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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인문학 강좌: 인간과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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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3-11 ㅣ No.276

[인문학 강좌] 인간과 자연

 

 

오래전, 고등학교에 갓 입학한 어느 봄날이었다. 길을 걷던 까만 교복을 입은 까까머리 학생의 눈이 보름달만큼이나 커졌다. 마치 신발이 땅에 붙은 듯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가톨릭 서점 앞 유리창에 붙은 사진 한 장 때문이었다. ‘우주의 한 점인 지구’라는 글귀와 함께 파란 지구 사진이 내걸렸던 것이다. 하얀 구름 사이로 파란 바다와 갈색의 대륙이 보였다. 내가 살고 지구의 모습을 그처럼 생생하게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우주의 한 점인 지구, 파란 행성 속의 한 점인 대한민국, 그 안의 한 점인 나!’ 충격이었다.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 그럴까 싶었다. 그날 처음으로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세례 받은 지 2년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처럼 광활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신 하느님은 얼마나 크고 아름다운 분이실까’를 생각한 것도 바로 그때였다. 피조물인 나와 대자연, 그리고 창조주인 하느님과의 관계를 처음으로 떠올린 날이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5년 8월 6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에 의미 있는 서한을 발표하였다. 정교회에서 오래전부터 거행해 온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을 가톨릭교회에서도 2015년 9월 1일로 제정한다는 것이었다. 교황은 서한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명백히 밝혔다.

 

“영성은 인간의 몸이나 자연, 또는 세상 현실에서 분리되지 않고, 오히려 그 안에서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과 일치를 이루며 더불어 살아가는 것’(「찬미받으소서」 216항)이라는 것을 우리는 언제나 기억하고 있습니다. 생태계의 위기는 우리의 깊은 내적 회개를 요청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이 ‘생태적 회개입니다. 이는 예수님과의 만남의 결실이 그들을 둘러싼 세상과의 관계에서 온전히 드러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찬미받으소서」 217항). 이처럼 ‘하느님 작품을 지키는 이들로서 우리의 소명을 실천하는 것이 성덕의 삶에 핵심이 됩니다. 이는 그리스도인 체험에서 선택적이거나 부차적인 측면이 아닙니다.’(「찬미받으소서」 217항).”

 

이러한 선포는 오늘날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는 생태계 파괴에 기인한 것이다. 지구의 자연환경은 산업혁명과 과학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불과 이백여 년 만에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고 말았다. 석탄, 석유, 천연가스와 같은 화석연료로 인해 이산화탄소 배출이 지속적으로 증가하였다. 대기오염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또한 프레온가스 등의 화학물질 과용으로 인해 오존층이 파괴되었다. 급속한 온실효과가 진행되어 지구 온난화가 가속화하고 있다. 빙하가 녹아내리고 해수면이 상승하여 바다에 잠기는 섬들이 속출하고 있다. 기상 이변으로 전 세계적으로 가뭄과 홍수, 폭염과 폭풍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사막화에 따른 황사와 공해에 따른 산성비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지구의 허파 역할을 하는 아마존의 열대우림과 같은 울창한 숲들이 사라지고, 그곳에 서식하던 수많은 생명체들이 멸종하고 있다. 편리한 과학 기술의 무분별한 적용과 자연을 정복하겠다는 인간의 그릇된 인식, 그리고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가 이러한 현상들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문득 미국의 해양생물학자이자 대중과학작가인 레이첼 카슨(1907-1964년)이 떠오른다. 그녀는 <타임(TIME)>지가 선정한 20세기를 변화시킨 100명의 인물 중 한 명이었다. 대규모 농업을 꿈꾸던 1950년대 미국에서는 해충 박멸이 무엇보다 골칫거리였다. 바로 그때 DDT라는 기막힌 살충제가 개발되었다. 비행기로 그 살충제를 대량 살포한 며칠 뒤 사람들은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 그토록 속 썩이던 벌레들이 모조리 땅에 떨어졌던 것이다. DDT의 위력은 막강하였다. 실로 과학의 승리이자 인간의 쾌거였다. 그 해 곡물을 비롯한 농산물이 넘쳐나 풍년을 이룬 것은 물론이었다. 문제는 그 이듬해였다. 새들이 지저귀는 봄이 왔건만, 숲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하였다. 지난해 살포된 DDT에 오염된 지렁이를 비롯한 동식물 먹잇감으로 겨울을 난 새들이 대부분 죽거나 불임이 된 탓이었다. 새끼들이 부화하여 한창 생기 넘쳐야 할 숲이 깊은 침묵 속에 묻힌 까닭이었다. 그 상황을 기록한 책이 1962년에 발표된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Silent Spring)』이었다. 결국 1963년 미국 의회는 잔류 농약이 동식물 조직에 축적되어 그 연쇄작용으로 피해가 확대된다는 레이첼 카슨의 증언을 청취하였다. 아울러 대통령 과학고문위원회가 ‘농약에 관한 조사 보고서’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그 이후 DDT는 전 세계적으로 사용이 금지되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가르침은 동양에서도 꾸준히 있어 왔다. 맹자는 4촌(약 16센티미터) 이상의 크기로 짠 그물로 고기를 잡고, 한 자 이상의 물고기만 시장에 내다 팔면 대대로 물고기를 먹을 것이라 하였다. 치어를 잡지 않고 남획을 방지하기 위한 묘책이었던 것이다. 또한 초목의 잎이 말라 떨어진 이후에 벌목을 하면 자자손손 목재를 쓸 것이라 하였다. 이 역시 자라는 생명체를 해치지 않고 남벌을 막기 위한 혜안이었다.

 

우리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신라의 귀산이라는 사람이 수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원광법사에게 가르침을 청하였다. 그러자 원광법사는 그 유명한 세속오계를 내렸다. 사군이충(事君以忠), 사친이효(事親以孝), 교우이신(交友以信), 임전무퇴(臨戰無退), 그리고 살생유택(殺生有擇)이 바로 그것이었다. 귀산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살생유택만은 잘 모르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법사가 말하길 “6재일과 봄 · 여름에는 살생치 아니한다는 것이니, 이는 때를 택하는 것이다. 또한 말 · 소 · 닭 · 개처럼 부리는 가축을 죽이지 않고, 고기가 한 점도 되지 못하는 미물을 죽이지 않는 것이니, 이는 사물을 택하는 것이다.”(『삼국사기』 45, 열전 5, 귀산)라 하였다. 살생에 있어 때와 사물을 가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인간과 자연이 어떤 관계를 맺고 지내야 하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내었던 것이다.

 

한편, 1854년 미합중국의 피어스 대통령은 아메리카 원주민이 사는 땅을 매입하고자 하였다. 그때 스쿼미시 부족의 시애틀 추장이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가 오늘날까지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경종이자 묵상거리이다.

 

‘워싱턴에 있는 대통령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말을 전해왔다. 하지만 어떻게 땅과 하늘을 사고 팔 수 있는가? 그런 생각은 우리에게 생소하다. 신선한 공기와 물방울이 우리 것이 아닌데, 어떻게 그것을 사가겠다는 것인가? 이 땅의 모든 것은 우리에게 신성한 것이다. 반짝이는 소나무 잎, 바닷가 모래밭, 짙은 숲속의 안개, 수풀과 지저귀는 곤충들 모두가 우리의 기억과 경험 속에 신성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핏줄 속을 흐르는 피처럼 나무속에 흐르는 수액을 잘 안다. 우리는 이 땅의 한 부분이며, 땅 또한 우리의 일부이다. 향기 나는 꽃은 우리의 자매다. 곰과 사슴과 큰 독수리는 우리의 형제다. 바위, 수풀의 이슬, 조랑말의 체온, 사람, 이 모든 것이 한 가족이다. 시내와 강을 흘러내리는 반짝이는 물은 단순히 물이 아니다. 우리 조상의 피다. 우리가 당신들에게 땅을 팔면, 이 땅이 신성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호수에 비치는 모든 것은 우리 민족 삶 속의 사건과 기억을 말해준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는 내 아버지의 아버지의 목소리다. 강은 우리의 형제다. 우리의 갈증을 달래주고, 우리의 카누를 옮겨주고, 우리의 아이들을 키운다. 그러니 당신들은 형제를 대하듯 강을 친절히 대해야 한다.’

 

[평신도, 2015년 가을호(VOL.49), 김문태 힐라리오(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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