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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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선교와 사목 영성: 헌신적인 노력과 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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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8-23 ㅣ No.2009

[신앙선조들의 발자취]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선교와 사목 영성


헌신적인 노력과 열성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데 있어 열성은 복음 선포자들이 지녀야 할 중요한 덕목이다.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들이 갖는 열성은 그들에게 어려움과 고난이 닥칠 때마다 그것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준다. 반대로, 열성이 부족할 때는 무관심과 나태에 빠져 복음 선포에 실패하고 만다.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는 박해의 고난과 역경을 겪을 때마다 헌신적인 노력과 열성으로 극복하였다.

 

김대건 신부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조국의 모습에 매우 아쉬워하며 조선에 복음이 전해져 동포들이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기를 진정으로 염원했다. 그는 1844년 중국에서 입국 기회를 살피다 페레올 주교에게 보낸 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저는 혼자서, ‘슬프다! 이 백성들은 아직 외국인을 귀찮게 여기고 무서워하며 나라에서 내쫓아야 할 원수로밖에 여기지 않는 아주 비참한 상태에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당시 조선에 박해가 일어나 입국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음에도 김대건 신부가 조선에 들어가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은 무엇보다 조선의 선교를 위한 열성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옥중서한에서 “함께 갇혀 있는 교우들에게 고해성사로 힘을 북돋우고 있고, 또 두 예비 교우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라고 기록하였다. 이는 옥중의 어려운 조건 가운데서도 주위 사람들에게 헌신적인 노력으로 복음을 전하는 모습이었다.

 

최양업 신부도 입국 전부터 조선의 선교에 대한 열망을 크게 가지고 있었다. 그는 중국에서 조선의 박해 상황을 듣고도 조선을 “우리의 포교지”라고 부르며 입국의 날을 기다렸다. 그는 사제품을 받고 귀국하자마자 곧바로 교우촌 방문을 시작하였다.

 

최양업 신부의 교우촌 순방에는 박해로 인한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때로는 광적으로 흥분한 사람들의 습격을 받기도 했고, 외교인 동네에서는 쫓겨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헌신적인 노력과 열성으로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며 복음 선포자의 사명을 다하였다.

 

베르뇌 주교는 최양업 신부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열성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였다.

 

“그는 굳건한 신심과 영혼 구원을 위한 그의 불같은 열심, 그의 훌륭한 분별력으로 […] 12년간 거룩한 사제의 모든 본분을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사람들을 감화하고 성공적으로 영혼 구원에 힘쓰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기록들은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헌신적인 노력과 열성이 복음 선포에 큰 밑거름이 되었음을 알려 준다.

 

참조

조규식,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선교와 사목 영성」, 성 김대건 안드레아 탄생 200주년 희년살이 심포지엄, 2021.

 

[2021년 8월 22일 연중 제21주일 의정부주보 3면, 의정부교구 교회사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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