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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50: 인노첸시오 3세와 교황의 세계지배 - 교회가 세상의 중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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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1-07 ㅣ No.241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50) 인노첸시오 3세와 교황의 세계지배 - 교회가 세상의 중심에 선 절정기

 

 

- 인노첸시오 3세. 13세기 프레스코화. 인노첸시오는 교황직을 신앙으로 통일된 서구 세계의 지도자로서 이해했다.

 

 

유럽의 역사도시들을 돌아다니다 보면 도시의 상징은 항상 주교좌 대성당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대성당들이 1100년대에서 1500년대 사이에 지어진 것들이다. 이 무렵에 무려 500개가 넘는 대성당과 무수한 수도원들이 건축되었다. 또한 대성당들은 문맹자들을 가르치기 위한 눈으로 보는 교리서 역할을 성당 자체가 했기 때문에 하나같이 화려한 조각과 스테인드글라스 등으로 꾸며져 있으며 크고 웅장하다. 지금의 경제력이나 기술로도 지어지기 힘든 대성당들이 이처럼 건축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문화와 사회의 중심이 교회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서구세계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지배적 상황을 말없이 보여주고 있는 셈인데 그 절정의 시기가 중세의 가장 위대한 교황 중의 한 명이었던 인노첸시오 3세 재위시절이었다.

 

 

그리스도의 대리자

 

교황 그레고리오 7세 개혁은 표면상으로는 교회 독립을 위한 것이었지만 그 내면에는 중세 그리스도교 문명의 주도권을 둘러싼 투쟁이었다. 그레고리오 7세 이후 교황들은 황제들과 주도권 다툼을 벌이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 해 줄 통치기구를 발달시켜 법률과 행정제도가 크게 발달했다. 이러한 법률적 발전과 세속 정부를 앞지른 관료적 교회 행정기구의 발전은 교황의 지도력을 대외적으로 크게 신장 시켰다. 12세기 중반이후로는 교황청 업무를 처리하는 데에 법률적 지식의 중요성이 커지다 보니 교황들은 대부분 교회법 전문가 출신이었다. 이는 그레고리오 개혁기의 교황들이 대부분 수도원 출신들이었던 것과 대조를 이룬다.

 

교회의 일사불란함과 달리 서구 주도권을 놓고 교황과 다투던 독일의 하인리히 6세가 1197년에 2살짜리 아들을 남겨 놓고 사망하자 황위 계승을 둘러싼 싸움이 일어났다. 그리고 몇 달 후 1198년 2월 22일 90대의 노쇠한 첼레스티노 3세 교황의 뒤를 이어 37세의 젊고 활동적인 로타르 (Lothar von Segni) 추기경이 인노첸시오 3세의 이름으로 교황이 됐다.

 

독일의 장기간에 걸친 왕위투쟁은 그만큼 교황권의 신장을 가져다 주었는데 여기에는 인노첸시오 3세의 뛰어난 개인역량도 한 몫 했다. 인노첸시오는 볼로냐와 파리대학에서 수학한 뛰어난 신학자요 법률가였다. 이미 추기경 시절부터 세속권력에 대한 교황권의 우위를 주장해 온 인노첸시오는 착좌 연설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Vicarius Christi)를 자처하며 교황에 의한 이상적인 세계지배를 꿈꾼다.

 

인노첸시오에 있어 서구는 그리스도교 백성들로 이뤄진 초자연적 공동체였으며 초국가적 공동체였으므로 교회의 우두머리인 교황이 자연 같은 신앙 안에서 일치된 서구 국제사회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세계지도자로서의 원동력을 「그리스도의 대리자」 개념에서 찾았다. 그리스도께서는 사제이자 왕이시며 교황은 지상에서 그 대리직을 맡고 있기 때문에 속권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이다. 인노첸시오는 황제 우위권을 주장한 콘스탄티노플의 알렉시오 황제에게 답서를 보내면서 『하느님께서는 하늘의 창공, 즉 보편적 교회 안에 두 개의 거대한 광채를 마련해 두셨습니다. 그 두 광채란 교황권과 왕권이라는 거대한 두 개의 직권입니다. 그러나 낮을 지배하는 태양이 밤을 관장하는 달보다 더 위대하고 달이 태양으로부터 그 빛을 얻듯이 교황이 왕보다 더 위대하고 왕권은 그 권위를 교황권으로부터 얻습니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인노첸시오는 교황이 세속에서 무한한 권력을 갖는다든지 속권을 교권에 포함시키려는 시도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죄를 범할」(ratione peccati) 경우에는 언제든지 자신이 나서서 왕들을 견책 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교황의 세계지배

 

인노첸시오는 자신의 이러한 이념을 실현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먼저 그동안 독일의 호헨슈타우펜 왕가의 황제들에 의해 몹시 제한되었던 로마와 교황령에 대한 교황의 통치를 위해 전력을 다했다. 합병이 가능한 지역은 교황령으로 합병 시켰고 교황령 전체에 대해 효율적이고 치밀한 행정제도를 도입했다. 그래서 진정한 교황령의 건설자로 불리기도 한다.

 

인노첸시오는 같은 입장에서 독일에서 왕위다툼이 일어났을 때 교황은 후보자의 자격을 조사한 다음 이를 승인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고 양측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교황수위권의 인정을 받아냈다.

 

교황은 처음에 확장된 교황령과 시칠리아에 대한 교황의 봉토 주권의 승인, 성직서임권 포기 등을 약속으로 오토 4세를 인정하였으나 오토가 교황으로부터 황제의 제관을 받은 후 약속을 어기고 시칠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고 나서자 그를 파문했다. 이어 인노첸시오 3세는 하인리히 6세의 아들 프레드리히 2세를 등용시켰다. 교황의 이러한 시칠리아 정책은 교황권을 독일제국에 속한 주교로 국한시키지 않고 보편적 지배권을 행사하려는 일련의 노력이었다.

 

또한 영국 존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테파노 랭턴을 캔터버리의 대주교로 임명하고 이를 거부한 왕에게 파문과 영국내의 성무집행 정지를 통해 왕의 순명을 이끌어 내고 영국을 교황봉토로 삼았다. 이밖에도 부당하게 재혼한 프랑스 왕에 대한 파문, 근친결혼한 스페인 왕에 대한 파문, 왕위 다툼이 일어난 나라들에 대한 중재 등으로 아라곤, 포르투갈, 덴마크, 폴란드, 보헤미아, 헝가리 등이 교황의 주권을 시인함으로써 국가의 왕이 그들의 국토를 교황으로부터 봉토로 받은 셈이 됐다. 이처럼 교황의 영향력이 전 유럽에 미치게 됨으로써 마치 교황이 「왕관의 분배자」처럼 여겨졌다.

 

인노첸시오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의 사명감은 정통신앙을 유지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교황은 이교도들의 손에서 성지를 회복하기 위해 제4차 십자군을 조직했으며 카타리 이단으로부터 신앙을 지키기 위해 알비십자군을 조직하고 탁발수도회를 승인했다. 또한 가장 큰 업적 중 하나인 제4차 라테란공의회를 소집해 교회를 내적으로 개혁하고 쇄신시켰다.

 

인노첸시오 3세에 있어 세상은 하나의 위계제도, 곧 거룩한 질서로 이해됐다. 따라서 이 질서가 죄에 얽매인 사람과 죄의 이유로 교란될 때 언제나 간섭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고 이를 실천했다. 그러나 이러한 권력은 남용되고 오용될 위험이 컸고 실제로 교회가 권력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해 아픔을 겪기도 했다.

 

[가톨릭신문, 2002년 5월 12일, 김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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