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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49: 성 토마스 아퀴나스 - 근대를 열어가는 사상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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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1-07 ㅣ No.240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49) 성 토마스 아퀴나스 - 근대를 열어가는 사상 전개

 

 

- 성 토마스아퀴나스 : 성 토마스 아퀴나스. 귀 옆의 비둘기는 성령의 속삭임을 표현하고 있다.

 

 

중세 하면 우리에게 가장 떠오르는 단어가 무엇일까? 아마도 「암흑기」란 말일 것이다. 이런 오해는 중세시기의 모든 문화와 학문이 신 중심적, 교회 중심적이었던 것에 대한 인문주의자들의 반동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과거와 단절된 새로운 사상이란 없다. 신 중심적 세계관에서 인간중심적 세계관으로 넘어가는 근대 서구적 사상도 200~300년에 걸친 총체적인 사회변화였다. 이는 근대의 뿌리가 찬란한 중세 문명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조선이 개국 후 고려의 지배적 사상이었던 불교를 버리고 유교를 새로운 지배 사상으로 선택한 것은 자신들의 왕조 찬탈을 위한 당연한 명분이지만 그렇다고 고려불상의 미려함과 청자의 우아함을 부인할 정당성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중세의 절정기라 할 수 있는 13세기는 서양다운 서양을 형성하는 시기로 이미 근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시기의 한 인물을 통해 중세를 관통하고 근대를 여는 사상을 볼수 있으니 그가 바로 보편적이고 천사적인 교회박사 성 토마스 아퀴나스다.

 

 

생애

 

토마스는 1225년경 로마와 나폴리 사이에 있는 아퀴노 마을 인근의 로카세카 성에서 태어났다. 형제들 가운데 막내였던 토마스는 5살이 되었을 때 몬테카시노 수도원의 봉헌자로 보내졌다. 열 네 살이 되던 1239년 교황영토와 황제영토의 경계선에 위치한 몬테카시노 수도원이 황제의 군대에 의해 점령당하자 집으로 돌아와 나폴리 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여기서 토마스는 자신의 전 생애를 결정할 운명적인 두 가지, 아리스토텔레스와 탁발수도회를 만나게 된다. 나폴리는 시칠리아에 속하는 지역으로 동서방의 경계지역이자 전투지였다. 따라서 국경지역의 특성상 그리스나 아랍 등의 외래문화가 상존해 있었다. 여기에 나폴리 대학은 프레드리히 2세에 의해 세워진 순수 국립대학으로 교황청의 영향력에서 어느정도 비켜나 있었으므로 교황청의 공식적인 아리스토텔레스 강의 금지령을 글자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 이런 환경 아래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을 배우게 된다. 또 나폴리에는 1231년부터 도미니코회가 설립되어 있었다. 토마스는 19살이 되던 해 도미니코회에 입회했다.

 

토마스가 도미니코회를 선택한 것은 진리선포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다. 그는 신학대전에서 『가르친다든가 설교하는 일은 관상이 차고 넘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일은 단순한 관상보다 더 우월하다. … 따라서 갖가지 수도회 가운데 최고의 단계를 점하는 것은 가르치는 것과 설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수도회다』(188문 6항)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귀족이었던 그의 가문은 토마스가 구걸승이 된다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토마스는 가족을 피해 파리로 가는 도중 형제들에게 납치돼 아버지의 성에 감금된다. 1년 후 풀려난 토마스는 파리대학으로 가 알베르토 마뉴스의 지도아래 1250년까지 5년간 공부하고 알베르토가 쾰른에 수도원 대학을 세우기 위해 갈 때 동행해 학생들을 가르치며 한편으로 알베르토에게 강의를 들었다. 1252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중요성을 간파한 알베르토는 토마스를 파리대학에 보내 연구할 수 있도록 했다. 토마스는 스물일곱의 나이로 프란치스코회의 보나벤투라와 함께 파리대학교 교수가 됐다. 이때 성서학과 롬바르두스의 명제집을 강의하며 명제집을 간결히 정리하고 논증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과 원리를 도입한 신학을 전개했다.

 

1259년 이탈리아로 파견된 토마스는 같은 수도회 소속으로 희랍문헌들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던 뫼르베케 빌헬름을 알게된다. 그가 번역해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은 그리스어를 잘모르던 토마스의 철학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됐다. 이 시기에 토마스는 자신의 대표작인 「신학대전」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마흔넷이 되던 1269년 토마스는 다시 수도회에 의해 프란치스코회와의 학문적 대립이 첨예해진 파리대학교로 가게 됐다. 신앙을 강조하는 극단적인 아우구스티노주의와 이성을 강조하는 극단적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사이에서 자신만의 노선을 추구하던 토마스는 이 시기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저술을 하게되고 방대한 신학대전 2부도 이때 씌여진다. 1272년 로마로 되돌아온 토마스는 나폴리에 수도원 대학을 설립하라는 명을 받고 나폴리로 갔다가 1274년 리옹공의회에 참석하라는 교황의 명을 받고 리옹으로 가던 중 1274년 3월 7일 선종했다.

 

 

사상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사고를 받아들여 구체적인 사물에서 사고를 시작했다. 결국 토마스의 사상은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사물에 대한 설명이다. 그는 눈에 보이는 경험적 사물들에서 출발해 그 존재가 무엇인지, 어떻게 존재하는지, 그 존재의 조건이 무엇인지를 탐구함으로써 모든 존재사물의 근거로서의 최고 존재 곧 하느님을 탐구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토마스에 의하면 모든 사물 곧 존재하는 모든 것은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 자체」에 참여(participatio)하고 있기 때문에 없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철학적인 이 설명을 교회용어로 풀면 창조가 된다. 그리고 이 창조는 신에 의해 자유로이 이뤄지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철학의 원리인 존재자체에 대한 탐구를 창조론과 연결시킴으로써 토마스는 자신이 출발점으로 삼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넘어섰다.

 

또한 토마스에 의하면 창조된 모든 사물은 자신의 근원인 창조주에게로 되돌아가려는 근본적인 성향을 갖고 있는데 이것이 구원이다. 창조가 신에 의해 자유로이 이뤄지는 것처럼 구원도 사물들의 마지막 선택에 따라 이뤄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토마스가 쓴 명제집 주해서에 따르면 『피조물이 그들의 제일원천에서 생성되어 나오는 과정은 「일종의 윤회」와 같은 것이며 여기서 모든 사물은 태초에 그들이 출발점으로 삼았던 바로 그곳을 목적으로 삼아 되돌아간다』고 했다.

 

이처럼 토마스는 사물의 세계에서 출발해 신에게로 나아가고자 했다. 그래서 토마스는 인간의 행복을 『신을 직관하는 것』이라 표현했다. 토마스의 이러한 사상은 자신의 삶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데 그는 선종하기 얼마전인 1273년 12월 6일 미사 중 신비 체험을 한 이후 더 이상 저술을 하지 않는다. 토마스는 자신의 친구요 비서였던 레지날드에게 『내가 바라본 그것과 비교한다면 이제껏 내가 저술한 모든 것이 지푸라기와 같다』고 대답했다.

 

[가톨릭신문, 2002년 5월 5일, 김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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