 분단 적대감은 쌀이 넘쳐나도 같은 민족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불허한다. 대신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빈곤층을 돕자는 모금 운동은 텔레비전 등에서 넘쳐난다. 북에 식량을 지원하면 군사용으로 전용된다는 논리에 대해, 북한에 혈육을 두고 온 실향민조차 침묵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국가보안법에 대한 공포 탓이다.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재판의 변호를 맡았던 이재화 변호사는 재판 과정의 변론기를 「기획된 해산, 의도된 오판」으로 펴내면서 ‘획일적인 반공주의를 선택한 최악의 재판’이라고 비판했다. 통진당의 해산 결정은 국가보안법의 존재를 다시금 확대하고 재생산하면서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짓밟고, 정치 민주화에 한국형 족쇄를 채웠다.


사람 목숨보다 돈이 먼저

세월호 참사는 돈벌이를 최우선으로 삼는 신자유주의에 함몰된 정권과 사람 목숨보다 돈을 먼저 챙기는 탐욕의 화신인 자본으로 말미암은 타살이라는 성격이 강하다. 참사 1년이 넘도록 변한 것이 없다는 국민적 분노가 높아가고 있다. ‘부자 되세요.’가 유행가 가사일 정도로 물신주의가 팽배하다. 북한의 식량난을 외면하는 무감각증은 경제현장에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가학행위를 정당화시키는 밑거름이 되고 있다.

이명박 정권이 날치기 통과를 시킨 언론악법으로 대거 등장한 종합편성 채널 이후 족벌과 수구 언론의 영향력이 전체 언론의 90% 이상을 차지하게 되면서, 정부에 대한 비판 논리나 주장은 대부분 ‘종북몰이’로 공격의 표적이 되고 있다. 언론에서 승자독식의 신자유주의 논리가 확대되고 재생산되면서 남북의 평화적 재통합을 위한 논리의 비중은 자꾸 작아지고 있다.

이처럼 살펴본 한국사회에 대해 자살률, 출산율 등을 중심으로 우리 사회를 설명할 경우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사회는 나도 살기 싫고, 2세가 태어나기를 원하지 않는 생지옥과 같다. 삼백 년 뒤 지구상에서 멸망할 이 사회의 미래에 대해 크게 걱정하는 이조차 없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에 대한 이 같은 진단에 동의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다른 나라도 다 그런 것 아니냐?’면서 이 사회의 밝은 면을 주로 보면서 살아야 한다고 강변한다.

한국사회는 긍정과 부정적 요인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다. 또한 전통적인 측면과 현대성이 공존하고, 야만적인 측면과 인류애적인 측면 등이 동시에 혼재하고 있다. 이러한 과도기적 현상은 상대방과의 다름을 인정하면서 소통과 절충, 그리고 대안의 모색 등을 통하여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이처럼 건전하게 해결하려는 노력을 저지하는 괴물과도 같은 후진적 제도가 존재한다. 이를 살펴보자.


‘너 죽고 나 살자!’

한국인들은 고스톱, 폭탄주, 노래방을 유난히 즐긴다. 가족과 친지나 친구 또는 회사 직원 등의 모임은 이들 여가문화에 탐닉한다. 왜 그럴까? 이들 문화의 특징은 진지한 대화를 멀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에 주목하면 그 해답이 보인다. 진지한 대화는 위험하다는 공포가 도박, 빨리 취하기, 노래의 늪에 빠지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대화, 토론, 조정, 소통을 기피하게 만드는 원동력이자 공포의 대상으로 무엇보다도 국가보안법을 꼽고 싶다.

남한사회를 제도적으로 지배하는 것 가운데 가장 지독한 것이 국가보안법이다. 분단 상황에서 빚어지고 있는 부정적인 사회 현상은 이 법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분단된 뒤 한국은 외세의 영향과 전쟁 또는 정전상태로 지내왔지만 한국사회의 내부는 국가보안법이 막강한 영향을 미친 제도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다.

국가보안법은 북한을 고무하거나 찬양 또는 동조하는 것을 처벌하는 법이다. 이 법의 특성은 적대세력 곧 북한을 절대악으로 규정하고, 그 궤멸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민주주의는 정해진 규칙에 따른 경쟁을 중시한다. 그러나 남북이 대치하면서 전쟁의 공포가 일상화된 사회에서 일상적인 경쟁조차 ‘너 죽고 나 살자.’라는 식이 일반적이다. 이런 모습은 학교와 직장에서, 심지어 가정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남한의 모든 교과서는 국가보안법이 허용하는 내용으로만 되어 있다. 언론의 자유는 국가보안법의 테두리 안에서의 자유일 뿐이다. 국가보안법은 남한사회에서 통일과 그 뒤를 예견하는 미래학의 발전을 저지하거나 궁극적 세계 평화를 위한 세계 정부의 추진 등이 발붙이지 못하게 한다. 이 법은 상상의 자유가 기본인 진보세력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

남한사회에는 흔히 말하는 공정한 게임의 규칙은 존재하지 않거나 거의 무시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 달성을 추구하는 살벌한 논리가 지배하면서 사회 지도층의 탈세와 위장전입, 그리고 병역기피는 필수사항이 될 지경에 이르렀다. 한국사회가 승자독식의 논리로 피가 튀고 악취가 진동하는 아귀다툼의 장으로 전락해 하루에 40여 명이 자살하는 끔찍한 땅이 된 것은 상대를 배려치 않는 악법, 곧 국가보안법과 무관하지 않다. 국가보안법은 북한에게 위해를 가한다는 측면과 함께, 조금 심하게 말하자면, 남측내부의 힘을 약화시키고 밝은 미래에 대한 무서운 족쇄가 되고 있다.


북한이 하지 않았으면 누가 했겠느냐

국가보안법은 평화통일 운동을 적대시한다. 남북의 대치상태에서 정부는 안보강화와 평화통일을 위한 노력을 함께해야 하지만 미국과의 군사공조를 통한 물리적인 대북압박에 치중한다. 이는 북한의 굴복을 요구하는 것으로 평화통일에 필수적인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치명적인 현실을 초래한다.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6자 회담의 속개가 중요하지만 무조건 재개를 요구하는 것은 북한의 주장에 동조하는 식이란 논리가 독기를 품는다.

군사주권의 핵심은 전시 작전권의 행사 등인데 미국에 이를 넘겨준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이는 자주적인 평화통일 노력을 저해하고, 특히 한미상호 안보조약에 따라 미국의 최첨단 무기가 남한에 배치되는 일이 일상화되면서 중국과 러시아가 동북아 냉전시대의 등장을 경고한다. 한미 두 나라는 북한의 급변하는 사태에 군대를 평양 등에 진주시킬 작전계획을 공공연히 공개하여 북한을 자극하기도 한다. 독도 영유권을 노골화하면서 미래의 한반도 침략의 가능성도 보이는 일본인데도 미국은 한·미·일의 안보에 협조 관계를 강화하도록 한국에 강요한다. 남한은 제국주의로 회귀하는 일본과 부분적인 교류협력을 한다는 입장이지만 북한에 대해서는 계속하여 교류를 전면적으로 중단하고 있다.

남북 교류의 전면 중단에 빌미가 된 천안함 사건의 경우, 정부의 합동 조사단이 원인을 발표했어도 국내외에서 끊임없이 많은 의혹을 제기하였다. 그렇지만 정부는 ‘북한이 하지 않았으면 누가 했겠느냐?’는 정치 논리를 앞세우기도 한다. 자신들과 무관하다며 남북 공동조사를 하자는 북한의 주장에 대해 남한사회는 동조하거나 지지할 수 없다. 바로 국가보안법 때문이다. 선거철만 되면 색깔공세가 기승을 부리는 것도 이 법 탓이다.


인간의 상상력 탄압

국가사회주의는 지구촌 차원에서 실패했다. 중국도 정치는 사회주의 체제이나 경제는 자본주의 체제다. 정치사상과 이념은 가변적인 것으로 능동적으로 사상체계를 창조하는 것이 미래를 개척할 수 있다. 사상의 자유를 국가보안법으로 묶어놓은 것은 심각한 가학행위나 다름없다.

오늘날 지구촌에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가 가장 보편적인 정치제도가 된 상황에서 볼 때 국가보안법의 개폐가 논의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여야 정치 집단은 물론 지식인 사회조차 모두 입을 다물고 있다.

이승만이 이 법을 도입하여 기나긴 세월 동안 남한사회의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제약한 것은 최악의 과오요 범죄다. 인간의 상상력을 탄압하는 것은 인간 존재의 의의를 훼손하는 폭력이다. 인류의 역사가 인간의 무한한 상상력과 양심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 말미암아 이어졌다고 보면 국가보안법은 이제 철폐되어야 한다.

* 고승우 - 언론사회학 박사. 방송독립포럼 공동대표. 전 한성대학교 겸임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고려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5년 6월호, 고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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