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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47: 대 탁발 수도회의 탄생 - 철저한 청빈 순명으로 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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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1-04 ㅣ No.238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47) 대 탁발 수도회의 탄생 - 철저한 청빈 순명으로 헌신

 

 

- 무덤위 대성당 :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수도원 대성당. 이 수도원은 성인의 무덤 위에 건립된 것으로 성당과 부속건물이 아씨시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세속 권력의 부당한 간섭에 맞서 싸워 온 교회는 이 투쟁의 과정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면서 보다 부유해지고 더 강력해졌다. 그러나 교권의 독립을 이룩한 교회는 과거 권력에 휘둘린 아픈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기존 체제와 재산관리에 몰두함으로써 스스로 권력화 세속화하는 자기 모순에 빠지기도 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생겨난 것이 청빈운동으로 일컬어지는 12세기의 새로운 종교운동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종교운동들은 고유 단체로 결성돼 그리스도교를 반대하는 종파나 새로운 수도회로 발전하기도 했다.

 

교회의 책임자들은 새로 생겨나는 수도회의 수가 너무 많아서 정통 신앙의 유지에 골머리를 싸매야 했다. 그래서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는 새로운 수도회를 더 이상 설립할 수 없도록 결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3세기 초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라는 대 탁발 수도회가 창립된다. 이는 엄격한 두 수도회의 수덕적 경향을 반증하는 것이며 이들의 삶이 시대적 요구에 일치하고 있음에 대한 보증이었다.

 

종교재판이라고 불리는 이단 심문제도 도입이 정통신앙 유지를 위한 부정적 반응이었다면, 복음적 청빈에 의한 탁발 수도회의 인정은 긍정적인 대답이었다.

 

 

특징과 영향

 

탁발수도회는 종래의 수도회와는 몇 가지 점에서 확연히 구분된다. 첫째는 수도자 개인뿐 아니라 수도원 자체도 엄격한 가난으로 의무 지워졌다. 둘째는 설교 등을 위해서 순회했으므로 수도자가 일정한 수도원에 속했던 정주의 의무가 사라지고 수도원을 자유롭게 왕래했다. 셋째는 이단자들의 개종과 신자들에게 복음정신을 가르치기 위해 돌아다녔으므로 지난 날의 수도회와는 달리 도시 속에서, 세속 안에서 활동했다. 넷째 이들은 자신들의 목표를 위해 형제들의 단결을 중요시했으므로 총장을 우두머리로 한 강력한 중앙집권제 형태를 취했다.

 

탁발수도회는 당시 화두처럼 대두된 「복음적 가난」의 생활이 부와 세속적 권력의 정점에 서있던 당시 교회 안에서도 실현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교회에 대한 철저한 순명정신이 탁발 수도회의 정신이었다. 탁발수도회는 교회 안에서 사목에 헌신했고 이단과 투쟁했으며 이를 위해 교회학문영역에서도 훌륭한 공헌을 했다. 그러나 이후 성장을 거듭한 탁발수도회는 교황으로부터 받은 수많은 특전과 주교 재치권에서의 면제(Exemtio), 강력해진 수도회의 사목적 관여 등은 본당 성직자와 자주 충돌을 빚기도 했다.

 

 

프란치스코와 도미니코

 

중세에 생긴 탁발 수도회는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를 위시해 가르멜회와 아우구스티노 은수사회 등이 있고 이중 앞의 두 수도회를 2대 탁발수도회라고 한다.

 

프란치스코의 초기 삶은 이단으로 빠진 발두스의 그것과 닮아있다.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귀족이 될 수 있는 기사가 되기 위해 전쟁터에 나섰고 시련을 통한 회개의 과정을 거쳐 나환우들의 불쌍한 삶 속에 계신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철저히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했다. 성직자 없이 평화의 복음을 선포했고 성직자와 교회의 판단에 자신의 삶을 맡기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교회의 내적 삶에 봉사하는 것이 자신의 과업이란 것을 알아들었다. 유언에 『내가 해야 할 일은 복음을 따라 살아가는 일이었고 그것을 알려주신 분은 주님이셨습니다. 나는 이것을 단순하게 기록했고 기록한 것을 교황님께서 인준해주셨습니다』라고 밝힘으로써 교도권의 권위를 존중했고 분열이 일어나는 것을 피했다.

 

프란치스코는 어떤 목표를 설정하고 추구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고자 했을 뿐이었고 이 과정에서 같은 길을 가고자하는 형제들이 생겨났다. 구체적인 계획이나 회칙이 없었다. 성인의 인격 자체가 공동체를 형성하는 힘이었다. 형제들이 불어나자 프란치스코는 1209년 경 자신들이 하는 일을 인준받고자 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프란치스코가 내민 초기 회칙을 인간의 힘으로 지킬 수 없다고 하여 승인을 주저하다 그들의 청빈생활과 설교를 허락했다.

 

복음적 청빈으로 프란치스코가 추구하고자 한 것은 평화였다. 십자군 전쟁 때에도 직접 이집트 술탄을 찾아가 평화를 심으려 했다. 이러한 성인의 노력은 적대세력인 이슬람에도 인정되어 현지 예루살렘 성지의 가톨릭측 소유를 대부분 프란치스코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평화를 추구하는 성인의 정신은 이단과의 싸움에서도 논쟁보다는 삶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다.

 

그리스도의 강생을 부정하는 카타리파의 이단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강생하셨음을 보여주기 위해 1223년 성탄절에 구유를 만들어 전시했다. 물질세계 거부에 대해서는 찬미의 노래인 태양의 찬가를 지었다. 이렇게 복음적 청빈 생활로 평화를 추구한 프란치스코의 삶에 대한 보증으로 하느님은 1224년 성인에게 그리스도의 오상을 새겨주셨다.

 

도미니코는 스페인 칼렐루에가에서 신심깊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1828년 복자로 시복됐고 성인의 두 형제도 사제였으며 삼촌은 주교좌 성당의 주임신부였다. 또한 성인이 태어난 카스틸리엔 지역은 이슬람의 침입이 있었던 곳으로 100년전부터 이들을 몰아내는 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나가는 신앙의 활력이 넘치던 곳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자란 성인은 교회의 내적 쇄신과 외적 재건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됐다.

 

그는 교계제도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24세에 서품된 도미니코는 33살에 오스마 주교좌 성당의 참사회원으로 주교인 디에고와 함께 외교사절로 프랑스에 갔다가 랑그도크 지방에서 알비파와 싸우고 있는 시토회원들을 만나게 된다. 그는 여기서 수도자들이 항상 알비파에 지는 이유를 발견했다. 알비파의 교역자들은 엄격한 금욕생활을 하며 청빈한 삶을 사는데 비해 시토회원들은 그들의 공식 책무에 따르는 온갖 혜택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청빈의 삶이 가장 효과적인 도구임을 깨달았다. 청빈한 삶을 영위하며 해박한 신학지식을 바탕으로 이단자들에게 설교했다. 성인은 이단자들과 토론을 하면서 신앙상의 여러 폐단들이 교리 지식의 결핍에서 온 것임을 깨닫고 설교와 종교교육을 절감했다. 이에 툴루즈 주교의 후원을 받아 새로운 설교 수도회를 설립했다.

 

[가톨릭신문, 2002년 4월 21일, 김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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