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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장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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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5-08 ㅣ No.928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장발 화백 (상) 한국 교회미술의 시작과 그 의미


1954년 성미술 전람회 열어 교회미술 초석 닦아

 

 

- 장발 화백.


우리나라의 ‘교회미술’은 1920년대에 우석 장발(루도비코, 1901~2001) 화백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가 로마에서 있었던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식에 참례하고 돌아와서 곧바로 서울 명동성당 열두 사도 상을 제작한 것을 시작으로 본다. 그 뒤 장발 화백은 골롬바·아녜스 자매상과 김대건 신부상 등을 계속해서 그려냈다. 일제 식민통치하에서 교회와 성 미술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었을 시대에 무슨 생각이 있어서 그러한 일을 했는지는 기록이 없어서 알 길은 없다. 1920년대라고 하면 서양에서도 예술가가 ‘교회미술’에 손댄 일이 없었던 시기였으니 말이다.

1940년대 들어서면서 어떤 한 신부의 발상에 의해 프랑스 앗시라는 시골에 현대 미술가들을 초대, 그 결과 새로운 성당이 탄생했다. 이어 1964년 바오로 6세 교황에 의해서 현대의 교회가 현대 미술가들의 손으로 만들어져야 하겠다는 선언이 있었다. 그런데 장발 화백은 1954년에 이미 서울에서 현대 미술가들의 성미술 전람회를 주도했다. 1959년에는 혜화동성당이 건립되었는데, 이 성당은 한국 건축가에 의한, 한국의 조각가들에 의한, 한국 자본에 의한 최초의 성당이었다. 이것이 모두 장발선생이 주도한 일이었다. 한국의 교회미술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1965년에는 절두산성당이 만들어졌다. 건축가 이희태 선생이 설계하고, 조각가 김세중 선생과 최의순 선생이 참여했다. 그리하여 현대적인 성당이 탄생했는데, 프랑스에서 꼴뷔제 성당(1950년)이 세워진 것처럼 한국에서는 절두산에 새로운 획기적인 성당이 세워졌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1970년에는 서울가톨릭미술가회가 창립됐고, 이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성 미술전시회를 열고 있다. 지금은 전국의 각 교구마다 미술가회가 만들어져, 해마다 연구발표회를 열고 있다. 이와 같은 일은 세계적으로도 오직 한국의 가톨릭교회에서만 있는 일이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우리나라 가톨릭 신자 수는 급격히 증가했다. 한 해에 100개가 넘는 성당이 전국 각지에 세워지기도 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미술가들이 나서서 한국 교회미술 현대화에 앞장섰다. 새로운 설계, 새로운 성상이 미술가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이 일은 지금 계속해서 추진되고 있다.

- 장발 작 ‘성녀 김효임 골롬바와 효주 아녜스 자매’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이 시대의 교회미술이 이 시대의 신앙을 상징한다고 한다. 종교미술이 성했던 시대에 신앙이 성했고, 신앙이 쇠했던 시대에는 종교미술도 쇠했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고들 말한다. 아름다움이란 하느님의 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하느님의 모습을 우리가 볼 수가 없다. 예술가들의 창의성 안에는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 초자연계와 직관적 통교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술가들이 만들어내는 형상을 통해서 그 너머의 세계를 감지할 수가 있다고 한다. 교회미술이 예술가를 필요로 하는 이유가 그런 때문이다.

화백은 만 100세를 넘기시고 2001년 4월 8일 멀리 이국땅에서 파란 많은 큰 생애를 마치셨다.

장발 선생이 미국으로 가지 않고 그냥 이 땅에서 사셨다면 한국 교회미술은 눈부신 발전을 했을 것이다. 그의 준엄한 평가의 정신이 부당한 사례를 용서치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지금 해마다 수십 개의 성당을 신축하고 있다. 이런 모습은 세계교회 안에서도 매우 이례적이라고 한다. 하지만 성당 건축에 들어가는 막대한 자금과 인력을 효율적으로 써야 할 텐데, 그런 면에서 장발 선생을 잃을 수밖에 없었던 그간의 사정이 한국 가톨릭교회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문화, 특히 미술의 올바른 발전을 위해서도 여러 가지로 아쉬움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 장발 작 ‘장발 화백 자화상’.


새삼 장발 화백의 역량이 한국미술 발전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가를 생각해보게 된다. 해방 후 십여 년 동안의 그의 행적을 보면 그가 얼마나 폭넓은 활동을 했던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1960년 이후 그가 한국을 떠나 자리를 비운 사십여 년간 한국 미술문화계에 미친 손실을 생각하면 그저 아쉽기만 하다.

장발 화백은 미술대학을 창설하고 초대학장으로 취임했을 뿐만 아니라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을 창립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무엇보다 한국 미술가협회를 창설하고 ‘성미술 전람회’를 열어 한국 교회미술의 터전을 일구었고, 혜화동성당 건립을 지휘하면서 교회 건축에 최고 수준의 미술가들을 참여시킨 첫 역사를 만들었다. 또 예술원 부회장을 역임하고, 제1회 서울시문화상 대한민국예술원 공로상을 받는 등 그야말로 한국 미술을 주도한 인물이라 할 만큼 큰일들을 하셨다. 그가 본의 아니게 고국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세월에 어찌 안타까운 마음을 접을 수가 있겠는가.

장발 화백은 확실한 조형 역량과 예리한 감식안의 소유자로 당대 누구도 그를 따라잡을 사람이 없었다. 그가 남긴 성화들을 볼 때면 이러한 역량을 보다 여실하게 읽을 수 있다. 일본과 미국에서 수학했으면서도 일본풍 미국풍의 유화 냄새가 없는 것 또한 남달리 깊은 신앙심과 판단력의 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 최종태(요셉 · 조각가) - 서울대 미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공주교육대와 이화여대 교수를 거쳐 1970년부터 30여년간 서울대 미대 교수를 역임했다. 조각전을 비롯해 소묘전, 파스텔화전, 목판화전, 유리화전 등 국내외에서 수십 차례의 개인전을 가졌다.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자 서울대 명예교수, 김종영기념사업회 회장, 장욱진미술문화재단과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이사 등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6년 5월 8일, 최종태(요셉 · 조각가)]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장발 화백 (중)


한국 교회미술 토착화와 고급화에 공헌

 

 

- 장발 화백(가운데)이 최종태 교수(오른쪽)와 사진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우석 장발 화백이 삶의 마지막 여정을 보낸 곳은 미국의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라는 도시였다. 중심가에서 북쪽으로 좀 떨어진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는데, 마을 이름이 폭스 채플이라 했다. 크고 작은 연립주택들이 듬성듬성 있어서 공기 좋고 산책하기에도 적격인 동네였다.

 

마침 서울대학교에서는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이라는 상을 만들었는데, 장발 화백이 그 주인공으로 선정됐다. 장발 화백이 창설한 미술대학에서는 흉상을 제작해 학장실 바깥마당에 세우고 여러 동문과 제자들이 모여서 제막행사를 했다. 휘문중학교 교사 시절 제자였던 박갑성의 의미심장한 연설은 장내를 더욱 숙연하게 만들었다. 제막 행사가 열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피츠버그를 방문할 일이 생겼다. 덕분에 모든 사진자료와 그 밖의 기념품 등을 선생에게 전달하는 일이 나한테 맡겨졌다. 실로 오랜만에 선생을 만날 수 있는 행운의 기회가 생긴 것이었다. 당시 장발 화백은 아흔다섯 살이라는, 드문 나이를 살고 있었다.

 

내가 폭스 채플 그 언덕 마을의 장발 화백 댁을 방문했을 때 뉴욕에서 셋째 아들 장흔 신부가 와 있었다. 웬일인가 했더니 귀가 어두워서 통역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냥 대면해서는 대화를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나는 할 말도 많고 궁금한 것도 많았지만, 그의 모습을 보자 대화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금방 알 수가 있었다.

 

장발 화백의 자택 응접실 뒤편에 병풍이 하나 잘 표구된 상태로 있었다. 노수현, 장우성의 작품 등 여섯 쪽은 더 되어 보였다. 이건 누구 그림이고 저건 누구 그림이고 그림 설명을 하시는데 흐트러짐 없이 모든 말씀이 명명백백했다. 애제자 김종영 조각가의 선종 소식을 전했더니 대뜸 “그 사람 좋은 사람이야!”라는 말씀을 하셨다. 하지만 서울에서 가지고 간 흉상 제막행사의 사진들을 펼쳐 놓았는데, 대부분의 얼굴들을 알아보지 못하셨다. 이 얼굴은 누구이고 저 얼굴은 누구이고 하나하나 일러드렸더니 그야말로 감격 또 감격하는 모습이었다.

 

사십 년이란 시간이 흘렀으니 제자들이 모두 늙어 백발노인인지라, 장발 화백 또한 세월의 무상함과 옛 생각에 그야말로 흥분의 연속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김대건 신부와 명동성당 그림을 그릴 때, ‘성미술전람회’ 때, 혜화동성당을 만들 때의 일화 등 나는 듣고 싶은 이야기를 산더미 같이 안고 있었지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장흔 신부에게 몇 가지 메모를 남겨 주면서 대신 여쭤봐 달라는 부탁을 했었다. 

 

하지만 궁금한 부분을 차근차근 들을 수 없었기에, 지금도 생각하면 참으로 유감스러운 마음이다.

 

집에는 소파가 있고 그 옆쪽으로 식탁이 있었다. 장발 선생이 앉아 있는 뒷벽에는 그림 몇 점이 걸려 있었는데 모두 가족 그림이었다. 식탁 뒤편 한가운데에 십호쯤 될까 명륜동 집을 그린 그림 안에는 옛날의 부인과 누구누구 식구들이 그려져 있었다. 순간 묘한 감정이 들었다. 화려했던 젊은 날은 가고, 타향 이국땅에서 고향 생각을 하고 있는 한 노인을 내가 만나고 있는 것이었다. 그중 삼위일체 그림은 꽤 커 보였는데, 성부 성자 성령이 한복에 도포를 입고 갓을 쓰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림 속에는 조그마한 골롬바 아녜스도 있었는데 지금도 눈앞에 선하게 떠오른다. 그 작품은 장발 화백이 80대에 그린 것으로 추측되었다. 멀리 봄안개 너머로 남대문이 보이고 성녀의 가는 길가에는 꽃들이 예쁘게 그려져 있었다. 한 번은 여름 가톨릭미술인들과 이탈리아 새 성당 순례를 하는 중에 로마의 한인성당에서 주일미사를 봉헌하게 됐는데, 거기에 장발 선생의 골롬바 아녜스 그림이 한 장 걸려 있는 게 아닌가. 꽤 큰 그림이었다. 그러고 보니 장발 화백의 골롬바 아녜스를 내가 본 것만 해도 석 장이 되었다. 아마도 무슨 사연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교육자로서의 장발, 화가로서의 장발, 가톨릭미술가로서의 장발, 그는 여러 면에서 특출한 일을 하였다. 그리고 지금 내가 장발 화백의 생애를 돌아볼 때에 그는 가톨릭 신앙인으로서, 한국 교회미술 토착화에 가장 괄목할 만한 공로를 보인 인물이다.

 

1920년, 스무 살의 나이에 어떻게 ‘김대건 신부상’을 그리려는 마음을 먹었을까. 이 작품은 오늘날 한국 교회미술을 융성하게 하는데 씨앗이 되었다. 오늘날 비서구권 전체에서 가톨릭 교회미술의 토착화가 한국만큼 성숙한 나라는 드물다. 그것이 장발이라는 한 청년이 스무 살 때 그린 성화상 ‘김대건 신부상’으로부터 시작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신의 섭리란 사람의 이성으로는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이 이런 일을 두고 하는 말인 성싶다.

 

1930년대 프랑스에서는 쿠튀리에 신부가 당대 최고의 미술가들을 성당 만드는데 끌어들여 현대 종교 미술을 탄생케 한 것처럼, 장발 화백은 우리나라 가톨릭 교회미술의 고급화를 선도하고 그것을 이 땅에 정착게 한 위대한 선구자였다. [가톨릭신문, 2016년 5월 15일, 최종태(요셉 · 조각가)]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장발 화백 (하)

 

한국 교회미술 초석 놓고 서양화단 이끌어

 

 

- 장발 선생의 총지휘감독을 통해 한국 사람의 설계로, 한국 사람들의 성금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현대식 건축물인 서울 혜화동성당.

 

 

장면 · 장발 형제는 미국에서 프란치스코 제3회원이 되어 귀국했다. 장발 선생은 만 백 세 생신을 지낸 지 며칠 후 선종하셨는데, 나는 당시 혜화동성당에서 추모미사를 준비하던 중 제3회 회원들이 걸어온 전화통화 덕분에 이 사실을 알게 됐다. 우리나라에 프란치스코 제3회의 뿌리를 심은 분들이 장면·장발 형제였다니! 한국 천주교가 평신도들에 의해서 전래된 것처럼, 평신도 수도회 또한 그렇게 평신도에 의해 한국교회에 전해진 것은 정말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장익 주교가 번역한 「프란치스꼬 저는」이라는 책의 맨 앞에, “참다운 방지거 제3회원으로 사신 부모님 영전에 바칩니다”라고 적혀 있는 한 줄 속에, 제3회의 도입과 확산 등에 관한 많은 이야기가 함축되어 있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한국 교회미술의 초석을 놓고, 국내 서양화단을 이끈 선구자이자 교육자로 존경받는 장발 화백은 1901년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등보통학교 시절부터 서양회화 양식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때문에 그는 본격적으로 서양화를 공부하기 위해 1920년 동경 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서양의 조형세계를 보다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뜻으로, 이듬해에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미학과 미술사를 공부했다.

 

동경 미술학교 재학시절 ‘김대건 신부상’을 그렸고, 1926년에는 명동성당 제단벽화를 그렸다. 그의 깊은 신심은 이후로도 신의주성당의 벽화 ‘성령강림’(1928), 서울 가르멜 수녀원의 제단화 ‘성모영보’(1945)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1941) 등 다양한 성화를 그리게 했다. 장발 화백은 미국에서 추상세계를 표현하면서도 예전과는 또 다른 성화 작업을 쉬지 않았다고 한다.

 

장발 화백은 일반 미술계에서는 초기 추상미술의 흐름을 이어온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주관적이고 직관적인 비정형의 조형미 탐색을 통해 추상표현주의를 구축해왔고, 1962년 미국으로 건너가 정착한 후에는 그만의 독특한 작업 세계를 선보였다. 1950년대 초 대한민국 예술원 회장으로 선출됐던 장발 화백은 국전 운영을 계속 주도하면서 1960년까지 한국미협전을 열어, 우리나라 미술계의 종합적 발전에 이바지했다. 1958년에는 그동안의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예술원 공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대로 해방이 되고 서울대학교에 미술대학을 만든 이가 바로 장발 화백이다. 그는 서구식 미술 교육제도를 확실하게 다져놓고, 이로써 한국미술의 부흥에 절대적인 계기를 이룩했다. 지금도 전국의 미술대학이 장발 화백이 세웠던 교육과 이념의 기본 틀을 지키고 있다. 예술은 진리 탐구의 일환이라는 것이 그 근간이다. 바로 삶과 예술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1955년에는 ‘성미술전람회’를 만들자, 서울대 교수들을 중심으로 많은 이들이 출품을 했는데, 이 전람회는 우리나라에 그리스도교 미술이 있다는 것을 세상에 널리 알린 계기가 됐다. 장우성 화백 또한 장발 화백의 권유에 의해 성화를 그리게 됐다. 장우성 화백이 한복을 입은 한국 사람의 얼굴로 된 최초의 성모자상을 그린 것도 다 우연한 일이 아닌 것이다.

 

- 장발 화백 작 ‘명동성당 제단벽화’ 부분.

 

 

역시 장발 선생의 총지휘감독을 통해 한국 사람의 설계로, 한국 사람들의 성금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현대식 건축물인 서울 혜화동성당이 탄생했다. 이는 한국 교회미술계의 큰 성과일 뿐 아니라, 신앙의 토착화란 면에서도 크나큰 사건이 아닐 수 없다.

 

1960년 4·19 학생 혁명이 발생하고 장면 정권이 수립되면서, 장발 선생은 로마의 교황청 대사로 내정되었으나 이내 5·16 군사정권의 출현으로 모든 것이 좌절되었다. 이후 장발 화백은 한국 화단에서 공식 활동을 중단했고, 한국 현대미술사에서도 그의 이름은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됐다.

 

장발 화백은 본의는 아니었겠지만 미국으로 이주했다가, 이십 년 후 잠시 서울에 들른 일이 있었다. 그때 오자마자 서울의 새 성당 건축물을 돌아보면서 하루를 보냈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다. 얼마나 궁금했으면, 오랜만에 고국에 오자마자 새로 지은 성당들을 순례했을까. 이제 생각해보면 그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1964년 바오로 6세 교황이 시스티나 경당에 미술가들을 초청해 미사를 거행하고, 새로운 종교미술을 독려한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장발 화백은 그보다도 십 년 전에 서울에서 ‘성미술전람회’를 열었고, 그 오년 전에 미술가들과 함께 혜화동성당 건축을 기획한 것이다. 참으로 높은 지혜와 시대를 앞서 내다보는 선견지명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천주교회에 박해가 사라지고 20세기를 여는 즈음 태어난 장발 화백은 일찌감치 일본과 미국으로 유학해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한국 교회미술의 필요성을 예견하고 제시했다. 마지막까지 고국에서 삶을 살았다면 한국 미술계에서는 물론 교회미술 분야에서 얼마나 큰 역량을 보였을까. 한 개인이 공공의 가치 증진에 얼마나 많은 기여를 할 수 있는지 가늠해보니, 지난날 역사들이 더욱 아쉽기만 하다. [가톨릭신문, 2016년 5월 22일, 최종태(요셉 · 조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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