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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몬트리올: 그루터기에서 솟아나는 새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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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6-01 ㅣ No.175

[해외 한인 공동체 소식] 캐나다 몬트리올 : 그루터기에서 솟아나는 새싹

 

 

1974년 11월 거리에 흰 눈이 덮인 캐나다 퀘벡 주의 몬트리올에 도착했다. 새로운 나라에서 새롭게 살고 싶은 마음으로, 캐나다에서 유일하게 영어와 불어가 공용어인 이곳으로 이민을 온 것이다. 한인 인구는 고작해야 2,000명을 웃돌던 시기였다.

 

이곳에 고등학교 동창들이 제법 있었는데, 천주교 신자도 여럿 되었다. 또 이미 정착하여 안정된 생활을 하던 친구도 있었는데, 이 친구를 중심으로 천주교 신자 모임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신우회’ 출발과 교구 공식 인정

 

20명 정도였지만 우리는 다달이 모이면서 명칭도 ‘신우회’라고 정했다. 우리는 이곳저곳 성당을 돌아다니며 미사 참례를 하였고, 미사 후에는 우리끼리 모임을 갖곤 했다.

 

주님의 은총으로 신우회는 점점 자랐고, 우리만의 미사 공간도 얻게 되었다. 안나 수녀회에서 운영하던 대학 강당을 주일미사 때 빌려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를 지도해 주시는 신부님도 모시게 되었다.

 

신우회를 시작한 지 3년 만인 1979년, 우리는 이곳 몬트리올 교구로부터 인정을 받고 ‘Mission’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정식 본당이 아닌, 이민자들을 위한 공동체이기 때문에 이 이름이 부여된 것이고, 지금도 우리 공동체는 ‘Mission Catholic of Korean Sts. Martyrs’이다.

 

그 당시 우리를 돌보아주시던 장 펠리시에(Jean Pellitier) 신부님을 아이들은 무척 따랐지만, 통역 없이는 의사소통이 어려웠던 어른 신자들은 한국 사제 영입을 간절히 바랐다.

 

장 신부님이 계시는 동안 영어를 잘 하는 신자가 강론 통역을 해야 했고, 예비신자 교리 시간에도 통역이 필요하였다. 신자들의 영적 사정에 많은 정성을 기울인 신부님은 고해소에서도 통역을 이용하셨다.

 

물론, 고해소 통역은 아주 엄격한 규정을 따라야 했다. 자주 범하는 십계명 죄를 번호로 적어놓고 신자가 한국어로 죄를 고백한 뒤에 번호를 가리키면, 신부님은 보속항목을 나열하고 번호를 붙여 신자에게 번호를 가리키며 몇 번 하라는 식이었다. 나는 몬트리올 정부의 공인 통역사로서 성당에서도 가끔 통역 기회가 있었는데, 고백자에게 보속으로 “무슨 기도를 몇 번 하시랍니다.”라고 통역한 적도 있다.

 

 

한국인 신부님들과 함께

 

한국인 사제 영입에 힘을 기울인 결과, 처음에는 대구대교구, 그다음에는 부산교구에서 신부님이 오셨다. 하지만, 신자 수는 적고 재정적으로도 열악하여 큰 불편을 겪으셨다. 현지 신부님들과 함께 쓰는 사제관에서 서로 다른 음식문화에 적응하기 힘들었고, 성당 운영 면에서도 한국식 운영과 현지 교회 운영법의 차이로 어려움이 생겨났다.

 

그런데 이곳 몬트리올 교구에 불어를 구사할 수 있는 한국계 사제가 계셨으니, 바로 이민사목의 거목이셨던 고종옥 마태오 신부님이다.

 

고 신부님은 1963년 프랑스에서 사제품을 받으셨는데, 몬트리올 교구 소속 사제로서 이 지역에서 본당사목을 하신 적이 있었고, 북한 선교 그리고 미국 산호세에서도 사목을 하셨다. 고 신부님은 몬트리올 교구의 명을 받고 복귀하여 8년 동안(1991-1998년) 우리 공동체를 훌륭하게 돌보셨다.

 

1998년 고 마태오 신부님은 현 주임사제이신 성기택 베드로 신부님에게 한인 공동체의 사목을 넘기고 은퇴하셨다. 나중에 고 신부님은 퀘벡의 양로원에 잠시 머무르시다가, 친척이 있는 토론토로 가셔서 2004년 말에 선종하셨다.

 

 

아름다운 성전에서 주님을 찬양하기까지

 

한인 인구가 차츰 늘어나면서 신자 수도 많이 늘어나 현재 등록 신자 가구는 250가구에 달한다. 다른 한인 교회와 마찬가지로 몬트리올 한인 신자 공동체도 집회 장소 때문에 설움을 겪었다. 이 성당 저 성당으로 이사를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티칸 공의회 이후 이 나라에도 자유의 물결이 흐르면서 일부 성직자와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공의회 이전에는 성당을 꽉 채웠던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면서 이곳저곳 성당들이 문을 닫게 되었다.

 

교구에서는 점차 교세가 커가는 한인교회의 모습을 보고, 비어있는 문화재 성당을 무상으로 쓸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이는 교세 확장이라는 점 외에도 불어를 유창히 구사하는 성기택 신부님의 역할이 컸으리라 짐작된다.

 

우리가 무상으로 쓰게 된 성당은 몬트리올 시내 서쪽에 자리 잡고 있는데, 문화재로 지정된 만큼 그 예술적 가치는 보는 이의 찬탄을 자아낸다. 이름은 성녀 구네군다 성당인데, 그 웅장함과 아름다움으로 ‘서쪽의 주교좌성당’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이다(사진).

 

1910년에 건축된 이 성당에 발을 들여놓으면, 기둥이 없이 한 공간을 이루는 아늑한 내부, 빨간 양탄자가 깔린 위엄 있는 제단, 뒤쪽에 구네군다 성녀의 순결을 묘사한 아름다운 그림, 또 천정에는 천국에서 큰 상을 받는 성녀의 그림이 있고, 이 모든 것이 사방의 색유리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받으며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다.

 

 

여러 가지 활동과 행사

 

해마다 교구에서는 각 성당의 영세자들을 주교좌성당으로 초대하여 함께 살게 됨을 환영하는 자리를 마련한다. 그때마다 우리 한인 성당의 영세자 수는 늘 상위권이다. 캐나다 사람들이 성당을 많이 떠난 것에 견주어 교세가 늘어가는 우리 한인 성당이 교구로부터 많은 관심과 특별한 혜택을 받기도 한다.

 

주임신부님이 영어와 불어를 하시므로 가끔 이색적인 행사도 열린다. 이곳에 사는 캐나다인 한국전쟁 참전용사(몬트리올 55unit)와 유대가 돈독하신 성기택 신부님 덕분에 2010년 10월 추수감사절에 그들은 노구를 이끌고 우리 성당에 찾아와 감사미사를 드렸으며, 이렇게 한인 신자들과 관계를 돈독히 하고 있다.

 

성 신부님은 “병들고 소외되고 멀어진 양들을 찾아 돌보는 것”이 사목의 우선이며 그 무엇보다도 공동체의 일치가 중요하다고 강조하신다. 신자들도 성당 행사에 적극 참여하여, 몬트리올 한인회 행사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8·15 광복절 기념 한인 체육대회에서 4년 연속 종합우승을 해오고 있다.

 

 

그루터기에서 새싹들이

 

우리 공동체가 이만큼 성장하기까지 신자들의 많은 희생과 노고가 있었다. 1979년 교구의 정식 인정을 받기까지, 또 그 뒤로 허다한 파동을 거치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평범한 신자들, 평생 동안 성가대를 지켜온 지휘자와 성가대원들이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동고동락한 우리 공동체의 귀한 증인들이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오늘 우리는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하느님을 찬미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초기 공동체의 주축이었던 신자들은 대부분 자녀들이 있는 곳으로 이주하였거나, 더러는 하느님 품으로 돌아갔다. 몇 남지 않은 옛 교우들을 대하면 마치 거목의 그루터기 같은 장한 모습으로 비쳐진다. 이 그루터기에서 나온 새싹들이 자라나 성소자가 많이 배출되고 교회를 이끌어가는 날을 고대해 본다.

 

* 최춘희 아가타 - 캐나다 몬트리올 한국순교성인성당 신자. 1976-2010년 캐나다 정부 공인 번역 통역사로 일하였으며, 1991-1999년 몬트리올 교구 사목위원으로 봉사하였다.

 

[경향잡지, 2011년 5월호, 최춘희 아가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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