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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법의 근본 정신과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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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3 ㅣ No.472

법의 근본 정신과 해석

 

 

1. 사회 있는 곳에 법이 있다

 

우리는 날마다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무수한 법규범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집에 가만히 머물러 있어도 재산법적인 법률 관계 속에 있다. 살고 있는 집이 자기 것이라면 소유권 관계가 있고, 빌린 집이라면 전세니 임대차니 하는 법률 관계가 있다. 부모 형제, 기타 친족이 있으면 그들간에는 친족법상의 관계가 있다. TV 뉴스를 보고, 인터넷을 이용하는 것도 모조리 계약 관계이다. 밖으로 나가면 도로 교통법의 적용이 기다리고 있겠고, 담배를 사더라도 매매 계약을, 전철을 타더라도 운송 계약을 맺게 된다. 우리의 일상 생활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모든 것이 실은 대부분이 법률 문제이다. 기업이나 노동 조합, 지방 자치 단체나 국가와 같은 대규모 조직의 움직임도 대부분이 법률 관계로서 이해될 수밖에 없다. 예링이 법을 "사회의 생활 조건"이라 한 것은 법이 없으면 사회 생활을 영위할 수 없다는 점에서 부정할 수 없는 진리이다. "사회 있는 곳에 법이 있다."(Ubi societas, ibi ius)라고 하지 않던가?

 

 

2. 법과 도덕

 

법1)은 사람들에게 사회 생활상 해야 할 것이 무엇이고, 해서는 안 될 일이 무엇인지를 명한다는 점에서 사회 규범이다. 그런데 사회 규범에는 법만 있는 것은 아니다. 유행, 습속, 도덕, 종교도 그 사회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준수할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사회 규범이 된다. 그 가운데 특히 '법과 도덕'의 관계가 문제된다.

 

법과 도덕의 관계2)를 풀이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설명 방법이 동원된다. 법의 외면성과 도덕의 내면성, 법의 강제 가능성과 도덕의 강제 불가성 등등이 그러한데, 어느 것도 분명한 답을 주지는 못한다. 필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그래도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법과 도덕은 다같이 사람의 행위를 대상으로 하되, 그 대상을 보는 각도와 목적이 다르다.3)먼저 인간의 행위를 도덕은 선악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법은 '반사회적인가 아닌가' 하는 관점에서 바라본다. 이것이 양자 구별의 핵심 요소이다. 그러나 반사회성이라는 개념만으로 법과 도덕의 구별은 아직 충분히 설명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가령 위증은 반사회적인 행위로서 법률의 문제가 되지만 통상의 거짓말은 반사회적임에도 법률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반사회적인 행위가 법적인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기준에서인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법과 도덕의 목적에 따른 것이다.

 

사회 규범인 이상 양자가 궁극적으로 인간의 행복을 가져오기 위하여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지향하는 목적은 서로 다르다. 법의 목적은 평화적 공동 생활을 가능하게 하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위험을 정의에 합당한 방법으로 배제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도덕의 목적은 '완전한 인간을 만드는 것', 곧 '인간의 인격적 완성'이다. "평화로운 공동 생활"이라는 데서 드러나듯이 법은 최소한 두 사람 이상이 존재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국가 주권이 미치지 않는 무인도에 표류한 로빈슨 크루소에게는 법이 필요없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 섬에는 원주민이 살고 있었고, 로빈슨 크루소가 그 가운데 프라이디라는 충실한 벗을 얻는 순간, 이제 그들에게는 법질서가 필요해진다. 도덕에는 이러한 제한이 없다. 물론 여러 사람이 모이면 그 나름의 도덕 기준이 성립하는 것은 사실이나(예컨대, 교통 도덕, 위생 도덕), 비록 혼자 있더라도, 아니 달나라에 가 있더라도 인간에게는 도덕의 문제(선악의 문제)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이상과 같이 법과 도덕을 대상과 목적에 따라 구별한다고 하여 양자는 전혀 별개의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궁극적으로 도덕에 포섭될 수 없는 법질서는 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법을 가장한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서만 가능한 구별이다.

 

 

3. 법의 근본 정신(존재 이유)은 '질서 유지'와 '정의 구현'이다

 

하나하나의 법에는 각기 고유한 목적이 있다.4) 하지만 좀더 일반적으로 법의 목적을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곧 법의 이념이니 법의 근본 정신이니 하는 문제로, 법학에서 영원한 난문에 속한다. 수백년에 걸쳐 수많은 논문과 저작이 있다. 토마스 데 아퀴노는 법의 목적을 공동선(bonum commune, 共同善)이라 하고, 공동선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법은 법이라 할 수 없다고 하였다. 공동선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논자마다 견해가 다양한데, 토마스는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 곧 영원한 행복을 공동선의 밑바닥에 두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만으로는 오늘날 복잡하게 뒤섞여 있는 법규범의 존재 이유를 다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이 글의 성격상, 필자는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싶다.

 

 

4. 법의 제1차적 목적:질서 유지

 

우선 법이 없으면 사회는 폭력이 지배, 약육강식, 무정부 상태, 참으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법의 제1차적 목적은 사람들이 마음놓고 살 수 있게 하는 것, 곧 질서 유지라 할 수 있다. 타인의 신체적, 정신적, 재산적 침해에서 보호되지 않는다면 법이라 할 수 없다. 살인 강도가 어디서나 벌어지고, 밤에 마음놓고 잘 수가 없을 만큼 치안이 열악하다면, 그 사회의 법은 법이라 할 수 없다. 아무리 훌륭한 내용의 법이라도 그 방면의 질서 유지에 쓰이지 않는다면 법으로서는 실패작이요, 아무리 저급한 내용의 법이라도 잘 지켜져 일단 질서 유지에 큰 문제가 없다면 최소한의 기능은 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1920년대에 술의 해악을 강조하는 나머지 금주법을 만들었으나 결과적으로 마피아에 의한 밀주업만 성행하게 했다는 것은 전자의 예요, 5공 시절 국민들의 입과 귀를 틀어막은 서슬 퍼런 긴급 조치법은 후자의 예이다. 그렇다고 군부 독재 시대의 각종 입법 조치가 정당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악법도 법이다.", "지옥에도 법이 있다."라는 법언이 있듯이 질서 유지가 법에 기대되는 최소한의 요구 조건임을 말해 준다. 질서가 법의 한층 더 고차적인 목적인 '정의'에 따라 유지되는 상태를 '평화'라 부른다.

 

한편 법이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와 법이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는 서로 다르다. 당위와 존재의 차이이다. 법에 질서 유지의 기능 내지 목적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 법이 질서 유지 기능을 잘 발휘하고 있는지, 곧 법적 안정성이 있는지는 별개 문제이다. 법적 안정성이라는 것은 질서 있음의 다른 표현으로 법의 내용이 안정되어 있어서 사람들이 법에 따라 안심하고 생활할 수 있음을 뜻한다. 법적 안정성이 유지되려면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몇 가지 요구가 필요하다. 먼저 법의 내용이 명확해야 한다. 법의 내용이 애매하여 자기의 행동이 법에 적합한지 어떤지를 판단할 수 없다면, 안심할 수 없을 것이다. 또 법의 내용이 너무 자주 변하는 것은 반드시 피하여야 할 일이다. 법의 변경이 빈번하면, 따라야 할 법의 내용을 쉽게 알 수 없다. 또 법의 내용이 실현되는 것도 중요하다. 나아가 법의 내용이 사람들의 의식에 합치하는 것도 필요하다. 사람들의 의식에 합치하지 않을 경우에는 관련 법규를 개정해서라도 법에 따르도록 할 필요가 있다.

 

 

5. 그러나 질서 있는 사회('법이 잘 지켜지는 사회')라고 꼭 좋은 사회는 아니다.

 

사회에 법이 있을 수밖에 없고, 법인 이상 그것은 모든 국민이 지켜야만 하는 것이나 법이 잘 지켜진다고 꼭 건강한 사회는 아니다. 입 한 번 잘못 놀리면 국가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곤 했던 시절의 한국 사회는 보안법이 잘 지켜지는 사회였지만, 법이 잘 지켜졌다 하여 좋은 사회는 아닌 것이다. 비정치적인 내용의 법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현대법은 갈수록 어디서나 합의가 모든 것을 정당화한다고 보는 합의 지상 주의, 감각적인 가치를 최고의 자리에 두는 찰나주의, 금지를 모르는 허용주의로 치닫고 있다. 법은 폭력보다 조금 수준이 높은 질서 체계이므로 국민의 의식이 변하면 바뀔 수밖에 없다. 오늘날 이미 다수의 국가에서는 이혼, 마약, 낙태, 매춘, 안락사, 동성혼이 법률상 허용되며 또 간통이 형사상 처벌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혼율이 높은 사회, 마약 이용자가 많은 사회, 낙태를 부지기수로 하는 사회, 매춘이 아무 거리낌 없이 행해지는 사회, 안락사가 간단히 행해지는 사회, 동성혼이 많은 사회는 그런 것들이 아무리 합법적인 상태에서 행해지는 것일지라도 틀림없이 건강한 사회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실정법이 잘 지켜지면 평화로운 사회가 되리라고 믿는 것이야말로 경계해야 할 법만능주의적 발상이다.

 

 

6. 법의 궁극 목적:정의 구현

 

한 목적은 더 큰 목적을 위해 봉사하고, 그 목적은 다시 더 높은 목적의 수단이 된다. 법의 목적이 우선 질서 유지라면, 무엇 때문에 질서를 유지해야 하는가? 그것은 평화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평화 유지는 무엇 때문에 필요한가 등등, 목적에는 더 큰 목적이 이어져 있다. 목적 중 최고의 것을 '이념'이라 한다면, 법의 이념은 정의의 구현이라 할 수 있다.

 

1) 정의의 종류

 

먼저 법은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서구의 언어에서 법이라는 말은 '정당하다, 바르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라틴어로 정의는 'iustitia'인데, 이것은 법 'ius'라는 말에 유래한다. 또 법을 나타내는 프랑스말 'droit'나 독어 'Recht'는 어느 것이나 정당하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렇지만 법의 이념이 정의의 실현이라 해도 무엇이 정의인지는 어려운 문제이며, 예로부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논의의 대상이었다.

 

역사를 훑어 보자. 정의에 관한 풀이로는 그리스·로마 이래 "정의란 각자의 권리를 귀속시키는 항구적이고 지속적인 의지이다(Iustitia est constans et perpetua voluntas, ius suum cuique tribuendi)"(울피아누스)가 유명하다. 나중에는 간단히 "각자에게 그의 몫을 주는 것"(suum cuique tribuere)이라 하는 일이 많아졌다. 이보다 앞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를 덕의 하나로 보고, "정의란 저녁의 별도 새벽의 별도 이렇게까지는 찬탄할 가치가 없는 덕이다."라고 말한다. 이어서 시작하여 아우구스티노와 토마스 데 아퀴노를 거쳐 오늘날도 자주 주장되는 정의의 분류가 있다. 그는 '자연의 본성에 의한 정당성'과 '법률에 의한 정당성'5)을 나누고, 전자를 다시 '산술 비례에 따른' 정당성과 '비례에 따른' 정당성으로 구별한다. 전자가 '평균적 정의' 또는 '교환적 정의'(iustitia commutativa), 후자가 '배분적 정의'(iustitia distributiva)라 불린다.

 

평균적 정의의 예는 "10원을 빌린 사람은 10원을 갚아야 한다."라는 토마스 데 아퀴노의 설명6)이 있듯이, 매매에서 물건의 가치에 따른 대가를 지불할 것, 손해 배상에서 손해에 맞는 배상을 하는 것, 일한 만큼 임금을 지불하는 것, 말하자면 주고받는 관계에서의 정당성을 말한다. 배분적 정의는 개인의 각각의 능력이나 자질에 따라 달리 다룬다는 이념이다. 예컨대 능력 있는 사람에게 높은 급료를 주고, 반대로 능력이 없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생활 보조금을 지급한다거나, 많은 수입을 올리는 사람에게는 높은 세율에 따른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등은 배분적 정의에 따른 것이다.

 

이 구별에도 많은 문제가 있다. 양자는 요컨대 사회에서의 재화나 불이익의 분배가 이루어져야 할 영역의 차이이지 성질의 차이가 아니며, 결국 '같은 것은 같게'라는 평등의 원리와 배분적 정의에 귀결되지 않는가 생각할 수 있다. 나아가 각각에 관하여서는 평균적 정의에는 어느 정도의 것을 가지고 '평등'(균형)이라 할까, 배분적 정의에는 생래의 불평등한 조건(능력, 부모의 재력, 사회적 환경 등)을 고정하고, 그것을 한층 잔혹한 것으로 만들 위험이 있지 않나 하는 의문이 있다. 무엇을 다른 취급의 기준으로 할지는 좀더 세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체로서는 이 2종의 분류 자체는 예리한 것이므로, 오늘날도 많이 쓰인다. 그 종합으로서 '각자에게 그의 것을'의 정식도 마찬가지이다. 정의가 '각자에게 그의 것'이 제대로 돌아가게 하도록 하는 것을 다른 말로 '공동선'이라 부른다.

 

2) 정의론의 침체와 메타 정의론의 융성

 

그러나 위의 것들은 다소 추상적인 원리이며, 구체적인 문제의 정과 부정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될 수는 없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정의와 정당성의 기준 그 자체를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정의 또는 정당성의 기준은 존재할 수 있는가, 그것에 관한 이론에는 어떠한 것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의 검토가 윤리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것을 '메타 윤리학'(또는 '분석 윤리학')이라 부르며, 무엇이 정당한지를 다루는 전통적인 윤리학을 '규범 윤리학'이라 부른다. 새로운 입장에 따르면, 윤리적 가치(정의도 이에 포함된다)의 객관적 타당성과 그 인식 가능성을 주장하는 입장(객관설)과, 그것을 부정하고 가치는 각자의 감정, 정서 등 주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입장(주관설 또는 가치 정서설)으로 나누어진다. 전자는 다시, 가령 '사람의 본성'이라는 경험적 사실에서 윤리적 가치를 인식하고 이끌 수 있다고 하는 입장('자연주의' 등)과, 사람의 깊은 직관으로 객관적 가치, 윤리를 인식할 수 있다고 하는 입장('직관설' 등)으로 갈라진다. 메타 윤리학을 연구하거나 그 영향을 받은 학자는 주관설(가치 정서설)을 취하면서, 어떻게 해서 "합리적, 객관적인 탐구와 논의가 가능한가"를 추구하려 한다고 할 수 있으나, 주관설 탓인지, 무엇이 정의인가에 대한 논의는 다소 미진한 듯하다.

 

3) 최근의 정의론의 상황

 

그래서 최근에는 다시금 규범 논리 또는 정의가 논의되게 되었다. 다만 여기서 '무엇이 정의의 내용인가'(실질적 정의론)라는 문제와 '어떠한 절차가 정의에 어울리는가'(절차적 정의론)의 문제가 있음이 점차 의식되고 있고, 이 중 후자에 중점이 놓여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7) 현재의 상황으로는 영미의 정의론에는 3가지 유형이 있다고 한다.8) 첫째는 '공리주의'로서, 모든 개인 행복의 총화의 최대화를 정당성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는다. 둘째는 공리주의를 비판하여, 정의의 핵심을 개인의 권리의 존중에서 찾는 입장(권리 기저적 정의론)이다. 셋째가 로울즈의 것으로, '공정(fairness)으로서의 정의'를 주장한다. 그리고 유럽 대륙에서는 전통적인 실질적 정의론이 여전히 유력하다.

 

메타 윤리학을 거친 오늘날에는, 한편으로 규범적 정의론에 대한 비판의 극복과 더불어, 객관적 실질적 정의의 탐구의 곤란성도 충분히 의식한 상태에서 검토되고 있다.

 

 

7. 그러나 정의만으로는 위험하다

 

1) 정의만으로는 위험하다

 

그러면 법의 이념은 정의로 끝나는가? 아니다. 더 높은 가치로 뒷받침되지 않는 정의는 결국은 정의라는 이름의 독선이 되고 만다. 우선 자비와 사랑으로 교정되지 않는 정의는 위험천만한 것이다. 자비에 관하여는 두 가지 것을 인용해 둔다. 토마스 데 아퀴노의 "자비가 없는 정의는 잔혹하고, 정의가 없는 자비는 분열의 어머니이다."(Iustitia sine misericordia crudelitas est, misericordia sine iustitia mater est dissolutionis.)9)라는 말이 있고, 셰익스피어도 [베니스의 상인]에서 샤일록에 대한 포셔의 말을 빌려 "정의에 자비가 들어가면 지상의 권력도 신처럼 아름다워진다(And earthly power doth then show likest God's, when mercy seasons justice)."라고 하였다. 자비는 '형평', '개별화적 정의'를 고려하게 하는 마음 자세, 또는 "정의의 바탕"10)이기까지 한 것이다.

 

또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그리스 문화와 그리스도교에서 이야기되어 온 몇 종류의 사랑 가운데, 성애를 의미하는 에로스(eros, 우정을 의미하는 필리아(filia)가 아닌, 그리스도께서 강력히 제시하신 이웃 사랑(agaphe, caritas, charity, charite)이다. 아가페란 "뭔가의 의미에서의 구하는 바가 있는 에로스나 필리아라는 말과는 달리, 자기를 버려서라도 가치의 유무에 불구하고, 또 벗인지 적인지 구별 없이, 상대의 행복을 바라는 사랑"11)이다. 그 극치는 "누가 너희의 오른 뺨을 때리거든 왼뺨도 내밀어라."(마태 5,39; 루가 6,29)라는 것인데, 법, 법률의 문제는 되지 않는다. 결국 어느 것이나 구체적이거나 개인을 대상으로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기는 하지만, '자비'가 가치가 낮은 것에의 동정과 베풂이라는 뉘앙스가 있음에 반해, 사랑은 인간이라는 것 이외에 다른 가치를 묻지 않는 점에 차이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사랑 없이 권리만을 주장하거나 사랑을 모르는 의무만의 강조는 정의가 무엇 때문에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는, 그리하여 정의의 가치마저 죽이는 맹목적인 법률론이 아닐 수 없다.

 

주의할 것은 사랑과 정의의 경계는 시대에 따라 변한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사랑의 문제였던 것이 법의 문제, 곧 그것을 받는 쪽의 권리가 되는 일이 있다. 예컨대 과거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은 사랑의 의무라 했던 것인데, 오늘날에는 약자의 권리, 곧 정의의 문제가 되어 있다. 이리하여 사랑의 강조는 권리로서 당연히 인정되어야 할 것을 특별한 은혜인 양 생각하게 하여, 권리의 발전을 방해할 위험이 있다고 이야기된다. 또 사랑의 발현이 개별적인 것이기 때문에, 사회의 구조적 부정을 해결하지 못함도 지적된다.

 

그러나 사랑에도 두 가지 차원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하나는, 그 명하는 의무 내용이며, 구체적 행위의 규범으로서 위와 같은 비판을 받는 경우가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또 하나, 사랑에는 도덕과 같이 좀더 높은 차원이 있다. 그것은 '도덕적인 행위의 원동력, 정의를 실현할 때의 정신의 약동'이자, 타인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의 근저로부터의 간절한 바람'이다.12) 곧 "내가 비록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 준다 하더라도 ......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1고린 13,3)라고 이야기되는 도덕, 법에 어울린 행위를 뒷받침하는 깊은 마음 자세이며, 그러한 것을 초월한 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않는다."(1고린 13,6)라고 하는 것도 이를 나타낸다. 곧 정의 실현의 노력의 배후에는 사랑이 필요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의와 사랑은 맞물린다.

 

2) 정의의 기준은 정의 자체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인간의 행위 가운데 어떤 것을 평균적 정의로 다스리고 어떤 것을 분배적 정의로 다스릴 것인가 하는 것은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다. 위정자들이나 법을 적용하는 사람들이 '정의'의 이름으로 하는 법 운용의 실태를 보라. 좌충우돌, 아전인수, 귀에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아닌가? 산술적 정의를 적용해야 할 곳에 배분적 정의의 기준이 거론되거나 그 반대가 아닌가?

 

정의론이 어느 때보다도 성행하는 오늘날, 다른 한편으로, 정의의 이름으로 전쟁이 벌어지고, 특히 오늘날에는 구체적인 문제에 관하여 각자가 정의라 생각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정의란 각자의 주관적 신념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상대주의'가 횡행하고, 나아가 정의에 관한 허무주의를 취하는 자도 적지 않다. 또 정의인지 아닌지를 판단해야 할 사람들이 행한 수많은 악행을 보라. 애초에 사람은 정의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부딪히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날카로운 지적을 포함하고 있고, 절차적 정의론과 같은 최근 이론은 배워야 할 점이 많이 있으나, 반대로 부유한 사회의 무기력과 빈곤한 사회의 비참을 눈앞에 두고, '정의'가 행해지는 것이 긴급한 사항이 된 시대에는 '관용'과 '자유로운 논의와 비판' 외에 사람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 던져지고 있다.

 

한편 '효율'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효율의 추구를 정의의 추구와 동일시하는 입장도 있다. 예컨대 미국에서 시작된 '법과 경제'(Law and Economics)라는 접근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경제적 효율'이라는 관점에서 법·법률을 분석하고, 다시 어떤 학파는 그것을 하나의 중요한 가치로 하여 현행의 법·법률의 비판을 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후자에서는 '효율'이 법, 법률에서의 이상의 하나라고 하게 된다. 이에 대하여는 학문적 분석 수단의 하나로서의 유용성에는 거의 이의가 없는 것 같고, 종래 그다지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던 이념을 인식시킨 것이었으며, 하나의 법이념으로 삼는 데는 이론이 없으나, 정의가 상위의 이상, 가치임은 부정할 수 없지 않는가? 예컨대 불법 행위에서의 손해 배상 의무를 누구에게 부담하게 할 것인가에 관해 가장 값싸게 그 비용을 부담할 수 있는 자에게 부담시킴이 효율적이라는 것인데, 과연 그것이 늘 정의에 어울린다고 볼 수 있는가? 경제 효율성이 정의의 자리에 들어서게 되면, 다수의 난민 구제나, 중증의 신체 장애인 또는 거동이 어려운 노인들을 돌봐주는 일 따위는 예산이 부족하면 중단해도 도리가 없는 일이 되고 만다. 안락사라든가 낙태 같은 것도 오래지 않아 인간의 행복 추구에 비효율적이라는 점에서 정의의 이름으로 주장될 날이 오지 않을 것인가?

 

 

8. 법의 해석13)

 

1) 법 해석의 필요성

 

국가의 정치는 법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는 원리를 법치주의14)라 하고, 근대 이후 국가의 기본 원리의 하나가 되어 있다. 법치주의 아래서는 재판과 행정이 법에 따라 행해질 것이 요망된다. 이때 법이 무엇을 명하고, 무엇을 금하고, 또 무엇을 허용하는지를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법규범의 의미 내용을 명확히 하는 것을 '법의 해석'이라고 부른다.

 

법의 해석은 '법의 적용'의 전제로서 행해진다. 예컨대 민법 제750조는 "고의 또는 과실로 인한 위법 행위로 타인에게 손해를 가한 자는 그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라고 규정하는데, 그 의미 내용을 명확히 하는 것이 법의 해석이다. 아파트 8층에 살고 있는 A가 베란다에서 화분을 손질하다가 실수로 그만 화분을 아래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 바람에 밑을 지나가던 행인 B가 상처를 입었다. B는 A에게 손해 배상을 청구했으나, 이야기가 잘 되지 않자 법원에 호소하여, 법원에서 민법 제750조의 적용이 문제되었다고 치자. 민법 제750조가 적용되는지, 적용되더라도 어떠한 결론이 나올지를 판단하려면, 한편으로는 사실을 확정하고, 다른 한편으로 이 조문의 의미 내용을 명확히 하여야 한다. 예컨대 "고의, 과실"의 의미 내용을 명확히 하지 않으면, A가 화분을 떨어뜨린 것이 A의 고의나 과실에 따른 것인지를 판단할 수 없다. 이 가운데 '고의'는 전문 용어로 일상 용어와 다소 의미가 다른데,15) A의 행위가 고의에 해당한다고는 말할 수 없으니, 이제 문제는 '과실'이다. 이것도 일상적으로는 '잘못하여', '부주의로', '어쩌다 실수로'라는 의미이나, 제750조의 '과실'의 의미는 서구 전래의 역사를 갖고 있는 매우 어려운 관념이다. 아무튼 그 의미가 분명치 않으면 이 사건을 해결할 수 없다.

 

또 '위법 행위'의 의미 내용을 명확히 하지 않으면 B가 상처를 입은 사실이 위법 행위에 해당하는지도 판단할 수 없다. 일상의 세계에서 구체적으로 발생하는 사건은 가지각색으로 똑같은 사건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 하나하나에 법률의 규정을 정하는 것은 쓸데없이 규정을 늘리는 것이 될 뿐더러, 모든 것을 상정하기는 우선 불가능하다. 그래서 다수의 구체적인 사건에 적용할 수 있는 추상적인 규정이 정해지게 되고, 구체적인 사실에 적용하기 위해 법의 해석은 불가결한 작업이 된다.

 

2) 법 해석의 성질

 

법 해석이라는 지적 작업의 성질을 보자. 불명한 부분을 명확히 하는 작업에는 성질이 다른 지적 작업이 포함된다. 한편으로 '발견해 내는 작업'이 이루어지는데, 다른 한편으로 거기에는 창조적인 작업도 포함되는 것이다. 그리고 한 '해석'이 발견인가, 창조인가 분명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래도 '해석'이라는 작업에 이들 두 요소가 포함되어 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해석시 어떤 요소에 비중을 둘지는 생각이 갈리는 바이다. 법원의 구속성을 강하게 인정하는 입장(발견의 측면을 중시)과 해석자의 자유를 널리 인정하는 입장(창조의 측면을 중시)이 있다.

 

3) 법 해석의 기술

 

(1) 문리 해석과 논리 해석

 

법 해석은 먼저 문리 해석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여기서 문리 해석이라는 것은 말의 의미와 문법에 따라 법 규범의 의미 내용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조문에 '남자'로 되어 있으면 '여자'를 포함하지 않고, 반대로 '여자'로 되어 있으면 '남자'를 제외하는 것이 문리 해석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하늘에 계신 우리 어버이"로 풀 수 없음과 같다. 다만 법률 용어에는 특유한 기술성이 있으므로 일반인에게는 어렵거나 오해를 유발할 염려가 없지 않다.16) 이러한 문리 해석에는 한계가 있다. 추상적인 법 규범에는 문리 해석이 거의 쓸모가 없고, 또 입법자가 잘못된 표현을 썼을 경우에는 문리 해석이 잘못을 조장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이때는 다른 방식으로 입법자의 과오를 시정해야 한다. 또 조문은 가까이 있는 다른 조문, 곧 그 조문이 포함되어 있는 좀더 큰 제도 안에서 또는 다른 조문이나 제도와의 관계에서 풀이하여야 한다. 조금 넓히자면 법 전체가 모순 없는 통일체를 이루도록 해석하여야 하는데, 이러한 해석을 논리 해석이라 한다.

 

(2) 확장 해석과 축소 해석

 

확장 해석은 말의 의미를 확장하여 풀이하는 것이며 축소 해석은 말의 의미를 축소하여 해석하는 것이다. 예컨대 아파트 관리 규약에 "개나 고양이를 사육할 수 없다."라는 규정이 있는 경우에, 개와 고양이 이외의 애완 동물도 금지된다고 풀이하는 것이 확장 해석의 예이다. 그리고 "동물을 사육할 수 없다."라고 규정하는 경우에, 사육하는 것이 타인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금붕어는 여기서 말하는 동물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풀이하는 것이 축소 해석이다.

 

(3) 유추 해석과 반대 해석

 

유추 해석이라는 것은 어떤 법문에 포함되지 않는 경우에 동일하게 해석하는 것이다. 예컨대 전술한 "개나 고양이를 사육할 수 없다."라는 규정을 놓고, 개나 고양이를 키우는 것이 타인에게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에 금지하는 것이므로, 원숭이나 뱀의 사육도 타인에게 피해를 주므로 금지한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확장 해석과의 구별은 미묘하다. 이에 대하여 반대 해석이라는 것은 한 법문에 포함되지 않는 경우에 반대로 해석하는 것이다. 예컨대 "개나 고양이를 키우지 못한다."라는 규정에 관하여, 금붕어는 개나 고양이에 들어가지 않으므로 금붕어의 사육은 금지되지 않는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4) 입법자 의사와 법률 의사(해석의 시각)

 

말의 의미 내용을 바탕으로 해석 작업을 하는 문리 해석, 논리 해석 등의 해석 기술과 대립하는 것으로 입법자의 의사에 따른 해석과 법률 의사에 따른 해석을 들 수 있다. 입법자의 의사에 따른 해석이라는 것은 법률의 규정이 제정된 때에, 입법자가 어떠한 의사로 제정했는지를 명확히 하고 법 해석에서 그 의사를 존중하고자 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입법자가 염두에 두었던 사회 사정과 그 배경이 된 사상이 변하면 조문의 해석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입법자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사태도 있다. 이러한 경우에는 그 조문이 현재는 어떠한 의미를 가져야 할지를 생각하여 해석할 필요가 있는데, 이러한 해석을 목적론적 해석 또는 법률 의사에 따른 해석이라고 한다.

 

전자를 '작자'의 시각을 중시한 풀이라 한다면, 후자는 '독자'의 자유로운 시점을 중시한 풀이라 하겠다. 그러나 양자에는 공통점도 있다. 그것은 어느 것이나 텍스트만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입법자 의사설은 입법 자료를, 법률 의사설은 현재의 사회 정세를, 각각 문제삼는다.

 

 

9. 그러나 법률 자체는 법 해석의 방법을 제시하지 않는다.

 

정작 법을 해석해야 할 경우, 이상과 같은 여러 가지 방법 중 어떤 것을 택할 것인가? 법률의 목적이 분명한 경우에는 그에 따라 해석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날마다 서로 목적에 충실한다고 하면서 대립되는 방향으로 해석되는 사태를 접하게 된다. 정의의 요청에 맞는 해석이라면서 한쪽은 축소 해석을, 다른 쪽은 확대 해석을 한다. 어느 것이 옳은 해석인가? 훌륭한 법 해석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요소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다.

 

첫째, 법 해석이 일관성이 있는가? 결론의 타당성을 추구하는 나머지 오락가락한 해석이 되어서는 훌륭한 해석이라 할 수 없다. 일관성이란 이미 축적된 확립한 법 원리와의 어울림이다. 그러려면 해석자에게 광범한 법 지식이 요구된다. 동시에 이것이 뜻하는 바는 법 해석은 점진적인 개혁의 도구일 수는 있어도 혁명의 수단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둘째로, 어떤 사례에 제시된 해석론은, 비슷한 사례에서 선례로 기능하게 될 것이 예정되어 있다. 따라서 그 사정 거리에 포함되는 유사한 사례에서도 타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해석인지를 물어야 한다. 한 특수한 장면에만 타당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어서는 해석론으로는 그다지 환영할 수 없을 것이다. 해석자는 유연한 사고력과 폭넓은 시야를 가져야 한다.

 

셋째로, 그 해석론은 설득적인 사상을 갖고, 정의, 형평의 관점에서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것인가? 말은 쉬워도 실천은 극히 곤란한 요청인데, 단적으로 말하면, 상식에 합치한 결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의 상식은 단순한 일상적인 상식이 아니라, 법적 소양과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회 일반의 상식과 동떨어진 해석은 그다지 훌륭한 것이라 할 수 없다.

 

이상과 같은 세 요건을 다 갖추었다고 해서 훌륭한 법 해석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하나하나가 다 힘든 일이며 특히 아무리 설득력 있는 사상과 정의와 형평의 관점에서 사람들이 지지할 수 있는 법 해석이라고 여길지라도, 그 인간적 관점을 정당한 것으로 만드는 보다 상위의 가치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진정 가치 있는 해석론이 되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10. 자연법:법의 이념과 해석의 정당화의 근거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자세를 견지해야 하는가?

 

1) 해답은 우선 자연법(ius naturale; Naturrecht)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연법을 수긍한다는 것은 법이 사회 생활에서 상대적인 것임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 생활의 수요에 합치하지 않는 법은 아무리 적법하게 제정, 공포되었다 해도 법으로서의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 로마인의 사회 생활과 현대 한국인의 사회 생활에는 물론 현격한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로마법과 현대 한국법 간에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양자의 법 사이에는 공통한 요소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확실히 인종, 시대 및 문화의 차이는 사회 생활의 전반에 걸쳐 다른 특색을 갖는 것이 물론이다. 그러나 그 차이가 있을지라도 양자 모두 인간이 이루는 사회 생활인 이상, 거기에는 그러한 의미에서 공통성이 존재함도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인간은 비록 문화 상태, 경제 상태를 달리할지라도 그 본성에서 다른 동물과 다른 이성을 갖고, 스콜라적 표현을 빌리자면 "자연 이성의 빛"(lumen rationis naturalis)에 따라 개인 생활과 사회 생활에서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해서는 안되는지에 관한 식별을 할 수 있음을 인정하여야 한다. 보이는 것을 넘어 보이지 않는 것을, 변하는 것을 초월하는 변하지 않는 것을 받아들이고, 보이지 않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에 의해 보이는 것과 변하는 것들이 움직이도록 해야 한다.

 

2) 이때 우리는 자연법과 실정법은 대립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양자는 후자가 전자에서 도출된다거나, 후자가 전자의 내용을 확정하는 관계에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양자간에는 연속적 관계가 존재하고, 자연법은 실정법 속에 빈틈없이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어떤 경우이건 실정법은 자연법상 정당화될 때 비로소 존재할 수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실정법은 상당 부분 자연법의 발전이든가 아니면 자연법의 외곽이 된다. 이처럼 두 방면에서 실정법이 자연법의 제약 아래 있는 이상, 실정법이 자연법을 떠나 입법자가 자연법에 반하는 규정을 설정할 수 없음을 들어, 자연법에 위반하는 실정법에는 저항권이 주어지게 되는 것이다.

 

3) 마지막으로 법 해석의 객관성과 관련하여 한마디하기로 한다. 법은 사회 규범이라는 데서 법적 안정성이 요청되고 따라서 법 해석은 되도록 객관적일 것을 요한다. 한데 법 해석은 완전히 객관적일 수 있는가? 난문이다. 자연법론자들은 대체로 객관적인 법 해석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한다. 사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하느님의 지혜를 따른다면 틀림없이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해석이 가능할 것으로 풀이할 수 있겠다. 그러나 객관적일 수 있다는 것과 객관적이라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정의 구현'이란 기치 아래 행해지는 수많은 일들이 진정으로 정의를 구현하는 일에 해당하는지는 별개의 문제인 것과 같다. 게다가 자연법을 인정치 않는 사람에게는 법 해석의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는 기준이 없으므로 결국은 각자의 입장의 문제로 귀착한다. 이렇게 볼 때 아무리 객관적이려 노력해도 해석자에 의해 해석이 달라지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현실적으로 법 해석자들은 정의의 이념을 초월한 가치를 인정하건 인정하지 않건 개개의 해석이 되도록 객관적으로 타당하도록 노력하고 그 시점에서 일단 최상의 것이라고 신뢰하고 해석을 펼친다. 모두가 자기의 해석이 최상의 것이요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해 마지않는다. 그럼에도 그 해석이 최상이라고 판단할 권한은 우리에게는 없는 것이다. 그것이 객관적인 것까지는 그만두더라도 그 상황에서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최상의 해석임을 모든 이가 납득할 만한 방법으로 어떻게 입증할 것인가? 그러한 점에서 법 해석에 종사하는 자들은 법 해석시에 불분명할지언정 있어야 할 객관적 정당성을 따르도록 노력함과 더불어, 이미 내린 판단의 객관성에 대하여는 겸손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법의 제정, 해석, 적용 등 법을 운용하는 모든 이에게 늘 필요한 것은 가난한 마음이 되어 전능하신 천주의 도우심을 청하는 '기도하는 마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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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은 '법'(ius)과 '법률'(lex)을 구별해야 한다. "법이란 공동체의 책임자에 의해 공포되고 공동선을 목적으로 하는 이성의 질서"(토마스 데 아퀴노)라는 풀이는 이상적인 정의이다. 현실적으로는 법은 '사회의 생활 관계를 실제로 규율하는 사회 규범(살아있는 법)' 또는 '현실로 존재하는 법·법률을 떠나 그 근거가 되거나 그것들을 비판하는 원리'를 뜻한다. 후자의 경우, '법'은 '자연법'을 뜻한다. 법률은 '입법 기관에 의해 제정된 법률 및 이에 준하는 것(조약, 명령 등)'을 뜻하는 것이 보통이나, 이런 의미의 법률에 판례와 관습법 등의 의미를 넣어 法이라는 식으로 풀이하는 것이 일반적인 까닭에 본고에서도 이러한 의미의 법 개념을 택하기로 한다.

 

2) 다나카 고타로, [법과 종교와 사회 생활], 졸역, 교육과학사, 1989년, 171면 참조.

 

3) 호세 옴파르트, [법철학의 길잡이], 졸역, 경세원, 2000년, 193면.

 

4) 요즘의 법률에는 먼저 그 목적을 규정한 것이 적지 않다. 예컨대 환경 정책 기본법(1990.8.1., 법 4257호) 제1조는 "이 법은 환경 보전에 관한 국민의 권리/의무와 국가의 책무를 명확히 하고 환경 정책의 기본이 되는 사항을 정하여 환경 오염과 환경 훼손을 예방하고 환경을 적정하게 관리/보전함으로써 모든 국민이 건강하고 쾌적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함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정한다.

 

5) 법률에 의한 정당성의 요구를 '일반적 정의'라 부른다. 개인의 사회 전체에 관한 행동을 규율하는 정의로서, 단체에 주어진 의무를 단체의 일원으로서 개인에게 부담시키는 정의를 말한다. 이러한 의무는 법률상 정해지기 때문에 법적 정의라고도 한다. 여기서는 설명의 단순화를 위해 추가 설명을 생략한다.

 

6) G. 달 사쏘-R. 꼬지 편찬,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요약], 이재룡·이동익·조규만 옮김, 1996년, 273면.

 

7) 대표적인 저술은 J. Rawls, A Theory of Justice, Harvard University Press, 1971년.

 

8) 井上達夫, "正義論", 長尾·田中 편, [現代法哲學 I], 1983년.

 

9) Heinrich Henkel, Einfuhrung in die Rechtsphilosophie, 2판, 1977년, 429면에서 재인용.

 

10) G. 달 사쏘-R. 꼬지 편찬, 앞의 책, 49면.

 

11) 今道友信, 愛について, 講談社現代新書, 1972년, 77면.

 

12) 星野英一, 法學入門, 1995년, 103면.

 

13) 졸저, [역사속의 민법], 교육과학사, 1994년, 345면 참조.

 

14) 영국과 미국에서는 '법의 지배'(Rule of Law)라 한다.

 

15) 법률상은 '일부러' 외에 '그 결과가 발생할 것을 알면서 그것을 용인하고' 한 경우도 포함된다.16) 예컨대 일상 용어에서는 '소유'와 '점유', '추정한다'와 '간주한다', '취소'와 '철회'가 구별되지 않고 쓰여도 큰 탈이 없겠지만, 법률 용어로서는 확실히 구별해야 한다.

 

[사목, 2001년 7월호, 정종휴(전남대학교 교수, 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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