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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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간추린 사회교리: 성경으로 세상 읽기 - 성경과 세상의 비판적 상호관계 맺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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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9-17 ㅣ No.971

[간추린 사회교리] 성경으로 세상 읽기 - 성경과 세상의 비판적 상호관계 맺기

 

 

성경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이다. 교회는 말씀전례 때 성경의 텍스트를 회중에게 전하며 이를 “주님의 말씀”이라고 선언한다. 회중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회중은 그 말씀을 듣고 느끼고 이해하고 사고함으로써 세상에서 하느님 백성으로서 그 고유한 삶을 구축한다. 경신례의 자리에서 주고받는 하느님과의 대화는 이렇게 세상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드러낸다. 이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당신 백성의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한다.

 

성경의 텍스트들은 그 본래 문맥(삶의 자리)에 머물지 않고, 확연히 다른 환경에 사는 독자(개인이든 공동체든)의 해석의 대상이 됨으로써, 새로운 전승을 창출하며, 따라서 성경에는 한 주제의 여러 전승이 곳곳에 자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구약성경의 주요 주제 가운데 하나인 탈출(the exodus) 사건은 탈출기 15,1-18.20-21에서, 시편 78편과 105편에서, 여호수아기 3,14-17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각각 다른 역사 배경과 문학유형으로 소개되고 있다. 또 이사야 예언서에서 다루는 바빌론 유배생활에서 귀향 사건은 억압에서의 해방이라는 제2의 탈출로 받아들여졌으며, 이는 신약성경 신학에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다.

 

이런 예는 ‘억압에서의 해방’이라는 탈출사건이 성경과는 전혀 다른 환경에 놓여있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해석과 그 의미 발견에서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늘의 억압은 무엇이며, 오늘의 해방은 무엇인지를 성찰하고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데 성경의 탈출사건의 전승들은 실질적인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실제로 남미의 해방신학은 바로 성경의 ‘억압에서의 해방’을 남미사회라는 삶의 자리에서 해석하려는 시도였으며, 억압구조의 타파에 강한 원동력으로 작동했다. 성경은 형식으로는 과거 고대의 문헌이지만, 오늘 우리 삶의 자리에서 끊임없이 재해석되어 삶과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된다.

 

 

성경의 일관된 주제, 사랑의 이중계명

 

성경은 믿는 이들의 공동체에게는 역사적 문헌이면서 동시에 정경이며 거룩한 텍스트다. 성경은 전례에서 선포되며, “거룩한 신학의 영혼”이다. 성경은 우리가 사랑하고 경배하는 그런 하느님을 계시한다. 그런데 성경에서 계시한 하느님은 세상과 인류의 역사, 그리고 공동체와 그 구성원의 삶의 태도와 양식에 지대한 관심을 갖는 분이다.

 

이를 간단히 ‘인격의 하느님 또는 역사의 하느님’이라 하며, 이와 대조를 이루는 용어는 ‘초월의 하느님 또는 철학의 하느님’일 것이다. ‘인격의 하느님’ 또는 ‘역사의 하느님’이라는 이 주제 역시 구약과 신약 전체에 스며들어 있다.

 

성경이 제시하는 일관된 주제 가운데 너무나 익숙하여 쉽게 지나쳐버리는 주제가 아마 사랑의 이중계명일 것이다. 모세의 율법에서부터 “서로 남의 짐을 져주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의 율법을 완수하게 될 것입니다.”(갈라 6,2)라는 바오로 사도의 훈계에 이르기까지 성경이 일관되게 확언하는 것은, 이웃사랑이 특별히 약하고 힘없는 사람을 실제로 돌보는 데에서 드러난다는 점이다.

 

앞에서 예를 든 탈출, 인격 또는 역사의 하느님, 약하고 힘없는 사람을 돌보는 이웃사랑 따위의 주제들이 천년에 걸쳐 재해석되고 율법, 예언, 가르침 따위의 문학 형식으로 성경에서 전승될 때 이를 우리는 성경의 계시라고 볼 수 있다. 이 성경의 계시를 우리는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아버지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신앙의 언어로 고백한 공동체의 하느님 체험

 

성경은 그냥 독립된 ‘나’보다는 공동체와 인연을 맺은 ‘나’에게, 더 나아가 ‘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은 ‘공동체’를 향해 밝힌 하느님의 계시,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바람, 하느님의 열정, 하느님의 말씀이다. 나의 하느님이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우리 아버지이시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이라는 보잘것없었던 유목민족과 그 역사에 처음부터 하느님께서 동행하셨음을 흥미진진하게 보여준다. 신약성경은 그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 예수가 무엇을 사람들에게 가르쳤고, 무엇을 드러내 보였으며, 이를 어떻게 성취했는지를 제자와 군중(보통사람들, 약하고 억눌린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여준다. 성경은 신앙의 언어로 고백한 공동체의 하느님 체험이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개인의 구원보다는 공동체와 세상의 구원을 향한 하느님의 구원경륜를 계시한다. 창세기가 전하는 창조 이야기, 인간의 타락, 하느님과의 관계의 단절은 개인사에 머물지 않고 인류와 세상과 하느님의 관계(조화)를 이야기한다.

 

이스라엘의 이집트 탈출사건 역시 세상의 억압과 착취구조와 하느님과의 대결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예언서들과 시편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어떻게 세상의 제국과 다른 모습으로 사회를 형성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이런 내용들은 대다수의 성경학자들의 연구결과로서 동의한다. 그리고 바로 이 성경의 계시는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을 성찰하도록 안내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 성경을 지극히 사사로운 영역에 가두어놓는다. 성경을 통해 사회적 맥락, 곧 공동체가 직면한 삶의 자리에서 공동체 역사의 여정에 동행하시는 하느님을 체험하기보다는, 나의 마음에 다가오시는 은밀하고 사적이며 영적이며 초월적인 하느님을 찾는다.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기보다는 나의 마음과 기분에 하느님을 맞추는 격이다.

 

 

성경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성경 문헌의 사회적, 역사적, 공동체적 요소는 간단하게 잊히고, 독자 개인의 마음에 떠오르는 느낌만 남는다. 창세기를 읽으면서도 인간의 욕망을 깊이 있게 성찰하여 오늘의 현실을 반성적으로 재구성하려 하지 않는다.

 

탈출기를 읽으면서도 오늘날 무력과 금력으로 무장한 억압세력의 착취구조를 성찰하지 않으며, 이스라엘 같은 사회적 약자 계급의 신음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 예언서를 읽으면서도 공동체 내 중앙집중화된 권력이 어떻게 사회적 약자를 억압하고 있으며 그 공동체가 치러야 할 혹독한 대가가 무엇인지 성찰하여 오늘 우리 사회가 나아갈 길을 모색하지 않는다.

 

예수님 주변에 왜 사람들이 그토록 몰려들었고, 그분의 가르침에 감탄했는지, 왜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못 죽여서 안달복달했는지 그 사회, 정치, 역사적 배경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은 채 예수님의 은총만이 내게 흘러넘치기를 바란다. 바오로 사도가 성찬례의 거행에 가난한 이를 위한 배려를 핵심요소로 제시한 것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1코린 11,17-22 참조). 그 대신에 성찬례의 참여 그 자체가 신앙실천의 핵심이라 여긴다.

 

이스라엘과 그리스도 공동체가 처한 로마제국의 식민지배라는 역사적 배경에서 이해하고 성찰해야 할 묵시문학은 미래의 불길한 파국을 점치는 판타지쯤으로 읽는다. 그리하여 신앙과 성경, 신앙과 생활, 생활과 성경을 철저하게 분리시킨다.

 

성경은 개인의 독서 취향에 맞게 사유화된다. 신앙은 몇몇 교회 규정을 지키는 것쯤으로 환원된다. 하느님의 백성임에도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 또는 세상의 이데올로기에 맞추어 생활하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게 된다.

 

 

사회교리와 성경의 관계

 

사목자들은 성경의 진리를 구체적인 생활환경에 적응시켜 설명하기보다는 일반적으로 또는 추상적으로만 설명하려 한다(사제생활교령, 4항 참조). 현대사회의 교우들에게 구체적인 생활환경은 당연히 경제, 정치, 국제질서, 제도와 법, 교육 따위의 구체적인 삶의 영역이다. 예를 들어보자.

 

교우들의 경제생활은 구체적이며 실재이며 현실이다. 경제생활에서 자본주의는 여러 모델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것이지, 그 자체로 완전무결한 경제모델은 아니다. 당연히 한계가 있으며, 이를 ‘시장의 실패’라고 부른다. 자본주의 시장의 실패는 사람을 고통스럽게 한다. 주기적 불황이 그렇고, 실직이 그렇고 빈곤이 그렇다. 실직과 빈곤의 위험에 직면한 교우들에게 성경의 진리에 바탕을 둔 사회교리를 제시하는 것이 사목자들의 임무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강론이나 교리교육 시간에 자본주의와 시장, 정부의 역할, 공동선의 원리, 재화사용의 보편적 목적의 원리 따위를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 이 현실을 다루기 곤란하다는 이유로 성경을 그냥 추상적으로 또는 일반적으로만 설명한다면, 이는 신앙을 구체적인 생활환경과 동떨어진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으로 유인하게 된다.

 

교회가 사회교리를 통해서 제시하는 원리들 (예를 들어, 인간 존엄성의 원리, 공동선의 원리, 보조성의 원리, 연대의 원리, 사회정의와 평화, 재화 사용의 보편적 목적의 원리, 사회적 약자에 대한 우선적 배려의 원리 따위) 가운데 그 어느 것 하나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은 없다.

 

* 박동호 안드레아 - 서울대교구 신부. 신정동본당 주임으로 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과 천주교인권위원회 운영위원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2년 9월호, 박동호 안드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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