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 ㅣ 봉헌생활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7-12 ㅣ No.691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상)


삼위일체의 사랑… 보편적 선교에 투신

 

 

- 창립자 복자 마리 드 라 빠시옹.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는 복자 마리 드 라 빠시옹(Marie de la Passion, ‘수난의 마리아’, 1839~1904)이 창립한 국제 수도회다. 세계 선교를 목적으로 설립된 최초의 여자 수도회로서 교황 비오 9세의 인가를 받아 1877년 1월 6일에 창립됐다.

 

수녀회 회헌은 첫 머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되어 당신의 백성을 이루기를 원하신다. 이 때문에 성부는 우리 모두가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변모되도록 우리를 부르신다.”

 

회헌이 이르듯,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는 하느님의 사랑에 의해 불려 성체조배와 인류복음화에 바쳐진 선교수도회다. 그래서 회원들은 사랑 때문에 당신의 몸을 남기신 예수님의 성체를 조배하면서 그분의 생애를 관상하고 세상의 복음화를 위한 사명에 초대된다.

 

삼위일체의 사랑에서 샘솟는 보편적 선교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교회의 본질적 정체성이자 소명이다. 수녀회는 그래서 하느님의 계획에 자신을 온전히 개방함으로써 인류의 어머니가 되신 마리아처럼, 모든 경계를 뛰어넘는 보편적 선교에 투신한다.

 

수녀회는 구세주의 어머니이자 인류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길을 따른다. 오직 아버지의 뜻에 스스로를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와 똑같이, 자신의 전 생애를 “예!”로 응답한 마리아의 온전한 순명과 신앙은 수도자들이 성소를 살아가는 근본적인 신앙의 태도를 보여준다.

 

동시에 자발적이고 기쁜 가난의 삶을 살았던 프란치스코 성인은 마리아와 같은, 또 하나의 성소의 길의 모범이다. 회헌 52항은 이렇게 말한다.

 

“프란치스코처럼 우리도 더 큰 사랑을 위하여 가난의 삶을 선택한다. 가난은 우리를 해방시켜주고 하느님께로 온전히 개방시켜준다. 가난은 우리로 하여금 작은 자가 되게 하고 서로 형제가 되게 하며 또한 우리 자신들의 한계를 받아들이게 한다.”

 

복자 마리 드 라 빠시옹은 1839년 5월 21일 프랑스 낭트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16세에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너를 더 사랑할 것”이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고, 1860년 12월 글라라회에 입회했다. 이듬해 1월 23일 낭트의 글라라회 수녀원에서 복자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의 제물인 마리아’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축성하라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다.

 

엄청난 영적 체험 이후 병을 얻고 수녀원을 떠난 복자는 1864년 ‘속죄회’에 입회하고 인도의 선교사로 파견돼 선교지의 관구장으로 임명된다.

 

하지만 선교지의 복잡한 상황과 본부와의 어려운 통신 사정으로 인한 오해와 갈등으로 선교지의 수도자 20명은 속죄회를 떠나야 했다. 이들은 1877년 1월 6일, 교황 비오 9세의 인준을 받아 마리아의 전교자회를 창립했다. 그리고 1885년에 프란치스코 수도3회에 가입,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로 불리게 된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2년 7월 10일, 박영호 기자]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중)


지구촌 곳곳 복음 선포에 헌신

 

 

-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직접 방문해 돌보는 수녀들의 모습.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제공.

 

 

세계 선교를 목적으로 1877년 1월 6일 창립된 마리아의 전교자회는 1885년 회원 전체가 프란치스코 수도3회에 가입했다. 이에 따라 레오 13세 교황의 승인을 받아 ‘마라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로 수도회 이름을 변경하고 1896년 회헌을 인가받았다.

 

수녀회는 창립 석 달 만에 프랑스를 시작으로 아프리카와 아시아, 유럽 등으로 활발하게 진출했다. 여기에는 스리랑카와 중국, 영국과 스위스 등이 포함된다. 1904년까지 전 세계 26개국에 모두 3000여 명의 수녀들을 파견해 학교와 병원, 무료 진료소, 기숙사, 양로원 등 각 지역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사도직을 실천하면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했다.

 

수녀회의 활발한 세계 선교의 노력은 1886년 중국에 진출했다가 순교한 7명의 수녀들에 의해 드러난다. 1900년 의화단 사건으로 순교한 예수의 마리아 에르민 수녀 등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소속 수녀 7명은 1946년 비오 9세 교황에 의해 시복됐고, 이어 2001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성됐다.

 

이후 73개 나라에서 국제적, 다문화적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고 있다. 현재 79개 국적의 5700여 명의 회원들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지구촌 어디든지 나아갈 각오를 지닌 선교사로서 복음 선포에 헌신하고 있다.

 

수녀회가 한국에 처음으로 진출한 것은 1958년 6월이다. 일본에서 입회한 한국인 수녀 6명을 포함해 11명의 수녀가 당시 부산대목구장 최재선(요한) 주교 요청으로 한국에 진출하게 된다. 수녀회는 1960년 5월 부산 양정동에 수녀원을 건립하고, 성모여자중고등학교를 열고 성모의원을 개원했다.

 

다양한 사도직 활동을 통해 항상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가운데 머물고 있는 수녀회는 현재 서울 가리봉동에 본원을 두고 있다. 1978년 독립 관구로 승격된 수녀회 한국 관구는 현재 21개 공동체에서 모두 160여 명의 수녀가 활동하고 있으며, 23개국에 30여 명의 수녀를 선교사로 파견했다.

 

전 세계적인 선교 수도회로 성장한 수녀회의 영적인 힘은 조건 없는 순명의 모범인 마리아의 자세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보여준 ‘작은 자’의 영성이다. ‘주님의 종’임을 고백한 성모 마리아의 모범, 그리고 단순하고 소박한 삶으로 가난의 영성을 전한 프란치스코 성인의 정신은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헌신적 봉사의 삶을 살도록 회원들을 이끈다.

 

수녀회는 국내에서 교육과 의료사업, 사회복지 분야의 다양한 사도직 활동을 통해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하며 그들을 돌보기 위해 힘쓰고 있으며, 1981년 프랑스와 콜롬비아를 시작으로 북미와 중남미, 아프리카 등 세계 각 지역으로 30명 이상의 수녀들을 선교사로 파견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2년 7월 17일, 박영호 기자]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하)


국내 21개 공동체 160여 명 활동

 

 

- 경상북도 상주시 ‘나눔의 집’에서 무료급식을 하고 있는 수녀들의 모습.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제공.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한국관구는 1978년 독립 관구로 승격돼 현재 21개 공동체에서 총 160여 명의 수녀가 활동하고 있다. 수녀회는 세계 선교회로서의 면모에 걸맞게 해외 선교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1981년 프랑스와 콜롬비아 선교를 시작으로 현재 전 세계 23개국에 30여 명의 수녀들이 선교사로 파견돼 있다.

 

수녀회는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선교사로서, 이 시대의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파견하고 있다. 수녀회는 회헌 5항에서 선언하듯, “겸손하고 가난하신 그리스도를 따라 단순함과 평화와 기쁨으로 세상 가운데서 복음을 생활하면서 프란치스칸 방법으로 소명을 실현”하고 있다.

 

1958년 한국에 진출해 교육 및 의료사업을 펼친 수녀회 사도직은 해외 선교 외에 행려자와 무의탁 노인복지, 근로 및 여성복지, 지역민들을 위한 종합복지, 도시빈민과 농촌, 탄광지역민들을 위한 복지 등 매우 다양하다.

 

수녀회의 한국 진출 초기에는 교육과 의료 사업에 초점을 두고, 성모여중고등학교를 설립해 운영했고, 1960년에는 부산 양정동 수녀원 내에 ‘성모의원’을 개원, 15년 동안 지역민들을 위한 의료 봉사를 했다. 이후 강원도 정선에 ‘성 프란치스코 의원’을 개원했다.

 

행려자와 무의탁 노인복지와 관련해, 1991년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 내에 ‘정하상 바오로의 집’, 천호동본당 인근 ‘강동 프란치스코의 집’, 안동 ‘요셉의 집’ 등을 운영, 행려자와 노인들에게 무료급식을 했다. 1992년에는 무의탁 노인들을 위한 ‘글라라의 집’을 운영하기 시작했고, 프란치스코 요양원과 산청 성심원에도 수녀들을 파견했다.

 

1977년에는 수녀회 설립 100주년을 맞아 서울 구로공단 인근에 공단 여성 근로자 1000여 명을 수용하는 기숙사를 설립했고, 서울 천호동 윤락지대에 ‘소냐의 집’을 마련해 성매매 여성들의 사회복귀를 돕기도 했다. 가출청소녀 단기보호소 ‘희망의 샘’ 쉼자리와 ‘마리스타 야간학교’도 운영했다. 부산지역에서는 1996년부터 부산교구 위탁으로 부산 당감종합사회복지관을 운영하고 있다.

 

이농현상이 급증하는 농촌을 위해 1980년대 중반부터 농촌 공소 사도직을 시작해 농민들과 함께 농사를 짓고 농한기에는 신자 재교육에 힘쓰는 한편 비신자들을 위한 한글교실과 노인학교를 운영했다.

 

이처럼 우리 사회의 가난하고 소외된 지역을 중심으로 다양한 사도직 활동을 펼쳐온 수녀회는 사회적 변화와 시대적 요청에 따라 지금도 왕성한 사도직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1996년 이후 JPIC위원회를 구성, 교육과 의식화,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과 연대, JPIC 정신의 구체적인 실천 방안들을 제안하고 촉진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2년 7월 24일, 박영호 기자]



780 1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