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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인문학 강좌: 삶과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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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3-11 ㅣ No.277

[인문학 강좌] 삶과 죽음

 

 

갓난아이가 세상에 나오면서 처음 우는 울음소리를 고고지성(呱呱之聲)이라 한다. 그리고 죽음에 이르러 기도가 막혀 호흡이 곤란해 헐떡이며 내는 소리를 천명(喘鳴)이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고고지성으로 시작하여 천명으로 끝을 맺어야만 하는 운명적 존재다. 『성경』은 인간이 그러한 운명을 지닐 수밖에 없는 까닭을 극명하게 밝히고 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그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집짐승과 온갖 들짐승과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 …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 아담은 모두 구백삼십 년을 살고 죽었다.’(창세1,26-5,5)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러나 하느님의 축복 속에서 창조된 인간은 죄를 범함으로써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인간에게 삶과 죽음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인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존재와 시간』에서 현존재인 인간은 본질적으로 죽음을 향한 존재라고 규정하였다. 이러한 철학자의 성찰이 아니더라도 인간은 누구나 죽어야 할 운명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막상 자신의 눈앞에 닥친 죽음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아니,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사실은 말도 안 되는,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zabeth Kubler Ross)는 『죽음과 죽어감』에서 임종 환자의 심리적 변화를 다섯 단계로 나누었다. 1단계는 ‘부정과 고립’으로 자신이 죽어야 하는 처지를 강하게 부정하며 받아들이지 않는다. 2단계는 ‘분노’로 적개심을 갖고 가족과 주변사람들에게 화를 낸다. 3단계는 ‘협상’으로 자신의 처지를 다소 인정하지만 지난날을 회개하고 후회하며 생명을 연장시켜 주길 바란다. 4단계는 ‘우울’로 죽음을 불가피하게 여기며 깊은 슬픔에 빠진다. 5단계는 ‘수용’으로 자신의 죽음을 비로소 인정하며 안정을 취한다.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사실을 즉각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나름대로 성실하고 선하게 살아온 자신이 왜 그처럼 일찍 죽어야만 하는지 의아해하면서 말이다. 이러한 현상은 자신만은 오래도록 죽지 않고 살 것이라고 믿어왔던 데 기인한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많은 이들이 언젠가 다가올 죽음에 대해서 털끝만큼도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러한 점에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자신의 자서전인 『생의 수레바퀴』에서 “사람들은 나를 죽음의 여의사라 부른다. 그러나 내 연구의 가장 본질적이며 중요한 핵심은 삶의 의미를 밝히는 일에 있었다.”고 한 말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그녀의 죽음에 대한 연구는 곧 삶에 대한 지향이었던 것이다.

 

죽음은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보편적인 현상이고, 결코 피할 수 없는 길이며,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죽음이 삶의 종말이자 절망의 나락은 아니다. 적어도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그러하다. 죽음은 영원한 생명에 있어서 삶의 한 매듭이며, 또 다른 생명으로의 전이인 것이다.

 

우리 천주교회 박해시기 때, 교리를 용이하게 전파하기 위해 천주가사를 창작하였다. 그 중 학자에 따라 이견이 있기는 하지만, 최양업 신부가 직접 창작하였다고 전해지는 <샤향가(思鄕歌)>가 있다. 하느님 나라인 고향을 그리는 노래다. 이 노래는 안으로는 신자 교육, 밖으로는 외인을 대상으로 하는 전교와 적대자들을 향한 호교의 양상을 띠고 있다. ‘어화 벗님네야 우리락토 찾아가?’로 시작하는 <샤향가>는 죽음 이후의 개별심판, 최후심판, 천당, 지옥 등과 같은 사말(四末) 교리에 주안점을 두고, 현세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노래에 따르면 현세는 잠깐 지나가는 풍진세계로서 눈물의 골짜기이자 귀양살이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현세의 즐거움을 탐할 것이 아니라, 사후의 심판과 그에 따른 지옥과 연옥과 천당을 염두에 두고 선하게 잘 살아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참된 도리를 몰라 지옥의 영원한 고통을 당하게 될 세속사람들과 달리, 낙원이자 고향인 천당의 영원한 복락을 생각하며 신자답게 살아야 대부모(大父母)이자 대은주(大恩主)인 천주를 볼 수 있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이에 따라 <샤향가>는 현세보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 무게 중심을 둠으로써 자연스럽게 순교영성과 긴밀한 연관을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천주가사의 시점은 전적으로 죽음 이후의 하느님 나라에 주안점이 맞추어져 있다. 현세에서 맛보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즉 생지옥과 대비되는 개념으로서의 ‘생천국’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조차 하지 않고 있다. 당시의 교리에서는 현세가 번개처럼 지나가는 의미 없는 나그네 길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가르침을 오늘날의 관점으로 본다면 지나치거나, 혹은 허황되다고 여기는 그리스도인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예전과 달리 천상 교회의 하느님 나라보다는 지상 교회의 하느님 나라에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사실이 있다. 적어도 우리 초기 교회의 가르침에서는 천주의 자녀이자 예수의 제자인 신자들이 지향해야 할 곳이 어디인지,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밝히고 있었다. 오늘날처럼 현세 중심적, 물질 중심적 사유가 팽배한 가운데 과연 정신적 가치, 또는 온전한 하느님 나라를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지 자문해야 할 시점이다. 나아가 죽음 이후에 맞이할 개별심판과 최후심판,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가야 할 지옥 · 연옥 · 천당에 대한 믿음은 고사하고, 죽음 이후에 완성될 하느님 나라에 대한 믿음과 지복직관에 대한 갈망은 있는지 성찰해보아야 할 시점이다.

 

이는 곧 오늘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출발점이며,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가에 대한 대비의 계기가 될 것이다. 이때 죽음은 고통스러운 삶의 끝이 아니라, 42.195km의 마라톤 코스를 완주하고 결승점에 도달하였을 때와 같은 대견함과 기쁨을 누리는 순간이 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기 위해 늘 죽음을 묵상하는 한편, 평화롭고 만족스럽게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오늘을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득 앞을 볼 수도, 말을 할 수도, 들을 수도 없었던 헬렌 켈러의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책이 떠오른다. 그러한 간절함이 우리에게 있는지 되묻게 된다. 앞으로 사흘만 살 수 있다면, 우리는 오늘 무엇을 할 것인가. 구상 시인의 <오늘>이라는 시가 빛난다.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평신도, 2015년 겨울호(VOL.50), 김문태 힐라리오(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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