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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봉헌, 완전한 사랑: 하느님의 뜻과 일치하게 하는 순명 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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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4-22 ㅣ No.516

[봉헌 - 완전한 사랑] 하느님의 뜻과 일치하게 하는 순명 서원


위기에 놓인 오늘날의 순명 서원

 

 

수도자가 공적으로 하는 서원 가운데 마지막으로 ‘순명’ 서원이 있습니다. 이 서원은 교회를 통해 임명된 장상들에게 자신의 뜻을 봉헌하겠다고 하는 공적인 약속입니다.

역사상 그 어느 시대보다도 더 많은 자유를 누리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순명은 이미 낯선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더욱이 그런 시대에서 자란 젊은 수도자들에게 순명은 자신이 추구하는 수도생활의 환상을 깨뜨리는 걸림돌처럼 다가오기 쉽습니다.

그 반면, 뿌리 깊은 유교의 장유유서 같은 사고방식과 남자들의 군대 경험은 비인간적인 상명하복의 문화를 그리스도교적인 순명으로 착각하게 만들고는 합니다. 그런 복음적이지 못한 복종에 익숙한 수도자들이 참된 복음적인 순명의 가치를 다시 일깨우고 살아가기란 쉽지 않습니다.

기존의 수도자들에게도 순명은 해가 갈수록 다른 두 서원에 비해 더욱더 무게감을 느끼게 하는 서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우리는 어떻게 순명의 신비를 다시 발견할 수 있을까요?


순명의 모범을 보여주신 그리스도

‘순명(oboedientia)’이란 말은 ‘듣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히브리어 ‘??ma’, 그리스어 ‘hypakou?’, 라틴어 ‘audire’라는 말과 관련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 용어들은 각별한 중요성이 있습니다. 인간을 만나러 오시는 하느님, 특히 인간에게 말씀을 건네시는 하느님이라는 맥락에서 주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순명은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열고 그분의 말씀을 깊이 받아들이는 자세로 듣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하느님 말씀에 부복하는 것이자 마음을 다해 그 말씀을 따르겠다는 내적인 태도를 말합니다.

또한 순명은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을 통해 드러난 그분의 뜻을 완수하는 것과 직접 연관되기도 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선하심, 특히 이스라엘의 역사 내내 그분께서 베푸신 자비와 용서, 그리고 그 모든 것의 바탕이 되는 그분과의 계약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으로 넘어오게 되면, 순명은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계시, 그분의 구원 업적에 대한 믿음과 직접 맞닿아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더 나아가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약속을 실현하신 분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것, 그분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순명이고, 바로 그러한 순명 가운데 구원의 길이 있다고 신약성경은 말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에게 참된 인간의 길을 보여주신 그리스도께서는 인류 구원을 위해 몸소 성부 하느님께 죽기까지 순명하는 모범을 남겨주셨습니다. 수도자를 포함해서 모든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순명은 바로 그런 예수님의 모습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순명 서원의 유래

역사적으로 볼 때, 순명이 수도생활의 시초부터 ‘서원’의 형태로 자리 잡았던 것은 아닙니다. 수도생활은 순교를 대신해서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목숨을 걸고 광야에 나가 살았던 은수자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독거(獨居) 은수자들에게는 직접 순명해야 할 장상이 필요 없었습니다. 공동체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점차 권위 있는 수도자를 중심으로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수도자들이 모여들면서 수도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의 이해관계를 조율하고 공동체의 균형 있는 발전을 위한 장상이 필요하게 되었으며, 공동체를 복음정신에 따라 운영하고자 장상의 합법적인 권위도 요청되었습니다. 더욱이 세월이 흐르는 가운데 점차 수도 공동체가 커가면서 10세기에 즈음해서 장상의 권위와 그 장상에 대한 순명은 마침내 공적인 ‘서원(votum)’의 형태로 제도화되기에 이릅니다.

이렇듯 순명 서원을 하는 수도자는 교회와 공적으로 결합함으로써 그 신분을 보장받으며, 수도 공동체 안에서 합당한 의무와 권리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게 하는 수로

수도자들의 청빈 서원이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며, 정결 서원이 자신의 사랑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라면, 순명 서원은 자신의 뜻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하느님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영성적인 면에서 볼 때 장상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뜻에 대한 순명은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뜻이 온전히 삶속에서 실현되게 하는 수로(水路)입니다.

사실, 순명은 복음적인 권고 그 이상으로 인간 구원과 성화를 위한 가장 필수적인 덕목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순명, 그분의 뜻에 대한 순명에서 생명의 길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순명은 지극히 성서적인 색채를 띤 서원이자, 구원과 성화와 직결된 핵심적인 서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성인성녀들은 끊임없이 교회 교도권에 대한 순명을 그리스도인의 근본적인 자세로 가르쳤으며, 교도권을 수행하는 교회 장상들, 수도자의 경우는 수도회 장상들에 대한 순명을 강조했습니다.

사도 계승을 통해 계시 진리를 유지 보존하고 전달하는 주교들과 그가 임명한 사제들과 수도회 장상들에 대한 순명은 교회의 일치, 수도 공동체의 일치를 보장하는 보루입니다. 또한 진리를 벗어나 일탈하는 위험을 막아줌으로써 진리의 포구로 확실하게 이끌어주는 안내자이기 때문입니다.


장상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뜻에 대한 순명

먼저, 장상에게 순명을 하는 수도자는 나의 취향 여부와 상관없이 근본적으로 장상의 명령 안에 숨어 있는 하느님의 뜻과 섭리를 찾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사실 모든 장상이 다 자신의 마음에 들만큼 지혜롭거나 훌륭한 인품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또한 장상이 번번이 인간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기도 힘듭니다. 오히려 그런 이유 때문에 순명한다면 그 가치는 반감될 수밖에 없습니다.

순명은 자신의 뜻보다는 장상의 말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맞추는 것이기에, 자신의 뜻을 봉헌하는 영적 지향성이 없다면 진정한 순명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장상들 또한 우리처럼 인간적으로 부족한 면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인간적인 부족함에도, 수도자는 언제나 그 모습 이면에서 그 장상의 모습을 통해 속삭이고 계신 하느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을 줄 아는 영적인 감각을 키워야 합니다. 그게 바로 ‘순명’ 서원과 더불어 자신의 모든 원의를 장상의 손을 통해 하느님께 바친 사람의 기본자세입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 수도자는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장상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뜻도 찾지 못하는데 어디서 어떻게 하느님의 뜻을 구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은 인간적인 도피이자 자기 합리화일 뿐입니다.
 

현대 교회가 가르치는 순명의 정신

교회 교도권은 여러 문헌을 통해 순명의 깊은 신비에 대해 가르친바 있습니다. 그 가운데 요한 바오로 2세의 교황 권고 「봉헌생활」 91항은 순명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순명은 아주 단호한 방법으로 성부에 대한 그리스도의 순명을 거듭 제시합니다. 사실 성자의 자세는 인간 자유의 신비가 성부의 뜻에 순명하는 길임을, 그리고 순명의 신비가 점진적으로 진정한 자유에 이르게 하는 길임을 보여줍니다. 봉헌된 사람들이 이 독특한 순명 서원을 통하여 천명하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신비입니다.”
 
이렇듯 성교회는 순명이야말로 인간이 그리스도의 순명을 닮는 가운데 참된 자유인으로 거듭나게 해주는 안내자라고 보장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는 혹여 권위의 남용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수도회 장상의 권위에 대해 이렇게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권위는 그 무엇보다도 형제적이고 영성적이어야 하며 권위를 부여받은 사람은 결정 과정에 형제자매들을 참여시키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봉헌생활」, 43항).

장상은 수하에게 명할 때 애덕을 가져야 하며, 복음적인 가치와 영혼의 유익 그리고 수도 공동체의 유익, 나아가 교회 전체의 유익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리고 조건 없는 명령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그 명령이 지향하는 가치를 통고해 주어야 합니다.

교회는 개인주의가 만연한 이 시대의 수도생활 풍토에서 장상이 언제나 수도 공동체 전체의 유익을 위하여 고심하고 책임 있게 결정해야 한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장상은 회원들과 다양하게 소통함으로써 그들이 수도 공동체가 지향하는 설립 목적에 맞게 성심껏 살도록 격려하고 이끌어야 하지만, 회원 가운데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최종 결정은 권위에 속하며 따라서 권위자는 그 결정이 존중되도록 감독할 권리를 지니고 있음”(「봉헌생활」, 43항)을 기억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건강한 수도자로 성장하려면 개인주의적 사고방식에 빠진 채 그저 머리로만 아는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순명에 갇혀서는 안 됩니다. 수도 공동체를 통해 교회가 세운 장상 안에서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성심껏 순명할 때, 수도자는 성화의 여정에서 확실한 도약대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 윤주현 베네딕토 - 가르멜수도회 사제. 로마 테레시아눔에서 신학적 인간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스페인의 아빌라 신비신학대학원 교수를 지냈다. 현재 가르멜수도회 대구수도원 원장, 대전가톨릭대학교 교의신학 교수로 활동하며 다양한 저서와 역서를 펴내고 있다.

[경향잡지, 2015년 4월호, 윤주현 베네딕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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