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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과이 아순시온: 남미의 심장 파라과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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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11-20 ㅣ No.183

[해외 한인 공동체 소식] 파라과이 아순시온 - ‘남미의 심장’ 파라과이에서


파라과이를 아십니까? 많은 사람들은 낯설어 하겠지요. 파라과이는 브라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에 둘러싸인 내륙국으로 ‘남미의 심장’이라 불리는 나라입니다. 영화 ‘미션’을 한 번쯤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영화의 주제곡 ‘넬라 판타지아’의 아름다운 선율이 울려 퍼지는 이구아수 폭포는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브라질의 국경에 있어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죠.

파라과이의 면적은 49만 6,752km2 로, 한반도보다 2배가량 큽니다. 인구는 약 600만 명이고, 파라과이 주민은 인디언 과라니족과 스페인계의 혼혈인 메스티소가 인구의 96%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언어는 스페인어와 인디언 언어인 과라니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서반구의 나라 가운데 유일하게 인디언 언어(과라니어)를 국가의 공식어로 갖고 있는 나라입니다.

파라과이에 거주하는 한인은 2009년 7월 현재 5,229명입니다(외교통상부 집계). 파라과이에 한인이 정착한 것은 공식적으로 1965년부터입니다. 정부에 농장 부지 구입대금 150불을 지불하고 온 순수 영농목적의 이민이었습니다. 46년이 지난 지금 파라과이의 한인들은 대개 제조업과 상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파라과이에 하나뿐인 한인 성당

한인 성당으로는 파라과이에서 유일한 성 남종삼 요한 성당은 1965년 4월 23일 파라과이 제1차 이민(35세대 총 95명)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초기 정착 단계까지는 열심한 신자 일부가 각자 주변 현지인 성당에서 미사 참례를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68년 스페인 발렌시아 출신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미로 신부님이 살레시아노 성당에 계실 때, 몇몇 한인 이민자들이 주일미사에 참석하는 것을 보시고는 스페인어를 조금 구사할 줄 아는 소녀와 이야기를 나누시면서, 미사 참석은 하는데 왜 고해성사를 안 보는지 물으셨습니다. 그 소녀는 의사소통이 안 되기 때문이라고 답하였답니다. 이에 신부님은 하느님께서는 한국어도 아시니 한국어로 고해성사를 보라 하셨고, 그다음 주에 이 소녀는 가족과 고해성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계기로 한인 신자들이 모이게 되었고 레지오 쁘레시디움을 창단하기까지 이르렀습니다. 신부님은 한국말로 된 죄의 목록표를 작성하여 한인들이 고해성사 때 그 표에서 해당 항목을 지적하면 신부님은 그 옆의 통역본을 보시고 보속을 주실 수 있었습니다. 열심히 노력하신 끝에 미로 신부님이 한국어를 간신히 읽으시게 되면서 교구청의 허락을 받아 한국어로 미사를 집전하게 되었고, 이렇게 하여 한인 공동체 미사가 생겨났습니다.


먼 길을 와주신 김수환 추기경님

1969년 10월, 미로 신부님이 건강상 이유로 스페인으로 돌아가시면서 한인 공동체 미사는 중단되었습니다. 그 뒤 하느님의 섭리로 미로 신부님이 건강을 회복하시고 다시 파라과이로 오셨을 때, 몇몇의 신자들이 신부님을 찾아가 다시 한국어 미사를 집전하여 주시도록 부탁하였습니다. 그러나 미로 신부님은 한국어를 잊어버렸고 미사 전례서도 없다고 거절하셨습니다.

이에 신자들은 포기하지 않고 한국어 책자와 전례서를 가져가 다시 요청하였으나, 이번에는 신자 수가 적으면 미사를 집전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전체 한인 가톨릭 신자들을 모아보라 하셨는데, 그다음 주일에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약 150명의 신자가 모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미로 신부님은 흔쾌히 승낙하시고 다시 한국어를 익혀 한인들을 위한 미사를 집전하셨습니다. 1976년의 일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공동체는 한인 천주교회 간판을 세웠고, 1980년에는 예수회 진성만 베드로 신부님께서 부임하셨습니다(1983년 2월까지 재임). 그 뒤 ‘시우닷 델 에스테’라는 국경도시에 공소를 설립하였고, 가톨릭 회관 개관 축하미사도 거행하였습니다. 또한 1982년 7월 22일에는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사목방문을 해주셔서 환영미사와 견진성사를 가졌습니다.


본당 승격과 성전 봉헌

1985년 4월에는 약 30년 동안 한국 살레시오회 소속으로 선교 활동을 하시다가 파라과이로 선교지를 옮기신 스페인 출신의 민정식 라파엘 신부님이 부임하셨습니다(2002년 9월까지 재임). 먼 나라에서 오셔서 모든 것이 어색하고 색다른 환경임에도 민 신부님께서는 우리 공동체를 위해 애써주시고 우리만의 공간을 만들어주시려고 본격적으로 활동하셨습니다. 본당 부지 구입부터 시작해서 성전 축대 공사, 가톨릭센터 공사 착수까지 일일이 돌보셨습니다.

마침내 1987년 9월 13일에 저희 공동체가 본당으로 승격되었습니다. 그리고 2년 뒤에는 또 다른 국경도시 ‘페드로 후안 카바예로’에 공소를 설립하였습니다. 성전 건축을 위한 사업은 계속되었고 전 신자들은 성전 건축기금 마련, 묵주기도 5만 단 바치기 운동 외에도 많은 활동으로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1992년 3월 21일 모든 신자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성전 봉헌식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저희 공동체를 방문해 주신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이 봉헌식을 집전해 주셨습니다. 1999년 7월 11일에는 가톨릭센터도 개관식을 가졌고 유치원도 개원하였습니다. 그 뒤 교민 숫자가 줄어드는 바람에 유치원은 휴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우리 공동체는 많은 단체를 만들어가면서 더욱더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에게도 어려움이라는 것이 찾아왔고 그 많은 어려움 가운데 민정식 라파엘 신부님께서는 우리 공동체를 떠나셨습니다. 그 뒤로 한동안 본당신부님 없이 카를로스 하비에르 미란다 신부님 집전으로 주일미사만 드렸습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하느님의 이끄심으로 지침 없이 신앙생활을 하던 중, 안동교구로부터 신부님들을 저희 공동체에 파견해 주겠다는 아주 기쁜 소식을 받았습니다. 2003년 3월 차광철 베다 신부님께서 부임하셨고(2006년 1월까지 재임), 이어서 안영배 사도 요한 신부님(2010년 2월까지 재임), 그리고 2010년 3월부터 지금까지는 양호준 델피노 신부님께서 본당신부님으로 계십니다.


이 모든 일을 이루신 하느님께 감사

우리 본당에는 주일학교와 교사회, 청년회를 비롯하여, 레지오 마리애(무염시태 꾸리아와 11개 쁘레시디움), 빈첸시오회, 전례부, 성가대, 복사단, 연령회, 성모회, 학부모회, 그리고 구역별로 모이는 반모임도 있습니다.

이 단체들이 개최하는 여러 행사가 있지만, 그 가운데 2009년부터 시작하여 올해로 세 번째인 ‘어린이에게 생명을’이라는 사회복지 바자회가 있습니다. 이 바자회는 영양실조나 질병으로 죽어가는 가난한 어린이 환자들에게 수술과 치료, 의약품을 지원해 주는 사업입니다. 이 행사를 통해 나보다 더 어려운 처지의 이웃을 생각하고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과 사랑을
전하고자 합니다.

또 다른 자랑거리는 본당 주보성인의 이름을 따서 만든 저희 주일학교 중고등부 학생들의 ‘요한제’입니다. 요한제는 학생들이 몇 개월 전부터 노래, 춤, 연극, 광고 등을 준비하여 저희 공동체뿐만 아니라 많은 교민들 앞에 발표하는 자리입니다.

지난 시간들을 뒤돌아보면 이민 초기 때부터 힘든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공동체는 모든 역경을 잘 극복하고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봅니다. 이 모든 일을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 서병주 알베르토 - 파라과이 아순시온 성 남종삼 요한 본당 신자이며, 현재 청년회 회장으로 봉사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1년 11월호, 서병주 알베르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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