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5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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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소통의 모범이신 성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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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1-13 ㅣ No.384

[레지오 영성] 소통의 모범이신 성모님



최근 몇 년 이래로 소통(疏通)이란 단어가 입에 많이 오르내립니다. 몸이 아프면 자꾸 그쪽으로 신경이 쓰이듯이 소통이 안 되니까 자꾸 소통 문제를 언급하게 됩니다. 통해야 할 곳이 통하지 않고 흘러야 할 것이 멈춰있으면 답답하고 괴롭습니다. 우리 사회 곳곳이 바로 이런 형국입니다. 그래서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소통을 부르짖지만 상황은 별반 나아지지 않습니다. 서로 소통이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네가 불통이다’하고 남 탓은 잘하지만, 정작 내 자신의 소통 능력 부족은 반성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소통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소통을 잘 하는 이들을 모범으로 삼아서 살펴보는 것도 소통을 배우는 좋은 방법입니다. 소통과 관련해서 성모님은 훌륭한 모범이 되십니다. ‘예수님의 탄생 예고’라고 불리는 루카복음서 1장 26-38절에는 성모님의 소통하는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어느 날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와서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고 인사를 합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을 당한 마리아는 당황해하면서도 천사의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합니다.’ 이어서 천사는 마리아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인데,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라는 엄청난 내용의 소식을 전합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하였지만, 아직 함께 살기 전이기 때문에 아이를 낳는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어서 “처녀의 몸인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겠느냐?”고 묻습니다. 천사는 성령의 능력을 언급하면서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한 엘리사벳을 예로 들고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고 대답합니다. 이에 마리아는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고 응답합니다.


원만한 소통 위해서는 경청과 숙고의 자세 필요

가브리엘 천사와 나자렛 처녀 마리아 사이에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진 결과로 구세주께서 세상에 오시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진정한 소통은 소중한 결실을 맺게 하는데, 그 첫 걸음은 경청과 숙고입니다. 성모님은 가브리엘 천사의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이해를 못하였지만, 귀담아 듣고 곰곰이 숙고하십니다. 이런 모습은 단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때 목동들이 찾아와 천사들을 만난 놀라운 이야기를 전하자 성모님은 그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셨습니다.’(루카 2,19) 또한 예루살렘 순례 길에서 열두 살의 예수님을 잃었다가 다시 찾고서 그 아들로부터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을 들었을 때에도 성모님은 같은 태도를 취하셨습니다(루카 2,51). 성모님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이라도 우선 잘 듣고 마음에 간직하면서 되새기는 분이셨습니다.

원만한 소통을 위해서는 이런 경청과 숙고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말을 귀담아 듣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이에게는 호의를 갖고 마음을 열게 됩니다. 상대편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이나 기분을 언짢게 하는 말을 한다고 해서 바로 공격적으로 반응하게 되면 상대편도 자신을 방어하면서 경직된 모습을 보일 것입니다. 그러면 소통은 어렵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라도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어렵지만, 혹시 숨은 뜻이 있는 것은 아닐까? 내 기분은 나쁘지만, 뭔가 말 못할 사정이 있어 저러는 것은 아닐까?’라고 깊이 생각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상대편도 마음을 누그러트릴 것입니다.

경청과 숙고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질문입니다. 성모님처럼 이해가 되지 않으면 물어봐야 합니다. 질문하기가 껄끄럽다 하여 묻지 않고 지레짐작을 하면 십중팔구 오해를 낳아 부정적인 감정을 갖게 됩니다. 하느님은 당신에게 질문하는 것을 허락하시고 거기에 답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인간들끼리도 서로 질문하고 대답하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솔직한 질문과 정직한 대답은 불필요한 오해를 줄이고 소통을 원활하게 합니다.

질문을 하되 따지거나 비난하는 투로 해서는 안 됩니다. “너 그게 무슨 말이냐?”고 공격적으로 묻는다면 싸움이 되기 쉽습니다. 비난조의 질문은 ‘너’로 시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에 진정으로 이해를 구하는 질문은 대개 ‘나’로 시작됩니다. 성모님이 가브리엘 천사에게 한 질문도 그렇습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가브리엘 천사의 말이 옳으니 그르니 따지지 않고, 담담하게 자신의 처지를 얘기하면서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해가 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너 왜 그러냐? 그게 말이 되냐?’는 비난조가 아니라 ‘내가 잘 못 알아듣겠으니 설명을 부탁한다.’는 식으로 질문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대결이 아니라 대화가 시작될 수 있고, 대화는 소통으로 향한 길을 열어줍니다.


참된 소통 위해 나와 다르다는 점 인정하고 관용 필요해

참된 소통을 위해서는 상대편이 나와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고 견뎌주는 관용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각자 나름대로의 ‘세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서로 완벽하게 이해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성모님은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말, 곧 ‘하느님은 궁극적으로 우리 이해를 넘어선다.’는 천사의 말을 듣고 더 이상 질문하지 않고 순순히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십니다.

하느님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없듯이 인간도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경청, 숙고, 대화의 노력을 다 하고서도 여전히 거리가 좁혀지지 않을 수 있고, 그런 경우에는 성모님처럼 조용히 상대방의 고유함을 존중해주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신앙인이라면, 나와 생각과 가치관이 달라 소통이 어렵다고 해서 그 사람을 적으로 여겨 미워하거나 공격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람도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분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생각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적대 감정을 갖고 험한 말을 퍼붓는 경향이 점점 강해집니다. 따라서 경청과 숙고, 대화를 통해 다른 사람과 소통하려는 노력, 여전히 간격이 남더라도 상대편을 적으로 여기지 않고 형제로 포용하는 관용의 정신이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합니다. 2015년 한 해 동안 성모님을 닮아 소통하는 신앙인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 성모님께 도움을 청하기로 합시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5년 1월호, 손희송 베네딕토 신부(서울대교구 사목국장, 서울 Se. 담당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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