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 (토)
(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강론자료

2008-06-08.....연중 10 주일 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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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08-06-08 ㅣ No.900

연중 10 주일 (가해)

호세아 6,3-6 로마 4,18-25 마태오 9,9-13

2008. 6. 8. 무악재

주제 : 하느님의 부르심

오늘은 예수성심 성월, 유월 들어서서 맞이하는 두 번째 주일입니다.

사람은 그가 세상에 있는 동안 그 필요에 따라서 날짜를 나누고 시간을 구분합니다. 우리들 각자가 만든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렇게 사람이 하는 이 일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날짜와 시간을 이렇게 나누는 이유는 제 아무리 용빼는 재주가 있더라도, 한 순간에 모든 것을 통찰하거나 알아듣는 일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내 앞에 펼쳐진 현실을 한꺼번에 이해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현실에서 적잖게 고생합니다. 말과 바람과는 달리 많은 것을 생각하거나 실천해도 현실은 우리가 사람이 바라는 대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사가를 부르신 이야기’입니다. 자기 이름으로 쓴 복음서에서 마태오는 자기의 전직(前職)을 ‘세금을 걷던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로마제국에 편입돼 있던, 히브리 민족의 역사에서 세금을 걷는 관리란 먹고 사는 호구지책을 연명하는 사람들 중에 아주 멸시를 받던 직업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움직이던 사람들 중 하나를 예수님은 제자로 선택하셨고, 훗날 그는 자기의 능력을 발휘하여 복음서를 내놓습니다.

  세상살이에서 선택하는 일에 대하여, 사람과 하느님은 분명 다르게 대하고, 다르게 행동한다고 우리는 신앙에서 말합니다. 이 마태오의 부르심과 응답에 대한 이야기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묵상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어떤 사람을 내가 친구로 삼든지, 나와 뜻이 통하는 사람으로 삼으려면 우리는 현실에서 많은 조건을 이용합니다. 얼굴은 어떻게 생겼는지, 고향은 어디인지, 그가 가진 재산은 얼마나 되는지, 내가 그에게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먼저 많은 것을 계산합니다. 그리하여, 그 대상이 내 코드(=Cord)에 맞는 사람으로 구별하고 그 사람들을 가까이해도 실패할 확률이 적다, 손해 보지는 않겠다는 사람을 중심으로 가까워지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완전한 보장은 없습니다. 이런 일은 사람이 세상을 대하는 한계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도 나옵니다만, 예수님은 사람들의 비판과 비난을 받으면서까지, 마태오를 선택합니다. 그는 세금을 징수하는 하급관리는 아니고, 웬만큼 높은 직책에 올라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모든 것을 내버려두고 따라나섭니다. 어쩌면 동족들 가운데서 비난을 받던 그가 자기를 알아준 단 한 사람의 스승을 향해서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순간적으로 파악하신 예수님에게 드러낸 충실성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 충실성 때문에 우리는 복음서를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바쁘게 삽니다. 하도 바쁘게 살아서 때로는 하느님에 대한 생각도 잊고 살거나, 시간을 맞춰 그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을 뒤로 미루어도 별 탈 없이 살 거라고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내 주변의 사람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지, 그들의 삶에 대해서 우리는 드러난 것밖에는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한계, 우리가 가진 한계입니다.

  그 사람이 좀 더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실천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구약시대의 호세아 예언자는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 그래서 그분을 향한 우리의 신의, 그분을 향한 믿음의 행동이 사라지기 쉬운 구름이나 이슬과 같아서는 곤란하지 않겠느냐?’고 안타까워합니다. 호세아예언자의 안타까운 외침입니다.

 오늘 호세아 예언서나 마태오 복음에 똑같이 등장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기억하여 제물을 봉헌하는 제사를 바치는 것보다, 하느님이 더 바라시는 것은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표현 말입니다. 제사를 화려하게 지낸다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자랑일 수도 있고, 거기에서 한몫 챙겨먹는다는 의도가 들어있다는 뜻 일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언제나 부르십니다. 가까이 오라고, 내가 축복을 줄 준비가 다 돼 있으니, 언제든지 다가오기만 하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현실에서 바쁘다는 핑계와 이유를 들어 그 실천을 뒤로 미룹니다. 그렇게 한다는 것은 내가 삶에서 해야 하는 의무를 미루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내게 다가올 축복을 내가 뒤로 미루는 행동도 된다는 것도 알아야 할 일입니다.

뭔가를 먹어야 우리는 배부를 수 있고, 거울을 들여다보거나 단장할 시간을 만들어야 내가 자랑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 어느 것도 공짜로 우리가 바라는 순간에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격언에도 아마 그런 뜻이 포함돼 있을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에게서 실천보다는 믿음이라는 요소를 본 그리스도교의 한 분파도 있기는 합니다만, 이 세상에서 사람이 올바르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가진 마음이나 생각’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시작된 좋은 마음이나 생각이 행동으로 연결돼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강조점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일입니다.

  어느 누구도 살아가기 쉽지 않은 세상에서 올바른 것을 기억하고, 올바른 것을 실천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그만큼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선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노력하는 것이 우선이어야 하겠습니다만, 부족하다면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도 함께 청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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