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 (토)
(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대야 류건휴의 이학집변에 나타난 천주학 비판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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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5-01 ㅣ No.880

大埜 柳健休의 《異學集辨》에 나타난 천주학 비판에 관한 연구

 

 

국문 초록

 

본고에서는 《이학집변》이라는 책의 저술 동기, 체제와 내용에 대해서 소개하였다. 더불어 이 책 가운데 <천주학> 편을 분석하여 천주학 비판 내용과 비판의 특징, 한계점 등을 살펴보았다. 《이학집변》은 19세기 초 안동의 성리학자였던 대야가 쓴 책으로 서문에는 천주학도들이 조선을 어지럽히는 것에 대한 분노 때문에 이 책을 썼다고 했다. 그래서 당 시대에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천주학을 빌미 삼아 원시 유학 이래 이학들을 모두 모아 변증하면서, 이미 사라진 전대의 이학들처럼 정학을 밝히면 천주학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대야가 표면적으로 드러낸 이유이고, 이면에는 노론으로부터 영남 남인들을 보위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노론들이 신유박해를 일으켜 기호 남인들을 대거 축출시키자 영남남인들은 그들의 표적이 되지 않기 위하여 방도를 찾아야만 했다. 안동은 대대로 퇴계의 덕화가 미쳐 성리학이 잘 보존된 지역임을 내세우고, 기호 남인들과 성향이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여 정적 제거 대상이 되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천주학의 이론적인 내용보다는 기호 남인들이 천주학을 이해하는 태도를 비판함으로써 영남 남인들은 기호 남인들과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러다 보니 천주학 이해에 대한 대야의 한계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그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천주학의 다양한 쟁점들에 대해 다루지 못하고 있다. 이것 때문에 피상적인 비판에 그치면서 번번이 핵심을 벗어나고 있다. 둘째, 논리적 비약으로 선학들의 비판을 비난하는 강경함과 준엄한 태도가 엿보인다. 셋째, 성리학 우월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다. 이것 때문에 조선의 신분 사회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비록 대야의 천주학 비판 내용이 허술하고 논리적 비약이 심해 한계가 그대로 노정되어 있다 하더라도 이후에 류치명(柳致明) 학파의 척사 의식에까지 영향을 끼쳐 영남만인소로 이어지게 했으므로, 영남 유림의 척사 의식의 흐름을 찾는 저술로써 의의가 있다 하겠다.

 

 

1. 글머리

 

전주 류씨(全州柳氏) 수곡파(水谷派) 대야(大?) 류건휴(柳健休, 1768~1834)는 조선 후기 예학의 대가였던 류장원(柳長源)을 사사하여 경학과 성리학, 제자백가서를 두루 섭렵한 인물이다. 그러나 류장원이 죽고 배울 곳을 잃게 되자 마음이 해이해져 스승이 가르친 뜻을 저버릴까 걱정하여 유학에만 전념하고 잡서는 보지 않았다.1) 그의 할아버지 류화현(柳和鉉)과 아버지 류충원(柳忠源)은 처사(處士)로서 한평생 학문에 몰두하고 수신에 힘썼으며, 대야 또한 그랬다.2) 대야의 할아버지 · 아버지 그리고 대야까지 처사로서 한평생 학문에 몰두하고 수신에 힘쓸 수밖에 없었던 것은 1694년 갑술환국 이후 남인들은 관직에서 배제되어 재야의 선비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 때문이었다. 그런 선비의 길을 벼슬을 주어도 받지 않은 ‘징사’(徵士) 또는 벼슬을 외면하며 사는 ‘처사’(處士)라고 자칭 자위했으나,3) 정국이 혼탁해지고 백성들은 살기 고단하여 민란이 발생하고 이향(離鄕) 현상이 발생했으니 체제에 대한 불만이 없지 않았다. 그래서 대야뿐 아니라 재야의 유림들은 중앙 정계에 대한 비판 세력으로 점차 그 영향력을 키워 나간다. 그런 중에도 영남 유림들은 자신의 학문적, 사회적 입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병호시비(屛虎是非)와 같은 지리한 논쟁에 뛰어들기도 한다. 대야는 이런 분위기의 안동에서 학문에 대한 신념과 자부심, 가문의 전통에 따라 한평생 성리학에 전념하며 살았다.

 

대야의 학문은 이황(李滉) → 김성일(金誠一) → 장흥효(張興孝) → 이현일(李玄逸) → 이재(李栽) → 이상정(李象靖) → 류장원(柳長源)으로부터 시작되는데, 류장원의 영향으로 예학에 조예가 깊었고, 그래서 류장원의 역작인 《상변통고》(常變通攷)를 교정할 때 류휘문(柳徽文), 류치명(柳致明, 1777~1861) 등과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 대야의 학문은 그의 문인이며 족손인 류치구(柳致救, 1793~1853)를 통해 전해진다. 전주 류씨 가문은 16세기부터 20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150여 명에 가까운 학자가 문 · 행 · 충 · 신(文行忠信)으로 이름을 남겼다. 이렇게 걸출한 선조들만큼 학문이 이르지 못했던지 그는 학문적으로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4) 하지만 그가 남긴 저술로서 사서의 중요한 부분에 대한 우리나라 선유들의 평주를 모아 엮은 《동유사서해집평》(東儒四書解集評), 이황과 이상정을 하나의 도통으로 연결시키고 학문적 요점을 발췌하여 분류 · 편성한 《계호학적》(溪湖學的), 조선 태조로부터 정조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서술하여 역대에 일어났던 사실과 인물을 중심으로 수록한 《국조고사》(國朝故事), 그리고 이단의 학문적 폐해를 논변한 《이학집변》(異學集辨)5) 등을 볼 때 저술 작업을 하며 학자로서의 삶을 성실히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저서 가운데 본고에서 살피고자 하는 것은 6권 5책으로 된 필사본 《이학집변》이다. 2004년에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영인하여 간행하였고, 2013년에 번역본이 출간되었지만6) 아직까지 학계에 널리 소개되지 않은 탓에 최근에 단 세 편의 논문만이 나와 있는 상태이다.7) 이 책은 제목에서 말해주듯이 원시 유학 이후 19세기까지 성리학자의 입장에서 이학으로 간주된 모든 학문에 대해 변증한 것들을 모은 것이다. 목차를 살펴보면, 권1은 <총론> · <노 · 장 · 열> · <양 · 묵> · <관자> · <순 · 양> · <공총자> · <문중자> · <도가>이고, 권2∼3은 <선불>, 권4는 <육학>, 권5는 <왕학> · <소학> · <사학>, 권6은 <천주학> · <기송사장>의 18가지 이학을 비판하고 있다.

 

그중에서 연구자가 주목하는 것은 권6의 <천주학> 부분이다. 사실상, 권1~5까지 논한 이학들은 대야 당시 조선 사회를 크게 어지럽힐 만큼의 위력을 갖고 있지 못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천주학은 대야 입장에서 당시 체제에 도전하는 사학(邪學)이었다. 《이학집변》의 ‘서발문’을 보면 이 책이 저술된 동기도 천주학도들이 조선을 어지럽히는 것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따라서 대야는 당 시대에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천주학을 빌미 삼아 원시 유학 이래 이학들을 모두 모아 변증하면서, 이미 사라진 전대(前代)의 이학들처럼 정학(正學)을 밝히면 천주학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라 기대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학집변》은 성리학만을 정학으로 인정하고 공부했던 대야의 이학에 대한 비판 의식이 잘 드러나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이 책은 이후에 류치명 학파의 척사 의식에 영향을 끼쳐8) 영남만인소로 이어지게 되므로 대야의 이학 비판의 내용과 특징을 살피는 것은 영남 유림의 척사 의식의 흐름을 찾는 연구로도 의의가 있다 하겠다.

 

본고에서는 먼저 《이학집변》 소개와 더불어 이 책 가운데 <천주학> 편에 주목하여 대야가 이 책을 쓴 직 · 간접적인 동기는 무엇이었는지, 이 책의 체제와 천주학 비판의 내용을 살피려고 한다. 그리고 대야가 이 책을 집필할 당시는(1833) 신유박해(1801)가 일어난 후여서 서학과 서학 서적에 대해 금교령 · 금서령이 내려진 뒤였는데9) 어떤 경로로 천주학을 배우고 이해하였으며 비판했는지, 그의 천주학 비판의 특징과 한계는 무엇인지도 밝혀보겠다.

 

 

2. 《이학집변》의 저술 동기

 

우선, 이 책의 저술 동기를 알고자 1833년 6월 대야가 쓴 《이학집변》의 ‘서문’을 살펴본다.

 

…원나라와 명나라 때에는 또 이른바 천주학이라는 것이 출현했는데, 그 이론은 불교와 도교의 찌꺼기를 주워 모은 것으로, 지극히 비루하여 사람을 속일 정도도 못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서양 오랑캐들이 여기에 의거하여 천지를 막고 가리며, 또한 점성 · 역학의 교묘한 술책이 인재와 지식계를 현혹하고, 남녀의 욕망을 부추겨 순진한 풍속을 억압 · 견제하고 있으니, 어떻게 우리 도학이 모두 침체해서 없어지지 않는다고 보장하겠는가. 나 건휴 또한 선배와 어른들의 말씀을 듣고 이 점에 대하여 분개의 감정을 느낀 적이 있다.10)

 

전략(前略) 부분에는 자사(子思)가 《중용》을 지어 후학을 가르쳐 성학(聖學)을 밝힌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갖가지 이학들이 성쇠(盛衰)를 반복했던 과정을 서술하였고, 앞의 인용문에서는 오늘날 천주학의 출현으로 성학이 침몰할 위기에 빠져 있기에, 여기에 분노하여 이학이 왜 이학인지를 밝히고자 이 책을 저술했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책이 저술된 표면적인 동기는 첫 번째, 이단의 비판을 통해 사학(邪學)의 폐단을 알리고, 주자에서 퇴계까지의 도학적 전통을 계승하며 이를 통해 도학의 정통성을 수호하는 것이었다.

 

아래는 계속해서 이어지는 ‘서문’의 내용이다.

 

뒷날 학문에 뜻을 두면서도 지향할 곳을 정하지 못한 이들로 하여금 상고할 곳이 생겨, 상像을 놓고 기도한다거나[도가의 천존天尊] 주主를 떠받들어 주문을 외우는 무리들[서학의 천주]이 일컫는 하늘은 하늘이 아니라는 것과, 공空을 성性이라 하면서 인仁 · 의義와 분리시킨다거나[불가의 공空과 무無] 생生을 성이라 하면서 기질과 뒤섞는 학설[고자의 ‘생을 성이라 한다’는 설, 순자의 성악설, 양자의 선악이 혼재되었다는 학설, 불가의 ‘작용作用이 곧 성’이라는 설 따위가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이 일컫는 성은 성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요명窈冥과 혼묵昏?이라는 말[노 · 장 · 열자는 모두 현허玄虛를 도라고 한다]이나, 보고 듣는 것과 움직이고 숨 쉬는 것이라는[불가] 설이 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 또한 스스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한다거나, 정도를 역행하여 거꾸로 행동하기[양씨의 위아설爲我說은 스스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고, 묵씨墨氏의 겸애설은 정도를 역행하며, 불가에서는 이 두 가지를 아우른다]를 주장하는 학설이 교敎에 현격히 어긋난 것이라는 사실[육상산과 왕양명의 학설이 겉으로는 유학을 표방하지만 속으로는 불가로, 곧 사이비라는 것은 이 네 조목에서 간파된다]을 알 수 있게 하였고, 그 외 저급하고 비루[관 · 상 · 신 · 한管商申韓과 왕 · 소 · 진 · 섭王蘇陳葉의 권모술수와 공리설 등]하거나, 편파적이고 왜곡되며[백가와 중기衆技 따위] 지리한[과거 문자와 사장학 따위] 학술 등을 모두 분변할 수 있게 하였으니….11)

 

두 번째 동기는 뒷날 학문에 뜻을 두면서도 어떤 학문을 할 것인지 정하지 못한 이들에게 상고할 곳을 만들어 주고 성리학만이 정학임을 알게 하기 위해서 이 책을 저술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후학들이 경계 삼을 수 있도록 각 이학이 왜 사학이고 사설(邪說)인지 맹점을 짧게 지적하고 있는데, 도가의 천존(天尊), 서학의 천주(天主), 불가의 공(空)과 무(無), 고자(告子)의 ‘생을 성이라 한다’는 설, 순자의 성악설, 양자(揚子)의 선악이 혼재되었다는 학설, 불가의 ‘작용이 곧 성’이라는 설 등등이다.

 

그러나 이렇게 대야가 밝힌 저술 동기 외에 영남 남인들의 생존과 관련된 더욱 절실한 이면적인 이유가 있었다. 이 책은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에 저술된 것이다. 대야는 신유박해로 기호 남인들이 대거 축출되는 사태를 보았고, 그 화가 영남 남인들에게까지 미칠까 두려움이 없지 않았다. 그래서 영남 남인과 기호 남인은 서학을 인식하는 측면에서 다르다는 것을 확인시켜야 했다. 그 결과 <천주학> 편에서 기호 남인들의 글을 인용하고 ‘안설’(按說)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밝힐 때면 그의 감정이 무척 격앙되어 있음이 느껴진다. 자신들을 보위하기 위한 절박한 수단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더욱 엄정한 비판의 잣대를 들이댔던 것이다.

 

 

3. 《이학집변》의 체제와 내용

 

이 책은 선유들의 설을 채록하고 부기하면서 자신의 ‘안설’도 덧붙이는 체제를 갖추고 있다. 아래의 인용문은 서문의 일부로써 이 책의 체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리하여 근래 《주자대전》과 《주자어류》를 보면서 손 가는 대로 뽑아 기록하고, 또 청란진씨의 《학부통변》과 설애첨씨의 《이단변정》을 얻어 빠진 데를 보충했다. 그리고 여러 유가의 학설을 그 사이에 부기하여 조와 목으로 갈래를 나누어 찾아보기에 편리하게 하고, 과거 문자와 사장학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종결했다.12)

 

선학(先學)들의 책을 보며 채록하고, 여러 유가의 학설을 사이사이에 부기하면서 조목(條目)으로 나누었고, 선학들의 학설에 이견(異見)이 있을 때에는 거침없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영남에서 대야의 집안은 대대로 문한(文翰)이 많이 배출되기로 유명한 집안이었고, 그에 따라 많은 서적이 간행되었는데, 그 형태가 《이학집변》과 같이 각종 학설을 분류 · 고증하고 집해(集解)하여 자신의 견해를 수립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면, 류지(柳?, 1626~1701)의 《방례변증》(邦禮辨證), 류경휘(柳慶輝, 1652~1708)의 《가례집설》(家禮輯說) 6권, 류대시(柳大時, 1657~1739)의 《자양집해》(紫陽集解) 10권, 류정원(柳正源, 1703~1761)의 《역해참고》(易解參攷) 17권, 류장원(柳長源, 1724∼1796)의 《상변통고》(常變通攷) 30권과 《사서찬주증보》(四書纂註增補) 31권, 류치덕(柳致德, 1823~1881)의 《전례고증》(典禮考證) 25권13)과 같은 것들인데, 분량 면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하고, 또 한 집안에서 이렇게 많은 책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는 것도 대단한 일이다. 그것은 영남에서 그의 가문이 갖는 위상과 특별히 이 가문이 혈연적, 학문적, 지역적 동지 의식이 투철14)했었던 데 이유가 있다. 《이학집변》은 이러한 류씨 집안의 남다른 학문 전통에다 19세기 초의 시대 상황15), 그리고 평소 그가 보고 들은 이학에 대한 생각과 다독(多讀)을 통해 축적된 지식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다음은 이 책의 전체적인 내용에 대해 살펴보겠다. 우선, 대야는 각론을 펼치기에 앞서 <총론>을 4조목으로 나누어 이단의 해로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스스로를 다스리는 것이 사설을 물리치는 근본임을 밝힘’(明自治爲闢邪之本), ‘사설을 물리쳐야 정도가 분명해진다는 점을 밝힘’(明闢邪然後正道明), ‘이단을 전공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점에 대하여 논함’(論專治異端之非), ‘우리 유학에 이미 밝으면 사설은 절로 변파가 된다는 점을 논함’(論吾學旣明邪說自破)이 각 조목이다. <총론>의 내용을 요약하면, 첫째로 유학자 본연의 자세로 유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적 자세로 본분에 충실해야 하고, 둘째로 이단의 폐해를 지적하여 습속을 바로잡아야 하며, 셋째로 이단의 이론에 대해서는 전혀 알 필요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다음은 각론으로 들어가 <노자 · 장자 · 열자>, <양주 · 묵자>, <관자>, <순자 · 양자>, <공총자>, <문중자>, <도가>, <선불>, <육상산>, <왕양명>, <소동파>, <사학>, <천주학>, <기송사장>을 비판하는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비판의 대상이 된 이학들은 대체로 시간상의 종적 흐름에 따라 전개되고 있으며, 그가 서문에서 언급하였듯이 이 글을 저술할 당시 가장 문제가 되었던 천주학과 과거용 문자와 사장의 폐단에 대해 언급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짓고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공리학(功利學)이나 권모술수, 양주나 순자 같은 제자백가들의 본성에 대한 그릇된 인식, 기송과 사장을 일삼는 데서 비롯된 언어의 폐해까지도 모두 이단의 범주에 포함시켜 비판한다는 사실이다. 대야는 주자의 학설에 근거하여 철저한 성리학적 세계관을 기준으로 거기서 벗어나는 것은 모두 이단이라고 엄정하게 변파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이 논고에서 주목하는 <천주학> 편의 내용을 살펴보겠다. <천주학> 편에서 비판하고 있는 각 세부 조목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대야는 기본적으로 서양의 학문과 과학기술을 바라보는 시각이 부정적이며, 천하의 중심이 서역이라는 것도 변파한다. 이것은 보수 주자학자로서 정사(正邪)의 이분법적인 사유 구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선험적인 반서양 인식에 기초한 것이다. 그래서 서역이 천하의 중심이 된다는 안정복(1712~1791)의 말을 앞의 <표 1> ⑫번 ‘서역이 천하의 중심이 된다는 것에 대해 변파함’(辨西域爲天下中)에서는, 이에 대해 확실한 자신의 견해가 없었던지 ‘안설’은 덧붙이지 않고 남한조의 말을 인용하여 변파하는 데 그치고 있다.

 

그 외 ⑩, ⑬, ⑭번은 서양의 역법과 서양의 과학기술에 대해 변파한 것이다. 대야는 ⑬번에서 《조야회통》(朝野會通)의 내용을 발췌해 아담 샬이 만든 시헌력(時憲曆)이 효종 4년(1653)부터 쓰이기 시작했음을 밝힌 뒤, 남한조의 말을 인용한다.

 

옛날 참판 김백옥[金尙范]이 역법을 만들었는데, …옛 역법을 폐기하고 이마두[마테오 리치] · 탕약망[아담 샬]의 역법을 이용할 것을 주장했다. 식자들은 이것을 가지고 중국이 오랑캐 옷을 입을 것이라고 예견했다. 몽예 남백거[南克寬]가 그것을 변론하여 비록 오랑캐더라도 일부 능한 재주는 취할 수가 있다고 하였다. …백거의 말도 옳지 않다고 할 수 없다. 명나라 말기에 도술이 분열되고 이설이 횡행했으니, 김공의 말이 매우 지나친 듯하지만 이치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16)

 

남한조는 서양 역법을 쓰자는 김상범의 말이 지나친 듯하지만 일리 있다고 했다. 이것에 대해 대야는 ‘안설’을 붙이지 않는다. 현 조정에서 사용하고 있는 시헌력을 폐기하자고 감히 주장하지는 못하지만 그것이 아담 샬이 만든 역법이기 때문에 기꺼이 받아들일 마음도 없는 것이다. 서양에서 들어온 것이라면 모두 정사의 이분법적 논리에서 이단으로 규정하고 보는 대야였기에 서양 역법을 사용한 것에 대해 변파하면서도 따로 ‘안설’을 통해 더 상세히 언급하지는 않는다.

 

⑭번에서는 안정복과 남한조의 아래와 같은 말을 인용하여 서양 기술이 정교하고 뛰어남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서국 사람들은 지식과 견해가 남들보다 뛰어나다. 천도天度의 움직임, 역법의 계산, 기물의 제조에 이르기까지 구중의 하늘을 꿰뚫는 것 같다. 80리를 날아가는 화포의 경우는 어찌 신기하지 않은가.17)

 

저들이 백성을 현혹하고 백성들이 저들의 학문에 현혹되는 것은 대체로 지식과 견해가 남다르고 기예가 정교하기 때문이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그 학문은 마음을 조섭하고 정신을 기르는 것을 주로 삼고, 일체의 힘들이는 일은 끊어 버리기 때문에 지식과 견해가 통하고 지혜로워서 종종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이 있지만,[예를 들어, 지금의 도 · 불의 부류에도 신령스러운 일이 많다] 거기에 견강부회하고 허탄한 말을 덧붙였다. 그 기예가 정교한 것은 신령스러운 지혜에 전일한 공부를 더하여 이룬 것이니,[예를 들어, 일본과 베트남의 기술은 매우 공교로워 우리나라가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 정교함은 괴이할 것이 없다. 그러니 서학 역시 지식과 견해는 비록 다르더라도 도 · 불에서 단련하고 수양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기예가 비록 정밀하다 해도 일본과 베트남의 기술에 불과한 것이다. 어찌 이것 때문에 외람되이 신인神人이라 이름을 붙여서 도리어 그들의 현혹시키는 술책을 돕겠는가.18)

 

하지만 마찬가지로 기예가 비록 정밀하기는 해도 일본과 베트남의 기술 정도에 불과하니 이것 때문에 신령한 사람들이라고 하면서 그들의 술책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한다. 대야는 여기에서 안정복과 남한조의 말만을 인용하고 ‘안설’을 덧붙이지 않는다. 다만, 이 ⑭번 조목을 끝내고 천주학 비판을 마무리 지으면서 자신의 스승이었던 류장원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자신의 ‘안설’을 대신한다.

 

사특한 마귀의 설은 갈래가 천만 가지여서 일일이 변별할 수가 없으니, 긴요한 곳을 가지고 한 칼에 잘라 버리는 것만 못하다. 저들이 천天으로 학문에 이름을 붙여 천학이라고 하지만 천서天敍와 천질天秩에서 벗어났고, 군신과 부자에 대해서 모르니 이것이 죄가 된다는 것을 성토하고, 천지 사이에 용납해서는 안 된다. 어찌 사소한 것을 끄집어내어 자세히 논하겠는가. 외국에서 중국의 정학이 황폐해진 것을 엿보고 이러한 문자를 던져 넣었으니 우리 유자는 마땅히 음란한 음악과 아름다운 여색을 멀리 하듯이 해야 한다. 혹시라도 그들의 신기함을 취해서 변박할 바탕으로 삼는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가운데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19)

 

이것으로 볼 때 남한조나 류장원, 대야는 서양의 과학기술과 학문이 뛰어나다는 점에서는 대체로 같은 의견을 보이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류장원이 제기했듯이 그 신기함에 취해 변박할 바탕으로 삼으려 하다가 오히려 서학에 빠져들지도 모른다는 경계심에 대야는 발전된 서양 과학 기술조차도 수용하지 말자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익이나 안정복 등 기호 남인들이 주장하는 발전된 서양의 학문과 과학기술은 받아들여야 한다는 논의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것이다. 앞서 기술했듯이, 이것은 영남 남인들을 보위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기호 남인들과 성향이 다름을 분명히 드러낼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4. 대야의 천주학 비판의 특징과 한계

 

1) 대야의 천주학 이해

 

대야가 이 책을 쓴 19세기 초는 1791년 윤지충과 권상연의 폐제분주(廢祭焚主) 사건20)으로 인해 서학 서적을 금지하는 금서령21)과 천주교를 금지하는 금교령이 내려진 상태였고, 1794년 주문모 신부가 밀입국하여 몰래 전교 활동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이런 과정들을 볼 때 대야는 안동이라는 내륙 지역에 살면서 서학 서적을 통해 직접 천주학을 공부하고 이해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가 《이학집변》, <천주학> 편에서 인용하고 있는 선유들의 글을 보면, 안정복의 <천학고>와 <천학문답>, 조술도(趙述道)의 <운교문답>(雲橋問答)22), 남한조의 글 등이다.

 

안정복은 같은 성호학파 일부 학자들이 천주학에 경도되는 것을 경계하여 <천학문답>을 썼고, 이것을 그의 문하에 드나들었던 남한조에게 보여주었다.23) 이것을 본 남한조는 안정복의 천주교 비판에 미진한 점이 있다고 생각하여 <안순암천학혹문변의>(安順庵天學或問辨疑)를 썼다. 그리고 이익이 쓴 <발천주실의>는 더욱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여 <이성호익천주실의발변의>(李星湖瀷天主實義跋辨疑)를 써서 천주교 비판에 강경한 입장을 드러냈다. 대야가 <천주학> 편에 실은 안정복의 글은 대부분 <천학고>와 <천학문답>에서 발췌한 것이고, 조술도의 글은 <운교문답>에서 발췌하였으며, 남한조의 글은 문집 《잡저》에 있는 <안순암천학혹문변의>와 <이성호익천주실의발변의>에서 발췌하였다. 이 외에 인용하고 있는 선유의 설은 허목(許穆), 남극관(南克寬), 이상정, 류장원인데,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설을 인용한 것은 안정복, 남한조, 이익, 조술도의 순이고, 나머지는 1회 정도에 그치고 있다. 이것으로 볼 때, 대야의 반천주학 사상은 이익, 안정복과 남한조, 조술도, 류장원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24)

 

이 외에 명나라 사람으로는 가상천(柯尙遷)의 글을 발췌하였고, 서적으로는 《조야회통》과 《명사》(明史), <정종대왕첩논도산>(正宗大王帖論陶山)에서 발췌하였다.

 

대야는 정통 성리학자로서 선험적으로 반서양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신유박해로 인해 환란이 일어나자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생각과 선유들의 글을 채록하여 사학을 비판할 계기로 삼았다. 비판 대상인 서학 서적은 보지 않고, 천주학을 비판하는 선유들의 글을 통해 천주학을 이해하였던 것이다. 일차적인 이유는 금서령으로 서학서를 구하기 어려워서이겠으나, 2차적인 이유는 대야 스스로가 이단 서적은 보지도, 볼 필요도 없다는 고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야는 젊어서 제자백가서를 두루 섭렵할 정도로 호학(好學)자였다. 그러나 《이학집변》의 <총론>, ‘이단을 전공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논함’에서는 퇴계의 말을 인용하여 “배우는 이는 성현의 글을 읽고서 끝까지 알아내고 그것을 믿어야지, 이단의 문자에 대해서는 전연 알지 못해도 무방하다”고 했고, <선불>(禪佛) 편, ‘정씨(程氏) 문하의 여러 사람들이 선학으로 흘러든 일이 많은 것에 대한 총론’에서는 “불교를 타파한 까닭은 바로 불서 자체를 옳다고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고 하며 이단 서적은 그 자체로 그르기 때문에 보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류장원이 앞의 각주 19)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의 학문과 기술을 변박하기 위해 이단 서적을 보다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가운데로 빠져들게 될 것이라 경계한 것을 깊이 새겼던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이 비판한 것 중 수긍할만한 것은 그대로 수용하였고, 서양 문물에 대해 유연한 태도를 보이는 것에는 더 강경한 배척의 입장을 가졌다. 이것은 자신들을 보위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기호 남인과는 다름을 보여주기 위한 표현이었던 것이다.

 

안정복은 나이 70세 무렵 당시 천주교에 입교하였거나 관심이 많았던 성호학파의 젊은 후배들을 경계시키기 위해서 <천학고>와 <천학문답>을 썼기 때문에 천주학에 대해서 많은 공부와 고민을 했다. 안정복이 이 글을 쓸 당시는 서학이 아직 사회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키기 전이었지만, 안정복은 젊은 후배들이 천주학에 빠져들면 언젠가는 파국적인 사태가 일어나리라고 예감하였던 것 같다.25) 그래서 같은 학파에서 평소에 친분이 있는 젊은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이론에서 밀리지 않을 만큼 철두철미하게 공부했다. 그는 진심을 다해 설득하고 염려하며 서학에 대해 무조건적인 비판만 하지는 않았다.

 

이에 비해 대야는 교조주의 성리학자로서 성리학만이 정학이고 나머지는 모두 사학이라는 이분법적인 사유 구조를 가지고 있는 데다가, 그에게는 종교적 의미 체계이기도 한 성리학을 수호해야 한다는 사명감, 그리고 노론의 정적 제거용 전술에 희생당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들이 혼합된 채 <천주학> 편을 기술하였으니 비판의 강도가 격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이익이나 안정복의 비판이 허술하다고 지적하면서 허술한 점을 이론적으로 채우기보다 오히려 그들의 유연한 비판 태도를 비난한다. 비판을 하기 위해서는 대상에 대한 철저한 공부가 선행되어야 함에도 대야는 적어도 천주학에 대해서만큼은 그런 과정이 없었던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럴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내면적인 저술 동기가 기호 남인들과 다름을 보여 영남 남인들을 보위하기 위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천주학의 논리나 내용에 대한 세세한 이해는 그에게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서정형도 “모든 비판적 담론이 흔히 빠지기 쉬운 함정을 비켜가지는 못한 것 같다. 함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비판의 대상에 대한 무지이고…비판의 대상에 대한 무지는 비교철학에서 늘 나타나는 한계지만, 모든 정치 · 사회적 논쟁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비교철학은 한 사람이 비교 대상이 되는 두 가지 철학에 똑같이 정통하기 어렵기 때문에 공정하면서도 통찰력 있는 비교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드물다”26)고 꼬집었다.

 

2) 대야의 천주학 비판 이유

 

집권 세력인 노론 벽파가 신유박해를 일으킨 주된 목적이 정적 제거를 위한 박해였다27)고 한다면, 대야가 천주학을 비판한 이유는 성리학적 질서를 붕괴시키는 사학이라는 것과 노론에 의해 축출된 기호 남인들의 사태를 보면서 영남 남인을 보위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정학을 수호하겠다는 사명감과 자존을 위한 이학 비판이었던 것이다. 《이학집변》을 저술한 동기가 곧 천주학을 비판한 이유이다. 대야에게 성리학이란 조선 사회를 안정시키는 질서 체계이고, 조선 사회의 안정은 자신이 거주하는 안동과 문중, 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정체를 온전하게 해 주는 장치였다. 따라서 학문적으로 천주학의 맹점을 예리하게 파헤쳐 공격하고 비판하기보다 무조건 배척의 입장에 있는데, 그런 태도를 읽을 수 있는 예문 한가지만 소개하겠다.

 

순암은 “천주 예수는 한漢나라 애제哀帝 때에 태어났다. 서사西士의 말에 따르면, 그들 나라에는 천지개벽 이후 역사 기록이 모두 3천 7백 권이 있는데, 예수가 태어날 시기를 모두 예언했다”라고 말하였다.28)

 

위의 글은 안정복의 글로서 <천주학>, ① ‘변야소지생어한시’ 조목에 나오는 글이다. 이 글을 인용한 뒤 대야는 아래의 ‘안설’을 붙였다.

 

나 건휴가 살펴보건대…그들이 말하는 ‘공부’는 불가佛家의 예참禮懺에 불과하다. 그들이 말하는 ‘영혼’[靈神], ‘천당’, ‘지옥’같은 것은 대체로 모두가 석가의 기량伎倆을 답습한 것으로 애초에 학문이라고 명명하기에도 부족했으니, 순암의 분석은 한 잔의 물을 가지고 한 수레나 되는 섶의 불을 끄는 것에 불과하다. …예수가 한나라 때 태어났는지 아닌지 따지는 것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그 나라의 역사서에 그 시기에 대한 예언이 혹 있더라도 오히려 말할 것이 못되는데, 하물며 이러한 이치가 없는 경우임에랴. 그리고 순암 역시 3천 7백 권이나 되는 역사책을 반드시 보지는 못했을 것인데, 근거 없는 말을 경솔하게 믿고 글로 적었으니, 사람들이 괴이한 것을 좋아하는 것이 심하다.29)

 

대야는 첫 조목부터 강경한 어조로 나가고 있다. 예수가 한나라 때 태어났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은데, 안정복은 3천7백 권이나 되는 책을 다 보지도 않았을 것이면서 근거 없는 말을 경솔하게 믿고 글로 적었다고 비난하면서 안정복을 괴이한 사람으로 매도하고 있다. 이처럼 대야는 천주학의 교리를 파헤쳐 그 맹점을 공격하기보다는 현혹될 것 같은 글들을 문제로 삼는다. 이것은 신유박해 이후 영남에도 천주학도들의 세력이 있음을 알고 스스로 보위하기 위해 기호 남인들과는 달리 더 강력한 배척의 입장에 있음을 공고히 해야 했기 때문이다. 대야가 살았던 안동이란 지역은,

 

근년으로 내려오면서 이단과 곡학曲學이 뒤섞여 경쟁하듯 일어나, 인륜의 명분을 밝히는 교훈을 쓸모 없는 물건과 다름없이 취급하고, 사람이 지켜야 할 법도 보기를 쓸모없는 혹보다 못하게 여기는가 하면, 아무런 근거 없이 큰소리를 치거나 괴상한 것을 신기하다고 여기며, 심하게는 이른바 서양의 학설이 있어 백성을 속이고 세상을 미혹시키는 일이 매우 많다. 그런데 유독 영남 지방만은 선배 유학자의 덕화에 젖어 추로의 기풍을 보존하여, 불경한 책과 성인을 비방하는 가르침이 없다.30)

 

천주학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여타 지역과는 달리, 선배 유학자[퇴계]의 덕화로 인해 추로의 기풍을 보존하고 있는 곳이었다. 이상정도 “전부터 양학(洋學)이 온 세상을 집어삼켰으나 영남 한 지역을 넘보지 못했던 것은 아마도 선정(先正 : 퇴계)의 가르침이 사람들에게 젖어듦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31)라고 하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학문을 한 대야였기에 어렸을 적에는 제자서들을 섭렵하였다고 하나, 스승 류장원이 죽고 난 뒤에는 정학이 아닌 학문은 모두 사학이라 하여 학문에 대해 열린 시각을 가지지 않았고, 체제를 위협하는 천주학에 대해서는 더더욱 강한 비판정신을 가지게 되었다.

 

차기진의 연구32)에 따르면, 천주교가 영남 지방에 실질적으로 전파된 시기는 1790년대 후반경이지만, 이미 그 이전에 간접적으로나마 천주교와 연관을 맺고 있었다고 한다. 다만, 안동이란 지역이 사림의 본고장으로서 학문적 기반과 사회경제적 지위를 갖춘 곳이었던 만큼 의리(義理)와 가례(家禮), 토착 문화의 뿌리가 깊어 이질 문화의 수용을 허용치 않는 정학의 지방이었기 때문에33) 이들은 더더욱 조심스럽게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다.

 

대야와 같은 성리학자들은 이 지역에 살고 있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히 컸다. 1801년 집의(執義) 윤우열(尹羽烈)이 영남 지방에도 천주교 집단이 형성되어 있음을 상소하자, 그 사실을 부인하면서 강세윤(姜世綸)이 올린 반박 상소문에 “만일 영남인으로 천주교에 물든 흔적이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먼저 영남인 스스로가 단죄하겠다”고 했을 정도였다.34)

 

대야의 ‘안설’을 읽다 보면 격앙된 그의 감정이 느껴진다. 그는 안동에 살고 있다는 자부심과 도학을 수호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고, 영남에서도 손꼽히는 명문가로서 누리는 기득권도 있었다. 이것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정적 제거의 희생양이 되지 말아야 했다. 강세윤의 “만일 영남인으로 천주교에 물든 흔적이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먼저 영남인 스스로가 단죄하겠다”는 말도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는 자부심과 더불어 이 지역을 지켜내야만 살아남는다는 절박함에서 나온 대응책이었을 것이다. 거기다가 대야는 어렸을 적부터 고집이 세어 할아버지도 그 뜻을 굽히지 못해 가르치는 데 매우 힘이 들었다35)고 하니, 그의 이런 성격이라면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강경함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이학집변》 서문에서 “소위 천주학이 출현했는데, …어떻게 우리 도학이 모두 침몰해 없어지지 않는다고 보장하겠는가” 하였다. 즉, 도학이 침몰하면 신분 구별이 없는 세상이 되기 때문에 붕괴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의 신념이자 사상인 성리학은 곧 모든 인간이 절대적으로 평등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상하 · 존비 · 귀천으로 구분되며, 이들 각 신분은 각자에게 합당한 지위를 가진다는 명분론을 내세우기 때문에, 이런 현실적인 불평등을 당연시하고 이를 토대로 구축된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것에 충실한 사상이었다.36) 그런데 이 시기 조선 사회는 이러한 전근대적 사회질서 체제를 해체시키려는 요인들로부터 끊임없이 도전받고 있었다. 17세기부터 빈발했던 도적 집단은 18세기에 이르면 한층 집단화 · 무장화 · 조직화되어 갔고, 생산 기반에 뿌리를 둔 농민층들은 격쟁(擊錚) · 상언(上言) · 등소(等訴) · 호소(呼訴)를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고자 했으며, 18세기 후반에는 민란을 방불케 하는 투쟁을 전개하기도 한다.37)

 

19세기 전반기는 조선 사회의 기반에서부터 동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평안도에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 조선왕조에 충격을 주었고, 도참설이 성행하였으며, 삼정의 문란으로 민생은 극도로 황폐해졌다. 이런 혼란 속에서도 영남의 성리학자들은 ‘장헌세자 추숭’, 김성일 · 류성룡의 문묘승무 문제 등 정치적, 사회적 문제와 ‘병호시비’에서 보듯이 이황 학통의 정립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38) 이에 대해 금장태는 “19세기 전반기 성리학자들의 대부분은 당론과 문파의 울타리 속에 안주하여, 국가의 안위나 민생의 실상에 대해 절박한 고민과 해결책의 모색을 보여주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39)고 지적하고 있다. 대야처럼 내륙 깊은 곳에 사는 양반들은 정학 수호, 유구한 도통 계승만을 울타리 삼다보니, 백성들이 요구하는 시대의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사상적인 면에서는 사변적 성리학에서 벗어나 실천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실학이 대두되었고, 기송사장학(記誦詞章學)은 비록 장기와 바둑, 노름 등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명성을 찾고 이익을 탐하는 것은 똑같다40)고 하며 일부 학자 사이에서 반성과 비판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에 비해 영남 남인들이 장헌세자 추숭 문제나 이황 학통 정립에 더 관심을 가졌던 것은 향촌 사회 내에서나마 자신들의 정치적, 사회적 입지를 독자적으로 구축하여 향권(鄕權)을 주도하려는 노력의 일환41)이었는데, 그런 측면에서 성리학만이 성학(聖學)이고 그 실천적 삶만이 가치 있다고 여겼던 대야에게 서학도들의 출현과 성리학적 사회질서가 무너지는 것은 사상폭동적 성격42)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각 방면으로부터 도전을 받는 가운데에서도 성리학은 지배 계급의 사회 지배를 정당화하는 통치 이념이었으며, 동시에 지배 계급의 종교적 의미 체계이기도43) 하였기 때문에 신분질서상 상위에 있는 이들에게 성리학적 질서는 반드시 유지되어야만 했다. 더군다나 대야는 관직에 나갈 수 없는 상황이었고, 그래서 더욱 안동 명문가의 일원으로서 누리는 기득권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정통 학문을 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존을 위해 반성리학 요소들을 강력히 배척하는 것뿐이었다. 이것은 대야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영남 유림들 모두의 문제였다.

 

대야의 문집44)을 살펴보면 많은 서한과 잡저 가운데 서양 학문을 비판하거나 이에 대해 질문을 주고받는 내용은 없다. 대부분 심성이기설과 사단칠정, 상례에 관한 것들을 토론한 것으로서 그의 평소 학문 성향이 어떠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족질 류성문이 쓴 만사와 족손이면서 문인인 류치구가 쓴 제문에 따르면, 대야의 학문 전수는 공자의 도를 전수한 증자와 같다고 했다. 이것으로 볼 때, 어른들로부터 어눌하고 재주가 둔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진실과 성실함으로 철저한 성리학자의 길을 걸었던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면에 깔린 내용이야 어떻든 이학의 비판을 통해 주희에서 이황으로 이어지는 도학 전통을 계승하고 정통성을 수호하고자 이학의 삿됨을 변파하고 나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성리학자의 입장에서 긍정적으로 대야를 바라본다면 도학 전통을 계승하고 정통성을 수호하고자 애를 썼던 인물이지만, 반성리학자의 입장에서 바라보았을 때는 시대의 변화와 민생의 고단함을 읽지 못하고 학문 수호라는 허울을 쓴 채 자신들의 정치적, 사회적 입지 마련과 자존을 위해 천주학에 대한 깊은 이해도 없이 비판을 한 것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대야의 《이학집변》은 이후 영남 남인들의 척사에 대한 확고한 입장을 정립하게 하는 데 큰 역할45)을 하게 되고, 이것은 전 유림이 당론과 지역을 초월하여 연맹한 영남만인소로 연결되게 한다는 점에서 일정한 의의가 있다 하겠다.

 

3) 대야의 천주학 비판의 특징과 한계

 

앞에서 제시한 <천주학> 14조목 가운데 대야의 ‘안설’을 통해 그가 쟁점화시키고 있는 부분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떤 특징이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14조목에서 주목되는 것은 ①, ②, ⑥, ⑧, ⑨번이다. 이 가운데 ①조목은 앞에서 인용문과 함께 거론하였기 때문에 제외하고, 나머지 조목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 네 조목에는 천주학에 대해 비판한 선학(先學)의 논설에 대해 대야가 강경하게 재비판하는 ‘안설’을 붙이고 있다. 이것을 보면 그가 <천주학> 편에서 무엇을 가장 쟁점화시키고 있는지, 그의 비판의 특징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② ‘변양학상제천주’ 조목은 양학에서 말하는 ‘천주’와 유학에서 말하는 ‘상제’가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에 대해 변파하는 논설이다. 이 문제는 천주학과 유학의 중요 쟁점이 되는 부분이다. 이익은 <발천주실의>에서 이 둘은 같은 것이라고 하였고, 남한조는 이익의 <발천주실의>를 읽고 쓴 <천주실의발변의>에서 다른 것이라고 하면서 “유가에서 귀신에게 제사 지내는 것은 리(理)에 뿌리를 두고 기(氣)에 합하기를 구하는 것이니, 상제를 밝게 섬기는 의리이다”46)라 한다. 이에 대해 대야는 상제와 천주는 다른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면서 남한조의 의견에 동조하지만, “유가에서 귀신에게 제사 지내는 것은 리에 뿌리를 두고 기에 합하기를 구하는 것이다”라는 구절은 온당하지 못하다고 평가한다. 아래의 ‘안설’을 보자.

 

대개 귀신에게 제사지내는 것은 기氣를 가지고 말하였지만 리理에 근원한 것이다. 그러므로 주자가 말하기를 “기가 이미 흩어진 것은 변화하여 없어지고, 리에 근원을 두고 날마다 태어나는 것은 넓고 넓게 무궁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흩어진 것은 변화하여 없어진다’고 했으니, 저들이 말한 ‘영혼불멸한다’는 이론과 이미 다르다. 또 ‘상제를 밝게 섬긴다’라는 것으로써 말했는데, 주자는 “신은 동류가 아니면 흠향하지 않고, 백성은 그 족속이 아니면 제사지내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기와는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어찌 저들이 말한 천주라는 것이 참으로 형체가 있는 사물처럼 사람들의 머리 위에 붙어서 살리고 죽이며 복을 주고 재앙을 내리는 권위를 주관하는 것과 같겠는가. 이는 바로 석씨의 무위진인이라는 상투적 수법이니, 우리 유가에서 말하는 상제와 나란히 논의하는 것이 옳겠는가.47)

 

유학에서 기는 흩어져 이미 변화하여 없어져 버리고, 리에 뿌리를 두고 날마다 태어나는 것은 무궁하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천주학에서 말하는 “영혼이 불멸하다”는 이론과는 이미 다르다. 또한 기와는 상관없기 때문에 “신은 동류가 아니면 흠향하지 않고 백성은 그 족속이 아니면 제사 지내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대야는 천주학에서 말하는 천주와 유가에서 말하는 상제는 같은 것으로 논의할 수가 없다고 한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말에 유학에서 상제와 태극은 둘로 나눌 수 없는 것인데, 상제를 주인으로 삼고 태극을 배척하는 천주학설에 대해 남한조는 리가 있으면 사물이 있고 사물이 있으면 리가 있는 것이어서 리와 사물은 본래 잘라서 둘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반드시 리가 먼저이고 사물이 나중이라고 한다. 그러나 천주학에서는 리를 사물에 의지하는 것으로 여겨서 신하가 임금을 따르는 것에 비유를 하는데, 이는 바로 ‘사물이 먼저 있은 후에 리가 있는 것이어서 사물이 되기 시작할 때에 의지하여 따르는 군더더기 같은 하나의 리에 불과할 뿐이니, 이것이 과연 말이 되겠는가’라고 한다. 또한, ‘상제는 리의 근원이 되어 이 천지만물을 창조한다’라고 한 것은 본래 태극이 사물이 태어나게 되는 근원임을 밝히고자 한 말인데, 이 말이 오히려 더 까다로워서 감정과 의도가 있고 조작함이 있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게 되어버렸음을 안타까워한다. 그리고 선유들이 리와 사물의 관계를 군신 관계로 설명하는 저들의 말을 배척하고는 있으나, 본말이 어긋나서 오히려 도를 밝히지도 못하고 이단을 물리치지도 못했다고 비판한다. 남한조의 이 말에 대해 대야는 ‘안설’을 붙여 다시 비판을 한다.

 

지금 순암은 “주재함이 있는 것으로써 말하면 상제라 하고,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것으로써 말하면 태극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이미 이와 같이 나누어서 말한다면, 상제는 소리와 냄새가 없을 수 없고 태극은 주재함이 있다고 할 수 없다. 그 아래에 비록 ‘리는 둘이 아니다’라고 말하였으나, 언어의 맥락 사이에 병통이 없을 수 없다. 손재는 이에 대해서 가혹하게 들추어내려 하지 않았고, 그것을 변석하지도 않았다.48)

 

대야가 볼 때 안정복의 말에는 어폐가 있다. “상제와 태극은 둘로 나눌 수 없는 것이지만 주재하는 것으로 말하면 상제라 하고, 소리도 냄새도 없는 것으로 말하면 태극”이라고 나누어 말하고 있다. 그리고는 또 “리는 둘이 아니다”라고 말하니 앞뒤 말에 모순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들추어내어 변석하지 않은 남한조의 태도에 대해서도 지적하고 있다. 안정복과 남한조 둘 모두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⑥ ‘변영신불멸’ 조목은 ‘영혼불멸’에 대해 변파한 것이다. 혹자가 ‘영혼이 죽지 않는다’는 설과 ‘천당 지옥’에 대해 묻자, 안정복은 “이는 형체가 없어 분명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이치로써 미루어 보고 경전에 실려 있는 것과 전기(傳記)에 기록된 것으로써 살펴보면, 모두 속일 수 없을 것입니다. …자로가 귀신을 섬기는 것에 대해서 질문하자, 공자는 ‘사람을 섬길 줄 모르는데,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는가’ 했습니다. 죽음에 대해서 묻자, ‘사는 것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는 것을 알겠는가’ 했습니다. 성인의 대답이 모호하고 분명하지 않아 거의 골륜탄조(??呑棗)에 가까운 것이 아니겠습니까”49)라고 한다. 대야는 이 말에 대해 ‘경전을 상고해 보면 속일 수 없다’는 말과 성인의 대답이 애매모호하고 분명하지 않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한다. 경전은 어떤 경전을 말하며, 성인의 대답이 모호하다는 것은 또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남한조가 이것에 대해 대체(大體)만 변별하고 깊은 분석을 하지 않은 점도 문제라고 지적한다. 아래는 이에 대한 대야의 ‘안설’이다.

 

영혼불멸설을 이미 깨뜨렸다면 이러한 것은 변별하지 않아도 절로 깨어질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문왕이 오르내리심이 늘 상제의 곁에 계신다’는 것과 ‘세 임금이 하늘에 계시다’는 따위의 말을 천당설로 견강부회하여 마침내 인귀와 사생의 가르침을 아득하여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올려놓았으니, 우리 도에 해가 되는 것을 또 어찌 다 말하겠는가. …석씨가 천당지옥설을 힘주어 말한 것은 어리석은 백성들을 유인하여 선을 행하도록 권장한 것에 불과한데, 이른바 ‘선을 행한다’는 것은 단지 은혜를 베풀고 불법을 숭상해서 그 무리들로 하여금 의식의 밑천을 얻게 한 것일 뿐이다. …시초를 밝혀서 태어나는 것은 기가 모이는 것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았다면, 반드시 마지막을 궁구할 수 있어서 죽음은 기가 흩어지는 것에서 말미암는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니, 사는 것 이외에 별도로 죽음의 도리를 아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하기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부자께서 자로에게 말해주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는 깊이 일러 준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을 가지고 ‘골륜탄조’라고 하는 것이 옳겠으며, ‘괴이하고 신령스러운 것으로 여길까 하여 말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옳겠는가.50)

 

대야는 영혼이 불멸하다는 설과 천당지옥설을 강력히 부정한다. 불교에서 천당지옥설을 말한 것은 의식을 제공받기 위해서 백성들을 유인한 것이어서 그것을 알고 있는 고승들은 그 천박함이 부끄러워 말하지 않는데, 안정복이 경전 운운하면서 견강부회하니 미혹됨이 심하다고 했다. 물론 안정복도 <천학문답>에서 천주학의 천당지옥설은 이익과 복을 구하는 위리지심(爲利之心)일 뿐이라고 보며, 이를 자기 본성의 실현을 강조하는 유학의 태도와 대비시켜 비판한다. 그러나 앞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안정복이 ‘경전에 실려 있는 것과 전기에 기록된 것으로써 살펴보면’이라는 말에 대야는 분개한 것이다. 천당지옥설은 천박한 설로써 말할 가치도 없는데 안정복이 경전 운운하니, 그 경전은 도대체 무슨 경전을 말하며, 경전까지 끌어와 견강부회하는 것은 심히 미혹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안정복이 말한 요지를 파악하고 이에 동조하거나 비판하기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선택한 단어에 오히려 더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결국, 기호 남인의 설을 적극 변파함으로써 그들과의 차이점을 분명히 하고자 하는 의도로 읽힌다.

 

⑧ ‘변제사마귀구식’ 조목은 제사 문제이다. 조선에서 천주학이 박해를 받게 된 원인에는 주지하다시피 제사 문제가 가장 컸다. 일명 ‘진산(珍山)사건’으로 불리는 폐제분주 문제가 발단이 되었다. 이때 천주교를 공격하려는 공서파와 천주교를 신봉하거나 묵인하려는 신서파의 심한 논쟁이 발생하게 된다. 이로 인해 천주교도들은 제사 의식을 포기할 수 없어서 신앙을 버리는 자와 제사를 포기하면서 더욱 독실해지는 자로 나뉘게 된다. 안정복은 “신부들이 ‘선한 자는 천당에 있으니 결코 제사를 먹으러 올 리 없고, 악한 자는 지옥에 있으니 올 수가 없다’ 하는 것은 성인이 제례를 정한 뜻과 다르며 백성들을 우롱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제사의 본래 뜻을 오해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 말에 대야는 동의하면서 다음의 ‘안설’을 붙인다.

 

아직 흩어지지 않은 기를 불러 모으는 것은 본래 효자의 애통하고 절박하며 지극한 마음 때문에 이르는 것이다. 제사를 논하자면, 결국 내가 주主가 되기 때문에 ‘조상의 정신은 바로 나의 정신’이라고 하는 것이다. 내가 정성을 다해서 찾으면 하나의 기가 서로 감응하여 신이 흠향하지 않음이 없다. 비록 자손이 마땅히 제사지내야 할 곳이 아니더라도 그 기는 모두 나와 상관이 있다. 이것이 이른바 ‘기가 이미 흩어진 것은 참으로 변화하여 남아 있지 않지만 이치에 근원하여 날로 생겨나서 넓고 넓어 끝이 없다.’51)

 

즉, 성리학에서 신체를 이기(理氣)의 합산으로 보는 것에 비해, 천주학에서는 영혼을 불사불멸의 존재로 본다. 이런 관념의 차이에서 이견이 생기는 것이다. 이처럼 성리학과 천주학은 첫 출발부터 신체와 영혼을 보는 시각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결코 이해되고 융화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더군다나 서양 학문으로 조선에 들어왔던 천주학이 사람들에게 종교로 기능하게 되면서 제사를 지내지 않게 되자, ‘제사 의식을 무시하여 예속을 피폐화시키고’, ‘인간 평등을 부르짖어 신분질서를 위협’한다고 금교령을 내리게 된다. 여기에서도 대야는 천주학에서 영혼을 왜 불사불멸의 존재로 보는지 그 허점을 따지고 논박하기보다는 성리학의 이론만을 거듭 제시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⑨ ‘논서학입중국’ 조목은 명나라 말엽에 서학이 중국에 들어온 것에 대해 논한 것이다. 남극관(1689~1714)은 “서양의 이른바 천주교는 명나라 말기에 상당히 유행했는데, 이것은 서역에서 전해진 것이다. 그러나 그 술수가 매우 천박하여 귀신의 도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또한 크게 어그러진 것도 없다”52)라고 하였다. 대야는 “그 술수가 천박하여 귀신의 도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크게 어그러진 것도 없다”고 말한 부분에서 몹시 못마땅해 하며 다음과 같이 ‘안설’을 붙였다.

 

천주의 가르침은 불씨의 찌꺼기를 주워 모았는데, 욕심을 부리고 멋대로 행동하여 꺼리는 것이 없는 것은 불교보다 심하였다. 그런데 지금 ‘또한 크게 어그러진 것은 없다’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문인이 기이한 것을 좋아하여 그것에 중독된 것은 아닌가. 그의 뜻은 거의 세상에 문장 하는 선비가 고무시키고 꾸며서 사라지게 하지 않은 것을 개탄한 것 같다. 사람에 따라 좋아하고 미워하는 게 같지 않은 것이 이와 같은가. 이것이 천박하고 망령된 말이라고 해서 변파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53)

 

남극관은 남구만(南九萬)의 맏손자로 26세에 요절한 인물이다. 그의 천주교에 대한 이해는 단편적이지만 서양 학술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에서는 진보적이었다고 한다. 위에 인용한 글은 《몽예집》 잡저에 실린 것으로써 김시진(金始振)의 역법론(曆法論)에 대해 반박하는 내용의 <김찬판역법변변>(金參判曆法辨辨)의 맨 마지막 부분이다. 남극관은 천주학에 대해 깊은 이해가 없었기에 천주학이 천박하다고만 말할 뿐 깊이 변파하지 않았다. 대야는 이것에 대해 ‘남극관이 기이한 것을 좋아하여 그것에 중독된 것은 아닌가?’ 하면서 천박하고 망령된 것일지라도 변파하여 밝게 하여야 된다고 한다. 이처럼 대야는 안정복, 남한조, 남극관 등이 천주학에 대해 비판한 것을 거론하면서도 자신의 생각에 미치지 못하면 ‘천주학에 미혹되어서 그렇다거나, 기이한 것에 중독된 것은 아닌가?’ 하면서 보다 더 강경하고 준엄한 태도로 배척의 입장을 보여준다. 서학 비판의 핵심은 읽지 않고, 비판하는 태도나 비판을 위해 선택한 단어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며 가차 없이 변파한다.

 

이상, 대야가 <천주학> 편에서 거론한 것 중 선학의 논설을 재비판한 ‘안설’을 중심으로 그의 천주학 비판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그런 가운데 대야의 천주학 비판의 특징과 한계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이것을 세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면적인 저술 동기가 기호 남인과 영남 남인이 다르다는 것을 밝힘에 있었기 때문에 논리적 비약과 강경함으로 기호 남인들의 설을 비판하고 있다. 둘째, 그렇다 하더라도 그의 비판은 번번이 핵심을 벗어나고 있다. 표면적으로 사학의 폐해를 알리고자 한 저술이라고 하였으니, 쟁점들을 깊이 파헤쳐 논리를 전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호 남인들이 서학을 비판하는 태도나 언설을 문제 삼고 있다. 성리학자들이 천주학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고 쟁점이 됐던 것은 유일신 · 천지창조설 · 동정녀 잉태설 · 예수 구속론(救贖論) · 예수 강생설 · 부활설 · 삼위일체설 · 원조론(原祖論) · 천당지옥설 · 영혼론 · 삼구설(三仇說) · 대부(代父) · 성수(聖水) · 별호(別號, 세례명) 등이었는데, 이 중에서 대야는 성리학자들이 가장 흔히 비판했던 천주와 상제의 동이 문제 · 천당지옥설 · 영혼불멸론만을 언급하고 있다. 셋째, 성리학 우월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양의 발전된 학문과 기술을 인정하면서도 수용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5. 마무리

 

본고는 《이학집변》의 <천주학> 편을 통해 이 책의 직 · 간접적인 저술 동기와 체제, 내용, 특징과 한계를 살펴보았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대야는 서학 비판에 대해 쓴 선학들의 글을 읽으면서 초록하고 거기에 자신의 ‘안설’을 덧붙여 <천주학> 편을 완성하였다. 대야가 여기서 거론하고 있는 것들은 14가지인데, 예수가 태어난 때, 상제와 천주의 동이, 천주학 공부, 남녀무별, 영혼불변, 금수의 세상이 됨, 제사를 지내는 문제, 서학이 중국과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에 대해, 《천주경》을 《시경》과 《서경》에 견주는 문제, 서역이 천하의 중심인가의 문제, 서양 역법 사용 문제, 서양 과학기술에 관한 것들이다. 주지하다시피 성리학 이론으로 천주교의 교리를 볼 때 가장 쟁점이 되는 부분이 유일신 · 천지창조설 · 동정녀 잉태설 · 예수 구속론 · 예수 강생설 · 부활설 · 삼위일체설 · 원조론 · 천당지옥설 · 영혼론 · 삼구설 등이다. 그런데 대야는 이 중에서 천주와 상제의 동이 문제 · 천당지옥설 · 영혼론만을 언급하고, 나머지는 역사적 사실일지라도 그것들의 전파나 기록하는 문제에 대해 선학들의 태도를 비난하면서 자신의 강경한 입장을 표명하는 내용으로 채우고 있다. 그것은 이론적인 내용보다는 기호 남인들의 비판 태도를 비난함으로써 영남 남인들은 기호 남인들과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더욱 강조하고자 한 측면이었다. 기호 남인들처럼 노론들의 정적 제거 대상이 되지 않고 스스로를 보위하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이다.

 

그 결과 그의 천주학 비판의 특징과 한계점을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었다. 첫째, 이면적인 저술 동기가 기호 남인과 영남 남인이 다르다는 것을 밝힘에 있었기 때문에 논리적 비약과 강경함이 있다. 둘째, 그의 비판은 번번이 핵심을 벗어나고 있다. 사학의 폐해를 알리고자 한 저술이라고 하였으니, 쟁점들을 깊이 파헤쳐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호 남인들이 서학을 비판하는 태도나 언설을 문제 삼고 있다. 셋째, 성리학 우월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양의 발전된 학문과 기술을 인정하면서도 수용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하늘의 질서에 따르는 성리학만이 우월하다고 보기 때문에 이 질서에 따르는 조선의 신분 사회는 마땅한 것이고, 남녀무별이니 평등이니 하는 것은 금수의 세상과 같다고 한다.

 

조선의 교조주의 성리학자 가운데 천주학을 비판하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천주학을 비판하는 글을 남긴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저술 동기가 어찌 되었든 이와 같이 자료들을 수집하고 저술로 남긴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지금껏 서학 비판 연구나 항일 운동 연구는 주로 화서학파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영남에서는 단편적인 비판54)만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화서학파는 의병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항전형’55)이었기 때문에 시대현실을 읽어내고 대처하면서 남긴 문서들이 좋은 연구 자료가 되어왔다. 이제 《이학집변》의 <천주학> 편을 통해 영남에서도 천주학에 대한 비판이 결코 단편적인 상태에 머물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대야의 천주학 비판 내용이 허술하고 논리적 비약이 심해 한계가 그대로 노정되어 있다 하더라도 이후에 류치명 학파의 척사 의식에까지 영향을 끼쳐 영남만인소로 이어지게 했으므로, 영남 유림의 척사 의식의 흐름을 찾는 저술로써 의의가 있다 하겠다.

 

지면의 한계로 영남 유림을 대표하는 대야의 천주학 비판이 화서학파와 어떻게 같고 다른지, 대야가 거론한 14조목 모두를 비교 분석하면서 결론으로 이끌어 내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참고 문헌

 

1. 기본 자료 및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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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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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동대퇴계학연구소 편, 《퇴계학자료총서》 83, 《대야집》, <행장 ; 류치명>, 2005.

 

2) 류건휴에 대해서는 이상호, <류건휴의 《이학집변》에 나타난 영남학파의 양명학 비판>, 《양명학》 24, 한국양명학회, 2009 ; 김순미, <柳健休의 《異學集辨》에 나타난 불교 비판 의식>, 《동아시아불교학회》 10, 동아시아 불교학회, 2012 ; 김백희, <조선후기 유학자 유건휴의 노장 비판 - 《이학집변》을 중심으로>, 《동서철학연구》 67, 한국동서철학회, 2013의 논문에서 그의 행장을 중심으로 정리되어 있다.

 

3) 조동걸, <성리학을 꽃피운 조선 중기의 안동>, 《조동걸 전집》 12, 역사공간, 2011, 29~91쪽 참조.

4) 《대야집》 권10 부록에 족질되는 류정문이 쓴 제문을 보면 대야의 학문을 깊이 아는 자가 없는 것이 슬프다고 하였다.

5) 자세한 것은 《대야집》(《퇴계학자료총서》 83, 2005)과 《이학집변》(한국국학진흥원, 2004) 임노직이 쓴 해제 참조.

6) 《이학집변》(국역), 한국국학진흥원, 2013.

7) 각주 2)에서 밝힌 세 편의 논문이 이것이다.

8) 권오영, 《조선후기 유림의 사상과 활동》, 돌베개, 2003, 335쪽 참조.

9) 금장태, <19세기 한국성리학의 지역적 전개와 시대인식>, 《국학연구》 15, 한국국학진흥원, 2009, 29쪽.

 

10) 於元明之際 又有所謂天學者出焉 其術 ?拾釋老之糟粕 至卑極陋 不足以欺人 然方今胡?竊? 天地閉塞 彼又以星曆之巧 眩惑才智 男女之慾 拘牽愚俗 安保其不至於胥溺乎 健休 亦嘗與聞先生長者之餘論 而有慨於斯焉. 《이학집변》, <이학집변서>. 번역은 《이학집변》(국역), 한국국학진흥원, 2013에 수록된 것을 따랐다. 이하 동일.

 

11) 使後之有志於學 而趨向未定者 有考焉 則可以知設像而祈醮[道家天尊] 揭主而念呪[西學天主]者之非所謂天也 以空爲性 而離乎仁義[佛氏空無] 以生爲性 而雜乎氣質[告子生之謂性 荀子性惡 楊子善惡混 佛氏作用是性之類 皆是也]者之非所謂性也 窈冥昏?[老莊列 皆以玄虛爲道] 視聽作息[佛氏]者之分於道也 遠矣 自私自利 倒行逆施[楊氏爲我 自私自利 墨氏兼愛倒行逆施 佛氏兼之]者之悖於敎也 懸矣[象山陽明之陽儒陰釋 似是而非者 皆於此四條看破]其餘若卑陋[管商申韓王蘇陳葉 權謀術數 功利之類]偏曲[百家衆技之類]支離[科擧文字言語之類]之學 皆有以辨之…. 《이학집변》, <이학집변서>.

 

12) 近看朱子大全語類 隨手採錄 又得淸瀾陳氏學?通辨 雪厓詹氏異端辨正 以補其闕 間附以諸儒之說 條分目別 以便考閱 而以科擧文字言語之弊 終焉. 《이학집변》, <이학집변서>.

 

13) 류장원 저, 한국고전의례연구회 역, <정경주 해제>, 《국역 상변통고》, 신지서원, 2009, 12쪽.

14) 권오영, 위의 책, 386쪽 참조.

 

15) 서양 과학기술의 유입, 신부들의 전교 활동, 교세 확장으로 인한 조정과의 마찰, 박해, 노론 벽파의 남인 축출 등 조선의 사회 정세와 관련된 상황을 말한다.

 

16) 損齋曰 昔金參判伯玉 作曆法 辨以中國 廢羲 · 軒 · 堯 · 舜之舊 而用利瑪竇 · 湯若望之法. 識者以此卜中國之?? 夢?南伯居辨之 以爲雖夷狄一藝之善 無不可取之理. …伯居之言 亦未爲不可. 而皇明之末 道術分裂 異說肆行 金公之言 雖若太過 而不可謂無其理也. 《이학집변》, <天主學>, ‘⑬ 辨用西洋曆法’.

 

17) 順庵曰 西國之人 知解絶人. 至於天度推步 · 曆法籌數 · 制造器皿 若洞貫九重之天. 八十里火?之類 豈不神異. 《이학집변》, <天主學>, ‘⑭ 辨西洋人知解技藝’.

 

18) 損齋曰 彼之所以?耀愚俗 愚俗之所以眩惑彼學 大抵以知解絶人 技藝精巧之類耳. 竊意其學以攝心養精爲主 絶去一切勞攘 故識解通慧 往往有驚人處 [如今道 · 佛者流, 亦多靈靈(異)事]而益之以傅會?誕之言耳. 其技藝之精巧 則又以靈慧之識 加專一之業 而致之 [如日本 · 安南之工技絶巧 非我國之所及] 則亦無怪其精也. 然則知解雖異 而不過道 · 佛鍊養之類而已. 技藝雖精 而不過日本 · 安南之工技而已. 烏可以是而猥加神人之名 反助其眩耀之術乎. 《이학집변》, <天主學>, ‘⑭ 辨西洋人知解技藝’.

 

19) 邪魔之說 千頭萬緖 不勝其辨之 不若就緊要處 一刀斫斷也 彼以天名學 而外天敍天秩 不知君臣父子 聲此爲罪已 不容於覆載間矣 何必抉摘細微 而悉論之耶 外國窺見中州正學之榛蕪 投以此等文字 爲吾儒者 當如淫聲美色以遠之 如或取其新奇而資其辨博 不覺其??然入其中矣. 《이학집변》, <天主學>, ‘⑭ 辨西洋人知解技藝’.

 

20) 1791년 전라도 진산(珍山)에서 천주교인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이 제사를 폐하고 신주(神主)를 불태워 버린 사건을 말한다. 1790년 말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는 조선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렸다. 이 명령에 따라 윤지충은 모친 권 씨의 상(喪)을 당한 후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워 땅에 묻었고 윤지충의 외종사촌 권상연도 죽은 고모의 신주를 불태워 윤지충과 보조를 같이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안 친척과 이웃 주민들이 두 사람을 무군무부(無君無父)의 불효자로 고발함으로써 사건은 서울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는데 조정에서는 이 사건을 충효의 유교 이념을 국시로 하는 조선 사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21) 진산사건이 일어난 뒤 일반인들을 상대로 관련 서적을 불태우고, 집에 소장한 자가 자수하지 않고 적발되는 경우 가장까지 처벌하도록 조치했고, 사대부들의 위정학(衛正學)을 위하여 정주(程朱)를 존중하며 유속(流俗)에 물들지 않은 자를 특별히 뽑아 관계에 진출시키도록 식년시(式年試)를 실시했다(《조선왕조실록》 1791년 11월 8일). 홍문관에 보관하고 있던 서양 서적을 즉시 불태우도록 했다(《조선왕조실록》 1791년 11월 12일).

 

22) <운교문답>은 서학을 배척하고 성리학을 옹호하는 내용인데 서학이 도입되던 시기에 곧바로 저술되었다. 조술도는 영양의 주곡리(注谷里)에서 살았지만 조부[趙德隣]의 신원을 위하여 한양을 오르내리며 채제공, 이헌경, 이가환, 정약용 등 기호 남인들과 교유하면서 천주학을 접하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 《퇴계학자료총서》 72, <만곡집 해제 - 주승택> 참조.

 

23) 서종태, <순암 안정복의 「천학설문」 · 「천학고」 · 「천학문답」에 관한 연구>, 《교회사연구》 41, 2013, 26쪽.

24) 서종태, 위의 논문, 26~29쪽 참조.

25) 정두희, <안정복의 천학문답>, 《세계의신학》 34, 한국기독교연구소, 1997, 128쪽.

26) <해제 - 서정형>, 《이학집변》(국역), 한국국학진흥원, 2013, 41쪽.

27) 서종태, <신유박해의 정치적 배경>, 《교회사연구》 18, 2002, 126쪽.

 

28) 順庵曰 “天主耶蘇 生於漢哀帝時 西士言其國有開闢以後史記 凡三千七百卷 耶蘇之生 皆預言其期”. 《이학집변》, <天主學>, ‘① 辨耶蘇之生於漢時’.

 

29) 健休按…其謂工夫者 不過僧家之禮懺 其言靈神堂獄之類 大抵皆襲釋迦之伎倆 初不足名之爲學 而順庵之辨 不過爲一盃水救一車薪之火而已…若耶蘇之生於漢時與否 有何輕重 而其國史之預言其期 誠或有之 猶不足稱 況必無是理乎 且順庵亦未必得見三千七百卷之史 而輕信無根之說 遽筆之於書 甚矣人之好怪也. 《이학집변》, <天主學>, ‘① 辨耶蘇之生於漢時’.

 

30) 近年以來 異端曲學 雜然競起 視名敎 無異?籬 視網維 甚於贅? 以放誕詭怪爲神奇 甚至所謂西洋之說 而其誣斯民 惑斯世也滋多. 特嶠南一隅 沐?先之化 存鄒魯之風 無不經之篇 非聖之訓. 《이학집변》, <天主學>, ‘⑩ 論西學入東國’.

 

31) 向來洋學 懷襄一世 而不敢窺嶺南一片地者 豈獨先正之敎 有以漸人哉. 亦以先生倡而明之 其事甚近也. 《大山續集》.

32) 차기진, <조선후기 천주교의 영남 전파와 그 성격>, 《교회사연구》 6, 1988.

33) - - -, 위의 논문, 203쪽.

34) 차기진, 위의 논문, 221쪽 재인용.

35) 《대야집》, 위의 책, <행장>.

36) 전종익, <정조시대 천주교 전래와 평등>, 《법사학연구》 40, 2009, 110쪽.

37) 김태영, <황사영의 의식 전환과 천주교적 세계관>, 《지역과 역사》 25, 191쪽 참조.

38) 권오영, 위의 책, 386쪽.

39) 금장태, 위의 논문, 11쪽.

40) 《이학집변》, <기송사장> 편.

41) 권오영, 위의 책, 같은 쪽.

42) 조광, <신유박해의 성격>, 《민족문화연구》 13,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1978, 66쪽 참조.

43) 전종익, 위의 논문, 121쪽.

 

44) 《대야집》 10권 5책 목판본, 1842년 간행, 시 78수, 서(書) 133편, 잡저 8편, 설 12편, 서증 1편, 동몽학령 1편, 서(序) 2편, 기 2편, 식발(識跋) 8편, 잠 3편, 축문 5편, 제문 14편, 애사 6편, 묘지 2편, 유사 5편,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45) 권오영은 “척사에 대한 사상적 기반은 주로 안정복의 《천학문답》과 류건휴의 《이학집변》을 통해서 이루어 나갔다. 류치명 학파는 특히 류건휴의 《이학집변》을 통하여 척사에 대한 확고한 입장을 정립했다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위의 책, 387쪽.

 

46) 是以儒家之祭祀鬼神 本乎理而求合乎氣 昭事上帝之義也. 《이학집변》, <天主學>, ‘② 辨洋學上帝天主’.

 

47) 盖祭祀鬼神 以氣言而原於理 故朱子曰 “氣之已散者 固化而無有矣 其根於理而日生者 固浩然而無窮也.” 旣曰已散者化而無有 則與彼靈神不減之說 已自不同矣. 且以昭事上帝言之 朱子曰 “神不歆非類 民不祀非族 只爲這氣不相關.” …豈若彼所謂天主者 眞若有形之物 着在人人頭上 而主其生殺禍福之權哉. 是乃釋氏無位眞人之舊套 而比論於吾儒所謂上帝可乎. 《이학집변》, <天主學>, ‘② 辨洋學上帝天主’.

 

48) 順庵之言曰 以有主宰而言 則曰上帝 以無聲無臭而言 則曰太極. 旣如是分言之 則上帝不得爲無聲臭 而太極不可謂有主宰也. 其下雖言其理不二 而語脈之間 不能無病. 損齋於此 殆不欲苛摘而不之辨也. 《이학집변》, <天主學>, ‘② 辨洋學上帝天主’.

 

49) 是無形慌惚之事 不可以質言 而以理推之 以經書之所載傳記之所記觀之 似皆不誣矣. …子路問事鬼 子曰 ‘未知事人 焉能事鬼’ 問死 曰 ‘未知生 焉知死’ 聖人所答 ?糊不分明 其不幾於??呑棗乎. 《이학집변》, <天主學>, ‘⑥ 辨靈神不滅’.

 

50) 以旣破靈神不滅之說 則此等將不辨而自破矣 然或者妄引文王陟降 在帝左右 三后在天之類傳會天堂之說 而遂置人鬼死生之訓 於茫昧不可測知之域 則其爲吾道之害 又豈可勝言也哉…盖釋氏勅爲堂獄之說 不過?誘愚俗 勸令爲善 而所謂爲善 只是捨施崇奉佛法 使其徒得以資其衣食而已…原始而知生之由於氣聚 則必能反終而知死之由於氣散 非生之外 別有知死之道也 故曰, “或曰 ‘不告子路’ 不知此乃所以深告之也.” 以此而謂之昆侖呑? 可乎 謂之以神怪而不語可乎. 《이학집변》, <天主學>, ‘⑥ 辨靈神不滅’.

 

51) 盖招聚未散之氣 固孝子哀痛迫切之至情而至 論祭祀 則畢竟以我爲主 故曰祖考精神 卽我之精神 自我盡誠以求之 則一氣相感 神無不格 雖非子孫苟其所當祭者 其氣莫不與我相關 是則所謂氣之已散者 固化而無有 而根於理而日生者浩然而無窮者也. 《이학집변》, <天主學>, ‘⑧ 辨祭祀魔鬼求食’.

 

52) 西洋所謂天主敎者 頗行於明季 盖自流傳西域者 然其術甚淺 不出鬼道 亦無大悖. 《이학집변》, <天主學>, ‘⑨ 論西學入中國’.

 

53) 天主之敎 ?拾佛氏之糟粕 而肆欲妄行 無所忌憚 甚於佛氏 今謂亦無大悖 何也 豈文人好異頗中其毒者耶 其意殆若慨恨於世無文章之士 鼓舞緣?而至於衰熄也 人之好惡不同 有如是耶 是不可以浮薄妄言而不之辨也. 《이학집변》, <天主學>, ‘⑨ 論西學入中國’.

 

54) 금장태는 ‘1830년대에 천주교 신앙 집단이 광범하게 확장되어 가고 서양 신부가 잠입하여 전교하는 상황에 이르자, 위기의식이 각성되면서 도학자들의 서학 비판이 다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서학의 위협적 성격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고 적극적 비판 태도를 보였던 것은 기호학파 안에서도 이항로 · 김평묵을 중심으로 하는 화서학파가 주축의 역할을 하였으며, 그 밖에 송병선에서 간단한 비판의 논설이 보이고, 영남학파에서는 이원조와 허전의 단편적인 비판론이 보이는 정도’라고 하였다. <19세기 한국 성리학의 지역적 전개와 시대인식>, 《국학연구》 15, 2009, 29쪽.

 

55) 금장태, 위의 논문, 16쪽.

 

[교회사 연구 제45집, 2014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김순미(경성대학교 한문학과 초빙교수)]

 

※ 본문 중에 ? 표시가 된 곳은 현 편집기에서 지원하지 않는 한자 등이 있는 자리입니다. 정확한 내용은 첨부 파일에서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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