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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현대 가톨릭 신학의 흐름20: 가톨릭 철학의 흐름과 동향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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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8-18 ㅣ No.183

[신앙의 해 · 창간 86주년 기획 - 현대 가톨릭 신학의 흐름] (20) 가톨릭 철학의 흐름과 동향 4 : 과학기술 발전의 빛과 그림자에 대한 비판적 성찰

기술 덕에 운명 · 자연도 장악할 수 있다는 자만


우리는 현재 과학적 지식의 축적과 기술의 발전을 통해 이룩한 문명세계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회칙 ‘신앙과 이성’(106항)도 “과학자들의 탐구는 우주 전체와 그 풍부한 유기적·무기적 구성 부분들, 그리고 그 복잡한 원자적·분자적 구조들에 관해서 늘 더욱 풍부한 지식을 제공하고 있다”며 과학이 이룬 성과에 대해서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그리스도교가 항상 과학의 탐구를 방해하거나 단죄해 왔다’라는 판단이 편견일 수도 있음을 보여 준다. 오히려 13세기에 서양의 대학들이 설립될 때에는 교회야말로 다양한 분야의 학문연구를 격려하고 지원해 왔던 주체였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비판적인 철학자나 사상가들이 근대 서구의 과학을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각종 환경 문제와 생명 문제를 일으킨 주범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뉴턴의 고전역학 등으로부터 출발한 근대 과학에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과학과 기술을 동일시하며 기술의 발전을 절대시한 후대 사람들의 인식이 문제를 일으킨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과학 연구 자체와 ‘과학주의’의 구별

가톨릭교회가 자연과학에 대한 의견을 표명할 때도 정당한 자연과학의 연구와 이를 넘어서는 부당한 주장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이미 13세기에 신학과 철학의 고유 영역을 구분하고, 세속 학문의 독립성을 인정했던 토마스 아퀴나스를 따른다면, 교회는 자연과학의 독립성을 결코 위협하거나 간섭하려 해서는 안 된다.

정확히 말해서, 가톨릭 교회가 경계하는 것은 자연과학의 연구 자체가 아니라 소위 ‘과학주의(scientismus)’로서, 이것은 실증 과학의 지식과는 다른 형태 지식들의 타당성을 부정하는 사상을 말한다.

불행하게도 과학주의는 윤리적인 가치들도 단순한 감정의 산물로 간주하고, 인생의 의미 물음과 관련된 모든 것을 비합리적인 환상으로 치부해 버린다. 과학적 탐구와 현대 기술의 눈부신 성공이 이런 과학주의적 성향을 부추겼다. 그렇지만 과학주의의 주장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종종 피상적인 유비에 바탕을 두고 주장을 펼치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논증된 과학의 결과라고 볼 수 없는 경우가 나타난다. 이러한 과학주의자들은 개별과학의 “연구 결과에서 정당하게 끌어낼 수 있는 결론을 훨씬 벗어나, 인간 자유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이를 부정”(‘진리의 광채’ 33항)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결정론적인 과학주의는 윤리적 판단을 통해 제공되는 비판을 위한 여백을 남겨 놓지 않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과학적으로 가능한 것은 무엇이든지 다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더욱이 인간 이성에 대한 과도한 신뢰가 이미 포스트모더니즘 등의 현대철학에 의해서 비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현대인들은 “과학과 기술의 정복 덕분에 우주의 조형자(demiurgus)인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자기 운명에 대하여 완전히 장악할 수 있으리라는 착각을 계속해서 품고 있다”(‘신앙과 이성’ 91항). 과학주의가 빚어내는 최악의 결과는 일부 과학자들이 윤리적 가치에는 아무 관심도 기울이지 않으면서, “시장 경제의 논리에 따라, 자연과 심지어 인간 존재자에 대해서까지도 거의 신적인 능력을 행사하려는 유혹에 굴복”(‘신앙과 이성’ 46항)할 때 빚어진다.


인간에 대한 상이한 이해 : 세포의 집합체 또는 존엄한 인격

추상적으로만 들릴 수 있는 이러한 우려가 21세기에 들어와 가장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생명 윤리’ 관련 분야에서 현실화되고 있다. 최근 생명공학의 발전으로 난치병의 치료와 인간의 건강한 삶과 복지를 향한 연구는 엄청난 성과를 거두고 있다.

물론 고통을 받는 환자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신약을 개발하고 치료법을 찾기 위해 연구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반드시 성찰해야 할 것은 이러한 연구가 ‘어떤 전제에서부터 출발하며’, 또한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하는 점이다.

만일 과학자들이 인간을 단지 ‘DNA’ 유전자나 정교한 세포의 집합체로만 본다면, 과학기술의 주체인 인간은 이제 생명공학의 대상으로만 취급될 위험이 생겨난다. 더욱이 이것이 극단적인 실용주의, 더 나아가 시장경제의 실리만을 추구하는 경향과 결합될 때, 인간생명의 가치는 극도로 위협받게 될 것이다. 인간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시작된 연구가 인간 초기의 생명을 박탈하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생명들을 죽이기 위해 양산하는 일들이 벌어진다면 이는 이미 연구의 목적과도 모순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위험성을 지적하는 윤리적 판단의 근거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많은 생명 윤리학자들은 인간 존엄성의 근거로 칸트의 ‘인격성’ 개념에 의존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인격성의 근거가 되는 인간 생명 그 자체는 근본적인 가치로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적 가치가 될 수 없고, 어느 사회에서나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불가침성을 가지며 결코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러한 ‘인격성’에 대한 강조는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보존하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기에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렇지만 인간이 지닌 보편적인 이성과 초월성 자체에만 근거를 두는 칸트보다 더욱 깊이 있는 인격에 대한 성찰이 그리스도교의 전통 안에서 발전되었다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격(persona)’ 개념의 정의 중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것은 ‘이성적 본성을 지닌 개별적 실체’라는 보에티우스(480~524)의 정의이다.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는 보에티우스의 정의를 수용하면서도 이러한 수정 노력을 집대성하여 ‘인격’ 개념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토마스는 칸트가 강조했던 보편적인 ‘이성적 본성’을 넘어서서 ‘개별적 실체’ 개념으로부터 개별 인격이 지닌 고유성과 대체불가능성을 부각시켰고, 보에티우스의 정의가 표현하지 못한 인간의 본성적인 ‘관계성’을 이웃 인간과 창조주 신에게까지 연결시켰다. 그는 이를 통해 ‘이성성’, ‘개별성’, ‘관계성’과 ‘초월성’ 등 모든 특성을 포괄하는 ‘완결된 전체’로서의 인격이 지닌 근본적인 ‘존엄성’을 규명했던 것이다.

이렇게 포괄적인 인격 개념을 토대로 가톨릭 교회는 “모든 무고한 인간 존재가 지닌 생명에 대한 권리는 천부적인 것으로 인간의 생명은 질적으로 구분되어 보호받아야 하며 폭력의 희생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여러 차례 천명해 왔다.(‘인간의 존엄’, ‘생명의 복음’, ‘인공유산 반대 선언문’ 등)

독일 철학자 슈페만은 이러한 가르침에 따라, 인간 배아 대상 연구의 경제적 효용성을 주장하는 의견에 대해서는 ‘도덕적 종말’이라고 강하게 비판하면서, 연구의 자유라는 미명 하에 인간 배아의 생명을 해치는 연구 방식에 강하게 반대했다.


과학 시대에 필요한 가톨릭 철학의 역할

우리는 생명 공학의 예를 통해, 인간에게 자유를 주기 위한 기술에 오히려 인간이 종속되는 결과를 빚고 말 것이라는 우려를 체감할 수 있다. 이미 찰리 채플린이 주연했던 ‘모던 타임즈’라는 영화에 나타난 바와 같이 기술 발전에 따라 하나의 부품처럼 취급되게 된 인간의 비참한 현실이 눈 앞에 다가와 있는 것이다.

이런 현실 앞에서 ‘신앙과 이성’(81항)은 가톨릭 철학자들에게 “삶의 긍극적이고 보편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그 지혜적 차원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렇게 될 때 철학이 “과학의 여러 영역들의 토대와 한계들을 규정하는 결정적인 비판적 요인이 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궁극적인 목적과 의미로 수렴”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가톨릭 철학자들은 과학주의와 구별되는 정당한 과학의 연구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이들이 지니고 있는 전제들 중에서 자칫 과학주의로 흐를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 자연과학자들이 정당한 방법으로 자유롭게 탐구할 수 있는 구체적인 윤리 지침의 마련에도 함께 노력해야 한다. 이런 도움을 통해 자연과학자들도 “진리 탐구가, 그것이 세계나 인간이라는 유한한 실재에 관심을 기울일 때조차도, 결코 끝나는 법이 없고, 언제나 직접적인 연구 대상을 훨씬 뛰어넘는 어떤 것을 가리키며, 신비를 향해 출구를 여는 질문들을 던진다”(‘신앙과 이성’ 106항)라는 지혜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현대사회에 들어서며 인간이 자연을 수탈해 온 것에 대해 반성하는 생태주의가 많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런 경향의 출발점인 과학주의 비판에는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물질중심주의적으로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단순히 양적인 차이로 취급하려는 일부 학자들의 성찰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못한다.

과학기술의 남용이 빚어낸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단순히 인간과 자연 사물을 동일시하는 것만이 최선책은 아니다.

오히려 떼이야르 드 샤르댕의 ‘인간은 전체 우주 진화의 화살촉’이라는 표현처럼, 자유와 책임이 어우러진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요구된다. 근대 이후에 나타난 신을 배제하고 자연 위에 군림하는 인간 중심주의가 아니라, 세계의 의미를 파악하며 자신이 자유롭게 결단함으로써 선택한 일들에 책임질 수 있는 인간관이 필요하다. 이러한 ‘새로운 인간 이해’를 통해서만 인간의 그릇된 선택으로 신음하고 있는 자연의 아우성을 경청하고, 스스로의 책임을 느끼고 반성함으로써 창조 질서를 회복할 수 있는 새로운 힘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 박승찬 교수는 서울대학교 식품공학과와 가톨릭대학교 신학부를 졸업한 후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중세철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00년부터 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현재 한국중세철학회 회장, 한국가톨릭철학회 부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3년 8월 18일, 박승찬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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