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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가계치유, 무엇이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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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5-23 ㅣ No.259

[경향 돋보기] 가계치유, 무엇이 문제인가?


건전한 신앙생활을 위협하는 가계치유 문제에 대한 교의적 고찰

 

 

지난 2007년 10월 15일부터 나흘 일정으로 진행된 주교회의 추계 정기총회에서는, 교회 일각에서 심각하게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이른바 가계치유의 신심행위가 교회의 가르침에 위배되며 신앙의 잘못된 해석에서 비롯된 문제라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이 문제에 교구별로 지혜롭게 대처하기로 하였다.

 

가계정화라고도 하는 가계치유는 조상의 죄가 후손에게 육체적, 정신적, 영성적으로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가계치유 기도와 가계치유 미사로 그 사슬을 끊어야 한다는 것이 주장의 핵심이다. 곧 자신의 가계 안에 어떤 조상들이 무엇인가 한이 풀리지 않은 상태에 있거나 또는 조상들이 지은 죄가 있을 때 그 좋지 않은 영향이 현재에 미치기 때문에, 미사나 특별한(?) 기도를 통하여 그것을 풀어야 한다는 것이 이설(異說)을 유포하는 사람들의 논리다.

 

이러한 가계치유 문제는 이미 개신교 내부에서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문제가 제기되었지만, 개신교 내 많은 신학자들도 잘못된 이설이라 판단하여 많은 교파들 사이에서 가계저주론, 가계축복론 등의 논의를 금하고 있는 현실이다.1) 이러한 현상에 직면하여 가톨릭 교회 내의 건전한 신앙을 위협하는 가계치유 문제에 대한 교의적 고찰이 절실히 요구된다. 곧 이러한 제반 신앙생활이 어떠한 면에서 교회의 가르침을 거스르며, 어떠한 면에서 혼란을 야기하는지를 정확히 지적하여, 올바른 교회의 가르침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이에 최근 유포된 ‘가계치유 기도문’(존 햄쉬)과 그와 관련된 모임의 논의들을 중심으로 이들 문제에 대한 몇 가지 고찰을 시작해 본다.

 

 

1. 무엇보다 먼저 가톨릭 교회에서는 세례를 통하여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 곧 입문성사로서의 세례성사와 그 효과를 중요하게 가르치고 있다.2) 그런데 가계치유를 말하는 사람들은 세례성사의 성사적 의미와 효과를 간과하고 세례 후에도 여전히 그 ‘죄가 (소멸되지 않고) 유전된다.’는 커다란 신학적인 혼돈을 가진다.

 

하느님은 보이지 않는 당신의 사랑을 인간이 알아듣는 표징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 그리고 인간을 구원하시는 그분의 초월적 권능을 기억하고 보전하고 구현하는 그리스도의 성사이다. 인간이 하느님의 은총인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세례성사로 먼저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야 한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은 새로운 생명의 표징이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는 것이며, 죄(원죄와 본죄)를 씻어내는 것이며,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씻어진 죄가 여전히 남아있을 것이란 믿음은 세례성사의 (은총) 효과를 부정하는 논리이며, ‘원죄’를 넘어선 ‘조상죄’의 대물림은 인간에게 더욱 큰 죄의 부담을 주어 사랑과 위로, 기쁨과 희망을 주어야 할 신앙이 그 본질을 잃어버릴 위험에 놓이게 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3)

 

 

2. 가계치유는 가톨릭 교회의 ‘인간’에 관련한 가르침에 위배되는 잘못된 인간학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모든 종교는 인간의 고통이라는 주제에 관련하여 ‘고통이란 어떻게 피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겪어야 하는가?’의 문제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고통은 인간이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 하는 문제이지, ‘해결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는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실존 그 자체이며 자연의 법칙인 고통을 외면하고 피해가겠다는 가계치유의 기도와 신앙은 가톨릭 교회가 가르치는 인간에 대한 가르침에서 벗어난 것이다.

 

신앙하는 인간은 그리스도교에 입문하는 세례성사를 통해 모든 죄가 씻긴 이후에도, 계속하여 죄를 짓게 된다. 또 사람은 끊임없이 삶의 고통과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게 된다. 이전에는 미래를 ‘인간 행위의 산물’로 또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운명’으로 여기던 시대도 있었지만, 과학의 진보와 첨단기술의 발달로 더 이상 미래는 과거의 세대들이 바라보았던 미래가 아니다. 인간은 사회와 자연에 대한 더욱 진보한 과학과 기술로 더욱 효율적인 통제와 조작, 예측을 가능하게 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자연의 엄청난 파괴력(태풍, 홍수, 해일, 지진 등)과 지구 생태계의 파괴(지구온난화, 오존층 파괴 등)로 말미암아 미래는 여전히 인간에게 두려움으로 작용한다. 또한 개인에게 다가오는 실직, 비정규직 노동, 실업, 산업재해, 파산 등의 경제적인 어려움에 각종 재난과 사고 등으로 인한 대규모 인명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인간은 끊임없이 고통과 대면해야 하는 운명의 주인공으로 세계 내에 존재한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고통’이라는 주제에 맞서 고통의 원인을 ‘조상’들에게 전가하는 신앙에는 커다란 문제들이 발생한다. 환경 탓, 조상 탓으로 모든 문제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삶의 주인인 자기 자신에게서 도피하고, 창조주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신 이성과 자유, 책임에서 도주하는 더 큰 죄일 수 있다. 죄와 환난의 책임을 조상에게 돌리고, 그 집안에 흐르는 무서운 저주의 힘이, 더군다나 저주의 배후에 있는 마귀가 인간실존의 문제인 고통의 뿌리라는 설명은 건전한 신앙생활을 방해하여 미신과 무속적인 경향으로 흐르게 할 소지가 다분하다.4)

 

 

3. ‘가계치유’는 가톨릭 교회의 연옥에 대한 교리와, 교회의 오랜 전통인 그리스도 안에서 희망을 가지고 죽은 이들을 기념하는 미사성제(위령미사)의 본질을 왜곡하며, 교회의 전승에 대한 의심과 회의를 가지게 할 우려가 있다.5)

 

미사예물을 정성스레 준비하여 먼저 세상을 떠난 부모, 형제, 자매, 친지들을 위해 미사를 봉헌하고, 특별한 때(위령성월이나 민족의 고유명절, 기일 등)에 미사지향을 두는 것이나 조상들을 위해 위령기도를 바치는 것은 교회의 오랜 전통이며6), 그리스도교 신앙이 한국 교회 창립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역의 문화와 관습, 언어에 토착화된 좋은 모범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러나 미사의 횟수나 미사예물의 금액이 가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제시된다면, 이는 거룩한 신앙의 전통을 속된 것으로 오염시키고 아름다운 신앙의 전통을 파괴하는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다. 가계치유 기도문을 바치거나 미사예물을 많이 바치고 많은 횟수의 미사를 지낸다고 가계에 있던 모든 문제가 다 치유되고 모든 고통이 사라지게 되어 만사가 형통한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4. ‘가계치유’ 기도모임을 통해 밝혀지는 그들의 종말론적 증언은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과 현대신학 안에서의 종말론과도 커다란 불일치를 보여준다.

 

그들은 잘못된 종말론, 곧 심판과 사후세계(천국, 연옥, 지옥)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교회의 보편적인 교리인 것처럼 가르친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이른바 치유의 방법으로 구마기도와 미사봉헌을 권고한다.7) 본질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은 사람들을 위협하고 불안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래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이해해야 한다.8)

 

가계치유에 대한 신심 확산의 밑바탕에는 신자들의 죽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죽음 너머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핵심 에너지로 작용한다. 모든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지만, 동시에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이다. 곧 죽음은 어둠과 고뇌와 냉혹함, 고립, 두려움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열정과 빛과 사랑과 기쁨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종말교리에서 죽음 이후에 인간은 사심판에 놓이며, 이는 그의 삶에 대한 심판을 의미한다. 죽음은 삶의 완성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 만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며, 심판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가 얼마나 충만한 삶을 살았는지 주님의 말씀과 행위가 바로 심판의 기준이 될 것이다. 이러한 사심판에 대한 현대 교회의 신학은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주는 신앙이 아닌 희망의 신앙임에 틀림없다. 조상한테 물려받은 좋지 못한 유전적 기질들은 주님의 자비와 은총에 힘입은 신앙인의 자발적인 회개와 노력으로, 또한 끊임없는 영적인 투쟁을 통하여 극복해 가는 것이지, 조상의 죄와 죽은 영혼이 치유를 받아서 극복되는 것은 결코 아님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글을 맺으며

 

우리는 최근의 이러한 가계치유에 관련된 문제들을 접하면서 ‘왜 이러한 문제들이 신자들 가운데 빠르게 확산되었는가?’를 끊임없이 반성하고 연구하고 성찰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가정 해체 현상과 가정의 위기는 심각한 사회문제임과 동시에 그릇된 신앙을 유발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가정의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나약한 인간은 문제의 원인을 가정의 위기에서 찾아 개선하지 못하고 조상들의 문제로 치부함으로써 문제의 해결책에서 멀어진다.

 

교회 공동체는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상처받은 가족 구성원을 위한 다양하고 폭넓은 프로그램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 가족치료(Family Therapy)와 상담을 위한 전문 인력을 양성하고, 가족 복지정책과 가정사목을 위한 교구의 정책을 더욱 장기적으로 준비해야한다. 또한 이혼자와 재혼자를 위한 프로그램 준비, 도박 중독과 알코올 중독자 가정을 위한 배려, 가정폭력으로 고통 받는 가정에 대한 사목적 배려, 독거노인과 편부모, 조손 가정에 대한 배려 등을 교회정책 안에서 연구하고 구체적인 사목의 대안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한국 교회의 대형화, 중산층화 경향은 물질적으로 영적으로 가난한 이들의 자리를 교회 내에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가계치유 모임에 참여하는 신자들 가운데 경제적인 어려움에 놓인 사람, 오랫동안 불치병이나 난치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 마음에 큰 상처를 가진 사람, 사회적인 교육수준이 낮은 사람, 이들 대부분은 현실세계에서 당하는 고통에서 치유와 위로와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 했던 사람들이다. 교회 공동체는 그러한 점에서 뼈아픈 반성을 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고통에 처한 사람들과 연대하여 그들의 고통에 함께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실천을 마련하고,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신앙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이러한 건전하지 못한 여러 종교적인 흐름은, 환시나 기적, 메시지 중심의 특별한 현상에 대한 병적인 집착과 치유와 복을 신앙의 중심으로 이해하는 신자들의 감상에 기울어져, 교회의 전통과 교의마저 위협하는 무비판적 신심 수용으로 흐를 위험을 다분히 갖고 있다. 가톨릭 신앙의 고유한 가치와 의미를 약화시키는 그릇된 신심행위가 교회 안에 다분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리스도교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종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죄의 용서를 믿으며, 용서하시는 분의 자비를 믿으며, 아무 탓 없이 받아주시고 의롭다고 인정하시고 거룩하게 살도록 배려하시는 살아계신 하느님을 믿는다. 구원, 해방은 인간의 죄에 앞서는 하느님의 선물이다. 세례로써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새 옷처럼 입고 사는 사람,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또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하느님의 능력을 믿음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일으켜진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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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계에 흐르는 저주 이렇게 끊어라”라는 개신교 이윤호 목사의 사우스웨스턴 침례신학교에서의 ‘치유 세미나’ 개최에 관하여 21세기 교회성장연구원 원장인 김홍기 목사가 그 부당성과 잘못된 신학을 지적하며 ‘크리스챤 투데이’라는 개신교 신학잡지에서 지상논쟁이 벌어졌고, 많은 개신교 신학자들도 이러한 소위 ‘가계저주론’은 왜곡되고 편의적인 신학해석에 근거한 잘못된 신학이라고 지적한 바있다(크리스챤 투데이, 152호 참조).

 

2) “가톨릭 교회 교리서”, 1227. 1234. 1264-1279항에서는 “교회는 신자들이 세례를 통하여 모든 죄, 곧 원죄와 본죄, 그리고 죄벌까지도 용서받기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가로막는 아무런 죄도 남아있지 않으며, 아담의 죄도, 본죄도, 죄의 가장 중대한 결과인 하느님과의 단절도 남아있지 않다.”(1264항)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성화의 은총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지체, 성령의 성전이 되어 새롭게 태어났기 때문이다.

 

3) 가계치유를 말하는 이들은 치유모임을 통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학자들이 많은 집안에서는 학자가 많이 나고 무인 집안에서는 무인이 많이 난다. 또 점쟁이 집안에서는 점쟁이들이 많이 나며 (중략) 그래서 이처럼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좋지않은 것을 차단시키는 것, 그래서 그 후손들에게는 그러한 것들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가계치유이다”(이○○ 신부의 부산 ○○성당 특별강론 중).

 

이것은 인간 기질의 유전이라는 측면 곧, 가족치료(Family Therapy)의 영역 안에서 논의되는 문제이다. 인간은 보편적으로 어린 시절에 어른들에게서 받은 많은 것들에 따라 자아상태, 또는 정체성(Ego state)을 형성하는데, 어린 시절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들은 그 마음 안에 어른들(특히 부모)에 대한 분노가 해소되지 않은 채 한처럼 덩어리를 형성하고 있어서, 과거를 돌아보면서 한을 푸는 작업을 하는 것이 심리치료의 전형적인 방법이다. 결과적으로 마음의 편안함을 갖도록, 마음의 건강함을 찾도록 하는 것이 심리치료에서 가계치유인 것이다.

 

하지만 현재 교회내 가계치유를 말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믿는이들의 마음에 불안감을 조성하고, 사람들에게 기도를 마음의 편안함을 얻고자, 또 하느님과 통교하는 길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불안함과 눈치봄을 더욱 가중시키는 병적인 신앙의 길로 이끌 가능성이 높다. 인간의 유전적결함이나 기질의 문제를 ‘죄’의 문제로 혼동하는 것, 또 ‘죄의 유전’으로 설명하는 것은 커다란 문제를 야기한다. R. Horacio Etchegoyen, Fundamentals of Psychoanalytics Technique, Karnac Book, London 1991, 25-26 참조.

 

4) 사목헌장, 10, 18, 22항; “가톨릭교회교리서”, 1503-1505항 참조.

 

5) “가톨릭교회교리서”, 1030-1031. 1054항 참조.

 

6) “가톨릭교회교리서”, 1032항.

 

7) “좋지 않은 영향 뒤에 마귀가 있다고 느끼면 그 마귀를 묶고 추방하는 기도를 바친다. 그리고 가계치유를 위해서 미사를 봉헌하면 좋다. 불행하게 죽은 어떤 영혼이 있으면 그를 위해서 미사를 봉헌하면 좋다. 그리고 살아 생전에 화해해야 했는데 화해하지 못하고 죽은 부모님이나 친척이 있으면 그런 경우에 예수님을 중재로 해서 서로 화해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며 가계에 흐르는 이른바 ‘저주’를 끊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8) “가톨릭교회교리서”, 1038-1050. 1058-1060항 참조.

 

* 지성용 가브리엘 - 인천교구 성소국장 신부. 로마 교황청립 우르바노 대학교에서 신학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인천 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원론을, 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에서 인간학을 가르친다.

 

[경향잡지, 2008년 5월호, 지성용 가브리엘(인천교구 성소국장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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