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일)
(백) 부활 제5주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성무일도ㅣ독서기도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하느님을 뵈오리라는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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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6-19 ㅣ No.417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독서기도

 

제2독서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의 강론에서

(Orat. 6 De beatitudinibus: PG 44,1266-1267)

 

하느님을 뵈오리라는 희망

 

 

하느님의 약속은 너무도 위대하여 행복의 최고 한계를 초월합니다. 하느님을 본 사람이 하느님을 봄으로써 그분 안에서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좋은 것을 맛본 다음 무엇을 또 원하겠습니까? 사실 성서에서 “무엇을 본다.”라는 것은 “무엇을 가지다  - 누리다.”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예를 들면 시편에서 “예루살렘의 번영을 누리게 하여 주시기를”이라는 뜻으로서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게 하시기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악한 자는 주의 영광을 보지 못하게 쫓겨나리라.”라는 말씀에서 예언자가 “주의 영광을 보지 못하게”라고 말할 때 그는 “주의 영광에 참여하지 못하게”라는 뜻으로 이 말을 사용합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보는 사람은 이 보는 행위 안에서 이 세상에서 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갖게 됩니다. 그는 끝없는 생명, 영원토록 부패하지 않는 것, 사라지지 않는 행복, 영구한 나라, 끊임없는 기쁨, 참 빛, 감미로운 영신의 목소리, 도달할 수 없는 영광, 그리고 끝없이 지속하는 용약 - 한마디로 온갖 선을 얻습니다. 희망 속에 약속된 행복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것은 이렇게 많고도 큽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하느님을 보는 것은 마음의 순수성에 달려 있으므로 마음이 깨끗한 사람만 하느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의 순수성은 우리 본성을 능가하고 우리가 이루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을 생각할 때 내 마음은 한번 더 현기증을 느끼게 됩니다. 하느님을 보는 것이 이 순수성에 달려 있고 또 한편 모세와 바오로가 자기들이나 어떤 누구도 그분을 볼 수 없다고 말하듯이 자신들도 그분을 보지 못했다면 이제 말씀께서 우리에게 제안하시는 행복은 그전에도 성취되지 못했고 또 실제로 불가능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을 보게 될 수 있는지 알아도 우리가 알게 된 그 목적을 이룰 힘이 없다면 우리에게 유익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흡사 이승에서 볼 수 없는 것을 천국에서 보게 되기 때문에 천국에 있는 것은 복되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말이 천국에 도달하는 방법까지 보여 주어야만 참으로 유익한 말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천국에 이르지 못하는 동안에는 천국에 있는 것은 행복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천국의 행복을 알면서도 그것을 아직 얻지 못하는 것은 결국 우리에게 앗긴 것으로 느껴질 때 번뇌와 환멸이 되어 버리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느님은 우리 인간 본성과 능력으로서는 할 수 없는 그런 엄청난 것을 명하신단 말입니까?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날개를 주시지 않은 이들 보고 새가 되라고 명하시는 일이 없고 뭍에서 살게 되어 있는 조물 보고 물 속에서 살라고 명하시지도 않습니다. 다른 모든 피조물에게 있어 법은 그 피조물의 능력에 맞게 되어 있고 그 능력 이상의 것을 지키라고 명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에게 약속된 이 행복은 우리 능력으로 가능한 것임을 알아 그것을 이루는 데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한도 바오로도 모세도 또 그들과 같은 다른 이들도 하느님을 보는 데에 존재하는 그 초월적 행복에서 누리지 못한 것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오로는 “이제는 정의의 월계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날에 정의의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 월계관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요한은 “주님의 가슴에 기대어 있었으며”, 모세는 “모든 이에 앞서 너를 알았노라.”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느님을 보는 것은 인간 능력을 초월하는 것이라고 말한 이들이 행복을 이루었다면, 그리고 행복이 하느님을 보는 데에 있고 또 마음이 깨끗하고 순수한 사람들이 하느님을 볼 수 있다면, 행복을 이룰 수 있게 해주는 그 순수성은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바오로 같은 분들이 하느님을 보는 것이 인간 능력을 초월하는 것이라고 말할 때, 이 말이 사실이라면, “마음이 깨끗한 자는 하느님을 뵙게 되리라.”는 하느님의 말씀은 바오로의 말과 모순이 되는데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겠습니까?

 

 

응송  시편 62(63),2bc. 16(17),15

 

◎ 내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 하나이다. * 하느님 내 하느님, 당신을 애틋이 찾나이다.

○ 나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을 뵈오리다. 깨어나 당신 영광을 뵈옴으로 흡족하오리다.

◎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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