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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ㅣ복음화

아레오파고스에서 얻는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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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9-24 ㅣ No.337

[세상 속의 교회읽기] 아레오파고스에서 얻는 메시지

 

 

성 바오로는 선교 활동 여정 중에 아테네의 아레오파고스를 찾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리스인들에게 죽은 이의 부활에 대해 선포했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은 이 이야기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는지 크게 호응하지 않았다(사도 17,16-34 참조). 그럼에도 아레오파고스 사건은 우리에게 큰 교훈과 영감을 준다. 이곳에서 사도 바오로는 다른 종교, 다른 사상, 다른 문화와 더불어 열린 마음으로 대화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때 바오로는 상대방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자세로 토론에 임했다. 그만큼 상대방을 많이, 그리고 깊이 알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로써 바오로는 ‘이방인의 사도’답게 대화를 향한 의지를 보여 주었다.

 

7월 4일을 독립기념일로 지내는 미국은 현실적으로 우리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나라다. 그리고 우리는 미국을 꽤 친숙한 나라, 잘 아는 나라로 여긴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 나라에 대해서 피상적으로 알거나 제대로 알지 못한다. 특히나 전 인구의 절반 이상이 개신교 신자인 미국 사회에서 상대적 소수(25%)인 가톨릭교회와 신자들이 살아온 이야기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다. 개신교도들이 먼저 정착하여 자리를 잡고 살던 땅에 늦게 들어간 가톨릭 신자들은 어떻게 자리 잡고 적응하며 살았을까? 혹시 그들에게 사도 바오로의 모범이 혹시 어떤 영감으로 작용하지는 않았을까?

 

 

개신교도들과 가톨릭 신자들의 대립과 배척

 

16세기 초에 유럽에서 소위 ‘종교 개혁’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유럽 사람들이 ‘신대륙’인 미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17세기 초에는 영국의 많은 청교도들이 종교적인 탄압을 피해 미국 동부로 건너왔고, 이들은 플리머스와 제임스타운 등지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청교도들만큼 많지는 않지만 가톨릭 신자들도 미국을 찾았다. 그들은 역경과 탄압 속에서 열심히 노력하여 메릴랜드에 자리 잡았다.

 

개신교도들은 자기들이 정착하여 개발한 플리머스와 제임스타운 같은 도시들이 개신교 지역임을 대놓고 표방하였다(이렇게 편협하기로는 유럽에서 노골적으로 가톨릭 지역임을 표방한 스페인과 프랑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가톨릭교회와 신자들을 배타적으로 대했다. 1689년에는 가톨릭 신자들이 유일하게 건설한 메릴랜드를 강탈하여 성당들을 모두 빼앗고 가톨릭 신앙을 금지했다. 개신교도들과 가톨릭 신자들 사이의 대립과 배척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보여 주는 일화가 있다. 개신교도로서 미국의 제3대 대통령을 지낸 토머스 제퍼슨은 독립선언서에 영국 왕이 가톨릭 신자들을 관대하게 대했다는 불만을 집어넣었고, 1776년에 미국이 영국에 맞서 독립운동을 전개했을 때 가톨릭 성직자들은 대부분 이에 반대했다고 한다.

 

또한 개신교도들은 인디언(원주민)들을 ‘악마의 자식’이라고 불렀다(이 점에서는 가톨릭 신자들도 다르지 않았다. 다만, 개신교도들과는 달리 가톨릭 신자들은 원주민들을 없애려고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복음화할 수 있다고 믿었고, 또 복음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에 개신교도들의 도시에서는 인디언들에게 납치된 초기 청교도 여성에 대한 이야기 따위가 교묘하게 떠돌았는데, 이는 개신교 도시의 주민들이 성폭행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또한 가톨릭으로 개종할지 모른다는 우려를 경계한 이야기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개신교도들과 가톨릭 신자들이 배타적이지는 않았다. 일부 가톨릭 신자들은 독립운동에 가담했고, 당시 볼티모어 교구 대주교의 조카(찰스 캐럴)는 독립선언서에 서명까지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여러 주(州) 정부들이 친(親)개신교 노선을 폐지하였고, 이에 따라 가톨릭 신자들은 새로운 권리들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개신교도들은 가톨릭 신자들을 여전히 아주 미심쩍은 존재로 취급했다. 가톨릭 신자를 교황 통치라는 세계적 음모를 위한 ‘악의 앞잡이’로 여긴 것이다.

 

 

열린 자세이되 복음의 핵심을 부당하게 흐려서는 안 돼

 

이러한 분위기에서 19세기 중엽에는 아메리카당이라는, 순전히 가톨릭의 영향력에 맞서기 위한 정치적 파당이 조직되었다. 아메리카당의 당원들은 나중에 공화당을 조직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고, 이렇게 탄생한 공화당은 남북 전쟁(1861-64년) 후에 ‘술과 로마 가톨릭과 반란’에 맞서 싸울 것을 천명했다. 그리고 그들은 금주법(禁酒法)을 발효시켰다. 금주법은 주로 맥주를 마시는 아일랜드와 독일의 이주민들과 포도주를 좋아하는 이탈리아 이주민들의 미국화, 곧 개신교화를 겨냥한 법이었다. 이에 맞서 가톨릭의 주교들은 이 법이 부당하다면서 가톨릭 신자들은 이를 어겨도 무방하다고 선언했다. 가톨릭 신자들은 이 선언을 기꺼이 따랐다. 시카고의 알 카포네, 뉴욕의 오우니 매든(살인청부업자), 보스턴의 조지프 케네디(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아버지) 같은 저항 운동 지도자들이 비공식 조직망을 통해 이를 지원했다.

 

그러니 대다수의 미국 가톨릭 신자들이 민주당원이 된 까닭이 그다지 불가사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1928년에는 가톨릭 신자로서 뉴욕 주지사를 네 번이나 역임한 인물(알 스미스)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그러자 전통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하던 지역인 남부의 여섯 개 주가 가톨릭 신자 대통령을 거부하고자 공화당 후보에게 표를 던졌다. 이때 가톨릭 신자들은 민주당 지지를 고수했다. 그리고 그 얼마 뒤에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연합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 연합은 금주법 철회를 공약으로 내세웠고, 루스벨트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루스벨트가 대통령에 당선된 데에는 조지프 케네디가 보스턴 지역에 구축한 정치적 조직이 큰 역할을 했다. 그 뒤 조지프 케네디는 계속해서 정치 역량을 키워 나갔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들을 정계에 진출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1960년에 그의 차남인 존 F. 케네디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였다. 다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겠지만, 많은 미국의 가톨릭 신자들은 이를 자신들의 ‘정치적 성공’으로 여겼다.

 

이때 존 F. 케네디는 텍사스 주의 목사들 앞에서 단 한 차례 연설을 함으로써 미국의 다수를 차지하는 개신교도들을 설득했다. 그는 가톨릭 신자들이 개신교도들에게 해가 되지 않을 것이며, 또한 그 자신의 개인적인 믿음이 그의 공적인 행위에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영향을 미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후로 미국의 대다수 가톨릭 신자들은 이 약속을 충실하게 지켜 온다.

 

이 역사적이고 현실적인 맥락에서, 사도 바오로의 모범을 새삼 돌이켜보며 소중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바오로는 이교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열린 자세를 취했지만, 상대방의 지지와 동의를 얻기 위해 복음의 핵심을 부당하게 흐리는 일은 하지 않았다. 우리는 열린 마음으로 대화에 임해야 하는데, 굳이 미국 가톨릭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그 모양새는 여러 가지로 다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의 정체성을 이루는 진리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런 점에서 ‘이방인의 사도’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아주 소중하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4년 7월호, 이석규  베드로(CBCK 교리교육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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