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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의 선교사 에델 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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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seongill] 쪽지 캡슐

2015-07-11 ㅣ No.1857

 

 

 

아프리카를 정복한 여성 레지오 단원 

 

(1907-1944)

레지오 마리애가 배출한 전인(全人)에 가까운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에델 퀸이고, 또 한 사람은 알폰소 램이다. 두 사람 모두 죽음의 마지막 순간까지 평신도 사도직 수행에 있어서 성모님을 제대로 하여, 하느님에게 모든 것을 깡그리 봉헌함으로써 개인 성화에 도달한 성스러운 레지오 단원이다(공인 교본 제11장, 12장). 그리스도를 위한 외지 순방으로 아프리카에 첫발을 내디딘 에델 퀸은 허약한 육체적 조건과 지병에도 티없는 신앙, 용기, 인내, 쾌활, 타오르는 열정 등등 열거할 수 없는 덕목으로써 그 거대한 아프리카 대륙을 레지오 마리애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들었다.

 

 길조차 없는 밀림과 맹수라는 최악의 조건과 환경 속에서도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병든 몸조차 돌보지 않는 전적인 봉헌이 마침내 그녀로 하여금 거룩함에 도달하게 했다(공인 교본 제6장). 오늘 이야기의 제목인 "우리는 에델 퀸을 알아야 한다."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한다. 우리들이 그녀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녀는 그녀 자신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든지 영적인 격려를 하고 있는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나타내게 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지적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만일 내가 그 무엇을 굳이 지적해야 한다면 에델 퀸의 현대성(現代性)이라고 생각된다. 에델 퀸은 1944년에 선종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성이라는 빛깔을 두고 말한다면 확고하게 뚜렷한 존재이다. 한 시대 이전에-오래 전에 죽은 데도 말이다. 에델 퀸은 여러 계층의 사람들에게 전해 줄 하나의 메시지를 가진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비상한 호소력을 갖고 일해 왔다.

 

에델 퀸은 지병을 지닌 채 궁지에 몰려 있던 허약한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생애를,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성취의 역사로 끌어올렸을 만큼 피나게 노력했던 사람이다. 그녀의 생애(역자 주: 강인한 에델 퀸의 생명력 있는 삶을 나타낸 전기를 가리킴)를, 병과 싸울 힘을 잃어버린 어느 환자에게 줄 것을 그녀에게 당부했던 한 의사를 나는 알고 있다. 그 환자는 그 책을 읽었고, 읽음으로써 용기와 영혼을 다시 찾았다. 나의 생각으로는 에델 퀸이 모든 병자에게 똑같은 심리학을 베풀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 도덕성은 그 환자들이 똑같읕 처방을 받게 될 것이라는 데 있다.

 

남녀 누구에게나 표상이 되다

 

에델 퀸을 연구하는 모든 레지오 파견자들은 대체로 무엇을 느끼게 될까? 건강의 시각(時角)에서 본다면, 그들의 눈앞에 쾌 높고, 퍽 의무적이며, 쾌 비범한 인물이라고 할지, 하나의 기사 표제(標題)라고 할지, 아무튼 한 사람의 영웅을 그려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생각된다. 에델 퀸은 남성다운 여자라는 말과는 거리가 먼, 여자의 모든 미덕(美德)을 갖춘 여자이다. 그럼에도 에델 퀸은 주관이 뚜렷하다고 생각하는 남자들이 열을 지어 앉아 있는 경우에도 능히 가르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런 남자들에게서 존경을, 신심을, 복종을 명하고 요구할 수 있었다.

 

권위(權威)의 내부에 있는 -특히 레지오의 권위를 누리거나 업고 있는-여자들이 에델 퀸을 후자의 입장에서 분석하는 것은 현명한 일일 것이다. 에델 퀸이 남자들에게 의존함이 없이 자신의 뛰어난 지배력을 어떻게 행사할 수 있었는가? 덧붙여 말한다면, 에델 퀸은 남자들뿐 아니라 여자들에게도 의지함이 없이 어떻게 자신의 지배력을 실행하고 펴나갔는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녀의 겸손한 태도하고 하지만 그 대답은 다만 변죽을 울리고 있을 뿐이다. 레지오 마리애 단원이 에델 퀸의 비밀을 발견하려는 노력은 단원인 자신과 자신의 단원 자격에서 결국 찾게 된다. 왜냐하면 레지오 마리애에게는 에델 퀸이 전인(全人)에 가까운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그녀를 레지오 마리애의 본질적 존재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단어가 초세련화의 과정을, 초정제화(超精製化)의 과정을 표현해 주는 말이라고 설명한다.

 

이상하게도 에델 퀸은 레지오 마리애라는 것이 진정 인격체(인간) 안에서 끓어 용해되어 있기를 바랐고, 또 그러한 레지오 마리애를 주장하고 옹호했다. 만일 레지오 마리애 단원인 여러분이 에델 퀸을 이해할 수 있고, 나아가 에델 퀸을 모방하려면, 여러분은 분명히 레지오 마리애의 중심이 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은 레지오 마리애가 교종에게서 여태껏 최상(最上)의 정교한 치하의 말씀을 들은 신심 단체(信心團體)라는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교종 요한 23세께서는 레지오 마리애가 가톨릭 교회의 진면목을 나타내주고 있다고 말했다.

 

순수했던 에델 퀸

 

좋은 점에만 국한하여 인상을 받을 만큼 에델 퀸에 대해서 너무 깊이 파고들어 가서는 안된다. 에델 퀸의 미(美)와 매력은 솔직히 여러분들을 맞서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매력에 대해서 나는 얼마간의 단서를 달아야 할 입장이다. 에델 퀸의 미는 섬세한 질서에서 오는 것이지, 단순한 글래머가 아니었다. 그녀의 매력은 한 겹의 베니어 합판(역자 주: 외적인 미)도 아닐 뿐더러 인위적으로 면밀하게 가꾼 매력도 결코 아니었다.

 

에델 퀸에게는 인위적이라고는 눈 닦고 보아도 찾을 수 없다. 아마도 우리는 이러한 버위 안에서 에델 퀸의 바탕을 더듬어 볼 수 있고, 고귀한 그녀의 내부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에델 퀸이 저기 여러분 앞에 섰을 때 레지오 마리애 단원인 여러분들은 비현실성, 또는 비실재(非實在)를 응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여러분들을 외판원의 접근 방식으로 대하지 않고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대했다. 우리들이 지금 알고 있듯이, 그녀의 인격은 그녀 자신이 만들어 나갔다. 그녀의 양친은 어릴 때부터 에델 퀸의 그러한 면을 포착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러한 에델 퀸의 인격성이 결정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여러 가지의 어려운 역경이 그녀의 가정에 들이닥쳤을 때부터였다.

 

그녀는 학교 교육을 중단하게 된 일에 대해서 어린이처럼 무조건 슬퍼만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으며, 아일랜드 본국으로 돌아가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일자리를 구했다.

 

구애를 받는 에델 퀸 

 

그녀는 직장에서 일방적인 사랑의 모험을 하게 되었다. 그 모험은 그녀 쪽에서 벌인 것이 아니고, 그녀에게 매혹된 젊고 훌륭한 고용주 쪽이었다. 이런 관계는 자연스럽게 발전되어 갈 듯 했지만, 그런데도 그녀의 마음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환경이 허락하면, 가난한 수도자가 되겠다는 의향이 이미 그녀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었다.

 

레지오 마리애가 그녀에게 나타난 것이 바로 그 무렵이었다. 아마도 레지오 마리애의 단원인 여러분들은 레지오에 입단한 그녀의 배경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되풀이도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그 장면은 아주 독특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우연히 한 소녀를 사귀게되어 그 소녀를 집으로 초대했는데, 그 소녀는 약속을 지킬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그날 저녁 그 소녀는 레지오 마리애의 회합에 참석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레지오 마리애(마리아의 군단)! 레지오 마리애는 대체 무엇인가? 이 두 단어는 에델 퀸의 일생과 다른 많은 사람들의 생애를 바꾸어 놓았다.

 

레지오 마리애는 그녀의 생애를 세계적인 전설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한 그녀의 결정이 성교회의 거룩함을 다짐해 주는 보증이 되리라는 것을 우리들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바티칸의 한 주요 한 인사는 최근에 에델 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본인은 이 훌륭한 삶이 암시하는 영감에 흠뻑 젖어, 전혀 새롭게 고양되는 순간순간을 체험하지 않고서는 그녀가 남긴 문서를 읽을 수가 없었다."

 

레지오와 운명적인 만남

 

그녀는 "레지오란 무엇인가?"라는 의문 때문에 레지오 마리애 회합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녀의 선언에 의하면, 그녀가 참석해 본 레지오 마리애의 회합에서 별안간 그녀의 눈앞에 나타난 상황은 자기 자신이 평소에 무의식적으로 추구해 오던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 순간이 자기 생애에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녀의 운명이 스스로 다가온 셈이었다.

 

그녀는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그것을 받아들였고, 또한 그것에 매달렸다. 그리고 그녀는 결코 뒤돌아보지 않았다. 얼마간의 세월이 지나자, 비상한 영혼의 소유자인 이 젊은 아가씨의 말이 우리들에게 둘려오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아직도 그녀를 보지 못했다. 우리들은 그녀를 불러 그녀와 함께 하룻밤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섬세한 면을 조금도 보여 주지 않았다. 다만 그녀에 대한 훌륭한 소문을 정당화시켜 주었을 뿐이었다.

 

우리들이 의논하여 평점을 내린 바에 의하면, 그녀는 '제1급'이었다. 바로 그때, 신분이 낮고 천한 여인들의 하숙집 등을 방문한 적이 있는 어느 한 쁘레시디움에 단장 한 사람이-속된 말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유능한 단장 한 사람이-필요하다는 말이 우리들에게 전달되었다. 우리들은 에델 퀸을 그 쁘레시디움의 단장으로 보냈다. 그녀의 임지 도착은 그 쁘레시디움에 큰 충격이었다. 하지만 단원들은 충격을 감추었다가 회합이 끝난 후 별도로 모여 에델 퀸의 단장 취임을 의논했다.

 

그들은 그들의 영적 지도자 고(故) 뎀프시 박사를 레지오 사령부에 보내어 애송이 아가씨를 그들을 지도할 사람으로 보내 준 데 대해 항의를 제기했다. 그 항의는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 영적 지도자는 멀지 않아 훌륭한 단장을 모시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가를 느끼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정말 멀지 않아 그들 단원들은 그러한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청천의 벽력처럼 그녀의 건강이 나빠짐, 요양소에서의 체류, 레지오 활동의 재개, 웨일즈 지방을 향한 그녀의 첫 파견 등이 숨쉴 사이 없이 일어났었다-그녀는 아프리카에 파견되었다. 그녀의 모든 활동들은 흥미와 관심과 나아가 교훈 등으로 넘쳐 흘렀다. 나는 그녀의 이러한 활동들에 대해서 여러분들에게 쉬넨스 추기경의 책을 소개하는 바이다. 걸작인 그 책은 몇 분의 교종께서 한번 읽기를 추천하기까지 했다.

 

중국에 메아리 친 아프리카의 서사시

 

레지오 마리애와 동맹 관계에 있는 1000개 단체의 아프리카 여행은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격언이 있듯이 단 한 발자국에서 시작되었다. 레지오 마리애에 연결시키는 그 첫걸음을 내디딘 에델 퀸은 인간 영혼들을 찾아나서는, 이른바 페레그리나티오(그리스도를 위한 외지 순방)에 나서게 되었으며, 이러한 운동에 수천개의 단체들이 합류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그녀를 아프리카에로 인도했고, 그녀를 외방 선교회에 대해 어떤 사명을 갖게 한 일종의 특수한 파견자로 만들었으며, 나아가 그녀 자신의 입체적 성장을 충분히 펼 수 있게 해주었다.

 

그녀의 혜택을 본 대상은 오직 아프리카만은 아니었다. 리베리 추기경은 다음과 같이 그 사실을 설명했다. "아프리카의 정글 깊숙이 파고든 에델 퀸은 중국의 종교사(宗敎史)에 영향을 끼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에델 퀸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를 개종시키기 위하여 여태껏 시도한 것 가운데 가장 위대한 노력을 진수시킬 영감을 제공해 주었다." 그녀의 티없는 신앙, 용기, 인내, 쾌활, 열정 및 그 밖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자질 떼문에 그녀의 아프리카 파견은 그녀를 역사상 위대한 성인들의 위치에 서게 만들었다.

 

아마도 레지오의 유명한 파견자들 중에서도 에델 퀸은 독특한 존재였다. 그 많은 파견자들 중에서 에델 퀸처럼 허약한 육체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온 힘을 다해 정열적으로 엄청난 활동을 해낸 경우는 정말 드물다. 그녀가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에 그녀로서 의식적인 노력을 필요로 했던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겠다. 그녀는 허약한 신체와 가혹한 풍토와 기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일하고 또 일했다.

 

비록 그녀의 하루 일과를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훨씬 더 피로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기세를 꺽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의 유쾌한 처신에 한 줄기의 그늘을 드리울 사람이나 일은 전혀 없었다. 간헐적으로 그녀의 계속되던 진군이 중단되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다만 그녀의 신체가 더 이상 자신의 의지에 호응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경우에 해당하는 그녀의 말들이 많은 경우에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없는 일 외에는 내가 하지 않으려고 한 일은 아무 것도 없다."

 

그녀의 무서운 자질에 관한 하나의 에피소드로서, 나는 체력이 소진하여 어쩔 수없이 드러누워 있었던 그녀를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그녀는 평소 만나 보고 싶었던 주교가 왔다는 말을 전해듣게 되었다. 불가능을 성취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녀는 병상(病床)에서 일어나 주교를 만나 보기 위해서 100마일이나 여행했다. 그런데 그녀는 다시 병상으로 돌아와서는 고꾸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병상에서 얼마나 오래 머물 수 있을 것인가? 그녀는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내부에 다시 생명력이 꿈틀거리기 시작하면 그 순간에 의무적인 행군은 또 재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앙과 확고 부동한 태도

 

여기에서 나는 말을 잠시 중단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나의 의향은 그렇지 않지만 내가 에델 퀸의 허구적인 이미지를 부각시키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일정한 한 가지 모습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다른 측면에 대해서 해악(害惡)을 끼치게 됨으로써 쉽게 허구적인 이미지가 부각될 수 있게 된다.

 

아마 내가 쇠처럼 굳건한 의지를-자기 자신에와 자기 이외의 모든 사람들에게도 가혹하게 대하는-지닌 채 인간에게 주어진 자연 조건도 무시할 뿐 아니라 자신이 나아갈 길을 막는 묏부리들도 옆쪽으로 밀어붙이면서 전진하는 한 여인상을 묘사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한 표현이 오늘 우리의 주제를 결코 매력적으로 부각시키는 묘사는 되지 않을 것이며, 또 그것은 진실과 전혀 동떨어진 이야기가 될 것이다. 비록 원칙과 확고 부동한 결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에델 퀸에게는 독하다든지 고집 불통 같은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사실대로 말하면 분별력 있게 자신에게조차 가혹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남에게도 의심할 나위도 없이 가혹하게 굴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녀가 사랑에서 출발하여 가혹한 가시밭길을 걸어간 것뿐 결코 고행(苦行)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이 에델 퀸에 있어서 위대한 요소였다고 믿는다.

 

 더욱이 그녀는 자신의 육체적인 허약성을 극복하는 것조차 우리들이 상상하듯이 자기 자신에게 폭력과 같은 방법을 쓰지는 않았다. 내가 그녀에게 있었던 일들을 미루어 본다면, 그녀는 어떤 동기로 강렬하게 움직였던 것이고, 또 그러한 동기들이 그녀의 의지를 잠식해 버리고 그 자리를 차지했던 것뿐이다. 그녀는 남들이 마지못해 하는 일들을 하고 싶어했다. 그녀에게 환하고 매력적인 일이 우리들에게는 꺼려지는 일이었다. 보통 사람들의 경우에, 초자연적인 것이 인간 영혼의 내부에 자리하기 위해서는 응분의 투쟁을 치르지 않으면 안된다.

 

하지만 그녀의 경우는 그러한 투쟁(갈등)의 과정을 거쳤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하느님을 쉽게, 그리고 명확히 인식했다. 그녀는 자신의 온 마음으로 예수님과 성모님을 사랑했다. 그리고 그녀는 두 분이 바라신다고 생각하는 일을 격정적으로 추구했다. 그녀가 레지오 마리애를 알게 된 순간부터 그녀의 마음이 레지오를 온통 받아들였다는 것은 레지오 마리애에 대한 치하일 뿐 아니라, 레지오 마리애에 대한 일종의 보증(保證)이기도 하다.

 

예수님과 성모님이 그녀에게 활동해 주기를 바라는 활동에 사고(思考)와 방식(方式)의 체계를 레지오가 제시해 주었다. 특히 레지오 마리애는 신비체와 은총과 관련한 성모님의 모성적(母性的)인 보살핌 등의 교의들을 가르쳐 주었다. 그녀는 이러한 교의들을 철저히 의존하여 생활한 결과 마침내 남들에게 표양이 될 수 있는 위대한 인물이 된 것이다.

 

소위 에델 퀸의 무분별 · 경솔이란?

 

그녀는 저절로 떠오르는 모든 개념을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와 연관을 지었다. 그 결과 그녀의 정신적 과정들과 판단들이 신속하게, 그리고 분명히 이루어지곤 하였다. 거기에는 동기들의 어떠한 배열도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내적 갈등을 거치는 투쟁도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이기적이거나 적당하지 않은 발상(發想)이나 생각은 마음속에 떠오르는 그 순간에 없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신성(神聖)에 관련된 생각이 떠오르게 되면, 비록 그것이 인간의 본성에는 상처를 입힐 수 있을지라도 그녀를 유혹하는 방향으로 작용했다고 할까.

 

가끔 이러한 신성의 상념(想念)이 그녀를 휩쓸어 삼켜 버리곤 했다. 이것이 그녀의 소위 무분별·경솔에 대한 설명이다. 그녀의 마음 안에는 공포하는 것이 숫제 작용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즉 호(好)·불호(不好)에 동거하는지의 여부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녀가 지닌 정감(情感)들이야말로 강렬한 것임이 틀림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남들이 판단할 때에는 그러한 정감들은 모두 제자리에 위치함으로써 아무런 혼란도 비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족과 친구들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중요한 순간이 다가왔을 때, 그녀는 그들을 두 번 다시 볼 기약(期約)이나 미련도 없이 가까운 사람들을 뒤로 하고 훌훌 떠나 버리곤 했다.

 

그런데 그 이유는? 가족들과 친구들, 그리고 그녀 자신이 꽤나 갈망해 온 서로의 만남은 결코 장한 일이 못되는 것일까? 또 한 한가지 고려 사항이 있다. 그녀가 우리의 상상에 맡기듯이, 그녀의 건강은 진전을 보이지 않고 끊임없이 체중이 줄어들고 있었다. 그리도 그녀는 만일 가고 싶은 고향으로 즐겁게 돌아간다고 하면, 두 번 다시 외국으로의 파견이 허용되지 않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섰던 것이다.

 

따라서 그녀는 그 즐거운 귀향(歸鄕)의 그리움을 마치 하나의 유혹처럼 생각했다. 여러분들은 그녀가 밀림 속에서 인간 영혼을 찾아다니다 자가용 기름이 동난 에피소드를 기억할 것이다. 그녀의 전속 운전사는 기름을 구하러 나섰다. 기름을 구해 돌아올 때까지 시간이 많이 지났기 때문에 운전사는 그녀가 공포에 떨고 있으리라고 짐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으나 천만의 말씀이다. 그녀는 연락을 해주어야 할 곳에 연락을 취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녀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웃음으로 운전사를 맞았다. 힘들어하거나 무서워하지 않는 평화스러운 표정이다. 그러니까 천상(天上)에 계신 분들이 그녀와 함께 머무시기 때문에 약한 생각이나 공포에 떨 여지가 전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이미 부정한 바 있는 비인간적인 기조를 여기에서 발견해 낼는지도 모르겠다. 확고하게 자신의 진로를 계속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이 지상에는 거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영혼이 미칠 수 있는 범위가 어느 정도 인가를 보여 준 예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격언이 있듯이 그러한 노력 앞에서는 만사가 굴복하게 되어 있는 법이다.

 

전적으로 타인만 생각하다

 

한 이론가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폐결핵이 극도로 악화된 상태로 근 8년 동안 활동을 할 정도로 무분별하고 경솔하게 행동했다는 것이다. 활동을 하고 있는 동안 그녀는 온 데다 병균을 전염시켰다는 짐작이 성립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녀를 접촉한 사람 중에 아무도 폐결핵 균에 감염되었다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 그녀는 스스로 어떤 내적(內的)인 빛, 즉 영적인 빛을 틀림없이 보유하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그녀 스스로 남에게 위험한 존재라고 믿었다면, 그녀는 미련없이 사막으로 물러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타인들을 위한 배려는 그녀에게 있어서 하나의 기본적인 요소였다고 선언한다.

 

나의 판단으로는, 그녀는 어떠한 사람에게도 남을 생각해 주는 배려에 조금도 소홀히 한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쉬넨스 추기경은 그녀의 모든 가족들과 가진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였다. "에델 퀸의 성격에 특수한 것이 무엇이오?" 에델 퀸의 어머니는 서슴없이 "이기심이 없는 거예요"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쉬넨스 추기경은 그러한 성격이 몇 살 때에 분명히 나타나기 시작했느냐고 물었다. 그녀 어머니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그러한 성격이 드러나기 시작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쉬넨스 추기경은 어린아이란 시기를 잘하는 작은 동물이므로, 어른에게 올바른 가치들을 배워야 한다고 말하면서 에델 퀸 어머니의 답변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러한 지적에 대하여 전 가족은 에델 퀸이 결코 이기적이 아니었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에델 퀸의 또 하나의 모습을 묘사하는 이야기가 있다. 선교 활동을 위해 해외로 파견되기 전에 그녀가 쓰러져 요양소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을 때다.

 

그 요양소의 환자 한 사람이 밤중에 느닷없이 죽게 되자, 그 환자의 담당 간호사는 병상에서 잠든 에델에게 도움을 청하러 급히 찾아왔다. 그 젊은 간호사는 에델 퀸보다 훨씬 더 확실하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간호부장이 있었는데도 에델에게 달려왔던 것이다. 이 일에도 의미 심장한 그 무엇이 함축되어 있다. 갑자기 사람이 죽자, 경황이 없는 그 젊은 간호사의 마음속에 에델이 반사적으로 떠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와 똑같은 양상이 에델의 부모님에게도 있었다. 가정적으로 위기가 닥치면 양친은 언제나 변함없이 에델을 가족회의에 불러들이곤 했다.

 

항상 즐겁고 명랑한 에델 퀸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있을 때 어떠했는가? 그녀를 가리켜 남의 기를 꺾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이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녀에게는 남들을 사이좋게 지내게 하는 비결이 있었다. 그녀에게는 감미로운 개성이 넘쳐흐름으로써 그녀의 신변에는 따뜻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녀가 참여한 어느 한 집단이 암울하거나 방향 감각을 잃고 있었던-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던-경우를 돌이켜보지 않을 수 없다. 아무튼 그녀로 말미암아 그 단체의 구성원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를 항상 알게 되고, 더욱이 유쾌하고 명랑한 것을 지향하는 경향이 지배적이게 되었다. 그녀는 일부러 그러한 것을 유의하지는 않았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더욱이 그녀는 자기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내세우지 않았으며 말이 적었다. 아마도 집단 내에서 가장 입이 무거웠다.

 

그러한 그녀기에 항상 즐겁고 성스러운 인격을 발산시키곤-영향력 있는 빛을 뿜어내곤-했다. 그녀에게서 유머가 완전히 사라진 적이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줄리안 주교께서 그녀를 위한 황홀한 장례에 대하여 말을 하는 마지막 순간에서도-그녀도 마지막 순간이라고 생각했다-그러한 유머가 스스럼없이 나왔다.

 

즉 그녀는 마음껏 소리내어 웃음으로써 주교를 놀라게 했다. 또 하나의 귀중한 이야기-암소에 관한-가 있다. 한 마을에서 다른 마을로 갈 때에는 다른 마을로 가기를 바라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차에 태워 주는 것이 그녀의 관례이다. 어느 날, 웬 사람이 자기는 가지 않고 암소 한 마리를 보내기를 원했다. 재빠른 암소 한 마리를 차에 태워 묶는 데 한두 시간이 걸렸다.

 

에델 퀸은 도착하자마자 차 한 잔을 마시는 자리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는 신부에게 레지오 마리애를 시작할 때의 필요 사항 등 설명하였다. 그 신부님은 일부러 낙담하는 표정으로, 두 손을 하늘을 향해 치켜들고 감탄 어린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 암소가 이곳(역자 주 : 천상, 즉 영적 세계를 뜻한다.)에 와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녀는 독특한 유머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부님, 신부님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저를 여기에 데려 온 것은 결코 암소가 아니예요. 그 암소를 갖고 온 자는 바로 접니다."

 

에델 퀸에게 긴급성이라는 의미

 

사람들은 에델 퀸에게서 무엇인가 뿜어 나오는 듯한 힘을 느끼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보기만 해도-그녀가 아직 말하기 전인데도-이미 반 가량 그녀에게 숙이거나 지고 들어갔다. 그녀의 생활은 정복의 과정이었다.

 

 쉬넨스 추기경이 쓴 전기물인 생명(Life)이라는 책에서 특수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란 그녀가 거쳐 지나갔던 지역들이 묘사된 이야기이다. 그녀가 거쳐간 지역들은 아주 달랐고, 또 선교 활동을 위해 파견된 성직자들도 꽤 다른 인생관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새로 머무는 곳마다 다른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어느 경우에나 똑같았다. 다시 말하면 레지오 마리애가 새로 조직되어 출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대단한 희생을 딛고 출발하는 것이 보통이다. 대화를 하고, 설득을 하고, 교리를 가르치는 이른바 기초적인 일들이 성취되는 그런 활동이 되풀이되는 것인데, 계획대로 다 이루어지더라도 긴장을 풀고 쉴 여유도 없이 그녀는 또 다음 지역을 향해 떠나간다.

 

다음 장소(지역)가 기다리고 있으며, 또 시급히 가야만 하는 이른바 긴급성이 활동의 기조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시급히 가야 하는 이유는? 생명을 유지하면서 활동할 기간은 얼마나 남은 것일까? 이 후자의 인습적인 표현보다 더 적절한 말이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이 활동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몇 개의 장소를 더 돌고 싶어 했다. 그렇지만 누구든 그녀를 맞아들였을 때 기력이 다한 사람을 대한다고 느끼는 곳이란 한 군데도 없었다. 그녀로서는 머무는 곳마다 그 장소가 곧 이 지상엣 마지막으로 머무는 곳처럼 한결 같이 밝고 명랑한 표정을 잃지 않았다.

 

물론 임종은 길에서 맞이할 수도 있다. 찾아 보아야 할 곳의 명단은 리롱웨에서 끝났다. 그곳에 선교 활동을 하기 위해 파견돼있던 신부는 레지오 마리애의 파견자 에델 퀸을 맞아들였다. 두 사람 사이에 인사가 끝나자, 그녀는 자기 임무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부님은 당황하여 그녀의 말을 듣는 것보다 오히려 그녀를 보는 쪽에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신부님은, 자기의 날카로운 시선을 애써 피하려는 그녀의 시선을 포착하고, 그녀의 말을 중단시켰다.

 

"퀸양, 당신은 지금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나요? 레지오의 과업 대신에 이제 자매님은 죽음을 대비하여 죽음을 맞아야 합니다. 그 신부의 말이 옳았다. 그녀는 바야흐로 죽음의 문턱에 와 있었다. 그 말이 신호이기나 하듯이 그녀는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그렇게 쓰러진 뒤에 그녀를 위한 영결 미사를 집전하기 위해 현지로 달려왔다는 점을, 또 그녀의 장례식보다는 위대한 한 사도의 장례식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왔다는 점을 그녀에게 알린 좀처럼 듣기 힘든 주교의 일화가 전한다.

 

지금까지 그녀는 믿을 수 없는 훌륭한 활동의 제 2국면을 달성하기 위하여 생존했고, 그러한 토대 위에서 잠시도 쉬지 않고 살아 왔을 뿐이다.

 

초인이 아닌 완전히 정상적인 인격체

 

 하지만 나는 여러분들에게 실제 이상의 모습을 표현한 것은 아니다. 나는 결코 그녀의 지능이 우수하다거나, 관찰자들을 고무시켜 주는 여러 가지의 자질들이 많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녀 스스로 다른 사람을 돕는 단계가 되었을 때, 그녀는 신심보다 더 높은 차원을 추구하는 데 결코 자기 자신을 맡기지 않았다.

 

그녀는 소녀들로 구성된 어느 한 클럽의 일을 돕는 여분의 일과 평상적인 일이 끝난 뒤 여러 가지 직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초인적인 그 무엇을 암시해 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당시의 에델 퀸을 관찰한 바 있는 몬타 티어니는 에델을 레지오 마리애 단원이 될 것 같지 않다고 판단한 사실을 우리들은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반짝이는 에델 퀸의 눈 속에서 훗날에 지니게 될 외모를 갖추어 가고 있었다.

 

 그러한 외모를 갖추어 가는 원인은 레지오 마리애에 그녀가 입단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녀의 내부에서 이차적으로 작용하게 된 것들은 일련의 새로운 동기(動機)들이지 어떤 위대한 천재적인 자질이나 파격적인 노력이 결코 아니었다. 레지오가 그녀에게 제의했던 일에 그녀는 충분하게 자기 자신을 활짝 열어제쳤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리하여 은총이 작용하여 비로소 가시적인, 선풍적인 성장 과정이 열리게 된 것이다.

 

무한히 베푸는 일에 억척이다

 

그녀가 가는 곳이면 어디에고 장벽을 그냥 두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충분하다!'는 말을 결코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필연적으로 저 높은 곳을-우리들이 초인이라고 하는 저 높은 곳을-달성할 때까지 계속 쉬지 않고 전진했다. 다만 그렇게 높은 곳이 그녀의 의지, 그녀의 판단, 그녀의 큰 인물을 제시해 왔다는 점과, 여러분이 그녀에 대한 표현에 과장이 섞여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를 만큼 그릇된 전달을 해왔을지 모른다는 점에서 나는 지금 마음 아파하고 있다.

 

그게 아니면 에델 퀸이 우리들에게는 전혀 모범이 될 수 없는 초인적인 인물이라는 식으로 나는 그릇되게 실상을 표현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내가 과장해 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녀와 관련하여 성교회에 의하여 인준(認准)된 것들, 그리고 로마 바티칸의 엄정한 검열 기준에 일치되는 것들만 말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그 이야기들은 이미 정착된 것들이며 어떤 장식이나 윤색이 없는 이야기들이다.

 

그런 내 이야기가 그녀를 초인으로 치켜세우는 것인가? 여기 에서 나는 감히 다음과 간은 주장을 하고자 한다. 즉 그녀는 초인이 아니라 완전히 정상적인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원래부터 정말 훌륭한 성향(性向)의 인간이 보유하고 있는 것과 같은 자질을-그 이상도 결코 아니다-갖춘 인간이었다. 그녀만큼 신심이 깊은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그녀처럼 잘 해낼 수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지 않은가?

 

이 묘한 질문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어릴 적부터 에델 퀸이 그 무서운 잠재력을 발휘해온 신심, 그녀의 지능, 그밖의 모든 것들이 자연보다 더 크게 보이게 하고, 또 자연을 뛰어넘는 경지에 이른 것처럼 보이게 한다. 어디까지나 그것은 즐겁게 무제한으로 베푸는 일과 끝까지 억척스럽게 버티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그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녀 아닌 다른 사람들도 무제한으로, 아까워하지 않고 베푸는 일을 얼마든지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녀를 공통적인 분류에서 제외하거나. 아니면 그녀에게 시성을 베풀어 그녀가 우리들의 영역 밖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기라도 하면, 그것은 결정적인 과오가 될 것이다.

 

성모님 생각과 신앙의 전달

 

모든 것을 이미 이야기한 상황임에도 다음과 같은 사실이 남는다고 하겠다. 에델 퀸은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의 일이라면 어떠한 일이 있어도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는 그녀 나름의 정책을 통하여 초인과 비슷한 저 높은 곳을 성취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분명히 그녀가 아프리카의 모험에서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하는 높이까지 올랐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어떻게 해서 그 높은 곳들을 차지할 수 있었는지 우리들은 알지 못한다. 그녀가 쉬지 않고 끊임없이 한길과 샛길을 따라 움직이고, 나아가 아프리카 대륙의 밀림과 동굴까지 탐색하는 가운데, 그녀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성모님의 처신과 활동에 부합하고 어울린다고 성모님이 생각하지 않으셨을까 생각한다. 성모 마리아는 성령의 거주지이시다. 그러나 성모님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지 않으셨다. 성모님은 두드러지지 않으시고 또한 겸손하셨다.

 

그런데 이제 성모님은 천상에 계시기 때문에 성모님을 섬기는 사람들을 통하여 당신을 투영(投影)하신다. 성모님을 섬기는 사람들을 성모님과 똑같은 완덕성(完德性)을 지닌 인간들로 만드시는 것이 성모님의 목적이다. 성인들의 생애를 보면, 가끔 성인들이 예수님과 성모님의 모습으로 변형. 변모되는 경우들이 많았다. 그런 의미에서 성바울로의 감탄문에 조그마한 수정을 가하여 그 말을 에델 퀸의 입을 통하여 말하게 하는 것이 전적으로 허용될 수 없는 일인가? "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나를 이용해서 예수님을 주게 만드는 자는 내가 아니고, 바로 그분의 어머니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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