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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경쟁사회: 과도한 경쟁이 불러온 병리현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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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9-23 ㅣ No.867

[경향 돋보기 - 경쟁사회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과도한 경쟁이 불러온 병리현상들

 

 

어린 시절 어른들이 장기를 두다가 이따금씩 상황이 불리해지면 장기판을 확 뒤엎는 걸 보고 ‘왜 저럴까? 저렇게까지 해서 꼭 이겨야만 하나?’ 의문을 품곤 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내가 성인이 된 뒤 바둑을 배우면서 상대방으로부터 “참, 경쟁적이시네요.”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던 적이 있다.

 

스스로 인정하든 인정하지 아니하든 간에 사람들은 누구나 욕망의 주체다. 사회생활이란 이러한 욕망의 주체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얽혀 형성되는 것이기에, 때때로 특정 목표와 이해관계에 따라 경쟁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사회생활에서 경쟁이란, 나 혼자만이 차지할 수 없는 어떤 특정한 재화나 목적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다 같이 노력하면서 벌이는 상호작용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스포츠 선수들끼리의 경쟁, 직장생활에서 일어나는 경쟁은 경쟁자들이 자신의 승리와 성공을 위해 다투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서 보편적이고 정규적으로 발생하는 사회관계의 한 유형이라고 볼 수 있다.

 

또 경쟁은 설사 그 경쟁 시스템의 규칙이 공정하지 않다 하더라도 경쟁자들이 모두 일정한 규칙에 따라 다투기 때문에 ‘갈등’과는 달리 ‘우호적 투쟁’의 양상을 띠게 된다. 반면 경쟁이 적대적 형태로 발전한 것인 ‘갈등’은, 참여자들이 정해진 규칙을 무시한 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우는 ‘비우호적 투쟁’이라고 볼 수 있다.

 

 

경쟁의 긍정적 기능과 부정적 기능

 

경쟁은 개인의 잠재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집단 목표를 효율적으로 달성하도록 도와주는 긍정적 기능이 있다. 특히 경제 영역에서는 기업 간 경쟁이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와 기술을 개발하는 원동력이 되고, 이는 소비자들이 더 훌륭한 제품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소비자들이 상품 선택의 기회를 더 많이 갖게 되면, 제품 가격이 낮아지는 긍정적 효과로 이어질 수 있다.

 

정치 영역에서도 경쟁은 긍정적 효과를 낼 수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사회 구성원들은 선거의 공정한 경쟁을 거쳐 자신들이 원하는 정치인을 국민의 심부름꾼 또는 지역 대표로 선출할 수 있다.

 

그러나 자원이 심각하게 부족한 상태에서 그 사회관계를 맺는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완전히 다를 때, 또는 규칙이 아예 존재하지 않거나 경쟁 규칙이 공정하지 못할 때 등의 몇몇 특수한 상황에서 벌이는 과도한 경쟁의 결과는 그리 바람직하거나 긍정적이지 않다.

 

사회학에서 잘 알려진 ‘죄수의 딜레마 : 경쟁과 협조’는 공범인 두 죄수를 격리시키고, 같은 조건을 제시한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두 사람 모두 자백하면 7년, 둘 다 자백하지 않으면 3년의 형기를 받되, 한 사람이 자백을 할 경우 그 사람은 방면되고 자백을 하지 않은 또 다른 한 사람은 15년의 형기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 경우 현실적으로 둘 다 자백하거나 자백하지 않을 경우는 매우 드물다. 대개의 경우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저 녀석을 과연 믿을 수 있을까? 만일 저 녀석이 먼저 자백하면 난 어떻게 되지? 혹시 나만 꼬박 15년을 감방에서 썩어야 하는 거 아냐?’ 죄수는 심각한 딜레마와 부정적 경쟁 심리에 빠지게 된다.

 

 

과도한 경쟁의 발생과 문제점

 

‘죄수의 딜레마’는 두 죄수의 사회관계와 상호작용을 통해 일어난다. 그러나 사회는 두 사람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섞이고 얽힌 곳이고, 복잡하고 다양한 사회관계에서 수많은 딜레마가 발생하는 장소다. 그뿐 아니라 복잡한 현대사회에서는 정치, 경제 영역에서 다양한 이익집단의 수와 규모가 점차 커지고 있다. 집단 내의 경쟁도 그만큼 더 치열해진다. 그렇다면 이렇게 치열한 경쟁이 집단 목표의 효율성으로 이어질까? 우리 사회의 급속한 산업화와 경제 발전에는 - 특히 교육과 산업의 측면에선- 이런 경쟁 문화가 상당한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후기 근대사회의 특징은 영국 사회학자 기든스(A. Giddens)가 말한 대로, 불안전과 위험이다. 이러한 시대적 특성 아래 과다한 경쟁, 또는 정도를 벗어나는 경쟁은 집단과 조직이 추구하는 목표를 잊게 만든다. 이렇듯 과도한 경쟁이 벌어지는 대규모 집단 안에서 구성원들은‘과연 내가 무엇을 위해 이토록 경쟁하는가? 이런 삶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고 삶에 비관적인 태도를 지니게 된다.

 

과도한 경쟁은 조직 관리의 측면에서도 문제를 일으킨다. 집단 구성원들 간의 복잡한 사회관계에서, 특히 불안과 위험 상황에서는 경쟁이 원인이 되어 실책을 감추거나 진실을 외면하게도 만든다.

 

따라서 조직의 상층부도 구성원들 가운데 누가 조직에 협조적이며 믿을 수 있는지, 그리고 그들 행위가 수단과 방법의 측면에서도 과연 정당한지 확신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조직 관리와 조직 구성원들의 충성심 동원의 어려움은 벡(U. Beck)이 말하는 대로, ‘아무도 지배하지 않는 지배’ 또는 ‘조직화된 무책임성’을 조직 전체에 만연시킬 수 있다.

 

이미 언급한 대로, 합리적 규칙에 따라 명확한 목적 추구를 하는 과정의 선의의 경쟁은 그 목적 달성을 위해 효율적이고 바람직하다. 그러나 규칙을 어기며 제멋대로 무분별하게 행해지는 변칙적 경쟁, 또는 규칙 자체가 공정하지 못해 불만족을 느끼는 상황에서 행해지는 경쟁 등은 건전한 사회를 좀먹거나 병들게 하는 일종의 병리현상으로 볼 수 있다.

 

 

과도한 경쟁의 병리현상

 

1. 기업의 이익과 기업 순위를 유지하려고 불법적 상속과 증여, 탈세 등의 방법을 마다하지 않는 대기업, 또는 대기업 브랜드를 이용해 영세한 동네 빵가게나 구멍가게마저 잠식해 들어가는 상황 등은 지나친 경쟁의 대표적 예다. 그런가 하면 정치인들 또한 지역구민의 관심을 대변하거나 활발한 의정활동을 하는 대신 언론 플레이로 자신을 부각시키는 데 몰두한다.

 

정계나 경제계처럼 경쟁이 치열한 곳에선 정도를 걷는 것이 극히 어리석은 일로 간주된다. 하지만 현대사회의 과도하고 과다한 경쟁은 정치나 경제 영역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이제 경쟁은 소비, 교육, 대중문화와 스포츠, 그리고 외모와 거주지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일상생활 모든 영역에서 발생한다. 푸코(M. Foucault)가 현대의 권력은 사회라는 몸체의 모세혈관에까지 침투하여 미시권력으로 작용한다고 이해한 것처럼, 경쟁 또한 다양한 사회 영역의 미시적인 인간관계에까지 침투하여 긍정적 또는 부정적 기능을 발휘한다.

 

‘나는 소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표현처럼 소비를 부추기는 현대 소비사회에서 소비에 대한 경쟁은 이제 어린이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존재와 정체성을 드러내는 수단이 되었다. 따라서 집단 구성원들이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려고 이웃이나 친구의 구매 행위를 따라 자기도 경쟁적으로 상품을 구매하는 현상까지 나타난다. 문제는 이런 과시적 소비현상이 예전엔 상층 계급에 국한됐다면 지금은 사회 하층 계급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으로 확산되는 데 있다.

 

일찍이 베블린(T. Veblen)은 「유한계급론」에서 경쟁 문화의 동인(動因)은 자존심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특히 한국의 현대인은 다른 모든 것을 잃을지언정 자존심을 잃고는 살 수 없는 존재들이며, 그러한 자존심을 잃지 않으려고 과시적 소비에 집착한다고 볼 수 있다.

 

2. 교육체계에서 주된 동인은 경쟁이다. 교육체계는 다음 세대를 이끌어나갈 훌륭한 인재를 양성하려고 학생들 간의 경쟁을 장려한다. 특히 교육을 통해 전문가와 엘리트를 배출하는 데 주된 관심을 둔 사회는 누가 더 좋은 성적을 얻고, 누가 더 능력이 있는지 비교하는 방법으로써 경쟁을 강조한다.

 

그러나 교육에서 과도한 경쟁이 반드시 동기 유발을 한다고는 볼 수 없다. 경쟁은 불가피하게 낙오자를 낳으며, 낙오자는 어쩔 수 없이 자신에 대한 열등의식과 함께 경쟁에서 탈락될지도 모른다는 심리적 부담감을 안은 채 경주를 계속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감을 잃고, 결과적으로 결코 자신의 잠재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 과도한 경쟁 문화는 학생들이 협동과 배려, 우정을 아예 잊어버리도록 만들고 더 나아가 극도로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을 양성한다.

 

그러면 또한 우리 부모들은 어떠한가? 자녀들이 친구들과 사귀면서 사교성과 우정을 학습할 수 있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대학입시 준비를 위해 여러 가지 사교육을 시킨다. 저소득층의 경우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사교육비를 마련하려고 어렵고 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또는 수많은 가장이 자녀 영어 교육을 위해 기러기 아빠가 되어 어려움을 겪고, 가족들이 떨어져 생활하는 과정에서 일탈이발생하기도 한다.

 

그뿐 아니라 한국 가정의 지출 가운데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교육비는 계층 간 위화감을 조성하는 주된 요인이 될 수도 있다. 적어도 대학 교육만은 제대로 받고 사회에 나가야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 부모 세대는 자식을 충분히 뒷바라지 못하는 자신이 무능하다고 느끼고, 그 열등감은 사회의 상층 계층에 대한 시기와 증오의 감정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3. 자본주의 사회의 경쟁은 대중문화와 스포츠 영역에서 가장 쉽게 발견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중문화란 문화산업의 형태를 띠기 때문에, 자본력이 약한 산업은 문화상품의 생산은 물론 그 제품에 대한 광고와 시장 개척의 측면에서도 경쟁력이 약하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대형 출판사, 음반 기획사, 그리고 영화사들은 거대자본의 힘으로 블록버스트 상품을 제작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생존전략의 또 다른 방식으로 심히 자극적이거나 선정적인 문화상품을 생산할 수도 있다.

 

더욱이 교통, 통신의 발달로 여러 가지 재화와 서비스, 금융 등 경제, 사회, 문화 교류가 활발해지고 국가 간 경계가 약화된 세계화 시대에서 경쟁은 미디어 산업 영역에서 가장 안전한 독점 기업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미디어 산업에서 과도한 경쟁은 광고주 눈치 보기에 급급해 시청률이 낮은 드라마를 갑자기 중단시키는 방송사, 신문 구독률을 높이려고 물량 공세를 아끼지 않는 신문 지국의 행태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스포츠의 목적은 승패 여부를 떠나 일정한 규칙에 따라 정정당당한 대결을 함으로써 개인과 집단이 지닌 능력을 최고조로 발휘하고, 대중에게 기분전환을 위한 오락거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스포츠에서 경쟁은 경기 규정에 따라 제약을 받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안전하고 무해하다. 그러나 경기에서 승리하려고 약물 복용, 의도적인반칙, 지나치게 격렬한 다툼과 싸움은 불건전한 경쟁의 사례들이다.

 

또한 연예인이 아닌 일반인도 외모 경쟁에서 뒤지지 않으려고 쌍꺼풀과 코높이 수술을 하는 일이 드물지 않으며, 많은 젊은 부부들이 서울, 그것도 강남에 살기를 희망한다. 이제 외양이 남에게 뒤지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관계에서 자신감을 부여하고 자기 몸을 잘 관리한 능력의 표징이 된다.

 

또한 서울에서도 강북이 아닌 강남에 산다는 것은 당신이 얼마나 유능하고 성공한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인생 마라톤의 승리자로 인식된다. 그러나 남보다 더 아름다워지려는, 또는 특정 지역에 편입하려는 과도한 경쟁은 아름다운 자와 그렇지 못한 자, 그리고 특정 지역에 사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편 가르고 이를 기준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이상한 차별을 야기시킨다.

 

 

만성적으로 ‘피곤한 사회’가 되기 전에

 

어떤 면에서 과도한 경쟁의 더욱 병리적인 현상은 사회 구성원들 내면의 심리적 변화이다. 과도한 경쟁이 습성화됨으로써 사회 구성원들 대부분은 경쟁에서 뒤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자신의 능력에 대한 회의나 수치심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두려움과 억압된 수치심은 분노로 이어지고, 당사자를 심히 공격적인 성격 유형으로 몰아넣을 위험이 있다.

 

이러한 유형의 성격 소유자는 어떤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경쟁에서 이기려고 하는 욕구를 지닌다. 이들은 자기를 사랑하는 성향이 남달라서, 만일 그들이 실패했다고 인식하게 되면 스스로 위협받는다고 느껴 그 공격의 화살을 타인에게로 돌린다. 이처럼 심히 공격적인 성격 유형의 구성원들이 많은 사회는 상호 피로감과 짜증이 누적되고, 마침내는 사회 전체가 만성적으로 ‘피곤한 사회’로 바뀔 수 있다. 이러한 피곤은 심각한 사회갈등의 전조를 드러내는 징후로, 그 치료제는 ‘박카스’처럼 쉽게 구할 수 없는 것이다.

 

* 엄묘섭 알렉산드리아의 가타리나 - 대구대교구 매호본당 신자. 1981년부터 대구가톨릭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문화사회학회 고문이기도 하다.

 

[경향잡지, 2011년 9월호, 엄묘섭 가타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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