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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ㅣ복음화

선교와 문화: 종교의 기복성과 미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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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6-09 ㅣ No.373

[선교와 문화] 종교의 기복성과 미신성

 

 

실제 중국에서 일어난 일이다. 어느 시골 본당의 신자가 성상이라면서 보자기로 싼 물건을 본당 신부에게 가지고 와서 축성을 부탁했다. 축성해 줄 테니 보자기를 풀어 보라고 하자 신자는 완강히 거부했다. 실랑이 끝에 결국 풀어 보니 관음보살상이 나왔다. 사제는 이 신자의 사악한(?) 행위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그 젊은 중국 신부는 노발대발하고, 질책하고, 훈계하여 신자를 되돌려 보냈다. 그런데 그 사제의 거룩한(?) 마음이 승리한 바는 무엇이고 얻은 바는 무엇인가? 다음날부터 그 신자는 성당에 발을 끊었다. 

 

신자를 이기면 사목은 실패다. 선교사들은 낯선 문화의 현장에서 만나게 되는 타문화의 이른바 ‘불순한 요소들’을 대할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처리해야 할까? 2차 바티칸 공의회 전까지 신자들의 기복적인 태도를 우리 교회는 거룩함이라는 미명 아래 죄악시하고 불순하게 여겼다. 그러나 선교의 현장에서 기복과 미신은 구분되어야 하고 다르게 대처해야 하지만 그보다 먼저 사목자는 기복 행위 밑바닥에 깔린 사람의 마음을 아량으로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복을 받고 싶어 한다. 기복 성향은 인종, 시대, 지역을 뛰어넘어 모든 인류의 공통된 바람이다. 문명과 기술이 발달한 현대 사회뿐만 아니라 유물 사관에 지배당한 중국 사회 역시 기복 성향은 농후하다. 공산당의 반종교 정책으로 종교를 갖고 있지 않은 대부분의 중국 젊은이들은 인터넷을 통해 자신들의 소망과 기원을 실현하고자 이른바 ‘기복빠(祈福?)’라는 것을 만들어 종교의 대용품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통계를 보면 종교인들의 기복 성향이 비종교인보다 높게 나타나고 있다. 천주교 신자들 역시 점을 보고 싶은 유혹에 근질거리는 마음을 억누르다가도 큰일을 앞두면 안절부절못하며 양심을 가리고 철학관을 기웃거린다. 성당에서 혼인 성사를 받으려는 사람들도 사주를 보고 웬만하면 손 없는 날에 결혼하고 싶어 한다. 이사를 가더라도 꺼리는 날짜를 당당하게 택하지 못하고 슬금슬금 눈치를 보는 것도 예로부터 민간에 전해 오는 기복 의식과 유관하다. 복 받기를 간절히 원하는 정서를 들여다볼 수 있는 현상들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점을 보고 싶어 할까? 점을 보고 싶은 마음은 인간의 실존과 관계있다. 현실에서 마주치는 고통과 실패, 다가오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불확실성이 바로 인간의 실존이다. 불행과 위험에서 벗어나고 싶은 기원, 행복과 평안을 추구하는 기원이 문화에 상징적으로 담겨 있다. 종교도 문화이기에 염원과 희망이 담겨 있는 인간의 기원이 기복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본적으로 모든 종교에는 기복성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기복성과 미신성은 (사실 이런 구분 자체가 모순이긴 하지만) 고등 종교이든 하등 종교이든 모든 종교 형성의 기본적인 조건이자 부정할 수 없는 실체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불안을 느끼는 존재이고 종교는 거기서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7,7)라고 말씀하셨다. 신 앞에서 부족한 인간은 간절해질 수밖에 없다. 어느 종교든 기복성을 제거하면 성립이 가능할까? 아마 하루도 서 있지 못할 것이다. 종교적인 감수성과 신앙적인 경향성은 기복성을 바탕으로 한다. 시골 할머니의 신앙 태도를 교의나 신학으로만 분석할 수 있는가? 미사 중에 묵주를 돌리고 예수님상을 쓰다듬고, 신부 손을 만지고 하는 동작들을 미신 행위라고만 폄하할 수 있는가? 단순한 신앙 외적 행위를 미신이나 기복으로 판단하거나 단죄할 것이 아니라 승화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행위 안에 존재하는 인간의 실존을 이해할 수 있어야 종교는 인간을 폭넓게 포용할 수 있다. 종교의 기복성이 지닌 긍정적 측면을 살리면 신앙의 큰 에너지가 된다. 기복은 신앙의 기초적 단계라고도 말할 수 있다. 

 

성서에도 기복적 행위에 관한 묘사가 적지 않다. 하혈하는 부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장면에서 주님은 그 사람의 신앙 내적인 요소와 가치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신다. 행위는 미신처럼 보일지라도 그 안에 담긴 인간의 실존적 기복성을 볼 수 있어야 인간에 대한 이해가 이루어진다. 또 예수님은 맹인 치유 의식에서 땅에 침을 뱉어 흙을 개고 눈에 발라주는 행위나, 간음하다 붙잡힌 현장에서 땅바닥에 주문을 쓰는 것 같은 행동들을 하시는데, 단지 행위 외적으로만 이해하면 기복적 요소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의 종교가 다른 사람의 눈에는 종종 미신으로 비쳐진다. 이를테면 개신교 신자들은 가톨릭의 성물·성상·성인 숭배를 미신으로 생각해 배척한다. 그리스도인은 힌두교의 여러 의식을 미신이라고 생각하며, '고등' 종교를 믿는 사람은 파푸아 뉴기니 원주민의 토템 신앙을 미신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결국 모든 종교적 신념과 의식은 그 종교를 가지지 않은 사람의 눈에는 미신으로 비쳐질 수 있는 것이다. 

 

천주교의 준성사 안에도 기복적 행위가 많다. 자동차나 집을 축복하고 성물 · 성인들에 대한 공경의 모습들 안에는 기복적 염원이 담겨 있다. 생미사와 연미사의 공동 봉헌을 금기시 하는 행동, 성수 마시기, 성직자 숭배 사상도 제각각이다. 특히 중국의 소도시 성당을 방문하면 신자들의 성직자 숭배는 도를 넘어선 듯 느껴지기도 한다. 공산당의 통치 아래에서 박해를 받아 온 중국 교회와 신자들은 공산당의 노선에 합류한 애국회 사제들을 강하게 비판한다. 신자들은 애국교회 노선에 있는 사제들의 미사에 참여하기를 꺼려하고 상대적으로 보편교회에서 온 사제를 대하면 “진짜 신부가 왔다”면서 손을 만지고 비벼 대는 동작은 거의 성폭력(?)에 가까울 정도이다. 

 

이처럼 세상의 모든 종교 안에는 감성적 요소가 농후하다. 그러나 종교가 참되고 신앙이 올바르기 위해서는 감성적 요소를 잘 조절할 수 있어야 하고 종교의 기복성과 미신성은 정확히 구분되어야 한다. 미신은 올바른 길을 잃고 헷갈린 믿음이다. 곧 개인의 욕망을 신의 힘을 이용해 이루려고 하는 행위로 종교의 사사화(私事化)를 말한다. 미신은 무지함에서 비롯되며, 감성적이고 비이성적이며 이기적인 종교적 표현이다. 존재의 두려움에 대한 본능적 표현에서 나온 저급한 행위이다. 그러나 기복성은 방향만 제대로 잡아 주면 종교 생활에 큰 힘을 실어 주고 오히려 종교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선교 현장에서 느낀 바는 그런 기복적 성향을 반대, 질책, 단죄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한 예를 들어 보면, 자녀의 대학 입시일에 신자이건 비신자이건 자녀를 위하는 마음은 모두 같지만 한국의 입시 풍속도는 천태만상이며 가히 유치한 수준이다. 극단적인 미신 행위에 집착하면 대구 달성산의 영험하다는 바위에 돈을 붙여야 마음이 놓인다. 그러나 기복성이 잘 방향 지어지면 수험생 자녀를 위해 성당에서 조용히 기도하고 자녀의 불안한 마음에 동참하고자 하는 행위로 표현될 수 있다. 수험생들도 자신의 부모가 지금 성당에서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침착하게 시험에 임할 수 있고 그러면 결과가 더 좋게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방향만 잘 이끌어 주면 기복성은 종교에 대한 강한 믿음으로 승화될 수 있다. 문화라 해서 모든 것이 수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불순하고 정당하지 못한 문화가 있으니 ‘문화 길들이기’는 바로 복음의 역할이다. 종교의 기복성을 승화시키는 길이 선교와 문화의 차원에서는 중요하다. 기복은 신앙의 방편(方便)이지 목적은 아니다. ‘마음을 드높여’ 천상적이고 형이상학적 가치를 추구하지만 역시 사람은 두 발을 땅에 딛고 있어야 한다. 천국을 그리워하면서도 지금 당장 빵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기복과 미신은 초월적인 힘으로 현세의 개인적 이익과 행복을 추구하고자 하는 원초적인 갈망이다. 그래서 신앙과 현실이 충돌되는 것이다. 사목자는 신앙적 교의와 이성적 원칙 안에서 인간의 심리 밑바닥에 깔린 ‘불안에서 나오는 떨림’, 곧 종교의 기복성을 감지할 수 있어야 하며 그 기복성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해 줄 수 있어야 한다. 

 

[땅끝까지 제87호, 2015년 5+6월호, 김병수 대건 안드레아 신부(한국외방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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