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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부활 제5주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7성사ㅣ 준성사

[혼인성사] 혼인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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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0 ㅣ No.77

혼인성사

 

 

젊은이를 바라보면 그들은 언제나 아름답다. 생김새도 그러려니와 그들의 생각도 기성세대의 것보다는 훨씬 참신하고 정직하기에 그들의 아름다움은 더욱 빛을 낸다. 이렇게 아름다운 두 젊은이가 이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한 모습으로 또한 가득한 축복 속에 혼인성사를 받는 것을 바라보면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 된다.

 

그러나 요즘은 혼인의 아름다움이 경솔함으로 많이 훼손되어 가는 것이 가슴아프다. 이혼율은 높아만 가고 아주 사소한 이유와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으로 부부가 마치 전쟁을 치르듯이 손발톱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모습은 정말 장가 한 번 못가본 내 마음을 슬프게 한다. 사제로 살아가면서 많은 부부들의 모습을 바라보게 된다. 어떤 부부는 참으로 동화처럼, 그림처럼 살아가는 것을 본다. 그리고 그 때 그것을 바라보는 나도 행복해진다. 그러나 어떤 부부는 마치 못과 망치처럼 두들기고 박히고 하면서 상처를 주고받아야만 하는 것처럼 살아가기도 한다. 그때는 그들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참 슬퍼진다. 혼인이라는 것이 하루를 살아도 자신의 전 인격을 나누는 축제인 것을 어찌 그들은 모를까?

 

우리는 기쁜 일이 생기면 잔치를 한다. 잔치는 나누는 것이다. 혼인이 참으로 인격과 성의 나눔이라면 혼인의 삶은 언제나 축제여야 한다. 특히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축제를 위하여 혼인을 마련하셨고 축복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첫 번째 기적도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일어났고 또한 그 기적은 다름 아닌 인간의 축제를 표상하는 술(포도주)을 만드는 기적이었던 것이다.

 

혼인성사는 이와 같은 하느님의 축복을 인간의 성과 인격의 나눔인 결혼과 연결시켜 표징화시킨 인간적으로 가장 아름답고 보기 좋은 성사이다. 이제 그 혼인성사에 대해서 조금 전례적으로 살펴보겠다.

 

 

혼인의 전례사적 개관

 

혼인이란 두 다른 성을 지닌 인격 사이에서 이뤄지는 가정적이며 사회적이고 교회적인 통교의 성사이다. 초대교회에는 특별한 고유 예식서 없이 각자가 속한 사회 풍습대로 혼인을 거행하였다. 로마제국을 관장하던 로마법에 의하면 결혼의 핵심은 결혼하려는 두 신랑신부의 인격적인 상호 동의에 있다. 이 동의를 받쳐주기 위해서 몇 가지 조건을 달았는데 우선 결혼 적령기에 도달했는지, 부모의 묵시적 동의가 있었는지, 혈족장애, 전혼의 인연장애, 시민지위의 장애 등의 혼인 금지 장애에 빠져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여 이상이 없으면 혼인을 허락하였다. 이렇게 혼인의 조건과 동의가 로마제국시대부터 중요하게 여겨졌고 집전형식은 부차적인 것으로 다루어졌다. 특히 로마에서는 3세기에 이르러 약혼이 결혼으로부터 독립되게 되고 가족들과의 잔치 때 혼인 약속을 하고 쇠로 만든 반지를 교환하는 예식이 희랍으로부터 들어왔다. 당시 로마의 결혼예절은 3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첫 부분은 신부의 집에서 거행되는데 신부에게 옷을 입히고 화관과 면사포를 씌우는 예절이 있었다. 둘째 부분으로 기혼 부인이 신부를 신랑에게 소개하는 예절이 거행되었는데 이때는 증인이 필요했고 반드시 혼인 동의를 확인한 후에 신부를 신랑에게 인계하고 이어서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는 형태로 혼인잔치가 시작되게 된다. 셋째, 저녁에 신부를 신랑집까지 데리고 가는 행렬 예절로서 공동체적인 축제의 성격을 더욱 강하게 띄게 된다.

 

밀라노 칙령 이전에는 교회는 고유의 혼인예절을 갖지 못했고 소속된 공동체의 풍습대로 혼인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이방인의 풍속 중에서 미신행위와 방탕한 잔치 등은 금지하였다. 교회 내에서도 혼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사자들의 동의였다. 4세기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혼인도 그리스도교적인 예절로 변모된다. 사회 예식에 신랑신부들에 대한 주교, 사제, 부모들의 축복형식으로 발전하다가 후에 신부에게 면사포 수여(로마, 밀라노), 화관 씌우기(동방교회), 침방으로의 인도(갈리아, 스페인) 등의 예절들을 그리스도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4세기경 로마와 밀라노 지방에서는 부모, 주교들의 축복과 면사포(velum) 수여 등이 행해졌고 아직 확정된 기도문이나 강복문은 없었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결합이 혼인의 신학적 기반으로 인식되어 예식에 반영되었다.(면사포: 신부의 새로운 지위를 표상하며 그리스도 앞에서의 교회의 모습을 상징함). 예식 중에 상징적으로 성서의 지혜로운 여인들이 인용되기도 하였다.

 

5세기 이후 혼인은 미사 중에 거행되었고 혼인 강복으로 이 미사를 마무리하였다. 당시에도 약혼식 등을 거행했으나 교회는 관여하지 않았고 혼인 강복은 공개적인 죄인(간음, 재혼)에게는 거부되었다. 5-6세기에는 갈리아와 켈트지역에서는 신혼 침실의 축복이 곁들여졌다. 이는 동정녀(수도자)들과 그들의 집(수도원)을 축복하던 예절에서 기인하였으리라 사료되는데 구약 토비아와 사라의 혼인 기도를 연상하게 한다 (토비아 8,4-10). 스페인에서는 침실의 축복뿐 아니라 혼인을 위한 기도(성무일도)와 밤샘기도, 신랑신부의 축복과 신부 단독의 축복 등이 거행되었고 신부를 신랑에게 성직자가 인도하였다. 후에 약혼식 로마 풍속인 반지의 축복예식이 들어와 약혼식 때에 거행되었다.

 

서방교회에서는 11세기를 기점으로 혼인예절 안에 남아있던 비 그리스도교적인 요소를 교회예절 밖으로 몰아낸다. 특히 9-10세기 이방민족의 입교를 통해 야만스런 혼인풍속(납치결혼 등)이 만연하였기에 교회에서는 결혼 전 신부의 동의여부를 묻는 등등의 사전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이후 사회가 그리스도교화 하면서 시민결혼이 교회의 행위 안으로 들어오고 이를 통해 여러 민속요소들이 교회로 들어오게 되었다.

 

특히 중세 교리의 발전으로 혼인이 성사의 하나로 확정되면서 혼인의 공적인 성격(교회내의 선포)이 강화됨으로써 혼인동의의 표명이 집이 아니라 성당 문간(in facie ecclesiae)에서 공개적으로 행해졌고, 신랑신부에 대한 강복, 침실축복, 혼인반지 축복 등이 부활되었다. 당시의 예절을 보면, 성당 문간에서 성수 뿌림, 혼인동의에 대한 사제의 질문, 혼인지참금과 반지의 축복과 교환, 혼인 강복, 성당에 들어와서 미사봉헌, 미사 끝 혼인강복 등의 순으로 거행되었다.

 

혼인의 성사적인 성격을 강조하다보니 혼인도 나는 너희를 짝지운다(Ego coniungo vos)라는 형태로 집전되게 되었고 사제의 역할이 강조되어 동의도 사제의 질문에 신랑신부가 단지 “예”라고 답변하는 형태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후 사제가 신랑신부의 손을 결합시키고 성수를 뿌린 후 반지를 축복하여 교환하게 하였고 이때 사제가 시편구절이 포함된 기도를 하였다.  이어서 신랑신부의 강복이 뒤따르며 그 후에 미사를 봉헌하고 미사 끝에 장엄강복을 내린다. 뜨렌또 공의회는 지방교회가 지닌 전통적인 혼례식을 인정하였고 따라서 프랑스에서는 혼인 침대의 축복예절도 존속했다. 그러나 이런 종류들도 17세기의 금욕주의적 경향으로 축소되었고 1614년 로마 예식서 (Rituale Romanum)의 간소한 예식이 전 교회로 확산되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새 예식서에 따른 혼인성사

 

전례헌장 77-78항은 성사의 은총과 부부의 임무를 강조하며 지방고유의 혼례의식을 인정하고 있다. 다만 동의 부분만은 강조하고 있으며 미사 중에, 적어도 말씀의 전례를 한 후에 성사를 거행할 것과 혼배 강복을 베풀 것을 권하고 있다. 1969년 3월 19일 반포된 새 예식서는 특히 다른 전례서보다 더 많은 자율성을 주교회의에 일임하여 혼배가 갖는 사회성을 반영하도록 유도하고 있기도 하다. (핵심인 혼인 동의와 강복부분의 문구까지 비교적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일러두기 12-18항 참조)

 

새 예식서의 특징으로는 아주 간략하게 혼배의 중요부분만을 모델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과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독서와 복음을 다수 수록하고 있다는 점이다.(35개: 구약 8개, 시편 7개, 서간 10개와 복음 10개). 새 예식서는 1614년 예식서로부터 골격을 물려받았으나 기도문 등에서의 많은 중요한 전환을 하였다. 옛 예식서의 문간예절의 일부를 예식 앞에 수용하였으며, 동의를 구체화하였고 그 형식을 사제가 아닌 신랑신부가 선언하게 하였고(영국전승) 사제의 혼인결정(Ego conjungo vos)이 단순히 그 동의를 받아들이는 표현으로 바뀌었다. 반지교환시도 신랑신부의 역할을 강조하여 옛 지참금의 축복과 교환의 정신(사랑과 신의의 표지)을 이어받았다고 본다.  전통의 혼인 강복이 뒤따르는데 더 이상 토비아서의 전승을 따르지 않고 삼위의 축복을 청하며(스페인 전승) 여기서도 혼인의 의미와 그를 통해 하느님께서 맡기시는 사명을 언급한다. 이와 같이 새 예식서는 옛 전통을 이어받고 중세기에 조금은 훼손된 혼인의 의미를 부활시키며 혼인을 다시 축제화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하고 있다.

 

문제는 혼인예식이 아니다. 누구든지 혼인을 처음 거행할 때는 축제로 지낸다. 그러나 결혼식 그 순간만이 축제가 되어 그 순간이 지나면 머지않아 아무것도 아닌 일상으로 돌아가 축제의 의미를 까맣게 잊은 채 살아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혼인은 한 순간에 끝나는 성사행위가 아니다. 일생이라는 긴 삶을 통해서 성취해 나가야 하는 인격적이며 성적인 나눔의 축제이다. 그래서 혼인을 거행할 때 가장 중요한 동의의 부분에서 “나는 당신을 내 배우자로 맞아들여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일생 신의를 지키며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할 것을 약속합니다”라고 서약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부부들은, 그림처럼 축제처럼 일생을 살고 싶은 부부들은 혼인이 결혼식의 환희가 아니라 그들 일생을 통해 축제화 시켜야 하는 하느님께서도 가장 기뻐하시는 축제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인천가톨릭대학교 홈페이지에서, 이완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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