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9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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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님 발자취를 따라서 순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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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05-02 ㅣ No.2224

[특집]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님 발자취를 따라서’ 순례기 (상)


만리장성 넘어…조선 복음화 간절했던 열정의 길 돌아보다

 

 

브뤼기에르 주교(1792~1835)는 이승훈(베드로)이 1784년 중국 북경 북당에서 세례를 받으며 시작된 한국교회가 1831년 9월 9일 조선대목구로 설정될 때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성직자다. 한국교회 초대 교구장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브뤼기에르 주교는 한국교회 역사에서 초석이 됐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러나 브뤼기에르 주교는 그토록 바랐지만 자신이 돌보아야 하는 조선대목구에 발을 디디지 못하고 중국 땅에서 선종했다. 또한 지금의 한국교회 신자들은 브뤼기에르 주교가 한국교회 초대 교구장으로서 남긴 발자취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위원장 구요비 욥 주교)는 4월 16~21일 브뤼기에르 주교가 초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된 뒤 조선에 입국하려 거쳐간 발자취와 유해 이송로를 따르는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님 발자취를 따라서’ 순례를 실시했다. 3회에 걸쳐 순례기를 싣는다.

 

-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님 발자취를 따라서’ 순례단이 4월 17일 중국 장가구 만리장성 대경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만리장성은 브뤼기에르 주교가 서만자에 도착하기 하루 전 넘은 곳이다. 사진 박지순 기자

 

 

2000km 넘는 대장정

 

순례단은 서울 순교자현양위 부위원장 원종현(야고보) 신부와 직원들, 순교자현양회 조화수(바오로) 회장과 이래은(데레사) 부회장, 양두석(토마스) 전 회장 등 전현 회장단, 성지순례 안내 봉사자 등 20여 명으로 구성됐다. 순례단은 프랑스에서 태어난 브뤼기에르 주교가 고향을 떠나 아프리카를 돌아 동남아시아를 거치고 다시 중국대륙을 지나 조선을 향해 걸었던 그 길을 따라 걷고자 했다. 이동 거리는 총 2000km가 넘었다.

 

“조선 선교에 대한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저는 프랑스에 머물러 있었고 그때는 어린 나이였습니다. 그 당시 조선의 신자들이 사제 없이 불쌍하게 버려진 소식은 제게 그들에게 가고자 하는 큰 열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교회에 대한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의 상황에 대해 남긴 글이다. 조선교회에 대한 선교 열망을 이미 지니고 있었지만 어느 길로 가야 할지를 몰랐다. 알려진 길이 없었기에 길을 만들어 내야 했던 시기에 초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된 브뤼기에르 주교가 얼마나 험난한 길을 거쳐 가야 했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순례단은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입국이라는 간절한 염원에서 중국대륙을 지나간 장소 중 1년간 머물며 사목했던 서만자(西灣子), 서만자에 도착하기 전 통과했던 만리장성, 마지막 기착지이자 선종 장소인 마가자(馬架子), 조선 입국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선종한 뒤 유해가 이송된 경로에 위치한 심양(沈陽)과 변문(邊門), 단동(丹東)을 주요 순례지로 정했다. 

 

4월 16일 오전 7시 이제 막 어둠이 걷힌 시각, 순례단은 중국 북경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김포공항에 모였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초석을 놓은 브뤼기에르 주교가 걸었던 길을 따라 걷는다는 생각에 순례단의 얼굴에는 흥분이 감돌고 있었다.

 

순례단은 16일 오전 11시경 북경공항에 내려 명·청대 천문 기구를 관장하던 흠천감(欽天監)과 예수회 마테오 리치 신부가 세운 남당(南堂)을 둘러본 뒤 한국교회 첫 영세자인 이승훈(베드로)이 1784년에 세례받은 북당(北堂)을 찾았다. 이승훈이 북당에서 세례받음으로써 한국천주교 역사가 공식적으로 시작됐다는 점에서 조선대목구 초대 교구장인 브뤼기에르 주교와도 무관하다고 볼 수 없는 기념비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원종현 신부는 한국천주교 역사가 공식적으로 시작되고 초대 교구장 임명으로 교회의 초석이 놓인 사건의 의미와 관련해 “그리스도교 신앙이 없던 시기에는 신분이 존재를 규정했다면,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인 이후에는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시대가 됐다”고 말했다. 조선대목구 초대 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는 교구 설정이라는 교회사적, 제도적 의미에서는 물론 사회사상사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 브뤼기에르 주교가 1834년 10월부터 약 1년간 머물며 사목했던 서만자에 세워진 성당 전경. 서만자성당은 1960년대 문화대혁명 때 파괴됐다가 2009년에 새로 지어진 것이다. 사진 박지순 기자

 

 

서만자성당에서 찾은 브뤼기에르 주교의 흔적

 

순례단은 북경에서 219km 떨어진 장가구(張家口)로 이동해 하루 숙박한 뒤 4월 17일 오전 8시30분 만리장성 제1문이라 불리는 대경문(大境門)을 찾아 버스로 출발해 9시15분경 도착했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을 향해 이동하던 중 서만자에 도착한 것은 1834년 10월 8일이었다. 서만자에 들어오기 전 만리장성을 넘은 것은 바로 전날이었다. 초대 조선대목구장에 임명된 지 정확히 3년하고도 한 달이 더 지난 시점이었다. 그만큼 앞서간 사람이 없는 길을 만들며 가는 일이 험난했음을 알 수 있다. 

 

순례단에게 만리장성은 세계적인 관광 명소가 아니었다. 끝이 보이지 않게 이어지는 만리장성을 바라보며, 브뤼기에르 주교가 만리장성 어딘가를 통과해 지나갔을 모습을 그려 볼 수 있었다.

 

순례단이 만리장성 대경문을 출발해 약 30km 떨어진 서만자성당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11시였다. 현재의 서만자성당은 1960년대 문화대혁명 때 건물이 철거되는 수난을 겪은 뒤 2009년에 새로 지어진 것으로 브뤼기에르 주교가 사목하던 당시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현재 성당 측면 한켠에 과거 성당 건물의 주춧돌이 보존돼 있다. 버스에서 내려 서만자성당을 올려다본 서울 순교자현양회 성지 안내 봉사자 이명애(소피아)씨는 “서만자성당을 보기만 해도 눈물이 나려 한다”며 “한국교회 신자들이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나 감사하다는 것을 실감한다”고 말했다.

 

서만자성당은 큰 외형에 비해 내부 벽에 걸려 있는 십자가의 길 성화 외에는 성물이라고 할 만한 것이 거의 없는 쓸쓸한 풍경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성당 바로 맞은 편으로 보이는 토굴과 신학교 건물은 브뤼기에르 주교가 서만자에서 사목할 때의 원형을 상당 부분 유지하고 있다. 

 

토굴은 중국 지방 관리가 유럽에서 온 선교사를 체포하려 하자 브뤼기에르 주교가 일시적으로 피신했던 곳이며, 신학교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그곳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서만자성당과 신학교가 지근거리에 위치해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신학교에도 그의 흔적이 남겨졌다고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신학교 뒤편으로 서만자 지역에서 사목했던 성직자 묘역도 조성돼 있다.

 

 

- 브뤼기에르 주교가 1834년 10월부터 약 1년간 머물며 사목했던 서만자성당 건너편으로 보이는 토굴. 중국 관리가 서양 선교사를 체포한다는 소식을 듣고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 토굴로 피신했다. 사진 박지순 기자




브뤼기에르 주교가 1834년 10월부터 약 1년간 머물며 사목했던 서만자에 있었던 신학교 모습. 현재는 언제 철거될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이다. 사진 박지순 기자

 

 

순례단을 안타깝게 했던 것은 외형만 겨우 남아 있는 신학교 건물이 언제 철거될지 모르는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이었다. 순례단이 서만자성당을 방문했던 날에도 신학교 건물 바로 옆에서 굴삭기가 땅을 파는 작업을 하며 모래바람을 심하게 일으키고 있었다.

 

순례단은 서만자성당에 도착할 때부터 ‘주위의 시선’이 순례단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국에서 온 단체 순례단이 서만자성당을 방문했다는 점에 예의주시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서만자에서 사목할 당시 지방 관리들에게 받은 그 시선이었을지 모른다. 순례단은 서만자를 떠나 브뤼기에르 주교가 중국에서 마지막으로 머물다 선종했던 마가자로 떠날 채비를 했다. [가톨릭신문, 2024년 4월 28일, 박지순 기자]

 

 

[특집]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님 발자취를 따라서’ 순례기 (중)


조선 선교 위해 목숨 바친 참 사제, 그 신앙 열정 가슴 깊이 새기다

 

 

- 브뤼기에르 주교 유해를 실은 기차가 1931년 9월 23일 심양역을 출발한 뒤 변문을 지나 단동으로 향할 때 이용했던 철길. 사진 박지순 기자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위원장 구요비 욥 주교)가 4월 16~21일 중국에서 진행한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님 발자취를 따라서’ 순례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중국 땅에 남긴 흔적과 그 안에 담긴 신앙 열정을 추적하는 여정이었다. 서울 순교자현양위 부위원장 원종현(야고보) 신부가 이끄는 순례단은 약 190년 전 자신을 기다리는 양 떼를 찾아 조선에 입국하려던 브뤼기에르 주교의 발자취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신앙이란 무엇인지를 깊이 깨달아 갔다. 순례단 앞에 불쑥 나타난 난관은 오히려 브뤼기에르 주교의 신앙과 영성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가는 계기가 됐다.

 

 

브뤼기에르 주교 선종지 마가자로 가기를 원했지만

 

이번 순례의 가장 중요한 목적지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중국에서 마지막으로 머물다 선종한 마가자(馬架子, 마자쯔)였다. 중국 북동부 내몽골 자치구에 속한 마가자는 한적한 농촌으로 교우촌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가자성당이 이곳에 자리한다. 서만자(西灣子, 시완쯔)에서 약 1년간 사목하던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5년 10월 7일 조선에 보다 가까운 마가자를 향해 출발한 뒤 10월 19일 도착했다.

 

그러나 마가자에 도착한 바로 다음날 선종하고 만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서만자에서 마가자로 이동하는 동안 다리가 부었다 가라앉는가 하면 동상에 걸렸고 두통에도 시달렸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결국 조선에 입국하지 못했다. 하느님께는 아마 다른 뜻이 있었던 것 같다. 

 

박해의 땅 조선 선교를 자처했던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그의 용기 있는 죽음을 접한 파리 외방 전교회 모방 신부가 1836년 1월 13일 서양 선교사로는 처음으로 조선에 입국했다. 같은 해 12월 31일 샤스탕 신부, 1837년 12월 18일 앵베르 주교가 조선 땅을 밟았다. 이들은 모두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해 1984년 성인품에 올랐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중국에서 선종했지만 조선에서 천주교 신앙을 꽃피우는 결과를 가져왔다.

 

- 브뤼기에르 주교 유해 상자가 1931년 9월 17일부터 23일까지 모셔졌던 역사적인 장소인 심양대교구 주교부 건물. 사진 박지순 기자

 

 

순례단은 마가자성당 뒷산 방향으로 걸어서 5분 거리에 조성돼 있는 브뤼기에르 주교 무덤 자리와 묘비를 찾아 4월 17일 서만자성당에서 출발할 예정이었다. 정확한 이동 경로는 17일 오후 1시 서만자에서 출발해 392km 떨어진 적봉(赤峯, 츠펑)시에 오후 6시에 도착한 뒤 현지에서 1박을 하고 18일 오전 9시 적봉에서 마가자까지 106km를 이동해 오전 11시 즈음 도착한다는 것이었다. 마가자는 적봉시 행정구역에 속해 있다.

 

적봉에서 걸려 온 한 통의 전화가 이 모든 계획을 뒤바꿔 놓았다. 현지 지방 정부가 한국 순례단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번 순례를 충실하게 진행하기 위해 원종현 신부와 서울 순교자현양위 신정주(요한) 팀장 등은 3월 13~18일 적봉교구와 마가자성당을 사전 답사하면서 뜨거운 환대를 받았고 한국 순례단에게 식사도 직접 요리해 대접하겠다는 약속까지 받은 터라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순례단은 긴급하게 대책을 논의했지만 마가자로 가는 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원 신부는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태 7,7)는 성경 말씀을 기억하자”며 “개척 과정에 있는 우리의 순례가 지속될 때 막힌 길이 열릴 것이라 믿는다”고 말했다.

 

순례단은 하북성(河北省, 허베이) 승덕(承德, 청더)으로 목적지를 바꿔 17일 오후 6시경 여장을 푼 뒤, 남은 일정을 하느님께 의탁했다.

 

- 중국 단동과 북한 신의주를 연결하는 압록강철교. 브뤼기에르 주교 유해는 압록강철교를 건너 1931년 9월 24일 오전 10시경 경성대목구 주교관에 도착했다. 압록강철교는 6·25전쟁 중 미군의 폭격을 받고 파괴돼 신의주 쪽 부분은 지금도 끊어진 채로 보존되고 있다. 사진 박지순 기자

 

 

브뤼기에르 주교 유해 이송 경로를 따라

 

순례단은 18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 승덕에서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등장하는 요하(遼河, 랴오허)를 지나 브뤼기에르 주교의 유해가 잠시 안치됐던 심양(瀋陽, 선양)에 이르는 600km 가까이를 이동했다. 하루 종일 광활한 중국 대륙을 버스를 타고 통과하는 피곤한 여정 속에서도 기도 소리와 브뤼기에르 주교의 생애를 공부하는 문답이 끊이지 않았다.

 

19일 하루 동안 심양의 역사 유적지와 박물관 등을 방문하면서 모처럼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낸 순례단은 20일 브뤼기에르 주교 유해가 모셔진 열차가 지나갔던 변문(邊門, 비엔먼)과 단동(丹東, 단둥)을 향해 버스에 몸을 실었다. 심양에서 변문까지는 160km, 변문에서 단동까지는 30km 정도 거리다. 이 경로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살아서 조선에 입국했다면 거쳐 갔을 길이다.

 

변문 표지석이 세워져 있는 곳에서 잠시 내린 순례단은 감격에 휩싸였다. 그곳은 서양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할 때, 그리고 조선 신자들이 박해자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중국을 왕래할 때 지나갔던 길목이었다. 또한 변문 표지석 바로 옆으로는 일제강점기에 경성에서 출발해 신의주를 거쳐 중국 대륙을 관통하던 철길이 있었다. 철길 위 기차를 보며 브뤼기에르 주교의 유해가 이 길을 지나는 풍경을 머릿속에 그려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버스가 단동시에 가까워질수록 순례단에는 지금은 갈 수 없는 북녘땅을 바라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 감돌았다. 단동시 외곽은 시골 장터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시내로 접어들자 고층 빌딩이 즐비했다. 드디어 낮 12시30분경 단동과 신의주를 연결하는 압록강철교와 북녘땅이 순례단의 시야에 들어오자 “아!” 하는 감탄과 탄식이 터져 나왔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그토록 밟고 싶었던 조선 땅에 살아서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선종 96년 만에, 조선교구 설정 100년 만에 유해로서 압록강 철교를 건너 경성까지 이송된 뒤 1931년 10월 15일 용산 성직자 묘지에 안장된 내력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지는 듯했다.

 

-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님 발자취를 따라서’ 순례단이 4월 21일 오전 9시 심양대교구 주교좌성당에서 주일미사를 봉헌한 뒤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심양대교구 주교좌성당 경내 주교부 건물은 브뤼기에르 주교 유해 상자가 1931년 9월 17일부터 23일까지 모셔진 역사적인 장소다. 사진 박지순 기자

 

 

순례단은 손에 잡힐 듯한 북녘땅에 갈 수 없다는 안타까움을 굽이치는 압록강 물결에 남겨 놓고 오후 4시경 버스에 다시 올라 북녘 동포들과 중국교회 신자들을 위해 기도를 바치며 심양으로 돌아왔다.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님 발자취를 따라서’ 순례 마지막 날인 4월 21일 주일에는 심양대교구 주교좌성당에서 오전 9시에 중국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했다. 주교좌성당 맞은편에 3층짜리 주교부(主敎府) 건물은 브뤼기에르 주교 유해 상자가 1931년 9월 17일 오후부터 9월 23일 심양역을 출발하기 전까지 머물렀던 역사적인 장소다. 브뤼기에르 주교 유해 상자는 심양-단동-신의주를 거쳐 9월 24일 오전 10시경 경성대목구 주교관(현 서울대교구 역사관)에 안치됐다. 이날 비로소 브뤼기에르 주교는 생전에 그토록 갈망했던 조선에서 안식을 취하게 된 것이다.

 

순례를 마친 서울 순교자현양회 이래은(데레사) 부회장은 “브뤼기에르 주교님이야말로 조선이라는 나라가 알려져 있지 않던 시대에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던 참 사제”라며 “자신을 기다리는 신자들을 찾아 나서는 용기와 열정이 오늘의 사제들에게 필요하다”고 소회를 밝혔다. [가톨릭신문, 2024년 5월 5일, 박지순 기자]

 

 

[특집]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님 발자취를 따라서’ 순례기 (하)


한국교회 서막 열었던 역사적 현장에서 신앙의 연대 확인하다

 

 

- 한국교회 첫 영세자 이승훈(베드로)이 1784년 예수회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받은 중국 베이징 북당 전경. 현재의 북당은 처음 지어진 곳에서 옮겨 지은 것이다. 사진 박지순 기자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님 발자취를 따라서’ 순례단은 브뤼기에르 주교가 자신의 사목지인 조선에 입국하기 위해 거쳐 갔던 중국 대륙 곳곳을 순례하며 한국교회 신앙의 뿌리와 더불어 ‘신앙의 연대성’을 깊이 묵상할 수 있었다. 신앙이란 시간적, 공간적으로 과거와 현재가 연대하면서 시작되고 성장한다는 사실을 브뤼기에르 주교의 발자취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초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되기까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한국교회 첫 영세자 이승훈(베드로, 1756~1801)이 나오고, 브뤼기에르 주교가 끝내 살아서는 조선에 들어오지 못했지만 그의 유해가 지나갔던 중국 변문(邊門, 비엔먼)은 한국교회 역사를 논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상징적인 장소다. 순례단은 이승훈이 세례받았던 중국 북당(北堂), 변문을 찾아 브뤼기에르 주교가 초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되기 전후의 역사를 추적했다.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님 발자취를 따라서’ 순례단이 4월 16일 중국 베이징 북당에서 미사를 봉헌한 뒤 북당 봉사자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박지순 기자

 

 

북당에서 찾은 한국교회의 뿌리

 

순례단은 4월 16일 중국 베이징공항에 도착한 첫날 한국교회 첫 영세자 이승훈이 예수회 선교사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받은 북당을 찾았다. 순례단은 북당에 앞서 베이징의 대표적 천주교 유적 중 한 곳인 남당(南堂)을 먼저 방문했다. 이승훈도 1783년 말에 베이징에 간 뒤 남당에서도 천주교를 접했기 때문에 순례단은 남당 순례에 큰 의미를 두었다. 

 

그러나 방문 당시 남당은 보수 공사 중에 있어 성당 마당으로 통하는 출입문이 잠겨 있었다. 다행히 남당을 관리하는 중국인 신자가 한국 순례단을 배려해 외부 출입문을 열어 주면서 성당 마당까지는 들어갈 수 있었다. 성당 내부 공사 관계로 성당 안까지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웅장하고 아름다운 자태와 유구한 역사를 지닌 남당을 두 눈으로 본다는 사실만으로 순례단은 큰 감동을 받았다.

 

예수회 마테오 리치 신부가 1605년에 지은 남당은 1775년에 불탔다가 다음 해 다시 지어져 현존하는 중국 천주교 성당 가운데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니며, 중국을 방문하는 조선 사신들이 반드시 들르는 명소였다.

 

-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님 발자취를 따라서’ 순례단이 4월 16일 중국 베이징 북당에서 원종현 신부 주례로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북당은 한국교회 첫 영세자 이승훈(베드로)이 세례받은 역사적인 장소다. 사진 박지순 기자

 

남당을 뒤로 하고 북당으로 향한 순례단은 이승훈이 세례받은 바로 그곳을 순례한다는 생각에 도착 전부터 일찌감치 감동을 느끼기 시작했다. 비록 1703년 12월 처음 봉헌된 북당이 19세기 후반, 천주교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당대의 권력자 서태후의 명으로 현재 위치로 이전했던 내력에서 이승훈이 세례받은 북당이 지금의 북당과 동일성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순례단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장소와 외형은 달라졌을지라도 그 안에 담긴 상징적 역사성은 달라질 수 없기 때문이다.

 

순례단을 인솔한 원종현 신부(야고보·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 부위원장)는 “이곳에서 우리 신앙의 뿌리와 연대성, 새 하늘과 새 땅의 의미를 찾자”고 말했다. 서울 순교자현양회 조화수(바오로) 회장 또한 “북당에 들어섰을 때, 이승훈이 세례받던 장면을 상상하면서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무한한 감격이 밀려왔다”고 밝혔다.

 

순례단이 북당 방문을 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평일에는 오전에만 미사가 봉헌되는 북당에서 오후 4시30분경부터 원 신부 주례로 미사를 봉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북당 공동체가 한국 순례단을 환대해 주었다.

 

- 한국교회 첫 영세자 이승훈(베드로)이 세례받은 역사적인 장소인 중국 베이징 북당 제대 뒤에 설치된 복자 주문모(야고보) 신부,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 하느님의 종 이승훈의 유리화. 사진 박지순 기자

 

 

원 신부는 강론에서 “이승훈 베드로가 여기 북당에서 세례받은 뒤 조선으로 돌아가 서울 수표교 이벽(요한 세례자)의 집에서 신앙 공동체를 형성한 1784년이 한국교회 신앙 원년이 된다”며 “뿌리 없이 나오는 신앙은 없다”고 강조했다. 원 신부는 1784년 이승훈의 세례, 1831년 초대 조선대목구장으로 브뤼기에르 주교 임명, 1962년 한국교회에 정식 교계제도 성립이 서로 별개가 아닌 역사적 연속성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순례단은 보편지향기도에서 브뤼기에르 주교가 하루라도 빨리 시복시성되기를 기원하고, 그의 강한 믿음을 본받겠다고 다짐했다.

 

미사 후 순례단은 제대 뒤쪽 공간에 설치돼 있는 복자 주문모(야고보) 신부,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 하느님의 종 이승훈의 유리화를 보며 또 한 번 시공을 초월한 신앙의 연대성을 발견하고 감격했다. 가톨릭 성직자로는 처음으로 1795년 1월 조선에 입국한 중국인 주문모 신부, 한국인 첫 사제 성 김대건 신부, 한국교회 첫 영세자 이승훈이 중국교회에서도 기념되고 있었다.

 

-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님 발자취를 따라서’ 순례단이 4월 20일 변문 새 표지석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박지순 기자

 

초기 한국교회의 관문 ‘변문’

 

순례단이 한국교회사의 관문이며 통로인 변문을 찾은 것은 4월 20일 오전이었다.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단동(丹東, 단둥)과 북한 신의주로 이어지는 철길 옆에 위치한 변문 표지석이 순례단을 맞아 주었다. ‘변문진’(邊門鎭)이라 새겨진 표지석은 오랜 세월이 흘러 모서리가 마모돼 있었다. 옛 표지석 바로 가까이에는 중국 행정당국에서 최근에 큰 바위에 붉은 글씨로 변문진을 새겨 설치한 것으로 보이는 새 표지석도 볼 수 있었다.

 

순례단은 초창기 한국교회를 이끌어 갔던 인물들이 중국에서 조선으로, 조선에서 중국으로 목숨까지 걸고 변문으로 드나들었던 역사를 상기하며 변문 표지석을 쓰다듬고 안아 보았다. 이승훈이 변문을 거쳐 중국 북당에서 처음 세례를 받고 조선으로 돌아왔고, 주문모 신부가 변문을 지나 조선에 입국했다. 김대건, 최양업(토마스), 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1836년 12월 마카오 유학길을 떠날 때 변문을 지나갔고, 김대건은 1844년 12월 부제품을 받고 1845년 1월 변문에서 조선 신자들을 만나 한양에 들어왔다. 

 

가경자 최양업 신부도 1849년 4월 사제품을 받기 전후에 여러 차례 변문을 통한 조선 입국을 시도한 끝에 결국 조선에 들어와 신자들을 돌보다 ‘땀의 순교자’가 됐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1831년에 초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되는 과정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변문을 드나들며 조선의 신앙공동체 상황을 전했던 많은 조선 신자들의 노고가 바탕에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순례단은 이번 순례에 동행한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 김기혁(요한 레오나르도) 순교자현양위원장으로부터 중국에서 변문으로 불리던 장소가 조선에서는 ‘책문’(柵門), 현지인들에게는 ‘가자문’(架子門)으로 불렸던 사실과 변문의 역사, 지리적 의미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이를 통해 변문이 교회사적으로는 물론 한국 근대사에서도 새 역사를 열어가는 장소였음을 다시금 알 수 있었다. 서울 순교자현양회 최만기(바오로) 부회장은 “한국교회 초창기 역사가 이뤄졌던 가장 중요한 장소 중 한 곳인 변문을 순례하며, 목숨까지 바쳤던 우리 신앙 선조들의 헌신에 큰 감사를 드렸다”고 말했다. [가톨릭신문, 2024년 5월 12일, 박지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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