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8일 (목)
(백) 부활 제3주간 목요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수도 ㅣ 봉헌생활

봉쇄의 울타리에서: 봉쇄 울타리 안의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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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10-30 ㅣ No.628

[봉쇄의 울타리에서] 봉쇄 울타리 안의 이야기들

 

 

“내가 ‘성도’는 알겠는데 ‘미니코’는 뭐신겨?”

 

수도원 마당에 들어서던 어르신이 ‘성도미니코회 수도원’이라는 문패를 보고 한 말이다. 우리 수도원이 자리한 이곳 배론은 박해 시대에 신앙 선조들이 숨어들어 살며 이루어진 산골 교우촌이다. 배 밑바닥 모양의 첩첩산중 한 편에서 순교자들의 삶을 본받으며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관상 봉쇄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해 보려 한다.

 

 

이야기 하나, ‘일상의 행복’

 

수도원에 들어와 생활하다 보면 모두가 한결같이 이야기하는 것이 있다.

 

“이게 이렇게 재미있는 줄 진작 알았으면 밖에 있었을 때 열심히 할 걸….”

 

사실 대단한 일은 아니다. 설거지하는 것도 재미있고, 화장실 청소하는 것도, 구멍 난 양말을 깁는 것도 재미있다. ‘하느님’과 ‘자매들’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 예수님께서 일깨워 주신 한 분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가장 큰 계명이 일상에서 너무나도 구체적이고 재미있게 실현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계시니 삶이 의미 있고 행복하다. 이 행복을 모두와 나누고 싶은 갈망이 커져 기도 안에서 이 세상 모든 이를 하느님에게로 초대하게 된다.

 

 

이야기 둘, ‘봉선화 꽃이 피었습니다’

 

수도원 구석구석엔 꽃이 많다. 야생화도 피고 동료 수녀들 얼굴에 미소 꽃을 피워 주려는 부지런한 손들이 정원을 가꾸기 때문이다. 한 해는 봉선화 씨앗을 얻어서 뿌렸는데 10개 남짓 싹이 났다. 꽃이 피기 시작할 무렵 장마가 시작되었다.

 

유난히 길었던 그해 장맛비와 싸우던 봉선화는 결국 다 뭉그러졌다. 모두가 그게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듬해 봄, 그 자리에 봉선화 새싹 수십 개가 올라왔다. 그다음 해에는 수백 개가 꽃을 피워 이젠 수도원 곳곳에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도 활짝 꽃을 피운 수많은 봉선화를 보고 있다.

 

이 세상에도 저런 봉선화 같은 수많은 사람의 삶이 존재한다. 타인을 위해 봉사하고 자신을 희생하며 살아가는 숨은 이들. 당장은 녹아서 꽃도 열매도 맺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 같지만, 그들이 있기에 이 세상은 점점 아름답고 풍성한 꽃밭이 되어 간다. 우리 수녀들의 삶도 그 봉선화 무리에 들기를 갈망하며 오늘도 봉쇄 안에서 하느님을 향해 미소 짓는다.

 

 

이야기 셋, ‘접시에 사랑을 그리다’

 

점심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수녀들이 식당으로 모인다. 침묵 중에 조용히 들어오지만, 모두의 눈은 식탁에 놓인 자신의 접시에 가 있다. 수녀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오늘의 메뉴는 오므라이스. 볶음밥 위에 달걀을 얇게 부쳐서 동그랗게 씌워 놓고, 또 그 위에 빨간 케첩으로 하트를 그려 놓았다. 바삐 음식을 준비하면서도 동료 수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렇듯 ‘사랑 고백’(?)을 한 주방 당번 수녀의 마음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사랑은 표현하는 것이다. 꼭 말로 하지 않아도 마음을 전하는 방법은 무수하다. 스쳐 지나가는 작은 미소 한 번, 누군가를 기억해 주는 꽃 한 송이, 무거운 짐을 같이 들어 주는 손동작 한번이 ‘당신은 소중합니다.’ ‘당신은 사랑받고 있습니다.’라는 확신을 전달해 준다.

 

이 세상엔 남이 없다. 만나는 사람과 장소가 한정된 봉쇄 공동체 안에서 이런 얘기를 하면 무슨 소용이 있나 싶겠지만, 하느님을 사랑하고 내 옆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지상을 순례하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하고 위대한 일이다. 하느님의 마음으로 사랑할 때 그 사랑은 아주 멀리까지 퍼져 나간다는 믿음이 있기에 봉쇄 관상의 삶이 뜻깊다.

 

 

이야기 넷, ‘땅콩을 던지다’

 

수도원 담장 안에 아담한 밭이 있다. 흙을 만지는 일은 참 좋다. 가지와 피망, 상추, 쑥갓, 깻잎, 호박, 완두콩, 시금치 등 다양한 채소가 자라는 모습을 보며, 모든 피조물을 가꾸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자주 느낀다. 그런데 우리 수녀들보다도 더 큰 관심을 가지고 밭을 살피는 녀석들이 있는데 바로 꿩 가족이다.

 

이 녀석들이 밭의 반을 차지하는 땅콩에 맛을 들이더니 이제는 아예 이사를 와서 수도원 안에 자리를 잡았다. 첫해 수확기에는 조금만 먹더니 해가 갈수록 대담해져서 이젠 땅콩을 심기가 무섭게 파헤치기 시작했다. 잡자니 불쌍해서 그렇게는 못하고, 울타리도 치고 독수리 허수아비도 매달아 놓는 등 여러 방법을 강구해 보았지만, 꿩들은 해가 갈수록 더 토실토실해졌다.

 

원장 수녀님은 수확의 30%는 벌레, 동물들과 나누어 먹는 거라고 하시지만, 밭 담당 수녀들의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꿩들이 흙을 다 파헤쳐 놓아서 날마다 땅콩 뿌리에 흙을 다시 덮어 주는 일이 더 늘었고, 다른 땅콩들도 잘 안 익는 것 같다고 볼멘소리로 말한다.

 

그래도 땅콩을 어느 정도 수확하고 추석을 맞았다. 이번 명절엔 특별한 놀이를 준비했다. 이름하여 ‘땅콩 먹는 동물 맞추기’. 사자와 개구리, 닭, 토끼, 고양이, 개 등 여러 동물 그림을 세워 놓고 땅콩으로 맞춰 쓰러뜨리는 놀이였다. 그중에 꿩도 있었다. “저놈의 꿩!” 밭 담당 수녀들의 땅콩 던지는 손놀림이 남다르다. 꿩이 땅콩에 맞아 쓰러질 때마다 몇 년간 받았던 스트레스가 함께 날아간 듯 보였다. 어떻게든 쌓인 감정은 해소해야 한다고 하지 않던가!

 

살다 보면 내 옆 사람이 꿩처럼 보일 때가 있다. 함께 살긴 해야겠는데 꿩처럼 얄밉게 굴어 피하고 싶어진다. 그런데 수도원 안에서 어디로 도망가겠는가?

 

수도원 밖일지라도 사회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겐 꿩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피할 수 없는 주변 사람이 어디나 있을 것이다. 그럴 때면 우리 수녀들의 놀이를 권하고 싶다. “주님, 저 인간을 축복하소서!”라고 땅콩 대신 화살기도를 날리는 것이다. 명중하면 꿩의 탈은 벗겨지고 다시 하느님의 사랑을 듬뿍 받는 자녀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된다.

 

어떨 땐 화살을 수십 개 날려도 모자랄 것이다. 그렇지만 늘 효과는 있다. 화살을 힘껏 날릴수록 팔 힘은 더 길러지고 적중률도 높아진다.

 

‘나도 날마다 수없이 많은 땅콩 세례를 받고 있겠지.’ 이런 생각이 들어 비시시 웃게 된다. 이것이 우리 수녀들이 함께 살아가는 즐거운 비결인가 보다.

 

[경향잡지, 2019년 10월호, 윤세레나 예수의 마리아(사그라리오 도미니코회 천주의 모친 봉쇄 수도원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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