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9일 (일)
(홍) 성령 강림 대축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정약전과 서교: 흑산도 유배 이전을 중심으로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28 ㅣ No.869

정약전(丁若銓)과 서교(西敎) - 흑산도 유배 이전을 중심으로

 

 

국문 초록

 

정약전이 서교를 수용한 것은 1784년 4월 이후이며 적어도 1786년 3월까지는 비교적 열심이었고, 1787년 12월의 정미반회를 계기로 거리를 두게 되었으며 1791년 신해교안을 계기로 서교와 완전히 결별하였다. 1795년 7월과 1799년 4월에도 서교와 관련이 있다고 모함당했으나, 그 증거는 전혀 찾을 수 없었다. 1801년 2월 신유교안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을 때도 이미 서교와 관계를 끊은 것이 문초 중 밝혀졌고, 1801년 겨울 다시 황사영 백서 사건에 연루되었으나 관계없음이 밝혀져 죽음을 면하고 흑산도로 유배 길을 떠났다. 1795년 이후 1801년까지 모함이 여러 차례 계속되었으나 공서파(攻西派)에서는 아무런 서교 관련 증거도 제시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관계를 끊었다는 증거만이 드러났다. 이것은 이미 1787년 12월 정미반회를 계기로 서교에 거리를 두게 된 정약전이 1791년 신해교안을 계기로 서교와 완전히 결별하였음을 의미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겠다.

 

정약전은 1776년 상경 이후 본격적으로 소장성호학파의 학문에 젖어들었다. 이것은 대체로 양명좌파적 경향에 더하여 원시유학적 경향을 띤 것으로 보이고 이런 학문적 경향은 그가 서교를 수용하는 사상적 태반으로 기능하였다고 하겠다. 퇴계 이황의 리발(理發)의 철학은 양명학을 비판하기는 하였지만 사상사적으로 볼 때 기호남인들에게 수용되면서 중국에서 양명학이 행한 것과 유사한 기능을 하면서 영향을 미쳤다. 이런 기능이 성호 이익 단계에서 부분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다가 소장성호학파 단계에 이르러 양명좌파적 경향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또 여기에 이익의 원시유학적 경향이 결합되어 이것을 사상적 태반으로 하여 상당수 소장성호학파 사람들이 서교를 수용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이런 소장성호학파 가운데 대표적 인물의 하나가 바로 정약전이었다. 하지만 그는 서교를 떠났다. 정약전의 사상 전개와 관련하여 서교의 영향을 부정할 수 없지만 기본적으로는 조선 주자성리학과 조선 후기 실학의 내재적 · 발전적 길 위에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1. 서언

 

손암(巽菴)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은 주지하듯이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중형(仲兄)이며 1801년 2월 동생 정약종(丁若鍾) · 정약용과 함께 신유교안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이 교안에서 정약종은 ‘순교’(殉敎)하였으나1) 정약전과 정약용은 죽음을 면하고 각기 전라도 신지도와 경상도 장기로 유배 갔다. 그러나 이해 1801년 10월 ‘황사영(黃嗣永) 백서(帛書)사건’이 터지자 두 사람 모두 각기 유배지에서 다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정약전과 정약용은 1801년 봄 신유교안 사건이 터지기 오래전에 이미 서교를 떠났다. 그러나 정약용의 ‘배교’(背敎)와 서교 교단 ‘복귀’(復歸) 여부에 대해서는 기존 연구들에서 논란이 되어 왔다. 필자는 유배 이전 정약용과 서교의 관계를 을묘교안(1795, 주문모[周文謨] 신부 사건)까지 단계적으로 나누어 검토하여 을묘교안과 금정찰방(金井察訪) 부임을 계기로 그는 완전히 서교와 결별하였다고 결론을 내린 바 있다.2)

 

위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정약전과 서교와의 관계에 대한 자료도 함께 살필 수 있었으며 이 문제에 대하여 지견을 조금 갖게 되었다. 아울러 정약전에 대하여도 정약용과 마찬가지로 ‘배교’ 이후 서교 복귀 여부가 문제 되고 있으며 그의 서교(西敎) ‘수용’(受用) 시기 및 서교를 떠난 시기가 중요한 문제임을 알게 되었다.3) 이들 문제의 해명은 정약전 개인과 서교와의 관계만이 아니라 당시 조선 내에서의 서교의 수용 과정 전반 및 조선 후기 사상의 내재적 발전과 서교 수용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리라고 생각된다.4) 본고에서는 범위를 정약전이 흑산도로 유배가기 이전 시기로 한정하여 그의 서교 수용 시기, 서교를 떠난 시기에 대하여 다루기로 한다. 정약전의 ‘서교 복귀’ 여부는 본고의 검토 대상이 아니다.

 

정약전이 이벽(李檗)으로부터 서교에 대하여 처음 들은 것은 일단 1779년 겨울의 주어사(走魚寺) 강학회에서였다고 판단된다.5) 그러나 그가 서교를 수용한 것은 이보다 다소 뒤인 1784년 4월 이후이며 서교 수용 뒤에도, 같은 시기 서교를 수용한 동생 정약용에 비하여 정약전은 다소 소극적이었고 교단과 완전히 결별하는 시기도 정약용보다는 조금 앞선 것으로 보인다.

 

정약전과 서교와의 관련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관련 자료를 망라하여 살펴야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존 관련 자료 가운데에는 신빙성이 의문시되는 것도 있다. 이 문제를 먼저 해명하기로 한다. 이어서 정약전의 생애를 주어사 강학회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그의 수학 과정 · 학문적 경향 및 서교와의 관계를 살펴보고, 결론 부분에서 본론에서의 논의를 요약하고 나서 정약전과 서교 관계에 대한 총괄적 의견을 제시하기로 한다. 그다음 조선 후기 사상사 전개의 흐름 속에서 서교 수용을 어떻게 위치 지을 수 있으며 그 속에서 정약전이 어떤 위치를 점하는지, 그리고 연구의 진전을 위한 앞으로의 과제 등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한다.

 

 

2. 관련 자료의 검토

 

정약전과 관련된 자료로는 정약전 자신의 저작과 다른 개인이 그에 대하여 쓴 자료 및 관찬 자료가 있다. 먼저 다른 개인이 그에 대하여 쓴 자료 및 관찬 자료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정약전에 관한 사실을 추적할 수 있게 하는 자료를 가장 많이 남긴 분은 동생 정약용이다.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는 정약전과 서교와의 관계에 대한 가장 기본이 되는 자료인 <선중씨묘지명>(先仲氏墓誌銘)과 <녹암권철신묘지명>(鹿菴權哲身墓誌銘)이 수록되어 있으며 이 밖에도 <영남인물고서>(嶺南人物攷序), <사촌서실기>(沙村書室記) 등 많은 자료가 수록되어 있다.6) 이들 자료는 정약용의 저술이므로 일단 신뢰도가 가장 높다고 할 수 있겠다. 개인 저술로서 1801년 <황사영 백서>(黃嗣永帛書)에 수록된 기록도 신뢰할 수 있는 자료이고 서교를 공격하기 위해 편집한 《벽위편》(闢衛編)에 수록된 자료들에도 당시 상황에 대한 매우 구체적인 진술이 있다. 필자의 검토 결과, 그들의 벽위적 시각 및 다소간의 과장을 걷어내고 보면 당시의 실상을 알 수 있게 하여 주는 자료이다. 《압해정씨가승》(押海丁氏家乘)에는 정약전의 부친 정재원에 대하여 비교적 상세한 언급이 있으며 이를 통해 정약전의 유년 시절에 대한 추정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7) 정약용에 대한 연보인 《다산연보》 및 《사암선생연보》도 정약전의 생애를 추적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8) 아울러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와 같은 연대기 자료 및 공초문서집인 《추안급국안》 등에도 관련 자료가 남아 있다. 이들 자료 역시 상당히 구체성을 띠고 있으며 심문관과 기록자의 시각을 걷어내고 본다면 신뢰할 수 있는 자료이다. 또 기타 서교 측 자료로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와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가 있다. 이들 두 자료에는 정약용의 기록에 없는 부분인 주어사 강학회에 관하여 덧붙여져 있다. 정약용 자신, 나아가서는 그의 후손들까지도 드러내기를 원치 않았을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언급이 있다. 이것은 서교 측에서 매우 진지하게 개관적 실체를 찾으려는 노력을 한 데에 따른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 점 역시 충분히 고려하여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정약용의 언급을 무조건 믿는 것이 위험할 수 있는 것처럼 서교 측 자료를 글자 그대로 믿는 것도 마찬가지로 위험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 본고에서는 정약용 자신의 자료와 천주교 측 자료 양쪽 모두에 대하여 신뢰성 여부를 검토하면서 최대한 객관적 실체에 접근하도록 노력하기로 한다.

 

다음으로 19세기 후반 서교도들이 편찬한 자료로 생각되는 현존 《만천유고》(蔓川遺稿)에도 정약전에 관한 언급이 있다. 《만천유고》는 현재 가장 논란이 많은 자료이다. 이에 대해서는 비교적 상세히 검토해 보기로 한다. 필자는 1779년 겨울 주어사 강학회를 계기로 하여 소장성호학파 사람들 사이에서 서교에 대한 관심이 집단적으로 촉발되었다고 보지만, 이때 소장성호학파 사람들이 바로 서교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만천유고》에 수록된 <십계명가>에 붙은 “기해년[1779년] 납월[12월] 주어사에서 강론한 뒤 정선암이 권(공)상학, 이(공)총억에게 작사하여 부쳐주었다”(己亥年臘月 於走魚寺講論後 丁選菴 · 權公相學 · 李公寵億 作詞寄之)라는 언급을 근거로9) 정약전이 1779년 겨울 주어사 강학회를 계기로 바로 천주교도가 되어 <십계명가>를 지었다고 하는 견해가 있다. 이 견해는 《만천유고》에 근거하는 것 외에 정약용이 지은 <선중씨묘지명> 및 <녹암권철신묘지명>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방식을 취한다. 하지만 이 점에 대하여 보다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으며 자료상의 문제점 등을 근거로 이를 비판한 연구들이 있다.10)

 

기존의 자료 비판 가운데 정약전의 호는 ‘손암’(巽菴)인데 《만천유고》에서는 ‘선암’(選菴)이라고 된 점, “丁選菴 · 權公相學 · 李公寵億 作詞寄之”이라는 구절을 “정선암(丁選菴)이 권(공)상학, 이(공)총억에게 작사하여 부쳐주었다”라고 해석하는 것은 오류이며 “정선암과 권(공)상학, 이(공)총억이 작사하여 부쳐주었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정약전의 호가 ‘선암’이라고 잘못되었으며 한문 어법상 전자와 같이 해석하는 것은 어색하다는 것이다.11) 이 견해에 필자도 동의한다.

 

이에 덧붙여 필자의 견해를 제시하기로 한다. 첫째, “정선암”이라고 앞에서는 호를 쓰면서 이어서 “권(공)상학”, “이(공)총억”이라고 이름을 그대로 쓴 것은 정상적인 서술이 아니다. 정약용이라면 이렇게 썼을 리가 없다. 이렇게 이름을 쓴 것은 권상학(權相學)과 이총억(李寵億)의 호를 몰랐기 때문일 것인데 정약용이 이들의 호를 모를 리 없다.

 

둘째, 이 《만천유고》의 발문(跋文)에 따르면, 편집자는 ‘무극관인’(無極觀人)이다. 현존 《만천유고》의 언급을 그대로 신뢰하는 연구에서는 이 무극관인을 정약용으로 보았다.12) 무극(無極)=태극(太極)이라는 총체적 리(理)를 부정하며 주자학의 태극을 인격적 주재자로서의 상제(上帝)로 대체한 것이 정약용의 철학적 기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발문 끝부분에서는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라고 하였다. 정약용은 절대로 이런 말을 하였을 리 없으며 ‘무극관인’이라는 호(또는 필명)를 사용할 리 없다.

 

셋째, 정약용이 유배에서 풀린 뒤 신유교안에서 희생된 지우들의 묘지명을 쓰는 등 유적(遺跡)을 정리하다가 이승훈(李承薰)의 잡기와 시문을 발견하고 1830년 무렵 《만천유고》를 편찬했다고 하였다.13) 발문에 “평생 감옥에 갇혀 살다가 죽음을 면하여 세상에 나온 것이 30여 성상”(平生囚獄 死免[於]出世 三十餘星霜)이라고 하였다.14) 정약용은 해배 이후 대략 1822년 전반기에 신유교안에서 억울하게 ‘서교도’로 몰려 죽은 이가환(李家煥), 권철신(權哲身) 및 억울하게 유배 간 이기양(李基讓), 오석충(吳錫忠) 등의 묘지명을 작성하였다. 하지만 이승훈과 셋째 형님 정약종의 묘지명은 작성하지 않았으며 이들에 앞서 1785년 타계한 이벽의 묘지명도 작성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정약용이 ‘조선 천주교회’ 창립의 두 기둥이었던 이벽, 이승훈에 대하여는 묘지명을 쓰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으며 끝까지 서교를 버리지 않고 순교한 형님 정약종에 대하여도 묘지명을 쓸 수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묘지명을 쓴 원래 취지가 신유교안에서 억울하게 당한 분들을 변호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정약용이 이승훈의 유고를 모아 편집하면서 서교 ‘천주교 가사’ 기록을 함께 수록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넷째로 문제가 되는 현존 《만천유고》의 구성을 전체적으로 한 번 살펴보면서 수록된 작품의 저자들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만천유고》는 총 56매(112쪽)이며 1면 9행의 괘지에 쓴 필사본으로서 속표지에 “蔓川遺稿”라 씌어 있고 다음 면에 목록이 있으며 잡고(雜稿) · 시고(詩稿) · 수의록(隨意錄) · 발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잡고에는 <농부가>와 <천주실의발>(天主實義跋), <십계명가>(十誡命歌), <천주공경가>(天主恭敬歌), 한문본 《성교요지》(聖敎要旨)가 수록되어 있다. 시고에는 한시(漢詩) 71수가 수록되어 있고 수의록에는 잡다한 수기(隨記)가 실려 있으며 말미에 발문이 있다.15)

 

현존 《만천유고》에 실려 있는 작품들 가운데 《만천유고》 자체에서 주석을 병기하여 만천의 작품이 아니라고 밝힌 것으로는 잡고 가운데 <십계명가> 외에 <천주공경가> 및 <경세가>(警世歌)가 있다. <천주공경가>에는 “기해년[1779] 납월[12월] 주어사에서 이광암(이벽)이 작사하다”(己亥年臘月 於走魚寺 李曠菴檗作詞)라고 주석이 달려 있으며, <경세가>에는 “이(금대)가환과 김(공)원성이 작사하여 주다”(李錦帶家煥 · 金公源星作詞 寄之)라는 주석이 달려 있다. 그리고 잡고 가운데에는 <천주실의발>(성호 이익) 및 저자 미상의 <농부가>가 실려 있다.

 

이벽이 1779년 겨울 주어사 강학회에서 바로 <천주공경가>를 지었다는 것에 관하여 위 주석 외에는 다른 자료가 없다.16) 이벽 스스로 서교와 ‘천주’(天主)에 대한 확신을 가진 것은 이승훈이 가져온 서교 관계 서적을 1784년 3월과 윤3월에 연구한 이후였다고 생각된다. 이 이전에 이벽이 서교를 선교했다는 기록은 다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다. 이 이전에 이미 있었다면 여러 천주교도를 문초한 기록에 그런 언급들이 분명히 있었을 것인데 그런 기록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17)

 

한편 이가환은 반대파들에 의해 여러 차례 ‘서교의 괴수’로 지목되었지만 그가 서교에 관여하였다는 어떤 분명한 증거도 제시되지 않았다. 이 점은 그가 서교와 관련이 없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 그러나 <황사영 백서>에서는 이가환이 이벽과 토론하여 서교를 받아들인 것처럼 주장하였다.18) 이것은 이가환은 서교와 관계없다는 <정헌묘지명>(貞軒墓誌銘)에서의 정약용의 주장과는 상충된다.19) 이와 관련하여 황사영의 주장을 더 신뢰하여 정약용이 이가환이 서교와 전혀 관계없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일부러 이 사실을 숨겼을 것이라는 의문을 제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약용이 자료를 남기면서 언급을 피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실들을 언급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있지만 그가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거짓말을 하였다면 그의 인격은 믿을 수 없는 것이 되고 그가 서교에 대하여 언급한 부분은 일단 모두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정헌묘지명> 등을 작성하는 1822년 무렵의 시점에서 정약용이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가환과 이벽의 토론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며 이것은 이가환이 어느 정도 서교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이고 또 이가환의 사상적 경향으로 보아서 그가 서교에 호감을 보였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이런 이가환의 태도에 대한 해석에서 정약용과 황사영의 입장이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집요한 반대파들의 공세들 속에서 이가환이 서교 집회에 참가하였다는 주장을 찾을 수 없는 점은 이가환이 비록 어느 정도 서교에 호감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집회에는 참가하지는 않는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는 당시 정조의 탕평정국하에서 이기양과 더불어 차세대 소장기호남인들의 정치적 리더의 위치에 있었다.

 

<황사영 백서>에는 정약용이 서교를 떠났지만 마음속에서는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고 한 언급도 있다.20) 여기에도 황사영의 개인적 판단이 들어가 있다고 판단된다. 정약용은 인격적 주재로서의 상제관을 끝까지 견지하였다. 이런 정약용의 태도를 황사영의 입장에서 해석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정약용은 <황사영 백서>가 쓰여지는 1801년 이전 이미 <변방사동부승지소>(辨謗謝同副承旨疏, 1897년 6월)에서 “서교와의 결별”을 공개적으로 선언하였다.21) 이런 공개 선언을 거짓으로 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정약용의 입장에서는 서교를 떠나는 것과 인격적 주재자로서의 상제관(上帝觀)을 갖는 것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한편 위의 《만천유고》, <경세가>의 주석 가운데 이가환에게는 금대(錦帶)라는 호를 붙이면서도 김원성에게는 호를 붙이지 않고 “김(공)원성”이라고 표현한 것도 어색하다. 그리고 사실 김원성은 1785년 봄 을사추조적발 공서파에 동조한 인물이다. 우리는 이가환은 서교와 전혀 관련이 없는 데에도 정치적 반대파에 의해 억울하게 몰려 죽음을 당한 것을 밝히는 것이 주된 취지인, 정약용 찬술 <정헌묘지명>의 기록을 우선적으로 신뢰하여야 할 것이다. 정약용이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의 찬술과 더불어 지은 이가환, 권철신, 이기양, 오석충, 정약전의 묘지명은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모두 이들이 신유교안에서 억울하게 서교도로 몰려 당한 것을 밝히는 것을 주된 취지로 하였다.22) 이렇게 보면 《만천유고》에서 별도로 저자를 밝힌 주석은 신뢰하기 어렵다. 사실 현존 《만천유고》에 수록된 ‘천주교 가사’가 1779년 겨울 당시 지어졌다고 하는 것은 무리이다. 1784년 4월 이래 이벽의 본격적인 선교에 의해 대략 같은 해인 1784년 연말 무렵 이 땅에 ‘서교 공동체’가 수립된 때로부터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한 시점이라고 생각된다.

 

다섯째로 ‘만천’(蔓川)이 누구인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한다. 《만천유고》의 자료적 가치를 그대로 신뢰하는 종래의 연구에서 만천은 정약전과 정약용의 매부 이승훈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정약용은 이승훈에 대하여 ‘만계’(蔓溪)라는 호를 사용하였다.23) 만계는 서울 인왕산에서 영천 독립문을 지나 서대문 방향으로 흐르는 계천이었으며 오래전 복개되어 현재 도로로 되어 있다. 이승훈의 호가 ‘만계’라면 이승훈이 ‘만천’이라는 호를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만천유고》 가운데 시고와 수의록 부분은 이승훈의 작품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하여는 앞으로 시고, 수의록 부분을 면밀히 검토하는 등 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여섯째로 《만천유고》의 편자 ‘무극관인’이 누구인지 생각하여 보기로 한다. 앞서 이미 무극관인이 정약용일 수는 없다는 점을 밝혔다. 무극관인은 발문에서 스스로 “평생 감옥에 갇혀 살다가 죽음을 면하여 세상에 나온 것이 30여 성상”이라고 하였다. 무극관인이 신유교안에서 죽을 뻔하다가 살아났다면 《만천유고》를 편찬한 시기는 대략 1830년대 초가 된다. 신유교안에서 살아남아 이 시기까지 생존한 사람으로는 정약용 외에 성수(惺?) 이학규(李學逵)가 있다. 이학규는 1828년 5월 4일(추정) 정약용을 찾아온 적이 있으며 이때 정약용은 <증성수>(贈惺?)라는 시를 써 주었다.24) 이학규는 1832년 8월 초순 무렵과 9월 2일에도 정약용을 찾아왔다. 8월 초순 방문 때 정약용이 써 준 시가 바로 <송성수환산>(送惺?還山)이며, 9월 방문 때 써 준 시가 <구월이일성수지>(九月二日惺?至)이다.25)

 

《만천유고》의 발문 끝부분에서 “이 또한 상주(上主)의 광대무변한 섭리이다. 우주의 진리가 이와 같다.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지극히 존재하는 것이다. 각성한 사람은 상주의 뜻을 접한 것과 같을 것이다”(此亦上主廣大無邊之攝理也 宇宙眞理如是也 無極而太極 醒覺者如接上主)라고 하여 ‘상주’라는 표현이 두 번 나와 무극관인이 서교 신자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문제이다. 정약용의 경우 인격적 주재자로서의 천(天) 관념은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지극히 존재하는 것”[無極而太極]을 부정하는 것과 연계되어 있다. 이학규가 서교를 수용하였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그 역시 소장성호학파의 일원으로서 인격적 주재자로서의 ‘천’ 관념을 가졌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으며 이학규의 경우는 정약용처럼 그렇게 깊이 ‘태극’ 문제를 탐구하지 않아서 ‘무극이태극’이라는 주자성리학의 개념이 인격자 주재자로서의 ‘천’ 개념과 모순되는 것을 알지 못하였을 수도 있다. 덧붙여 이승훈이 남긴 시고와 잡문을 찾을 수 있고 이에 대하여 애정을 갖고 정리할 수 있는 사람은26) 현재 우리가 아는 한, 정약용을 제외하면 이학규밖에 없다. 따라서 이학규가 이승훈의 남은 글들을 정리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혹은 지금 우리가 모르는 다른 생존자로, 이승훈을 잘 아는 사람이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다만 이것은 죽을 뻔하다가 살아난 사건을 1801년의 ‘신유교안’으로 보는 전제하에 가능하다. 일단 무극관인이자 발문을 쓴 사람은 신유교안에서 살아남은 소장성호학파의 한 분이며 이학규일 가능성이 있고, 《만천유고》의 처음 편집 시기는 1830년대 초라고 보기로 한다. 이것은 이학규가 1832년 가을 두 차례 정약용을 방문한 것과 대략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이때 두 사람이 과거를 회고하였을 가능성은 매우 크며 그렇다면 당연히 이승훈에 대하여도 말이 미쳤을 것이다.

 

한편 한글본 《셩교요지》의 말미에 “차 성교요지 책자는 옛 이벽 선생 만드신 구결이라. 임신년 정아오스딩 등 서우약현서실이라”는 기록이 있다.27) 이 임신년을 ‘1812년’이라고 하는 견해가 있으나28) 의문이 간다. 이렇게 1812년이라고 본다면 필사자 정 아오스딩이 정약용이 아니라는 것은 “서우약현서실”(書于藥峴書室)이라고 한 것에서 분명하다. 현재 서울 염천교 건너편 중림동 부근이 약현(藥峴)이다. 필자는 이 임신년을 1872년으로 보고자 한다. 정약용은 1812년 강진에 있었으며 1872년은 정약용이 이미 타계한 뒤이다. 그리고 이학규는 1812년에는 유배지(김해)에 있었으며 1872년은 나이로 보아서 이미 타계한 뒤일 것이다. 따라서 두 분 다 한글본 《셩교요지》의 필사자가 될 수 없다. 한글본 《셩교요지》 필사 부분의 원고지 판심에 ‘掌禮院’이라고 인쇄된 부분이 있다. 이 부분은 조선조 장례원의 원고지를 사용하여 필사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한글본 《셩교요지》의 필사 시기는 1872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정 아오스딩 등이 필사와 번역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였다고 여겨진다.

 

1872년은 1866년 시작되어 약 8년간 계속된 병인교안이 아직 지속상태에 있으므로 이 위험한 기간에 서울에서 이런 위험한 작업을 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므로 필사 시기를 1932년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을 수 있다. 이렇게 필사 시기를 1932년으로 보고 “30여 성상”을 역산해 보면 1870년 무렵이 된다. 이것은 1870년을 전후한 ‘병인교안’ 시기와 잘 부합된다. 그렇다면 30여 년 전의 교안은 병인교안을 말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한글본 《셩교요지》가 조선조 시기에 이루어진 것은 확실하므로 1932년은 필사 시기가 될 수 없다. 이상과 같은 점들에서 생각해 보면 무극관인을 일단 1801년의 신유교안에서 살아남은 사람으로 보는 것에 타당성이 있다.

 

현재 한국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된 현존 《만천유고》(한문본 《성교요지》 포함)와 한글본 《셩교요지》는 별도의 책으로 되어 있다. 한글본 《셩교요지》가 한문본 《성교요지》를 번역한 것이므로 한문본 《성교요지》는 1872년 이전에 지어진 것이 확실하다. 원래 《만천유고》의 편집(제1차 편집) 시기를 1830년대 초라고 볼 때 현존 《만천유고》의 편집 시기가 언제일지 문제이다. 필자는 바로 한문본 《성교요지》를 한글본 《셩교요지》로 번역, 필사하는 작업이 이루어진 1872년 무렵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즉 무극관인(이학규 혹은 다른 신유교안 생존자)이 편집한 제1차 《만천유고》는 현존 《만천유고》 가운데 시고 · 수의록 부분만을 편집하여 1830년대 초 당시 발문을 붙인 것이다. 그러나 임신년(1872년) 정 아오스딩 등이 《성교요지》의 번역, 필사 작업을 하면서 같은 시기에 《만천유고》를 제2차로 편집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29) 물론 약간의 시차는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일단 제2차 편집 작업은 대략 1872년 무렵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하고자 한다. 이 제2차 편집 과정에서 ‘천주교 가사’와 한문본 《성교요지》가 포함된 잡고를 추가하였고 동시에 작자에 대한 주석도 붙였을 가능성이 크다. 편집 체제상 잡고가 시고 부분보다 앞에 있는 것은 매우 어색하며 더욱이 잡고 가운데 이승훈 작이라고 확정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이 점에서 잡고 부분은 추가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제2차 편집 작업이 이루어진 것은 이승훈, 이벽 관련 자료 및 기타 초기 천주교 관련 자료들을 한꺼번에 모으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겠다.

 

1872년 무렵(추정) 제2차 편집본 《만천유고》 필사 시기에는 우리말 ‘천주교 가사’들이 널리 유포되어 있었을 것인데 이런 상황에서 초기 서교의 수용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을 작자로 생각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필사자가 의도적으로 ‘왜곡’하려 한 것이 아니라 그 무렵 서교도들 사이의 추정과 소문을 기록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당시 서교도들이 아마도 1839년 기해교안에 이어서 1866년 이후 8년간이나 지속된 병인교안을 겪는 절박한 환경 속에서 이벽, 정약전 등 초기 서교도와 신유교안을 회상하면서 자신들의 믿음과 소망을 공고히 하는 가운데, 주어사 강학회 등에 대한 소문도 퍼져나갔다고 생각된다.30) 이런 가운데 천주교 가사들의 저자를 주어사 강학회 참석자들로 생각하게 되었고, 정약용이 만년 서교에 다시 돌아왔을 것이라는 소문도 이런 분위기에서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31) 다만 잡고 작품들에 작자가 누구인지 주석을 붙인 사람은 주어사 강학회 참석자들 및 소장성호학파의 내부 인물들이 누구인지 비교적 잘 알고 있었다고 여겨진다.32) 이상의 논의에 의거해 보면 정약전이 1779년 겨울 강학회에 참석한 뒤 바로 <십계명가>를 지었다는 것은 상당히 의심스럽다. 따라서 <십계명가>는 자료로 이용하지 않기로 한다.

 

한편 다른 개인들이 정약전에 대한 남긴 자료들이 있을 수 있다. 스승 권철신, 1776년 상경 이후 절친한 친구였던 이윤하(李潤夏), 이승훈, 김원성 및 천진암 · 주어사 강학회에 함께 참여하였던 권상학, 이총억 그리고 1790년 겨울 이후 가깝게 지냈던 한치응(韓致應), 윤영희(尹永僖), 이유수(李儒修), 윤지눌(尹持訥) 등이 남긴 글들을 검토한다면 더 많은 관련 자료를 발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고 작성 과정에서는 미처 살펴보지 못하였다.

 

다음으로 정약전 자신의 저작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그의 저작에 대하여 정약용은 <선중씨묘지명>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공(인용자 : 정약전)은 찬술에 게을러서 저작이 많지 않다. 《논어난》(論語難) 2권, 《역간》(易柬) 1권, 《현산어보》(玆山魚譜) 2권, 《송정사의》(松政私議) 1권이 있으며 모두 해중(海中 : 인용자, 흑산도)에서 지은 것이다.33)

 

위에서 든 정약전의 저서들 가운데 종래 《현산어보》만 널리 알려져 왔다. 그러나 원래 정약용의 《주역사전》에 정약전 저작으로 《현산역간》(玆山易柬)이 수록되어 있으며 최근 《송정사의》가 발견되었다. 이렇게 보면 정약용이 언급한 《논어난》, 《(현산)역간》, 《현산어보》, 《송정사의》 가운데 현재 발견되지 않은 것은 《논어난》 뿐이다.34) 《논어난》은 정약전이 《논어》에 관하여 논한 글들을 정약용이 모은 것이다. 정약용이 1812년 무렵 《논어고금주》를 저술하면서 형제 사이에 서신을 통해 《논어》에 대한 토론이 있었고 이 가운데 정약전이 언급한 부분을 정약용이 정리하여 둔 것이 바로 《논어난》이다. 필자는 정약용의 《논어고금주》에서 정약전의 《논어》에 대한 언급을 찾아서 《논어난》을 재구성하고자 하였으나, 이상하게도 현존 《논어고금주》에서 정약전의 《논어》에 대한 언급을 인용한 부분은 찾을 수 없었다.

 

한편 정약용이 언급한 정약전의 저서들 외에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열수전서》와 규장각 소장 《여유당집》에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정약용과 주고받은 편지들이 수록되어 있었으나 주목받지 못하다가 최근에 이르러서 관심을 받게 되었다.35) 또 최근 연세대 소장 《여유당집》(1책)을 검토하여 이 책의 첫 번째 잡문을 수록한 부분에 정약용의 잡설이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정약전의 글이 실려 있는 사실, 이 책의 두 번째 부분 즉 <여유당시집> 부분에 손관(巽館)이라는 호(號) 아래 정약전의 시가 아울러 실려 있다는 사실36) 및 세 번째 부분 의(議) 형식의 글을 수록한 부분에 정약용의 <호적의>(戶籍議), <신포의>(身布議), <도량형의>(度量衡議) 외에 정약전의 《송정사의》(松政私議)가 실려 있는 사실 등이 알려지게 되었다.37)

 

아울러 흑산도의 어부 문순득(文淳得)이 자신의 동남아 표류와 귀환 과정을 구술하여 이를 토대로 정약전이 지은 <문순득표류기>가 최근 발견되었다. 이 역시 정약전의 저작에 포함시킬 수 있다. 새롭게 알려지게 된 저작들 외에 정약용의 <승암문답>(僧菴問答)에는 정약전의 <예론>(禮論)이 실려 있으며 규장각본 및 장서각본 《문집》에는 <매씨상서평서>(梅氏尙書平序)와 <주역사해서>(周易四解序) 등 정약전의 잡문이 수록되어 있다. 이상 정약전 자신의 저작들은 그의 사상을 살피는 데 큰 도움을 주지만 대체로 흑산도 유배 이후에 저술된 것들이며 그의 삶 자체와 관련된 정보는 거의 주지 않는다. 본고에서는 이들 저작의 성립 과정, 저작 시기 및 내용 등에 대한 구체적 검토는 하지 않고 이에 대한 검토는 후고에서 행하기로 한다.

 

 

3. 주어사 강학회 이전(1758~1779)

 

《가승》에 따르면 정약전은 1758년(영조 34) 3월 1일 출생하였다.38) 1762년 6월 출생한 정약용보다 4살 위가 된다. 정약전의 자(字) 천전(天全)이고 호(號)는 ‘손암’(巽菴)이다. 이 손암이라는 호는 바다에 들어갔다는 의미(‘손’[巽]은 주역(周易)의 손괘(巽卦)로서 들어간다는 뜻)에서 붙인 것이다.39) 따라서 손암은 흑산도 유배 이후에 사용된 호이다. 정약전의 부친은 정재원(丁載遠)이며 모친은 해남(海南) 윤씨(尹氏)이다.

 

부친 정재원은 본관이 압해(押海)로서 그의 집안은 숙종 대 이래 기호남인계에 속하며 정치적으로는 정조 대의 남인 재상 채제공(蔡齊恭)의 도움을 받았다. 따라서 대체로 청남(淸南) 계열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정재원의 집안은 청남 계열만이 아니라 흔히 ‘탁남’(濁南)이라고 비하되었던 허적(許積) 집안 등과도 교분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가승》에 따르면 정약전의 부친 정재원은 1745년(영조 21) 4월 의령 남씨에게 장가들었으나 1752년 10월 상처하였다. 정재원의 맏아들 정약현(丁若鉉, 1751년 5월 6일생)은 이 분 의령(宜寧) 남씨(南氏) 소생이다. 정재원은 1753년(영조 29) 7월 다시 해남 윤씨에게 장가들었으나 1770년 11월 다시 상처하였다.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은 이 분 해남 윤씨(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후손이며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의 손녀) 소생이다.40)

 

1770년 11월 해남 윤씨가 돌아가셨을 때, 부친 정재원에게는 의령 남씨 소생의 정약현 외에 해남 윤씨 소생의 둘째 아들 정약전, 셋째 아들 정약종, 넷째 아들 정약용이 있었다. 해남 윤씨는 1758년 3월 1일 정약전을 낳은 뒤, 1760년 3월 10일 정약종을 낳았고 1762년 6월 16일 정약용을 낳았다. 해남 윤씨는 아들 세 분 외에 따님 한 분을 낳았는데 이 따님이 이승훈에게 시집갔다. 따라서 정약전과 이승훈은 처남 · 매부 사이가 된다. 이 따님의 출생 연도는 확실하지 않으나 정약용이 이승훈에 대하여 ‘이형’(李兄)이라고 호칭하였으므로 정약용보다는 손위가 된다.41)

 

먼저 1776년 이전 정약전의 행적을 추적하여 보기로 한다. 이 시기에 관한 자료는 별로 남아 있지 않지만 《가승》 가운데 부친 정재원에 대한 기록과 《다산연보》와 《사암선생연보》를 통해서 그 편린을 엿볼 수 있다. 그의 행적을 출생지, 거주지, 수학 과정 등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가승》에 따르면 부친 정재원은 1762년 3월 10월 생원시에 합격하여 3월 17일 만령전 참봉에 임명되었다(정약전 5세).42) 이리하여 그는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아가게 되었다. 다만 3월 21일 사은(謝恩)한 다음 광주 초천의 집으로 내려가 있어서, 3월 25일 국왕 영조가 찾았으나 입시할 수 없었다. 만령전 참봉으로 근무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자 3월 21일 이후 잠시 집에 내려갔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1762년 3월 정재원의 출사에 바로 이어서 이해 5월 22일 ‘사도세자’(思悼世子)가 역모를 꾀하였다는 고변이 있었고 윤5월 13일 부왕의 명령으로 유수(幽囚)되었던 사도세자는 윤5월 21일 죽음이 확인되었으며 당일 사도세자라는 시호를 받았다. “임오년(1762) 3월 말 정약용의 부친 정재원이…출사를 포기…고향 마재로 발길을 돌렸다”고 하는 견해가 있다.43) 그러나 《사암연보》에서는 “이 해 국가에 차마 말 못할 변고(인용자 : 임오화변)가 있어서 부친 진주공(인용자 : 정재원)은 향리로 돌아갈 것을 결심하였는데 공(인용자 : 정약용)이 마침 태어나 이 이름(인용자 : 아명 귀농[歸農])을 붙여주었다”라고 하였다.44) 따라서 부친 정재원이 관직에서 물러나 향리인 광주 초천으로 돌아온 것은 사도세자가 서거한 윤5월 21일 이후 6월 16일(정약용 출생일) 이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대략 1762년 3월 말 무렵에서 윤5월 하순(혹은 6월 초) 무렵까지는 만령전 참봉으로 근무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만령전 참봉으로 근무할 때 정약전을 포함하여 가족들을 데리고 갔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지만 부인 해남 윤씨가 당시 만삭에 가까웠으므로(정약용 6월 출생) 초천에 머무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약전 역시 계속 초천에 머무르고 있었을 것이다. 정재원은 처음 출사 이전에는 대체로 본가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1758년 3월 태어난 정약전의 출생지는 서울이 아니라 초천이었으며, 출생 후 적어도 1762년 3월까지 대체로 초천에 살았을 것이고 부친이 만령전에 근무하는 1762년 3월 말 무렵에서 윤5월 하순(혹은 6월 초) 무렵까지의 기간에도 초천에 머무르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가승》에 따르면 1762년 11월 9일 전주 소재의 경기전(慶基展) 참봉직과 만령전 참봉직을 맞바꾼 것[相換]으로 되어 있다.45) 부친 정재원이 만령전 참봉직을 윤5월 말(혹은 6월 초) 사직하였지만 사표를 수리하지 않고 있다가 11월 9일 경기전 참봉직과 맞바꾸어 이에 발령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가승》에 따르면 부친 정재원은 11월 16일 사은하였으며 11월 17일 임금께 하직을 고하고 길을 떠났다.46) 그렇다면 임지인 전주 경기전에는 대략 11월 20일 무렵 도착하였을 것이다. 이 중동(仲冬)에 모친 해남 윤씨가 6월 태어난 갓난아기 정약용을 데리고 전주까지 따라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자녀들도 초천에 머물렀을 것이므로 정약전 역시 광주 초천에 계속 머무르고 있었을 것이다. 정재원은 1764년(영조 40, 정약전 7세) 3월 29일 희릉 참봉(禧陵參奉)에 임명되었다.47) 1762년 11월 부임 이후 이때까지 그는 단신으로 전주에 체재하고 있었고 가족들은 초천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정재원이 희릉 참봉에 임명된 뒤 가족들이 함께 희릉(한양 인근) 부근으로 이사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어서 1765년 6월 26일 정재원은 내섬시(內贍寺) 봉사(奉事 : 종8품)에 임명되었다.48) 내섬시의 봉사는 내직(內職)이므로 부친 정재원은 한양에 거주하여야 했을 것이다. 이때부터 1766년 12월 연천(漣川) 현감에 임명될 때까지49) 계속 내직에 근무하였으므로(1765년 12월 의금부 도사 임명, 1766년 4월 사재감 주부, 1766년 6월 형조 좌랑)50) 1765년 6월부터 1766년 12월까지 가족들이 함께 한양에 살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하여 《사암연보》에 아무런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가족들은 초천에 그냥 살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다산연보》에 따르면 정약용이 처음 서울을 구경한 것은 1769년(8세, 정약전 12세) 때이다.51) 부친 정재원을 따라서 정약전 등 가족이 임지에 가는 것은 정재원이 연천 현감으로 임명되고 나서일 것이다. 즉 1766년 12월까지는 모친 해남 윤씨가 정약현,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4형제와 딸을 광주 초천에서 키우고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다. 따라서 이때까지 정약전(당시 10세) 역시 초천에 살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52)

 

한편 《다산연보》와 《사암연보》에 따르면 정약용은 1765년(영조 41, 4세) 《천자문》(千字文)을 배우기 시작하였다.53) 이때 정약전은 8세이므로 정약용보다 앞서서 1765년 이전 향리 초천에서 수학(修學)을 시작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초천 시기에 배운 것은 천자문 등 초급 수준의 한학(漢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정재원의 가족은 대략 1767년(영조 43, 정약전 10세) 1월 초 무렵 연천으로 이사하였고54) 대략 정재원의 임기 만료(1770년 12월)까지 연천 관아에 살았을 것이다.55) 다만 정약전의 모친 해남 윤씨는 1770년 11월 9일 타계하였다.56) 이때 정약전은 13세로서 어린 나이에 충격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 연천 시절에 정약전 형제들이 학업을 닦고 있었을 것이지만 부친 정재원이 공무로 바빠서 직접 가르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1771년 1월 향리 초천에 돌아온 정재원은 자녀들과 집에 머무르면서 정약전(14세), 정약용(10세) 등 아들들을 가르쳤다.57) “수학경사”(受學經史)라고 하였으므로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수준 높은 학업이 시작되었다고 하겠다. 부친 정재원이 관직을 하지 않고 거가독서(居家讀書)한 기간은 1771년 1월부터 1776년 3월 영조의 서거 때까지로 대략 5년 남짓이 된다. 이 기간 중 정재원은 자신도 공부에 몰두하여 1774년 대과(大科)에 응시하지만 낙방하였다.58) 정약전 형제들의 학문은 이 기간에 행해진 부친의 교육으로 확고하게 기초가 잡혔을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정재원의 저작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아서 그의 학문적 경향을 잘 알 수는 없으나 숙종 대 기호남인계 학자 정시한(丁時翰) 등의 가학(家學)을 계승한 위에 성호학파 계통의 학문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이때 정재원이 아들들을 가르친 것은 과거(科擧) 준비를 위한 것이므로 주자성리학적 경향의 학문을 가르치는 데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때 정재원은 자신도 대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만 이런 가운데에서도 성호학파적인 성향이 은연중 다소 전수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1774년 여름 정재원은 서울에서 과거에 낙방하고 돌아오는 길에 광나루에서 장맛비로 지체되어 10여 일 머물렀으며 겨우 초천에 이르렀으나 비가 더욱 심하여 귀로에 만난 수백 명(기호남인계 인물)을 시골집에 나누어 머무르게 하였다.59) 이들 기호남인은 거의 다 과거에 낙방하였는데 그것은 남인이라는 당색 탓이었다. 당시 17세의 정약전은 이 광경을 직접 목격하고 이들의 실정을 들었을 것이며 이것은 부친의 학문적 · 정치적 성향과 함께 아마도 후일 그의 정치적 · 학문적 성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여겨진다.60)

 

한편 정약전의 부친 정재원은 1773년(정약전 16세) 서울에서 잠성(岑城) 김씨를 아내로 맞이하였다.61) 이 분이 정재원의 세 번째 부인으로서 정약전에게 ‘서모’(庶母)가 되며 이때부터 정재원의 가족은 잠성 김씨의 헌신적인 보살핌 아래 생활의 안정을 찾게 되었다.62) 다만 서울에서 잠성 김씨를 맞이하였다고 하여 정재원이 서울로 이사하여 살게 되었다는 뜻은 아니고 서울 출신을 맞아들였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잠성 김씨를 맞이한 이후 정재원 가족은 계속 초천에서 살고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1776년 3월 4일 부친 정재원은 판탁지(判度支)에 임명되었으며 그는 자청하여 호조 좌랑(戶曹佐郞)이 되었다.63) 이때는 영조가 서거하기 직전이며 세손 정조가 이미 대리청정을 하고 있었다(전년도인 1775년 12월부터). 이 시기에 홍국영(洪國榮), 채제공 등이 정조를 도왔으며 정재원이 다시 출사하게 된 데에는 채제공의 도움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당시 채제공이 호조판서였기 때문이다. 정재원이 판탁지에 임명된 다음 날, 3월 5일 영조가 서거하자 정재원은 인산 준비를 위해 다시 원릉도감(元陵都監) 낭청(?廳)에 임명되었다.64) 이 역시 채제공의 배려에 따른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채제공이 3월 10일 국장도감(國葬都監) 제조(提調)에 임명되었기 때문이다.65) 이어 1776년 6월 20일 부친 정재원은 제용감(濟用監) 판관(判官)으로 승진하였다.66)

 

1776년 3월 다시 관직에 나아가게 된 부친 정재원은 대략 6월 하순 제용감 판관에 임명된 이후 서울 명례방 소룡동(小龍?)에 집을 마련한 것으로 여겨진다. 제용감 판관으로 임명되기 전에는 원릉도감 낭청의 일로 매우 바빴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해 2월 혼례를 치른 정약용 부부는 이때부터 부친을 모시면서 이 소룡동 집에 살게 되었다.67) 정약전과 정약종은 정약용에 앞서서 이미 장가를 갔을 것이다. 이들이 결혼 후 어디에 살고 있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으나, 정약전과 정약종은 분가를 하였겠지만 계속 초천의 본가 부근에 살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1777년 정약용이 입춘일 소룡동 부친의 경저(京邸)에서 지은 시, <춘일제용동옥벽>(春日題龍?屋壁)에서 “소룡동은 명례방에 있으며 병신년(1776) 여름 아버님이 이곳에 사시게 되었다”(小龍? 在明禮坊 丙申夏家大人 僑居于玆)라고만 하였을 뿐 다른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 정약전, 정약종 부부는 이곳에 살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지며 맏형 정약현 부부 역시 초천에서 본가를 지키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1776년 봄 부친 정재원이 다시 한양에서 벼슬하고 이해 6월 이후 한양에 살게 된 것을 계기로 하여 정약전은 한양으로 올라와 살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이에 대하여 후술).

 

다음으로 1776년 이후 정약전의 삶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1776년 봄 부친 정재원이 다시 한양에서 벼슬하게 되었을 당시 정약전은 19세였으며 부친의 출사와 상경을 계기로 정약전 역시 상경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선중씨묘지명>에 따르면 정약전이 “서울에 노닐게 되면서 이윤하, 이승훈, 김원성과 절친한 친구가 되어 이들과 성호 이익의 학문을 이어받아서 주자학을 거쳐서 수 · 사학(공 · 맹의 원시유학)에 나아가 서로 덕을 닦고 공부하였다”라고 하였다.68) 이 인용문에서 “서울에 노닐게 되면서부터”를 1776년 부친이 다시 벼슬을 하게 되어 서울에 살게 되면서부터라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친이 벼슬을 않고 향리에 있는데 아들이 별다른 이유 없이 상경하여 산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정약전이 서울로 와서 사귄 친구들 가운데 김원성은 이미 1774년 권철신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왔으며69) 이윤하, 이승훈도 권철신의 문도였다고 한다.70) 이들은 기호남인계 인물로서 모두 소장성호학파의 리더 녹암 권철신의 제자라고 할 수 있겠다. 위 인용문에서 “성호 이익의 학문을 이어받아서 주자학을 거쳐 수 · 사학에 나아가 서로 덕을 닦고 공부하였다”라고 하였으므로 1776년 상경을 계기로 하여 본격적으로 성호학파의 학문에 접하였다고 할 수 있으며 성호학파 가운데 권철신을 중심으로 하는 소장성호학파의 학문이었다.71)

 

이상에 논의에 따르면 정약전의 학문적 토대는 부친 정재원의 거가독서 때의 가르침으로 형성되었고 이때의 학문은 대체로 과거 준비와 관계되는 주자성리학 계열의 학문이었으리라고 추정된다. 다만 부친이 기호남인 계열이었고 또 상경 이전 이미 권철신의 제자가 되었을 가능성 및 이미 성호학파적인 경향을 어느 정도 갖고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1776년 상경 이후 1779년 강학회까지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정약전이 소장성호학파의 학문에 침잠하고 이어서 이것이 서교로의 관심으로 연결되기까지의 시기이다. 이 시기 정약전의 행적으로 주목되는 것 가운데 하나로 1777년 9월 화순 현감에 임명된 부친 정재원을 뵙기 위해 1778년 가을 이전 화순으로 내려가 이해 중동(仲冬)에 동생 정약용과 화순 동림사에서 40일간 함께 독서한 일을 들 수 있다.72) 그러나 이 독서는 정약전의 사상적 발전과 큰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누구의 가르침 없이 단지 동생 정약용과 둘이서 함께 부지런히 독서하였고 정약용 역시 이때 독서와 관련하여 특기할 사상적 내용을 언급하지 않았다. 1779년 2월 정약용이 서울에 올라가 과거 문체 공부를 하라는 부친의 명령으로 서울로 가게 되는데 이때 정약전도 함께 올라왔다.73) 서울에 올라온 정약용은 1779년 9월 초 감시(監試 : 소과)에 실패하는데74) 이때 정약전도 함께 응시하였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감시에 불합격한 정약용은 이해 1779년 9월 하순 무렵 다시 화순에 내려갔다가 연말에 있을 태학승보시 준비와 응시를 위해 9월 하순(혹은 10월 초) 다시 서울에 올라왔으며 연말 무렵 이 태학승보시에 합격하였다.75) 정약용의 별다른 언급이 없으므로 이때 정약전이 함께 왕래한 것 같지는 않으며 그는 태학승보시에도 응시하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이해 겨울 주어사 강학회에 참가하기 때문이다. 동생 정약용은 아직 본격적으로 소장성호학파의 학문에 깊이 젖어들기 이전이라서 과거에 대한 집착이 아직 강하였던 데 비하여 정약전은 이미 소장성호학파의 학문에 깊이 젖어들어 과거에 대한 생각이 줄어들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1776년부터 1779년 사이 정약전의 사상적 경향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는 찾기 어렵다. 기존의 연구 가운데에는 권철신이 1769년 초 복암(茯菴) 이기양을 통해 양명학을 수용하였으며 이 양명학이 정약전을 포함한 소장성호학파 인물들이 서교를 수용하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는 견해가 표명되었다.76) 권철신을 중심으로 하는 소장성호학파의 학문에 양명학적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며 이것을 권철신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77)

 

<녹암권철신묘지명>에서 권철신의 학문 가운데 《대학》(大學) 해석과 관련하여 정약용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내가 듣기로는 대학을 논하여 격물(格物)이란 물(物)에 본말이 있다는 그 물(物)을 격(格)하는 것이며 치지(致知)는 지(知)에 선후가 있다는 그 지(知)를 치(致)하는 것이라고 하였다.78)

 

위와 같은 권철신의 《대학》 해석은 왕양명의 후학 가운데에서도 좌파 쪽의 해석과 궤를 같이하며 주자성리학의 근본 명제, “인간을 관통하여 하나의 리(理)=태극이 존재한다”라는 주장을 부정하는 것이다. 정약전은 당연히 이 해석을 따랐을 것이며 이 해석을 정약용은 아마도 정약전을 통해 전해 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권철신이 《대학》 해석에서 양명좌파의 흐름을 따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자연과 인간이 분리되어 인간의 도(道)의 실천성, 주체성이 더욱 강조되게 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서교를 수용하기 위한 토대가 마련되지는 않는다. 《중용》(中庸) 서두에서 말하는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의 천(天)이 “로고스로서의 이법(理法)”이 아니라 ‘인격적 주재자’, 원시유교의 표현을 빌리면 ‘상제’(上帝)로 해석되어야 한다. 권철신은 《중용》의 “듣지 못하는 바와 보지 못하는 바는 하늘의 소리 없음과 냄새 없음이다”라고 해석하였다. 하지만79) 이것만으로는 그가 인격적 주재자로서의 천=상제를 상정하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해석은 어느 정도 인격적 주재자로서의 천=상제라는 해석으로 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해석은, 권철신의 학문에 대하여 <녹암권철신묘지명>에서 그의 학문에 대하여 “성호 선생께서는…낙 · 민학(洛 · ?學 : 송학)을 거쳐 수 · 사학(洙 · 泗學 : 공맹의 원시유학)으로 거슬러 올라가…후학에게 가르쳐 주었다. 성호가 만년에 제자를 하나 얻었는데 이분이 녹암 권공이다”라고 하였다.80)

 

이 인용문에 따르면 성호 이익이 녹암 권철신에게 전해 준 학문이 원시유학적 경향이라는 말이 된다. 원시유학에는 천(天)을 이법(理法)이 아니라 인격적 주재자로서의 상제로 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선중씨묘지명>에서는 정약전의 학문적 경향에 대하여도 권철신과 동일하게 “성호의 학문을 받들어 주자학을 거쳐 수 · 사학을 거슬러 갔다”라고 하였다.81) 아울러 1779년 겨울 강학회는 매우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이에 대하여 후술). 나중에 이벽이 찾아와 온 뒤에도 이런 종교적 분위기는 지속되었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토론이 전개되었을 것이다.

 

정약용은 이 토론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강학회 언급에 바로 이어서 “그 뒤 7년째에(인용자 : 1785) 비방(인용자 : 을사추조적발사건)이 생기게 되었다”라고 하였다.82) 이 점에서 보면 1779년 주어사 강학회 당시 이벽에 의해서 서교와 유교 경전을 연결시켜 해석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것이 이미 천(天人)=인격적 주재자로서의 해석으로의 길을 가고 있었던 권철신을 포함한 소장성호학파 사람들 사이에 일정 부분 공감을 얻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리하여 토론이 밤새 진행되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결국 소장성호학파 사람들 사이에서 서교에의 관심이 촉발되었으며 이후 정약전을 포함하는 일부 소장성호학파의 학자들을 점차 서교 수용의 방향으로 이끌었다고 여겨진다.

 

덧붙여 양명좌파는 인간 평등관과 신분제 부정이 있는 점에서도 서교와의 친연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이미 양명좌파의 신분제 부정에 공감하고 있었던 소장성호학파의 사람들이 서교에 매력을 느낀 것은 살아있는 ‘천주’의 역동성 외에, 이런 천주가 인간과 세계를 창조하여 인간은 모두 동일한 천주의 피조물이라는 신앙이 있는 점에도 기인한다고 여겨진다. 이것은 바로 인간 평등관으로 연결되므로 당시 주자성리학적 신분 질서에 회의하고 있던 소장성호학파의 청년 지식인들을 강하게 서교로 이끄는 매력이 있었을 것이다. 서양의 중세 기독교가 인간 평등적인 것은 아니지만 당시 소장성호학파의 청년 지식인들로 하여금 ‘서교의 본질’ 속에서 이런 점을 보게 하였고 이것은 결과적으로 조선의 초기 서교 공동체에 인간 평등관, 신분제 부정의 분위기가 강하게 되도록 하였다고 생각된다. 바로 이 점이 서교가 조선 사회에서 그토록 강하게 박해를 받게 되는 한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83)

 

 

4. 주어사 강학회 이후(1779~1801)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정약전은 1776년(19세) 부친을 따라 상경한 이후에 서울에 거주하는 소장성호학파의 인물들과 교유하게 되었다. 상경 이전 이미 권철신의 제자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선중씨묘지명>의 “서울에 노닐게 되면서 이윤하, 이승훈, 김원성과 절친한 친구가 되어 이들과 성호 이익의 학문을 이어받아서 주자를 경유하여 공 · 맹에 나아가 서로 덕을 닦고 공부하였다”라는 언급에서 보면84) 상경 이후 본격적으로 소장성호학파의 사상에 젖어들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정약전은, 1778년 가을 이전 어느 시점에 부친의 임지 화순에 갔다가 다음 해 1779년 2월 이전 동생 정약용과 함께 돌아온 기간을 빼고는, 1776년 상경 이후 대체로 서울 혹은 때로는 향리 초천에 머무르면서 소장성호학파의 학문 탐구에 몰두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이리하여 자연스럽게 1779년 겨울 권철신이 주도한 주어사 강학회에 참석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이 1779년 겨울의 주어사 강학회는 기본적으로 유교적인 것이었으며 매우 경건한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85) 아마도 처음에는 천진암에서 진행되다가 부근의 주어사로 장소를 옮기게 되었고(앞에서 서술), 나중에 이벽이 참여하면서 새로운 토론이 전개되었다. 정약용은 이 토론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 뒤 7년째에(인용자 : 1785) 비방이 생기게 되었다”라고 하였다.86) 이 점에서 보면 이벽에 의해서 서교와 유교 경전을 연결시켜 해석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현존 자료에 관한 한 1779년 겨울 주어사 강학회 때 이벽이 《중용》의 천(天)을 확고하게 ‘인격적 주재자’로 해석하고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779년 겨울 그 당시에도 이벽은 어느 정도 서교의 가르침이 유교의 가르침을 보충할 수 있다는 보유론적(補儒論的) 견해를 갖고 있었고 소장학파 사람들은 이를 이해할 수 있는 사상적 토대가 마련되어 있어서 토론이 밤새 진행되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결국 소장성호학파 사이에서 서교에의 관심이 촉발되었다고 생각된다. 이벽 또한 이를 계기로 스스로 서교에 대한 관심을 더욱 크게 하였고 이것은 이승훈의 관심을 크게 촉발하였다고 여겨진다.87)

 

주어사 강학회 언급에 바로 이어서 이승훈에 대한 언급이 있다.88) 이 언급이 있는 것은 이승훈이 부친 이동욱(李東郁, 동지사 서장관)을 따라서 1783년 가을 북경으로 가서 이해 겨울 서교 신부들과 접촉한 일이 이벽의 참여로 촉발된 주어사에서의 서교 관련 논의와 연결되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1783년 가을 이승훈이 북경으로 가게 되는 시점에서는 두 사람 사이에 서교에 대한 믿음이 상당히 진전되어 있었으며 이에 따라 이승훈이 이해 겨울 북경의 천주교회당을 방문하고 세례를 받는 동시에 여러 서교 관련 서적을 갖고 오게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아마도 천주교회당 방문에 대하여는 이승훈과 이벽과 사이에 당연히 사전 상의가 있었을 것이다.

 

<선중씨묘지명>에서는 이승훈에 대한 언급에 바로 이어서 이벽과 정약전의 학문적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일찍이 이벽과 종유하게 되면서 역수(曆數)의 학(學)과 《기하원본》(幾何原本)을 탐구하여 그 심오한 이치를 분석하였다. 마침내 신교(新敎)의 가르침을 듣게 되면서는 매우 기뻐하였다. 온몸으로 종사하지는 않았다.89)

 

위 인용문에서 정약전이 이벽으로부터 먼저 배운 것은 서학 가운데 역수와 기하학 같은 것이었고 종교적인 것은 아니었으며 나중에 서교에 대하여 듣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벽으로부터 정약전이 서교에 대하여 듣는 것은 1784년 4월 15일 초천에서 큰 형수의 제사를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였다.90) 따라서 이 1784년 4월 15일 시점에 앞서서 이벽에게서 서양의 과학, 수학 등에 대하여 배운 것으로 판단하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 부분과 <선중씨묘지명> 말미의 “이벽으로부터 《천주실의》, 《칠극》 등 책 몇 권을 얻어 보았다”라는 언급이 합쳐져서 주어사 강학회의 후반부가 이벽이 온 뒤에 일어난 일에 대한 ‘서교 측 서술’, 즉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와 달레의 기록으로 남게 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위 인용문 가운데 “마침내 신교의 가르침을 듣게 되면서는 매우 기뻐하였다. 온몸으로 종사하지는 않았다”(遂聞新敎之說 欣然以悅 然不以身從事)라는 구절 가운데 “마침내 신교의 가르침을 듣게 되었다”라고 한 것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784년 4월 15일 정약전의 첫 부인 경주 이씨의 제사를 마치고 한양으로 오는 배 안에서 동생 정약용과 함께 이벽으로부터 서교에 대한 가르침을 들은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글의 맥락상 자연스럽다. 물론 정약전은 1779년 주어사 강학회 이후 서교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이벽이 서교에 대해 한 말을 단편적으로 들은 적이 있었을 수 있지만 본격적으로 들은 것은 1784년 4월 15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이벽은 이승훈으로부터 대략 1784년 3월 무렵, 북경 천주교당 방문과 세례받는 일에 대하여 들었을 것이고 3월과 윤3월 이승훈을 통해 얻게 된 서교 관련 서적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뒤에 대략 1784년 4월 무렵부터 본격적인 선교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그 이전 이벽의 선교에 대한 자료는 찾아지지 않는다. 집중적 연구의 결과 인격적 주재자로서의 ‘천=상제’라는 생각과 서교에 대한 믿음을 확고하게 갖게 되었을 것이다. 이벽의 첫 선교 대상자들 가운데 정약전과 정약용이 있었다. 이리하여 정약전은 동생 정약용과 더불어 ‘서교도’가 되었다. 그러나 위 인용문에서 보았듯이 정약전이 “온몸으로 종사한 것”은 아니었다.

 

다음으로 정약전의 신앙생활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이벽의 열성적인 선교에 의하여 조선에서 서교 공동체가 1784년 후반 서서히 성립되어 갔다. 이리하여 1785년 초(혹은 1784년 말)부터 공식적인 집회가 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1785년 3월에 적발(이른바 을사추조적발사건)되기까지 모임이 여러 차례 정기적으로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모임에 정약전은 동생 정약용과 함께 참여하였다. 이에 대하여 《벽위편》에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다.

 

을사년 봄에 이승훈과 정약전 · 정약종 등이 장례원 앞 중인 김범우의 집에서 설법하였다. 이벽이라는 자가 있어…두건을 머리에 쓰고 어깨에 늘어뜨리고 벽 앞에 앉아 있었다. 이승훈 및 정약전 · 정약종 · 정약용 3형제 및 권일신…부자(인용자 : 권일신 · 권상학 부자)가 모두 제자라고 칭하였다. 책을 끼고 모시고 앉아서 있었고 이벽이 설법을 하였다. 우리 유가에 비교하여 사제의 예가 더욱 엄격하였다. 날짜를 약속하여 집회를 하였으며 모인 것이 자못 몇 달이었고 모인 자가 수십 명이었다.91)

 

위 인용문은 공서파에 의해 작성된 것이지만 진술이 매우 구체적이어서 믿을 수 있다. 따라서 정약전은 동생 정약용과 함께 이 모임에 참석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위의 자료에서는 정약종도 언급하였지만 그는 이 시점에서는 아직 서교에 관계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92) 이렇게 서교 모임이 적발된 이후 부친 정재원은 정약전, 정약용 두 아들의 서교 관여를 적극적으로 만류하였으며 정약용에 대하여는 한집에 살게 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때 정약전이 서교 신앙을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고 여겨진다. 적어도 1786년 3월까지는 서교 신앙을 유지하기 때문이다(후술). 다만 을사추조적발사건 이후 한양에서의 서교 모임은 자제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약전의 신앙생활에 대하여 알 수 있는 다른 자료로서 1801년 봄 신유교안 때 정약종의 진술이 있다.

 

(정약종) 공초하여 말하기를, “병오년(인용자 : 1786) 3월 과연 이 학문(인용자 : 천주교)을 제 중형(인용자 : 정약전)에게서 듣고 저는 지금(1801년 : 신유교안 당시)까지 이 학문에 빠져 있습니다”라고 하였다.93)

 

위 인용문을 통해 우리 1786년 3월 정약전이 동생 정약종에게 서교에 대하여 말해 주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정약종이 서교에 입교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정약전은 적어도 1786년 3월 단계까지는 서교 신앙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이벽은 을사추조적발사건 이후 정부와 집안의 압박 아래 번민하다가 1785년 초가을 무렵 이미 타계하였다.94) 그러나 이벽의 사후 서교 관련 활동을 재개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이런 움직임 속에서 1787년 연말 성균관 앞 반촌(泮村) 김석태의 집에서 서교 관련 모임이 있었다(정미반회사건). 이에 대하여 공서파 측의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정미년(인용자 : 1787년) 겨울 이승훈, 정약용 등이 과거를 위한 글을 짓는다는 핑계로 반촌(성균관 앞의 마을) 김석태의 집에 모여 연소배들을 끌어들여 설법을 하였다. 이기경이 가서 그들이 지은 과거 글을 보니 대체로 거칠고 미완의 것이었다. 괴이하여 “그대들의 과거 공부는 원래 정밀하였는데 지금 이렇게 거친 것은 어찌 된 일인가. 다른 일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라고 하니, 모두 얼굴빛이 달라지고 땀을 흘렸다. …진사 강이원이 그때 자리에 있었는데 나와서 다른 사람에게 서양서의 이름과 서교의 예식을 모두 말하였다.95)

 

위의 기록을 보면 정약용은 1787년 겨울 (음력) 12월에 있었던 정미반회에 참가하였으나 정약전이 참가하였다는 언급은 없다.96) 참가하였다면 언급하지 않았을 리 없다. 1783년 가을 소과에 급제한 정약전은 1790년 가을 (음력) 8월 대과에 급제할 때까지 성균관 유생이었을 것이므로 그는 1787년 연말(12월)에 있었던 정미반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1801년 신유교안 때 정약전이 추국 과정에서 “정미년에 이르기까지 미혹되었다”라고 하였고 <선중씨묘지명>에서는 “신해 겨울 이래 나라의 금지가 더욱 엄하여져 경계가 분명하게 되었다”라고 하였다.97) 일단 정약전은 1784년 4월 이벽에게서 서교에 대하여 듣고 처음에는 몰입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몰입 과정에서 벗어났다고 볼 수 있겠다. 문제는 어느 시점에서 정약전이 서교를 떠났는가 하는 점이다. 스스로 정미년까지 미혹되었다고 하므로, 1787년 12월 정미반회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일단 이때까지는 아직 서교와 거리를 두고 있지는 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그가 1801년 추국 시점에서 정약전이 “정미년에 이르기까지 미혹되었다”라고 한 말을 혹시 축소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후 1790년대에 여러 교안에서 그가 언급되면서도 그가 인정한 것 외에 다른 서교 간여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이 말은 신뢰할 수 있다. 1787년 12월 정미반회에 정약전이 참가하지 않은 데에는 어떤 우연적 요인이 있었을 수 있다.

 

하지만 정미반회가 1788년 1월부터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문제 되자 정약전은 이를 계기로 서교와 서서히 거리를 두게 되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이 추정은 “정미년에 이르기까지 미혹되었다”는 그 자신의 말과 합치된다. 즉 다음 해 무신년(1788)부터는 미혹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는 말이 된다. 또 정미반회 이후 ‘서교 공동체’ 내에서 제사 폐지론이 나오기 시작하고 북경의 천주교회에서 이를 공식적으로 확인하게 되는 것도 그가 서교에서 멀어지는 데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리하여 <선중씨묘지명>에서 “신해 겨울 이래 나라의 금지가 더욱 엄하여져 경계가 분명하게 되었다”라고 한 것처럼 1791년 신해교안을 계기로 서교와 완전히 단절하게 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아울러 1791년 신해교안을 계기로 동생 정약용도 서교와 거리를 두게 되었으며 그 역시 1795년 주문모(周文謨) 사건을 계기로 서교와 완전히 결별하였다.98)

 

1795년 주문모 사건이 일어나자 이해 7월 공서파 박장설이 목만중의 사주를 받고 정약전을 이가환과 함께 모함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것은 서교와의 관련을 직접적으로 고발하는 것이 아니었다. 정약전이 오행(五行)을 버리고 서양의 사행(四行)을 따랐다는 것이었다. 이런 공서파의 주장마저도 근거 없는 것이었으며 이 점은 당시 국왕 정조에 의해서 명백하게 밝혀졌다.99) 정약전의 대책문 작성 시기가 1790년이므로 공서파들이 이 이후에 대한 증거는 찾을 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1795년 정약전은 국왕 정조의 도움으로 서교도라는 죄목에서 벗어났으나 1797년 가을까지 벼슬길이 지체되어 있었다. 이에 대하여 안타깝게 여긴 국왕 정조는 1797년 가을 정약용을 외직 곡산 부사로 내보내는 것과 때를 맞추어 이해 7월 11일 정약전을 승륙(陞六 : 정6품에 오르는 것)시켰다. 이어서 성균관 전적(典籍)에 임명하였으며, 이해 12월 19일 병조 좌랑에 낙점하였다.100)

 

병조 좌랑에 임명된 다음 해 1798년 겨울 《영남인물고》의 편찬에 참여하라는 왕명을 받았다.101) 《영남인물고》를 편찬케 한 의도는 영남남인들을 등용하기 위한 기초 자료로 삼기 위한 것이었고 여기에는 국왕의 의중 외에 채제공의 생각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후 정약전은 1799년 2월 4일 감군(監軍) 수점(受點)을 받아 내사(內司)에 입직한 것이 확인되지만,102) 이해 4월 29일 신헌조의 탄핵을 받자 신병을 핑계로 체직을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103) 정약전은 이해 8월 2일 솔가하여 낙향하였으며 이때 친구 윤무구와 동생 정약용도 동행하였다.104) 낙향한 뒤에는 스스로 당호를 ‘매심당’(每心堂)이라고 하고서105) 조용히 지냈다.

 

그러나 정약전은 신유교안에 연루되어 1801년 2월 8일 체포되었다.106) 하지만 서교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은 것이 밝혀져 2월 25일 차율을 적용하여 전라도 신지도로 유배가 결정되어 2월 26일 이 명령이 내려졌다.107) 이때까지도 관계를 단절하지 않고 있었다면 죽음을 면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리하여 2월 29일 유배 길을 떠나서108) 대략 3월 10일 무렵 유배지 신지도에 도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지도에서의 정약전의 생활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신지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정약전은 이해 1801년 10월 황사영 사건이 터지자 10월 20일 무렵(추정) 신지도에서 다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10월 27일 무렵(추정) 다시 옥에 감금되었다.109) 다시 입옥된 정약전은 11월 1일 의금부 옥에 있다가 추국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110) 그러나 관련 없음이 밝혀져 11월 5일 흑산도 유배가 결정되었고 이날 정약용 강진현 유배, 이학규 김해 유배 역시 결정되었다.111)

 

불행 중 다행으로 정약전은 동생 정약용과 같이 유배 길을 떠나게 되어 11월 21일 형제가 나주 율정(栗亭)에 도착하여 이날 밤 이곳에서 묵었으며 다음 날 동생 정약용과 헤어져 흑산도로 향하였다.112) 흑산도로 간 정약전은 유배에서 풀리지 못한 채 1816년 6월 6일 흑산도 우이보(牛耳堡) 아래에서 타계하였다.113) 앞으로 흑산도 시절 정약전의 삶을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그가 서교로 복귀하였는지 여부를 밝혀내는 길도 될 것이다.

 

 

5. 결어

 

먼저 이상 본론에서의 논의를 요약하기로 하기로 한다.

 

첫째, 《만천유고》를 검토한 결과 여기에 수록된 <십계명가>는 정약전의 저작이라고 보기 어렵다.

 

둘째, 한글본 《셩교요지》는 1872년 정 아오스딩 등에 의해 번역, 필사되었으며 현존 《만천유고》는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졌다(제2차 편집).

 

셋째, 만천은 이승훈의 호로 보이며 그의 다른 호로 만계가 있다.

 

넷째, 제1차 편집본 《만천유고》는 1830년대 초에 이학규 또는 신유교안에서 살아남은 다른 사람에 의하여 편찬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정약용은 《만천유고》의 편자가 될 수 없다.

 

다섯째, 《만천유고》의 제2차 편집 시에 ‘천주교 가사’ 등이 추가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여섯째, 현존 《만천유고》 및 천주교 측 자료에는 의도적인 왜곡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기해교안 이후, 그리고 대원군 집정기 당시 어려운 상황에 있었던 당시 서교도들의 소망과 믿음이 담겨 있다고 판단된다.

 

일곱째, 정약전의 출생지는 당시 광주(廣州)의 초천으로 추정되며 1776년 상경 이전까지는, 부친의 연천 현감 재직 시기를 제외하면, 대체로 초천 본가 또는 인근에 거주하였다. 이런 가운데 부친의 가거 시에 학문의 기초를 다졌으나 이것은 대체로 과거 준비를 위한 주자성리학 계열의 학문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여덟째, 정약전은 1776년 상경 이전 이미 권철신의 제자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본격적으로 소장성호학파의 학문에 젖어든 것은 1776년 상경 이후이다.

 

아홉째, 정약전은 1779년 겨울 주어사 강학회에 참석하였으며 강학회는 처음 천진암에서 시작되었으나 얼마 뒤 주어사로 장소를 옮겼다.

 

열 번째, 주어사 강학회는 기본적으로 유교적인 것이었으나 종교적인 분위기가 강하였다.

 

열한 번째, 주어사 강학회에 이벽이 참여하고 나서 보유론적 관점에서 서교와 유교와의 관계를 논하는 토론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열두 번째, 이런 식의 토론이 가능하였던 것은 권철신을 비롯한 소장성호학파의 학문이 이미 양명좌파 및 원시유학적 경향으로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열세 번째, 이 강학회에 바로 이어서 정약전이 <십계명가>를 지었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열네 번째, 1779년 겨울 강학회 이후 정약전은 이벽을 통해 역학(曆學)과 《기하원본》 등을 접하였으나 서교에 본격적으로 접하지는 않았다.

 

열다섯 번째, 1784년 4월 15일 정약전은 서울로 오는 배 안에서 동생 정약용과 함께 이벽으로부터 서교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들었다.

 

열여섯 번째, 이후 정약전은 이벽으로부터 서교 관련 서적들을 얻어 보고 서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

 

열일곱 번째, 정약전은 (음력) 1784년 말(혹은 1785년 초)에 시작되어 이후 1785년 3월 무렵까지 몇 달간 정기적으로 지속된 서교 집회에 동생 정약용과 함께 참석하였다. 다만 정약전은 동생 정약용보다는 다소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열여덟 번째, 정약전은 1785년 서교 집회가 적발된 이후 부친 정재원의 제지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적어도 동생 정약종에게 서교를 전해준 1786년 3월까지는 신앙을 유지하고 있었다.

 

열아홉 번째, 1787년 말의 이른바 정미반회의 서교 집회에 정약전은 참여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를 계기로 점차 서교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 이것은 ‘초기 서교 공동체’ 내에서 제사 폐지론이 나온 것과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스무 번째, 1791년 신해교안을 계기로 정약전은 서교와 완전히 결별하였다.

 

스물한 번째, 정약전의 <대책문>(1790년 작성)이 서양의 4원소설을 받아들였다는 상소가 주문모 신부 사건 직후인 1795년 7월 올라왔으나 국왕 정조에 의해 사실무근임이 밝혀졌다.114)

 

스물두 번째, 정약전은 벼슬길이 지체되었다가 1797년 가을 승륙하여 겨울 병좌 좌랑에 임명되었다.

 

스물세 번째, 정약전은 1798년 겨울부터 《영남인물고》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영남인물고》는 영남 남인을 등용하기 위한 기본 정보서로 작성되었다.

 

스물네 번째, 정약전은 1799년 4월 신헌조의 탄핵을 받고 물러났다가 이해 가을 낙향하였다.

 

스물다섯 번째, 정약전은 1801년 2월 신유교안에 연루되었으나 죽음을 면하고 이해 2월 말 신지도로 유배 길을 떠났으며 동생 정약용은 경상도 장기로 유배 길을 떠났다.

 

스물여섯 번째, 1801년 겨울 정약전은 황사영 사건에 연루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았으나 관련 없음이 드러나 흑산도로 유배가 결정되었다.

 

스물일곱 번째, 정약전은 동생 정약용과 함께 유배 길에 올라 1801년 11월 하순 나주 율정에 도착하였고 이곳에서 형제가 이별하였다.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갔다.

 

스물여덟 번째, 정약전은 1816년 6월 흑산도 우이보 아래에서 타계하였다.

 

스물아홉 번째, 본고에서는 초기 서교 공동체에서 정약전이 행한 역할 및 위치에 대하여는 미처 살피지 못한 점이 한계로 남는다.

 

이상의 내용을 따르면 정약전이 서교를 수용한 것은 1784년 4월 이후이며 적어도 1786년 3월까지는 비교적 열심이었고 1787년 연말 정미반회사건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점차 서교와 멀어지게 되었고 1791년 신해교안을 계기로 서교와 완전히 결별하였다. 1795년 7월과 1799년 4월에도 서교와의 관련이 있다고 모함당했으나 새로운 증거는 찾을 수 없었다. 1801년 2월 신유교안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나 이미 서교와 관계를 끊은 것이 문초 중 밝혀졌고, 1801년 겨울 다시 황사영 백서사건에 연루되었으나 관계없음이 밝혀져 죽음을 면하고 흑산도로 유배 길을 떠났다. 1795년 이후 1801년까지 여러 차례 모함이 계속되었으나 공서파에서는 아무런 서교 관련 증거도 제시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관계를 끊었다는 증거만이 드러났다. 이것은 이미 1787년 정미반회를 계기로 점차 서교에 거리를 두고 있던 정약전은 1791년 신해교안을 계기로 서교와 완전히 결별하였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다음으로 조선 후기 사상사의 흐름 속에서 서교 수용을 어떻게 위치 지을 수 있으며 그 속에서 정약전이 어떤 위치를 점하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정약전은 1776년 상경 이후 본격적으로 소장호성학파의 학문에 젖어들었다. 이것은 대체로 양명좌파적 경향에 더하여 원시유학적 경향을 띤 것으로 보이고, 이런 학문적 경향은 그가 서교를 수용하는 사상적 태반으로 기능하였다고 하겠다. 퇴계 이황의 리발(理發)의 철학은 양명학을 비판하기는 하였지만 사상사적으로 볼 때 기호남인들에게 수용되면서 중국에서 양명학이 행한 것과 유사한 기능을 하였다.115) 이런 기능이 성호 이익 단계에서 부분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다가 소장성호학파 단계에 이르러 양명좌파적 경향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또 여기에 이익의 원시유학적 경향이 결합되어 이것을 사상적 태반으로 하여 상당수 소장성호학파 사람들이 서교를 수용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이런 소장성호학파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 하나가 바로 정약전이었다. 하지만 그는 서교를 떠났다. 정약전의 사상 전개는 기본적으로 조선 주자성리학과 실학의 내재적 발전의 길 위에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서교의 영향을 부정할 수는 없으며 정약전의 사상적 발전은 기본적으로 조선 후기 사상사의 내재적 발전의 길 위에 있으면서 ‘서교’의 영향을 일정 부분 수용하면서 이루어져 간 것으로 판단된다.116) 이를 밝힐 수 있는 자료는 많지 않지만 4원소설의 유래, 흑산도 시절 동생 정약용과 주고받은 편지 속에 표현된 그의 경학관(經學觀)을 통해 살피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는 인격자 주재자로서의 천(天) 개념을 유지하였을 것으로 여겨지고 이러한 천(天)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평등적 인간성(仁)을 부여하였다는 생각을 여전히 갖고서 더 발전시키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 점은 유배 이후의 동생 정약용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정약전과 정약용을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아마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들에게서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 이를 믿는 자의 구원, 그리고 원죄 관념 같은 것은 찾을 수 없다.

 

끝으로 정약전 연구의 진전을 위한 추후의 과제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한다. 첫째, 현재 알려지고 있는 정약전의 저작을 모두 모아서 가칭 《정약전전집》(혹은 《손암전집》)을 간행하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논어난》 외에 정약전의 저작이 대체로 거의 모두 확인되고 있다. 전집의 간행은 우선 영인본 형태로 간행하고 이어서 《교감 · 표점 여유당전서》와 같은 표점 · 교감본을 만들 필요가 있다. 전집의 서두에는 <해제>를 붙여 《전집》의 의의와 문헌학적 문제들을 다루기로 하며 말미에는 <정약전 연보> 및 <연구 문헌 목록>을 붙이면 좋을 것이다.

 

둘째, 《정약전전집》의 말미에 <연보>를 붙이기 위해 그의 행적에 대하여 가능한 치밀하고 정확하게 <연보>를 작성하는 것이다. 이 작업을 필자는 이미 진행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타인의 정약전 관련 자료 및 관찬 사료, 즉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및 《추안급국안》 등과 천주교 측 자료 외에 정약전이 젊은 시절 스승으로 섬겼던 권철신 및 동문수학하였던 권상학, 이총억 그리고 유배 이전 교유하였던 이가환, 이승훈, 채홍원, 권일신, 윤지범, 한치응 등과의 관련 사항 등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이들이 남겼을 자료와 기타 자료를 이용하여 유배 이전의 행적을 다시 면밀하게 조사하여 보충할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우선 흑산도 유배기 시절의 행적을 현지답사 등과 기타 문헌 자료를 통해 면밀하게 조사하여 보충할 필요가 있다.

 

셋째, 이런 기초 작업 위에서 정약전의 초기 사상적 경향이 어떠하였고 이것이 어떻게 매개되어 서교 수용으로 가는지의 문제, 신앙생활과 교단 결별의 과정, 흑산도 유배기 정약전의 경학 이해 및 개혁 사상 등을 보다 실증적 사실들에 토대하면서 정치한 이론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이런 작업들을 통해 정약전의 서교 수용 이전과 수용 이후 신앙기, 서교 결별기, 유배기의 사상적 변화, 발전 과정을 체계적, 단계적으로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정약용의 학문적 동반자인 또 하나의 위대한 학자를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또 정약전에 대한 이런 연구는 소장성호학파의 학문적 전개와 발전 과정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데에도 도움을 줄 것이다.

 

끝으로 필자 개인적으로는 흑산도 유배기 정약전의 사상적 전개를 살펴보면서 이 시기 ‘서교에의 복귀’ 여부, 정약전의 4원소설과 서학과의 관계 및 4원소설이 그에게 흑산도 유배기까지 견지되었는지 여부, 흑산도 시기의 경학관 등을 검토하고 여기에 본고에서 미처 살피지 못한 초기 서교 공동체에서 정약전이 행한 역할 및 위치에 대하여도 보충하는 논문을 작성하는 것을 추후의 과제로 설정해 두고자 한다.

 

 

참고 문헌

 

서종태, <녹암 권철신의 양명학 수용과 그 영향>, 《국사관논총》 34, 국사편찬위원회, 1992.

- - -, <손암 정약전의 실학사상>, 《동아연구》 34, 1992.

- - -, <천진암 주어사의 강학과 양명학>, 《이기백선생고희기념 한국사학논총》(하), 일조각, 1994.

- - -, <주어사의 실체와 권철신의 강학>, 《부산교회사회보》 65, 2010.

윤민구,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 국학자료원, 2002.

이이화, <이승훈 관계문헌의 검토 - 만천유고를 중심으로>, 《교회사연구》 8, 1992.

정두희, <천주교 신앙과 유배의 삶, 다산의 형 정약전>, 《역사비평》 11, 1990.

조성을, <근기학인의 퇴계학 수용과 실학 - 한백겸과 유형원을 중심으로>, 《국학연구》 21, 2012. 12.

- - -, <정약용과 교안>, 《한국실학연구》 25, 2013. 6.

주명준, <정약용 형제들의 천주교 신앙활동>, 《전주사학》 1, 1984.

차기진, 《조선 후기의 서학과 척사론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최기복, <조선조 천주교회의 제사금령과 다산의 조상제사관>, 《한국교회사논문집》 2, 1985.

- - -, <천주교회의 유교제례 금령과 다산의 상제례관>, 《교회사연구》 39, 2012. 12.

하성래, <정약전의 십계명가와 이벽의 천주공경가(1)>, 《신학전망》 21, 1973. 6.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한국천주교회사》, 2009.

허경진, <새로 발견된 손암 정약전의 시문집에 대하여>, 《남명학연구》 36, 2012.

 

--------------------------------------------------

 

1) 본고에서는 천주교 관련 사건을 객관적 입장에서 접근하기 위해 ‘교안’(敎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한다. 이는 중국학계에서의 용어를 차용한 것으로 여기에는 조선과 중국 및 일본의 ‘천주교’ 사건을 비교하여 접근해야 한다는 의도도 있다. 또 ‘천주교’(天主敎)라는 용어 대신 ‘서교’(西敎)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한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천주교는 외래적인 것이며 유교와 불교가 우리나라에 수용되어 ‘우리 독자적인 것’으로 발전되었던 것에 비하여 천주교는 아직 우리 독자적인 것이 되지는 않았다는 생각, 또 앞으로 우리의 독자적인 것이 발전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따른 것이다. 다만 현재 한국 천주교의 사상적, 종교적 내용을 잘 모르는 데 따른 소치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필자는 우리 천주교와 교회사를 객관적 입장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이것은 신앙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는 판단을 갖고 있다.

 

2) 조성을, <정약용과 서교>, 《한국실학연구》 25, 2013. 6, 40~406쪽. 정약용 만년(晩年)의 서교로의 복귀 여부는 추후 검토할 예정이다.

 

3) 정약전에 대한 기존의 연구로는 다음의 논문들이 참고된다. 하성래, <정약전의 십계명가와 이벽의 천주공경가(1)>, 《신학전망》 21, 1973. 6 ; 주명준, <정약용 형제들의 천주교 신앙활동>, 《전주사학》 1, 1984 ; 최기복, <조선조 천주교회의 제사금령과 다산의 조상제사관>, 《한국교회사논문집》 2, 1985 ; 정두희, <천주교 신앙과 유배의 삶, 다산의 형 정약전>, 《역사비평》 11, 1990 ; 서종태, <손암 정약전의 실학사상>, 《동아연구》 34, 1992 ; 허경진, <새로 발견된 손암 정약전의 시문집에 대하여>, 《남명학연구》 36, 2012 ; 최기복, <천주교회의 유교제례 금령과 다산의 상제례관>, 《교회사연구》 39, 2012. 12.

 

4) 다만 필자로서는 우리 서교의 역사에 대해 문외한이므로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존의 연구에 의존하였다. 차기진, 《조선 후기의 서학과 척사론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 윤민구,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 국학자료원, 2002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한국천주교회사》, 2009.

 

5) 필자는 1779년 겨울의 강학회는 처음 천진암(天眞菴)에서 시작되었으나 무슨 사정으로 주어사로 옮겨가서 진행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주어사에서 시작되었다가 천진암으로 옮겨갔다는 견해도 있어 두 견해가 현재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주어사에서 시작되었다가 천진암으로 옮겨갔다는 견해는 주어사 자리가 권철신의 집에 가까운 양근(楊根)에 있고 천진암은 더 멀리 광주(廣州)에 있다는 지리적 위치와도 관련된다. 즉 양근의 권철신 집에서 더 가까운 주어사를 마다하고 1779년 이전에 있었던 강학회 모임들을 굳이 천진암에서 진행하였을까 하는 의문이다. 그러나 주어사와 천진암의 거리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되며 다른 참석자들의 거주지 문제, 천진암과 인근 기호남인계 가문과의 특수한 관계(일종의 원찰[願刹] 기능을 하고 있었을 가능성) 등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정약용의 <녹암권철신묘지명>에서는 ‘천진암 · 주어사’라 하였고 같은 정약용의 <선중씨묘지명>에서는 ‘주어사’라고만 하였다.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 따르면 이벽은 다른 절에 갔다가 밤중에 눈 속에 찾아온 것으로 되어 있다. 이벽이 처음 다른 절에 간 것은 1779년 겨울의 강학회 이전에 그 절에서 모임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 절이 바로 천진암이며 이벽이 천진암에 갔다가 주어사로 찾아온 것으로 보면 순조롭다. 정약용은 처음 천진암에서 시작되었다가 주어사로 옮겼기 때문에 ‘천진암 · 주어사’라고 구절 모두를 기록하였고 <선중씨묘지명>에서는 1779년 겨울 강학회의 특기할 부분이 주어사로 옮겨간 이후이므로 ‘주어사’만 명기한 것으로 보인다. 만일 주어사에 있다가 천진암에서 시작되었다가 주어사로 옮겨간 것이라면 <녹암권철신묘지명>에서 ‘주어사 · 천진암’이라고 표현하였을 것이다. 다른 결정적 자료가 발견되지 않는 한, 1779년의 강학회는 천진암에서 시작되었다가 주어사로 옮겨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된다. 이 문제는 본고에서의 주된 관심이 아니므로 이상의 점만 간략히 언급하여 두기로 한다. 이에 대한 기존의 논의에 대하여는 다음의 연구가 참고된다.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한국천주교회사》(2009)의 제2장 조선 천주교회의 성립 제1절 주어사 · 천진암 강학회와 천주교(227쪽 이하). 이 밖에 선행 연구로 원재연, <다산 정약용과 서학/천주교의 관계에 대한 연구사적 검토 - 다산의 천주교 신앙문제를 중심으로 ->, 《교회사연구》 39, 2013도 정약용과 서학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것이기는 하지만 초기 서교 연구사를 살피는 데에 도움이 된다.

 

6) 이하 《여유당전서》를 《전서》로 약칭하며 본고에서 사용한 것은 《교감 · 표점 정본여유당전서》, 다산학술문화재단, 2012. 12이다. 이하 쪽수는 이를 따른다. 《영남인물고》는 영남의 주요한 인물을 정리한 책이다. 국왕 정조와 남인 정승 채제공은 기호남인 세력을 보충하기 위해 영남 남인들을 등용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으며 일정 부분 실행하기도 하였다. 이런 배경 아래 영남 남인의 등용을 위한 기본 인사 정보 자료로 정리한 것이 바로 《영남인물고》이며 정약전도 이 책의 편집에 참여하였다. 정약용이 1799년 이 책에 대한 서문으로 쓴 것이 <영남인물고서>이다. 정약용이 강진 읍내에서 학동들을 가르친 것과 마찬가지로 정약전도 흑산도에서 서당을 열고 학동들을 교육하였다. 이에 대한 기록이 바로 <사촌서실기>이다.

 

7) 이하 《가승》으로 약칭하기로 한다. 본고에서 사용한 것은 정갑진 · 정해렴 역주, 《압해정씨가승》, 현대실학사, 2003이다. 이 책은 뒤에 원문이 붙어 있으며 본고에서의 인용 쪽수는 이 책의 것을 따른다.

 

8) 본고에서 이용한 《사암선생연보》는 규장각 소장본을 저본으로 한 영인본(정문사, 1984)이다. 이하 쪽수는 이 책을 따르며 《사암연보》라 약칭한다.

 

9) 하성래, 앞의 논문, 《신학전망》 21 ; - - -, 《천주가사연구》, 성황석두루가서원, 1985 ; - - - 역, <머리말>, 《국역 · 영인판 성교요지》, 성황석두루가서원, 1986 ; 김옥희, 《광암 이벽의 서학사상》, 가톨릭출판사, 1979. 3.

 

10) 조광, <한국천주교회의 기원 - 가설에 관한 역사성 문제>, 《그리스도교와 겨레문화》 3, 기독교문사, 1991 ; 주명준, 앞의 논문, 《전주사학》 1 ; 서종태, 앞의 논문, 《동아연구》 34. 이들 논문 외에 《만천유고》의 자료적 문제점을 검토한 논문으로 이이화, <이승훈 관계문헌의 검토 - 만천유교를 중심으로>, 《교회사연구》 8, 1992가 주목된다.

 

11) 주명준, 앞의 논문, 《전주사학》 1, 90쪽. 이에 앞서서 하성래, 앞의 논문, 《신학전망》 21, 144쪽에서도 “기해년 12월 주어사에서 강론을 마친 뒤 정손암과 권상학과 이총억이 지어주다”라고 해석하였다.

 

12) 하성래 역, 《국역 · 영인판 성교요지》, 11~12쪽.

13) 하성래, 위의 책, 12쪽.

14) 《만천유고》, <발>.

15) 하성래 역, 《국역 · 영인판 성교요지》, 10쪽. 현존 《만천유고》는 현재 한국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6) 이벽이 《성교요지》를 편찬했다는 기존의 견해에 대하여도 의문이 있다. <황사영 백서>에서 정약종이 《주교요지》를 편찬한 사실은 언급하였지만, 이벽이 《성교요지》를 편찬한 사실에 대한 언급은 없다.

 

17) 주어사 강학회에서 이벽은 보유론적 관점에서 서교와 유교 경전의 관계를 주장하여 토론이 벌어졌을 것으로 추정되지만(후술) 이것을 선교라고 볼 수는 없다.

 

18) 김영수 역, 《황사영 백서》, 성황석두루가서원, 1998, 58~60쪽.

19) 《전서》 3, 203쪽 이하.

20) 김영수 역, 《황사영 백서》.

21) 조성을, 《여유당집의 문헌학적 연구》, 혜안, 2004, 247쪽.

22) 《전서》 3, 203~247쪽.

23) 《전서》에 정약용이 이승훈에게 보내는 편지 <與蔓溪>(1 · 2), <答蔓溪>(1 · 2 · 3 · 4) 등이 수록되어 있다. 《전서》 4, 110~114쪽.

24) 조성을, 《여유당집의 문헌학적 연구》, 196~197쪽.

25) 위의 책.

 

26) 발문에서 “先賢知舊何處去哉…蔓川公之行蹟 伶文不少矣 然不幸(於)燒失 一稿不得見 千萬意外 詩稿雜錄片書有之 故劣筆(於)抄記 曰蔓川遺稿 東風解冬”이라고 하여 각별한 애정을 표시하였다.

 

27) 한글본 《셩교요지》 첫째 쪽(하성래 역, 《국역 · 영인판 성교요지》에 수록된 것을 인용, 원본은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본고에서 현대어법으로 다소 수정하고 띄어쓰기를 하였다. 한글본 《셩교요지》는 한문본 《聖敎要旨》를 번역한 것이라고 한다. 위의 책, 14쪽.

 

28) 하성래 역, 《국역 · 영인판 성교요지》, 15쪽.

 

29) 다만 현재 한국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된 《만천유고》와 한글본 《셩교요지》의 입수 경위 및 두 책의 지질 · 제본 · 필체 등을 더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30) 1872년은 대원군 집정기로서 1866년 병인교안 이후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하기까지 서교 탄압이 장기간 지속되었다. 이에 대하여는 유홍렬, 《고종치하의 서학수난의 연구》, 을유문화사, 1962 참조.

 

31) 이런 현상은 어떤 점에서 평안도 농민전쟁에서 홍경래가 죽었는데도 그가 살아 있다는 소문이 끈질기게 퍼진 것과 같다. 주어사 강학회에 관련된 서교 측 자료로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 가운데 언급된 것이 있다(윤민구, 《한국천주교회의 기원》, 국학자료원, 2002, 64쪽 이하에 <비망기>가 작성되어 있다. 본고 작성 과정에서는 이를 이용하였음). 이를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서의 주어사 강학회에 대한 언급과 비교하여 본 결과 후자의 주어사 강학회 관련 언급은 <비망기>에 의거한 것이다. 다블뤼 주교는 1845년 김대건 신부와 더불어 조선에 온 분으로서, 자신의 글이 정약용의 자료에 근거하였다는 사실을 밝히기도 하였다(윤민구, 《한국천주교회의 기원》, 50 및 72~73쪽). 이런 점에서도 그는 확실한 근거에 토대하여 객관적 실체를 추구하던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그는 조선의 천주교회사에 대하여 진지하게 접근하였고 의도적 왜곡을 가할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주어사 강학회에 대한 언급(연도를 1777년이라고 잘못 기록하고 있음)에서 정약용의 <선중씨묘지명> 및 <녹암권철신묘지명>에는 없는 후반 부분이 더 있어서 문제가 된다. 즉, 전반부 서술 다음에 “이어서 유럽 사람들이 한문으로 쓴 철학 서적들과 수학 서적들을 꼼꼼히 검토하였는데 그들은 가능한 모든 정성을 기울여 그 책들을 깊이 연구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그리스도교에 관한 몇몇 초보적인 책을 토론하는 방향으로 옮아가게 되었다”(위의 책, 76쪽)라는 부분을 추가하였다. 당시 조선 서교도들 사이에서의 이런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었고 이를 다블뤼 주교가 추가로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추가 기록은 <선중씨묘지명>에서 주어사 강학회 뒤의 일을 언급한 “又從德藻見實義 · 七克等數卷”과 또 다른 시기의 일을 언급한 “嘗從李檗游 聞曆數之學 究幾何原本”이라는 구절의 내용이 주어사 강학회에서의 일과 합쳐져 전해진 데에서 유래하였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의도적인 왜곡이라기보다는 사람들 사이에 몇 단계 구전으로 전해지는 가운데 얼마든지 자연스럽게 발생할 수 있는 일이었을 수도 있다. 이 구절들의 시기는 <선중씨묘지명>이나 <녹암권철신묘지명>에 나오는 주어사 강학회와는 다르다. 정약용이 주어사 관련 언급을 하면서 의도적으로 서교 관련 부분을 삭제하였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위의 두 글을 작성하면서 이 구절들을 누락시키지 않았다는 점이 주목된다. 그가 서교 관련 문제를 가급적 숨기려 하였다면 이런 언급을 하였을 리 없다. 이런 언급을 했다면 이 구절들의 시기를 굳이 원래의 시기에서 바꿀 필요도 없다. 다블뤼 주교가 정약용의 한문 자료를 직접 읽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비망기>의 기록은 이 두 사실을 주어사 강학회 시기에 있었던 것으로 오해한 데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오해는 초기 서교도들 사이에 주어사 강학회의 소식이 구전되는 가운데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오해이기도 하다.

 

32) 주어사 강학회와 관련된 정약용의 두 기록 <녹암권철신묘지명>과 <선중씨묘지명>은 다소 변형된 형태이지만 비교적 구체적인 그 내용이 이 주석 기록자에게 알려져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초기 서교 수용과 관련된 인물들에 대하여도 비교적 구체적인 정보를 갖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런 정보들은 상당 부분 <황사영 백서> 및 초기 서교들의 구전에 의거하였을 것이다. 다만 초기 서교도들의 구전이 모두 정확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고 소망과 오해가 다소 섞여 있었을 것이다.

 

33) 《전서》 3, 246쪽.

 

34) 《송정사의》는 오랫동안 발견되지 않고 있다가 최근에 발견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문이 참조된다. 김영원, <연세대본 《여유당집》에 대한 서지학적 검토>, 《남명학연구》 36, 2012.

 

35) 1930년대 (여유당) 《전서》 편집 과정에서 삭제된 것으로, 이 과정에서 정약전의 편지가 삭제된 것은 정약전의 저작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나 《전서》에는 《현산역간》 등 정약전의 저작도 일부 수록되었다.

 

36) 이 시들은 다음의 논문에서 분석, 검토되었다. 허경진, <새로 발견된 손암 정약전의 시문집에 대하여>, 《남명학연구》 36, 2012.

37) 김영원, 앞의 논문, 《남명학연구》 36, 287~293쪽.

38) “若銓 字天全 乾隆戊寅 三月初一日生” 진사공 · 좌랑공사, 409쪽.

39) 《전서》 3, <선중씨묘지명>, 242쪽.

40) 《가승》, 404쪽 이하.

41) 《전서》 1, 171쪽.

42) 404쪽 이하. 다음 구절에서 《가승》을 인용할 때에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일일이 쪽수를 표시하지 않기로 한다.

43) 이덕일,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상)》, 김영사, 2004.

44) “是年 國家有不忍言之變故 大人晉州公 決意歸田 公適生 仍以錫名” 《사암연보》, 1쪽.

45) “十一月初九日 慶基殿參奉 申敬日相換” 《가승》, 406쪽(1762년 11월 9일).

46) “[十一月] 十六日 謝恩” 《가승》, 406쪽(1762년 11월 16일) ; “十七日辭陛” 《가승》, 406쪽(1762년 11월 17일).

47) “甲申三月二十九日 拜拜禧陵參奉” 《가승》, 406쪽(1764년 3월 29일).

48) “乙酉六月二十六日” 《가승》, 406쪽(1765년 6월 26일).

49) “(丙戌)…十二月十七日 拜漣川縣監” 《가승》, 406쪽.

50) 《가승》, 406쪽.

51) “己丑 初觀京” 《다산연보》, 1쪽.

 

52) 맏아들 정약현은 당시 17세이므로 이미 장가들었을 가능성도 있으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맏아들이므로 분가하지 않고 초천의 본가에 함께 살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53) “乙酉 始學千字文” 《다산연보》, 1쪽 ; “四十一年乙酉 始學千字文” 《사암연보》, 2쪽.

 

54) “丁亥 往漣川縣(家大人任所)” 《다산연보》, 1쪽 ; “丁亥 公六世 陪往晉州公漣川任所 公德器之寬厚 經學之精微 專由家庭蒙養也” 《사암연보》, 2쪽.

 

55) “秩滿歸鄕廬” 《가승》, 406쪽.

56) “庚寅(十一月 初九日) 遭太淑人尹氏憂(在馬峴)” 《다산연보》, 1쪽 ; “庚寅 遭太淑人尹氏憂(十一月 初九日)” 《사암연보》, 3쪽.

 

57) “(英祖)…四十七年(1771) 辛卯 公(인용자 : 정약용)十歲 受學經史 是時 晉州公解官家居 自敎授” 《사암연보》, 4쪽. 《사암연보》에서는 수학(受學)에 대하여 정약용만을 언급하고 있으나 당연히 정약전(14세)을 포함한 다른 형제들도 가르쳤을 것이다. 아마도 정약현(21세), 정약종(12세)도 함께 부친께 수학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58) 《가승》에 따르면 1774년 여름 부친 정재원은 대과에 응시하였다가 낙방하였다.

59) 《가승》, 407쪽.

60) 이때 정약전은 이미 혼인을 하여 분가하였을 가능성이 있지만 분가하였더라도 초천의 본가 부근에 살았을 것이다.

61) “癸巳 又於京城 取處女金氏 爲側室” 《전서》 3, <서모김씨묘지명>(庶母金氏墓誌銘), 306쪽.

 

62) 정약용은 이 분에 대하여 ‘서모’라고 표현하였다. 이것은 이 분이 첩이라서가 아니라 신분이 중인이었기 때문이다. 서모이지만 헌신적인 이 분에 대하여 정약용은 <서모김씨묘지명>에서 매우 존경하는 마음을 표현하였다. 정약전도 그러하였을 것이다.

 

63) “丙申三月初四日 被判度支 自?爲戶曹佐郞” 《가승》, 406쪽(1776년 3월 4일).

64) 《가승》, 406쪽.

65) “蔡濟恭…爲國葬都監提調” 《조선왕조실록》 정조 1년 3월 10일. 이하 “《정조실록》 1년” 식으로 표시하기로 한다.

66) “六月二十日 拜引儀 陞濟用監判官” 《가승》, 406쪽(1796년 6월 20일).

 

67) “丙申…住京(時 家大人復仕)” 《다산연보》, 2쪽 ; “丙申…住京(時晉州公復仕)” 《사암연보》, 5쪽 ; 立春日題龍?屋壁(小龍? 在明禮坊 丙申夏家大人 僑居于玆) (丁酉年[1777] 입춘일).

 

68) “游乎京輩 博聞尙志 與李潤夏 · 李承薰 · 金源星等 定爲石交 以承受星翁之學 沿乎武夷 溯乎洙泗揖讓講磨 相與進德受業 旣又執贄請敎於鹿菴之門” 《전서》 2, <선중씨묘지명>, 621쪽. 기존의 연구에서 정약전이 1776년 상경을 계기로 이익의 학문을 접하게 되었다는 언급이 이미 있었다(서종태, <손암 정약전의 실학사상>, 《동아연구》 34, 273쪽).

 

69) 하성래, 《천주가사연구》, 85쪽.

70) 서종태, <녹암 권철신의 양명학 수용과 그 영향>, 《국사관논총》 34, 1992, 245~252쪽.

 

71) 그러나 정약전은 이미 1776년 상경 이전에 이미 권철신에게 나아가 가르침을 받기 시작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선중씨묘지명>에서는 위의 언급에 바로 이어서 “‘이미’ 또 녹암의 문하에 나아가 가르침을 청하고 제자의 예를 표하였었다”(旣又執贄請敎於鹿菴之門)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문장의 맥락으로 ‘이미’라는 말은 ‘19세에 서울에 올라가 이윤하 등과 교유하기에 앞서서 이미’라고 해석하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또 권철신에게 배움을 청하였다는 이 구절에 바로 이어서 “‘일찍이’ 겨울날 주어사에 우거하여 강학한 사람이 김원성 · 권상학 · 이총억 등 수인이었으며 녹암이 직접 규정을 만들었다”(嘗於冬月 寓居走魚寺講學會者 金源星 · 權相學 · 李寵億等數人 鹿菴自授規程)라고 하였다. 문맥상 1776년 상경하여 소장성호학파 인물들과 교유한 것, 권철신에게 가르침을 청한 것, 1779년 겨울의 주어사 강학회, 이 세 가지 일은 각기 별도 시기의 일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정약전은 1776년 2월 정약용이 혼인하기 몇 해 전, 대략 15~16세 무렵 결혼하였을 것으로 추정되고(1772~1773년 사이), 이를 계기로 초천 부근의 본가 근처에 분가하게 되었고 이후 인근 양근(楊根)에 거주하고 있던 권철신에게 가르침을 받기 시작하였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정약전의 누이는 이승훈에게 시집을 갔는데 정약용의 손위 누이이므로 적어도 1776년 정약용의 결혼 이전에 시집을 갔을 것이다. 따라서 정약전이 1776년 상경 이전 이승훈을 통해서 권철신에 대한 말을 듣고 그에게 나아가 가르침을 청하였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72) 《가승》, 406쪽(1777년 9월 27일) ; 정약용이 1778년 가을 전라도 광주 서석산에 올라갔을 때 지은 시(登瑞石山)와 이때 일을 기록한 《전서》 1, <유서석산기>(遊瑞石山記), 279쪽, “山在光州冬 三十里 名無等山”을 보면 정약전을 포함하여 4형제가 함께 서석산에 올랐음을 알 수 있다. 昆弟四人 復謀所以游瑞石山者, 曺公亦遣其子弟從焉(《전서》, 279쪽). 위 인용문 가운데 “昆弟四人”이라는 표현을 보아서 이때 화순에 정약현,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4형제가 모두 함께 있다가 무등산에 갔음을 알 수 있다. 1777년 10월 부친 정재원을 따라 내려온 것은 4형제 가운데 정약용만이었던 것 같고 이후 어느 시점에 정약현, 정약전, 정약종도 화순에 내려가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정약전이 1778년 11월을 전후하여 동생 정약용과 함께 40일간 화순의 동림사에서 독서하여 정약전은 《상서》를 읽고 정약용은 《맹자》를 읽었다. <독서동림사>(讀書東林寺)[1778년 11월 무렵 정약용의 시] “仲冬也 時與仲氏偕” ; <독서동림사기>(讀書東林寺記) “家君之知縣之越明年冬 余與仲氏讀書東林 仲氏讀尙書 余讀孟子…凡四十日也”라고 하였다. 따라서 40일간이란 음력 11월을 전후한 40일간이 되겠다.

 

73) 《전서》 1, <과경양지>(過景陽池 : 己亥), 173쪽, “時與仲氏 同赴漢陽 二月也”(1779년 2월 정약용의 시) ; “承晉州公命 還京 做功令各體” 《사암연보》, 6쪽. 과거 문체를 공부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라는 부친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 정약용은 대략 2월 중순 초천에 돌아간 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시 <환초천거>(還苕川居, 2월 중순 추정)와 <입한양>(入漢陽) “三月也 病未相見 留城外作”을 보면 2월 중순경 초천 본가에 도착한 정약용은 3월 다시 한양으로 올라왔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소과를 보기 위해서였을 것이며 얼마 뒤 정약용이 소과에 낙방했다는 언급이 있다.

 

74) “設九日製于泮宮” 《정조실록》 3년(1779) 9월 1일 ; <동작도>(銅雀渡, 1779년 9월 초순 정약용의 시) “時屈監試 領內赴和順 九月也 汝三同行” 《실록》에 따르면 성균관에서 구일제가 9월 1일에 있었는데 감시(監試)에 불합격하였다는 것은 이 시험에서 불합격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75) “陞補被抄 (還京)”(《다산연보》, 2쪽 : 1779년 겨울 기사) 일정상으로 보아서 부친의 명령을 듣고 대략 9월 하순(혹은 10월 초) 서울로 되돌아와서 (태학=성균관)승보시를 준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 시대 태학승보시는 사학(四學)에서 성균관의 기재(寄齋)에 올라가는 것을 말한다. 성균관에 결원이 있을 경우 대략 연말에 실시하였다. 태학승보시에 합격하면 생원, 이것은 성균관 유생의 수가 다 차지 않았을 때 시행하는 시험이었다. 이에 합격하면 생원, 진사와 같은 취급을 받아서 과시(課試) 등 성균관의 여러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다.

 

76) 서종태, 앞의 논문, 《국사관논총》 34, 245~252쪽 ; - - -, <성호학파의 양명학 수용 - 복암 이기양을 중심으로>, 《한국사연구》 66, 1989, 92~94쪽 ; - - -, <손암 정약전의 실학사상>, 《동아연구》 34, 274쪽 이하.

 

77) 이에 대한 기존의 연구로는 다음의 논문들이 참고된다. 서종태, 위의 논문, 《국사관논총》 34 ; - - -, <천진암 주어사의 강학과 양명학>, 《이기백선생고희기념 한국사학논총》(하), 일조각, 1994.

 

78) “然以余所聞 其論大學 以爲格物者 格物物有本末之物 致知者 致知所先後之知” 《전서》 3, 234쪽.

79) “以所不聞所不睹 爲千載之無聲無臭” 《전서》 3, <선중씨묘지명>, 235쪽.

80) “星湖先生…沿乎洛 · ? 溯乎洙 · 泗…披示來學 及其晩暮 得一弟子 曰鹿菴權公” 《전서》 3, 232쪽.

81) “承受星湖之學…沿乎武夷 溯乎洙 · 泗” 《전서》 3, 242쪽.

82) “其後七年而謗生” 《전서》 3, <녹암권철신묘지명>, 235쪽.

 

83) 오늘 21세기 초두 우리의 천주교는 이런 ‘조선의 초기 서교 공동체’로 되돌아가고 더 나아가서는 원시 기독교 공동체의 회복까지도 지향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84) 《전서》 3, <선중씨묘지명>, 242쪽.

 

85) 이에 대하여 <선중씨묘지명>에서는 “晨起?氷泉?水 訟宿夜箴 日出誦敬齋箴 正午誦四物箴 日入誦西銘”이라고 하였다(《전서》 3, 242쪽). 여기에 언급된 것은 모두 유교 문헌이며 이것을 집단적으로 암송하는 것은 종교적 분위기를 조성하였을 것이다.

 

86) “其後七年而謗生” 《전서》 3, <녹암권철신묘지명>, 235쪽.

 

87) <선중씨묘지명>에서는 주어사 강학회에 대한 언급에 바로 이어서 “當此時 李承薰亦?礪自强 就西郊行鄕射禮”라고 하였다(《전서》 3, 242쪽).

 

88) “當此時 李承薰亦?礪自强 就西郊行鄕射禮” 《전서》 3, <녹암권철신묘지명>, 242쪽. 여기에서 서교(西郊)는 아마도 서울 서대문 밖 서지(西池) 부근(오늘날 천연동)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 이곳에는 연못 외에 폭포 등도 있었으며 야외 집회를 하기 좋은 곳이었다. 이승훈이 주도한 이 집회는 서울 주재 기호남인들의 단합대회의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고 생각되며 이런 모임을 통해 이승훈은 새로운 사상적, 정치적 모색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향음주례는 기본적으로 유교적 위계질서를 질서의 확립을 지향하는데 이승훈은 이후 점차 이런 지향을 버리고 서교로 향하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정약용이 이 대목에서 이승훈에 대하여 서술한 것은 이 점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89) “嘗從李檗遊 聞曆數之學 究幾何原本 剖其精奧 遂聞新敎之說 欣然以悅 然不以身從事” 《전서》 3, <선중씨묘지명>, 242쪽.

 

90) “甲辰四月之望 旣祭丘嫂之忌 余兄弟與李德操 同舟順流 舟中聞天地造化之始 形神生死之理 恍惚驚疑 若河漢之無極” 《전서》 3, <선중씨묘지명>, 247쪽.

 

91) “乙巳春 承薰與丁若銓 · 若鏞等 說法於掌禮院前中人金範禹家 有李蘗者…以責巾?頭 垂肩主壁而坐 承薰及若銓 · 若鍾 · 若鏞三兄弟 及權日身…父子 皆稱弟子 挾冊侍坐 蘗說法敎誨 比之吾儒師弟之禮尤嚴 ‘約日就會 殆過數朔’ 士夫 · 中人 會者數十人…(乙巳三月)” 《벽위편》, 명문당, 1987, 463쪽. 이때 을사추조적발을 공격하는 통문에 주어사 강학회에 참석하였던 김원성의 이름이 들어 있어서 주목된다.

 

92) 위 기록에서 1785년 봄 을사추조적발사건 당시에 이미 정약종이 모임에 참석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정약종이 정약전에게서 서교에 대하여 들은 것은 1786년 3월이다(이에 대하여 후술). 1785년 봄 당시 정약종의 집은 아직 초천 부근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위 자료에서 정약종을 포함하여 3형제를 모두 언급한 것은 정약용과 정약전을 더욱 확실하게 얽어 넣으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여겨진다. 정약종의 개종 과정은 앞으로 단계적으로 좀 더 면밀히 살펴보아야 하겠지만, 이 시점에서 그는 아직 서교에 관심을 갖지 않고 신선술 등에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93) “供曰 矣身於丙午三月 果聞此學於矣身仲兄 而矣身則至今沈溺此學 仲兄則近果不爲矣” 정약종 공, 《추안급국안》, 245책, 한국문헌연구소, 1983.

 

94) 《전서》 시문집에 정약용이 1795년 지은 시로 <友人李德操輓詞>가 있다. 이 시에 “乘秋忽飛去”라는 구절이 있으므로 이벽이 타계한 시점은 대략 1785년 초가을 7월 무렵이라고 할 수 있다.

 

95) “丁未冬 李承薰 · 丁若鏞等 托做儷文 會泮人金石太家 講習邪書 誘入年少輩說法 李基慶往見其所作儷文 率皆滾草 未有完篇 怪問曰 ‘君輩科業 自來精工 今如是草率忙遽 何也 得無爲他事也’ 擧皆色沮漫?…姜進士履元 時在座 出而語人 洋書冊名 ? 及習邪節次 無不傳說” 앞의 책, 《벽위편》, 461쪽.

 

96) 정미반회는 1787년 가운데 12월 무렵 있었다. 조성을, <정약용과 교안> 가운데 제5장 정미교안과 정약용 부분 참조 요.

 

97) “至丁未年迷惑矣”(《추안급국안》) 및 “自辛亥以後 邦禁益嚴 而畦畛遂別” 《전서》 3, 247쪽. 《전서》의 이 구절을 정약용 자신에 대한 언급으로 볼 수도 있지만 <선중씨묘지명>에서의 언급이므로 기본적으로 정약전에 대한 언급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98) 이에 대하여는 조성을, <정약용과 교안> 참조 요.

 

99) <선중씨묘지명>, 243쪽. 이 대책문에 대한 시관(試官)이 이가환이었으므로 박장설 등의 모함은 정약전 · 정약용 형제에 더하여 이가환까지 함께 엮어 넣으려는 것이었다. 《사암연보》, 61쪽. 다만 4원소설과 정약전과의 관계 및 이와 관련한 서학의 영향 여부는 정조의 언급과는 별도로 다시 면밀히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100) 《승정원일기》 정조 21년 7월 11일조 및 12월 19일조. <선중씨묘지명>(《전서》 3, 243~244쪽)에서는 “上特念公落拓 遂以親政史官陞六品 又命銓曹 由成均館典籍 爲兵曹佐郞”이라고 하여 승륙, 전적 임명, 병조 좌랑 임명이 모두 겨울에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것은 병조 좌랑이 겨울에 있었던 것을 앞의 두 가지 일과 함께 기록하는 데에 따른 착오이다.

 

101) “戊午冬 命撰嶺南人物考” 《전서》 3, <선중씨묘지명>, 244쪽 ; 《전서》 3, <영남인물고서>, 36쪽.

102) 《승정원일기》 정조 23년 2월 4일조.

103) 《승정원일기》 정조 23년 4월 29일조.

104) “八月二日 因仲氏?眷東還 同尹无咎 上舟偕行(8월 2일)” 《전서》 1, 370쪽.

105) “仲氏之歸苕川也 名其齋曰每心 令余記之” 《전서》 3, <매심당기>, 86쪽.

 

106) “純祖 肅皇帝元年 辛酉 公 四十歲 二月 初八日 因院啓 初九日曉 被拿入獄” 《사암연보》, 127쪽 ; “是獄 巽菴先生 配薪智島 公之仲氏 公前一日 被禍” 《사암연보》, 130쪽.

 

107) “辛未 召見時原任大臣 · 金吾堂上 大王大妃敎曰…丁若銓 · 若鏞, 則當初之染汚迷溺 論以罪犯亦無所惜 而中間之棄邪歸正 不但自渠口發明而已 若鍾之現捉文書中 邪黨書札 有‘勿令汝弟知之’之語 若鍾所自書文蹟中, 又謂‘不能與兄弟同學, 莫非己罪’云 此則與諸囚, 略有區別, 施以次律, 不害爲寬大之典” 《순조실록》 1년[1801] 2월 25일 ; “若銓 · 若鏞 以次律減死, 定配若銓于 康津縣薪智島 若鏞于長?縣” 《순조실록》 1년 2월 26일.

 

108) 가족들과 헤어진 것은 석우촌(石隅村)이다. 석우별에서 “諸父諸兄 至石隅村相別”이라고 하였다. 정약용 저, <석우별>[石隅別](《전서》 1, 387쪽, 2월 29일). 석우촌은 서울 남대문 밖 3리 지점으로, 지금 용산구청 쪽으로 굽어지는 돌모루에 있던 마을이다.

 

109) “辛酉…十月 又被逮上京 (十一月 初五日)移配于康津縣” 《다산연보》, 16쪽 ; “十月 又被逮入獄 巽菴先生 亦同被繫 時黃嗣永就捕 洪李輩[인용자 : 홍희운 · 이기경] 以百計恐脅朝廷 自求入臺地發啓 請再鞫公 必殺乃已” 《사암연보》, 132~133쪽 ; “是年 十月 二十日夕 又被逮 二十七日入獄 十一月初五日 蒙恩出獄 移配康津縣” 《전서》 1, <獄中和東坡西臺詩>(정약용 작, 10월 27일~11월 5일), 422쪽. 위의 시, 인용문을 보면 10월 27일 정약용이 서울에서 입옥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장기에서 서울까지의 거리와 신지도에서 서울까지의 거리가 대략 비슷하므로 10월 20일 무렵 정약전이 신지도에서 체포되었다면 역시 10월 27일 무렵 서울에서 입옥되었을 것이다.

 

110) “推鞫邪學罪人” 《순조실록》 1년(1801) 11월 1일 ; “推鞫…罪人丁若銓原情 · 罪人丁若鏞原情” 《승정원일기》 순조 1년(1801) 11월 1일.

 

111) “若銓于羅州牧黑山島 若鏞于康津縣 學逵于金海府” 《순조실록》 1년(1801) 11월 5일 ; “是年十月 二十日夕 又被逮 二十七日入獄 十一月初五日 蒙恩出獄 移配康津縣” 《전서》 1, <옥중화동파서대시>(정약용 작, 10월 27일~11월 5일), 422쪽 ; “辛酉…十月 又被逮上京 (十一月 初五日)移配于康津縣” 《다산연보》, 16쪽 ; “出門街鼓已聲低” 《전서》 1, <출옥부화전운>(出獄復和前韻, 정약용 작, 11월 5일), 422쪽.

 

112) 《전서》 1, <율정별>(栗亭別, 정약용 작, 11월 22일), 423쪽 ; “同出一路 到羅州栗亭店 握手相別 各赴配所” 《전서》 3, <선중씨묘지명>, 245쪽.

 

113) 《전서》 3, <선중씨묘지명>, 245쪽.

 

114) 다만 국왕 정조가 변호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지는 추후 연구 과제로 남는다. 이것은 조선 후기 과학사의 전반적 발전 과정 및 이에 대한 ‘서학’의 영향이라는 전체적 구도 속에 추구될 필요가 있다. 이런 구도하에서, 정약전 4원소설의 유래 및 흑산도 유배기까지 이를 견지하였는지 여부 등의 문제를 추후 살필 필요가 있다.

 

115) 리발(理發) 관념이 바로 양명학에서의 양지(良知)의 기능을 대신하였다고 하겠다. 이것은 16세기 이후 동아시아 유학사에서 갖는 조선 유학의 독특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한편 기호남인의 퇴계학 수용 문제에 대하여는 다음의 논문이 참조된다. 조성을, <근기학인의 퇴계학수용과 실학 - 한백겸과 유형원을 중심으로 ->, 《국학연구》 21, 2012. 12.

 

116) 이에 대하여는 다음의 논문이 참고된다. 이동환, <다산사상에서 상제의 도입 경로와 성격>, 《민족문화》 19, 민족문화추진회, 1996.

 

[교회사 연구 제44집, 2014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조성을(아주대학교 사학과 교수)]

 

※ 본문 중에 ? 표시가 된 곳은 현 편집기에서 지원하지 않는 한자 등이 있는 자리입니다. 정확한 내용은 첨부 파일에서 확인하세요.



파일첨부

2,499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