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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사목] 아버지 여정: 아버지의 술잔엔 눈물이 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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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2-06 ㅣ No.606

[아버지 여정] “아버지의 술잔엔 눈물이 반입니다”


바쁜 사람들도 / 굳센 사람들도 /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 어린것들을 위하여 / 난로에 불을 피우고 /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 바깥은 요란해도 / 아버지는 어린것들에게는 울타리가 된다. / 양심을 지키라고 낮은 음성으로 가르친다. //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 김현승의 시, ‘아버지의 마음’ 중에서

이 시는 아이들의 교과서에도 수록이 되어 널리 읽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불현듯 엉뚱한 생각이 들더군요. 정작 아이들은 이 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요? 제가 한번 우리 자녀들의 입장에서 시를 재구성해 보았습니다. 제목은 ‘자녀의 마음’입니다.

아버지는 바빠서 얼굴 보기도 힘들다. / 아버지는 굳세서 도무지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 아버지는 바람과 같아서 주말만 되면 사라진다. / 집에 돌아오면 이래라저래라 아버지로서 생색내기 바쁘다. // 나의 마음이나 생활에는 별 관심도 없고 / 말없이 자기 일에만 집중한다. // 정작 자신은 능력도 없으면서 바깥 세상에 대해 한탄만 하고 / 정작 자신은 모범도 보이지 않으면서 양심을 지키라고 무서운 목소리로 가르친다. // 아버지는 바늘로 찔러도 눈물 한 방울 안 나올 사람이다. /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 절반이다. / 아버지는 나에게 가장 괴로운 사람이다.

이 글의 ‘아버지’를 ‘남편’으로 바꿔서 읽으면 ‘아내의 마음’이라는 또 하나의 시가 어렵지 않게 만들어집니다. 결국 아버지는 가족에게 가장 괴로운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슬픈 자화상을 발견합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21세기 정보화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아버지의 모습이 요구된다고 으름장을 놓습니다. 최근 들어 급증하고 있는 각종 가정문제의 핵심은 ‘아버지의 부재’라고들 말합니다. 세상은 정말 빠른 속도로 바뀌어갑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아버지들은 그 변화의 속도에 발맞춰 나가기가 버겁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소리 높여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아버지들 때문이야!” “그동안 아버지들이 잘못했어!” “아버지들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해야 해!” “아버지들이 가정으로 돌아와야 해!” “아버지들이 확 바뀌지 않으면 안 돼!”

그렇다면 지금 이 땅의 아버지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객관식으로 보기를 드리겠습니다.

① 신랄한 비난과 질책 ② 따끔한 체벌 ③ 변화를 약속하는 각서 ④ 따뜻한 위로와 격려

혹시 알고 계십니까? 아버지라는 존재는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감당하기 힘든 삶의 무게를 묵묵히 짊어지고 살아간다는 것을, 겉으로는 태연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허무감으로 괴로워한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가족을 사랑하지만 그 사랑을 표현하는 데 서툴고 어색함을 느낀다는 것을, 남모르는 두려움과 외로움으로 보이지 않는 눈물을 흘린다는 것을, 그래서 이런 아버지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따뜻한 위로와 격려라는 것을….

사실 우리 아버지들은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온 죄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아버지가 그렇게 살아왔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자리에서 죽을 힘을 다해 살아가고 있건만 가족들은 하루하루 멀어져만 갑니다. 이 세상 모든 아버지들은 가족으로부터 좋은 아버지라는 말을 듣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어떤 아버지가 좋은 아버지인지, 어떻게 하면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학교에서도 이를 가르쳐주지 않았고, 그렇다고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직접 보고 배울 수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남자가 된다는 것의 정확한 의미는 책임을 진다는 것입니다. - 생텍쥐페리

마찬가지로 ‘아버지’가 된다는 것의 정확한 의미는 책임을 진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사랑하는 자녀들의 부모로서 책임을 다하는 것을 의미하고, 사랑하는 아내의 남편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것을 의미하며, 한 가정의 가장인 나 자신 스스로에게 책임을 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이가 마흔이 되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나이가 마흔이 되면 사랑하는 자녀와 아내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가족의 얼굴은 내 삶의 성적표입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는 가족과 나 자신의 얼굴에 얼마나 책임을 지며 살아가고 있는지 끊임없이 성찰해야 합니다.

대한민국 아버지들의 술잔에는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입니다. 그 눈물의 다른 이름은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입니다. 우리 아버지들은 지금껏 각박하고 살벌한 경쟁사회 속에서 살아남으려고 앞만 보며 달려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족을 위한 유일한 사랑법이라고 느껴왔는지도 모릅니다.

앞으로 다달이 좋은 아버지가 되고자 하는 구체적인 방법들을 주제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나가 보려 합니다. 저 역시도 세 아이를 둔 평범한 아버지입니다. 사실 저 자신도 스스로를 좋은 아버지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좋은 아버지가 되려고 부단히 노력하며 공부하고 있습니다.

가슴에만 담아두는 사랑이 아닌 표현하는 사랑, 머리로만 생각하는 사랑이 아닌 실천하는 사랑, 미래에 존재할 사랑이 아닌 지금 이 순간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아버지들이 많아지면 참 좋겠습니다. 2012년 임진년은 어느 유행가의 가사처럼, 이젠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 권혁주 라자로 - 서울대교구 사목국 가정사목부, 가족관계 프로그램 개발 연구원. 그동안 서울대교구 혼인강좌, 부부여정, 아버지여정 등의 프로그램을 개발하였다.

* 하귀분 로사 - 화가. 서울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며, 서울가톨릭미술가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다수의 개인전과 단체전을 했으며 서울시립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경향잡지, 2012년 1월호, 글 권혁주 · 그림 하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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