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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소록도병원 개원 100주년 아픔의 땅, 치유의 섬 소록도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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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5-08 ㅣ No.359

국립소록도병원 개원 100주년 ‘아픔의 땅, 치유의 섬’ 소록도를 가다


한센인 아픔 딛고 은총의 땅으로 거듭난 곳

 

   

- 한센인 차별의 상징이었던 제비선창의 현재 모습. 1984년 제비선창 폐쇄는 소록도를 차별과 소외가 아닌 평등과 형제애의 섬으로 변화시킨 상징적 사건이었다.


아기 사슴의 머리 모양을 닮았다해서 이름 지어진 소록도(小鹿島). 전라남도 고흥반도 끝자락에 있는 소록도와 ‘천형(天刑)’을 받았다는 곡해와 설움의 시간을 보내야 했던 한센인들과의 인연은 일제강점기인 191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전국의 한센인을 격리, 보호하기 위한 장소를 물색하고 있었고, 육지와 가깝고 수량이 풍부하며 기후도 온화한 소록도를 선정했다. 이후 소록도에 한센인을 위한 부지를 정책적으로 매입해 병동과 막사를 짓고, 그해 5월 17일 한센병 전문병원 자혜의원(국립소록도병원의 전신)을 설립했다.

주교회의 미디어부(국장 이정주 신부)는 소록도 한센인 정착 100주년을 맞아 교계언론과 일반언론 종교전문기자를 초청, 소외되고 고통받는 한센인을 위한 교회의 노력을 알렸다. 지난 4월 25~26일 진행된 이번 소록도 동행취재를 통해 소록도는 한국 천주교 현대사의 현장이자, 사랑 실천의 현장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소록도에 날아 온 복음의 씨앗

한센인들은 세상과 격리된 채 통제와 인권침해 속에 살아야 했다. 전염의 위험이라는 공포로 이들은 가족과 생이별을 하고 강제 수용시설에 철저히 격리됐다. 환자들은 강제노역에 시달려야 했고 폭행, 감금, 강제낙태, 강제 불임시술 등의 인권유린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다.

- 소록도 구마탑. 미카엘 천사가 창으로 악마를 무찌르는 모습이다.


이러한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소록도에도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다. 1935년 장순업(프란치스코), 허영원(요셉), 강기수(바오로) 등이 소록도에 입원하면서 이들을 주축으로 가톨릭 신앙 공동체가 형성됐다. 나주 등지에서 사제들이 방문해 한센인들의 세례성사를 집전했다. 1943년에는 병사(환자들이 머무는 곳)에서 첫 미사를 봉헌했다. 이어 1946년에 병사 지대에 공소가 설립됐고, 1958년에는 병원 직원을 위한 관사 공소도 생겼다. 1958년 당시 광주교구장 현 하롤드 대주교가 사목방문 했을 때는 6000여 명의 주민 중 1000여 명이 신자였다. 마침내 1960년 소록도본당이 설립됐고 당시 신자 수는 1200여 명이었다. 이후 신자 수는 1300여 명까지 늘었다가, 현재는 한센인 수가 감소함에 따라 신자 수는 130여 명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그동안은 골롬반과 과달루페회 소속 선교사들이 소록도를 맡아 사목해오다 1997년 강길웅 신부가 최초의 한국인 주임신부로 부임했다. 지금은 김연준 신부가 소록도 두 곳의 성당(1번지 관사 성당과 2번지 병사 성당)에서 사목활동 중이다.

현재 소록도에 살고 있는 한센인 530여 명 중 가톨릭 신자는 130여 명으로 개신교 신자가 훨씬 더 많다. 그런데도 소록도는 가톨릭교회가 운영한다고 생각될 정도로 가톨릭적인 분위기다. 바로 ‘소록도 할매’ 마리안느 스퇴거 수녀와 마가렛 피사렉 수녀의 헌신적인 봉사활동,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방문 등을 통해, 가톨릭교회가 한센인의 삶에 들어가 일반인들의 시선을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방문과 제비선창

 특히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소록도 방문은 한센인들에게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사람들의 눈과 귀에서 멀어졌던 소록도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방문으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은 것이다. 교황의 방문은 한센인들에게 치유 그 자체였다. 1984년 5월 4일 소록도를 방문한 교황은 앞줄에 앉은 13명의 한센인에게 일일이 손을 얹어 축복했다.

교황의 방문은 소록도에게 또 하나의 선물을 줬다. 바로 제비선창의 폐쇄였다. 교황의 소록도 방문 소식에 세계 각국의 기자들이 소록도를 취재했고, 이 섬에 두 개의 선창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하나는 환자 전용인 제비선창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직원 전용이었다. 제비선창의 존재는 한센인에 대한 차별의 상징이었다.

이 같은 사실이 전 세계로 알려지자 소록도 병원장은 제비선창의 폐쇄를 명령하고 직원 전용 부두를 환자들과 함께 이용하도록 했다. 같은 선창 이용은 환자와 직원이 평등하다는 것을 의미했고, 서로가 운명공동체임을 확인한 것이었다.

- 소록도 한센인의 한과 아픔이 서린 벽돌공장 터. 지금은 십자가와 제단을 형상화한 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한센인의 한 서린 벽돌공장 터

1933년 소록도에는 1200여 명의 한센인이 살고 있었다. 당시 병원장 수호 마사키는 수용인원을 3000명으로 확대하는 한편 한센인 주거공간의 현대화(당시에는 초가집과 나무로 된 일본식 집만 존재) 사업을 시작했다. 이를 위해 벽돌제조공장을 세우고 한센인들을 동원해 벽돌을 만들어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국가재정이 전쟁비용으로 쓰여 의약품이나 식량사정이 나빠졌다. 병원 재정이 악화되니, 병원은 공장에서 만든 벽돌을 내다 팔기 시작했다. 한센인들은 성치 않은 손으로 흙을 나르고 벽돌을 굽기 위한 나무를 베어 왔다. 또 하나라도 더 만들기 위해 구운 후 채 식지 않은 벽돌을 꺼내야 했다. 손발의 감각이 무딘 한센인들이 화상을 입는 일은 빈번했다.

이런 고된 일을 견디지 못한 한센인들이 일을 못하게 되거나 반항을 하면 어김없이 감금실(소록도 감옥)에 갇혔고, 출소하면 바로 강제로 단종수술(정관수술)을 받았다. 많은 이들이 탈출하다 물에 빠져 죽기도 했다. 그래서 한센인들은 소록도 벽돌공장 터는 저주 받은 땅이라고 부른다. 지금은 벽돌공장 굴뚝 자리에 십자고상이 우뚝 서 있고, 벽돌공장 터는 거대한 제단을 형상화한 정원으로 꾸며져 있다.


치유의 길

- 한국 최초의 한센병 전문병원인 자혜의원 건물. 국립소록도병원의 모태다.


벽돌공장의 일이 고되니 섬을 탈출하려는 한센인들이 많아졌다. 한센인들은 숲이 우거진 십자봉에 숨어 있다가 배를 타고 나가거나 수영으로 인근 녹동으로 탈출했다.

수호 병원장은 한센인들의 탈출을 막고 탈출자를 검거하기 위해 십자봉 둘레에 4㎞가량의 길을 뚫었다.

한센인들은 중장비 없이 성치 못한 손과 발로 삽과 괭이를 들어 피눈물을 흘리며 이 길을 20일만에 만들어 냈다. 추운 날씨에 동상에 걸려 손가락과 발가락이 떨어졌다.

공사관리인은 말을 안 듣는 한센인들을 감금실에 가뒀고 채찍을 모질게 휘둘렀다. 바로 한센인 인권학대의 현장이었다.

소록도본당 주임 김연준 신부는 이 길을 ‘치유의 길’이라고 부른다. 11년 전 김 신부는 마리안느 수녀와 같이 이 길의 이름을 지었다. 김 신부는 “작은 상처는 큰 상처로 치유된다”면서 “우리가 정말 많은 고통과 자포자기를 겪지만 한센인의 피고름으로 만들어진 이 길을 걸으면 분명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름지었다”고 말했다.

- 한센인이 죽으면 부검을 했던 검시실. 사망자는 가족의 의사와 무관하게 검시를 마친 뒤에야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전라남도 등록문화재 제66호.


‘치유의 섬’ 소록도

한센인들의 격리 공간이었던 소록도는 그런 까닭에 깨끗하고 잘 보존된 자연환경을 자랑한다. 일반인은 소록도 주차장에서 해변가로 이어진 길을 따라 중앙공원까지 4㎞에 걸쳐 자유롭게 방문해 자연 속에서 쉴 수 있다.

소록도본당은 2003년 7월 피정의 집을 설립하고 ‘소록도 아기사슴 성당 피정’을 진행하고 있다. 성체조배실과 야외 정원, 십자가의 길 14처 등을 갖춘 피정의 집에서는 단체뿐 아니라 가족, 개인 피정이 가능하다.

김 신부는 “소록도는 고통이 많은 땅이었으니 신앙적으로는 은총이 많은 곳”이라면서 “소록도에는 한센인들의 아픔이 녹아 있지만, 이들의 아픔을 치료하고 보듬어 준 사람들로 인해 아름다움도 깃들어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러한 소록도가 힐링의 땅으로 알려지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가톨릭신문, 2016년 5월 8일, 최용택 기자]


한국 다시 찾은 ‘소록도 할매’ 마리안느 스퇴거 수녀


“소록도에서 보낸 반평생 하늘만큼 행복했습니다”

 

 

“특별한 일 한 것 없어요. 그저 예수님 복음 말씀대로 사람들을 돕고 싶었을 뿐이었어요. 간호사로서 고통 받는 환자들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요.”

 

‘소록도 할매’ 마리안느 스퇴거 수녀(82 · 그리스도왕 시녀회 재속회)가 처음으로 기자들 앞에 섰다. 긴장이 됐는지 목소리는 떨고 있었고, 오래 한국을 떠나 있던 탓에 말투도 어색했다. 하지만 한센인을 바라보던 다정한 눈빛은 그대로였다.

 

마리안느 수녀는 지난 1962년 28세의 젊은 나이에 소록도에 들어와 43년 동안 환자를 보살폈다. 그리곤 2005년 편지 한 장만 남기고 고향 오스트리아로 훌쩍 떠났다. 늙고 병든 자신이 오히려 환자들에게 짐이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랬던 마리안느 수녀가 소록도를 다시 찾았다. 광주대교구와 고흥군, 국립소록도병원이 소록도병원 개원 100주년(5월 17일) 기념행사에 참석해달라고 간곡하게 초청한 결과다. 마리안느의 단짝 마가렛 피사렉 수녀는 건강이 좋지 못해 같이 오지 못했다.

 

마리안느 수녀는 소록도병원 100주년과 복합문화센터 개관을 기념해 4월 26일 병원 측에서 마련한 기자간담회를 통해 지난 43년간의 소회를 털어놨다. 

 

수녀는 소록도에서 가장 좋았던 기억으로 병이 나은 환자들이 가족의 품에 다시 안겼을 때였다고 회상했다.

 

“환자들은 이곳에 오기 위해 가족과 헤어져야만 했고, 당시에는 편견들이 많아 가족과 단절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다 나은 환자들을 가족이 받아주고 안아줬을 때 기분이 정말 좋았어요. 하지만 다 나았는데도 집에 못가는 사람이 있었을 땐 가슴이 너무 아팠어요.”

 

마리안느 수녀가 43년 동안 소록도에서 살 수 있었던 것은 신앙과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리안느 수녀는 “예수님 복음 따라 기도했고, 옆의 사람들이 많이 도와줘서 환자들을 돌볼 수 있었다”면서 “하루하루 미래에 대한 걱정 없이 살 수 있었고, 환자와 병원 직원, 교우 구분 없이 모두 친구로서 살았다”고 말했다.

 

그렇게 걱정 없이 지내던 2003년 마리안느 수녀에게 대장암이라는 불청객이 찾아왔다. 오스트리아에서 세 번의 수술을 받고 돌아온 마리안느 수녀에겐 더 이상 환자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는 “하루하루 살다보니 43년이 흘렀고 나이도 70이 넘어 일도 못하는 상황이었다”면서 “환자들을 돌보지 못하니 조용히 떠나기로 결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마리안느 수녀는 현재 오스트리아의 고향마을 마트레이에서 지내고 있다. 천식을 앓고 있어 많은 일은 할 수 없고 일주일에 세 번 20㎞ 떨어진 인스부르크에 가서 미사를 드리고 마가렛 수녀가 있는 요양원을 방문한다.  

 

마리안느 수녀는 5월 17일 국립소록도병원 개원 100주년 행사를 마치고 6월 초 다시 오스트리아로 돌아갈 예정이다. 한센인의 친구로 소록도를 찾은 마리안느 수녀는 역시 소록도 사람들에게 친구로 남고 싶다. 그리고 거의 반평생 소록도 삶은 그녀에게 행복 그 자체였다. 

 

소록도에서 생활이 행복했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네, 행복했습니다. 이 만큼, 하늘 만큼이요”라며 두 팔로 큰 원을 그었다. [가톨릭신문, 2016년 5월 8일, 최용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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