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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51: 제4차 라테란 공의회 - 교회개혁 위한 70조항 반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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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1-07 ㅣ No.242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51) 제4차 라테란 공의회 - 교회개혁 위한 70조항 반포

 

 

- 라테란 대성당 : 라테란 공의회가 개최된 로마의 라테란 대성당.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시 사용했다고 하는 식탁이 보존되어 있어 교황의 성 목요일 만찬미사는 이곳에서 봉헌된다.

 

 

영원의 도시 로마 순례의 백미는 역시 4대성당이다. 중세 건축예술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는 이들 4대성당들은 로마를 순례하는 개신교 신자들이나 가이드들에 의해 그 웅장함과 화려함으로 인해 가톨릭 공격의 좋은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당시 신앙의 열정과 예술로 승화된 신앙심을 볼 수 있는 걸작들이다.

 

그중에서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증한 라테란 대성당은 1309년 교황이 아비뇽으로 옮겨갈 때까지 1000년간 모든 교황들의 대관식과 착좌식이 거행된 곳이며 선종후 이곳에 묻힘으로써 「교황의 성당」으로도 불린다. 라테란 대성당은 324년 실베스텔 1세 교황에 의해 구세주 그리스도께 봉헌되었다가 898년 지진으로 붕괴된 후 이를 재건한 셀지오 3세 교황이 세례자 요한에게 봉헌했고 12세기에 와서 루치오 2세 교황이 다시 사도 요한에게 봉헌해 지금은 「성 요한 대성당」으로 불린다. 세계공의회는 모두 21차례 개최됐는데 교리의 정립기라 할 1회부터 8회까지는 동방교회 지역에서 개최됐고 이 라테란 대성당에서 9회 공의회가 개최 된 이후에는 모두 서방지역에서 개최됐다. 라테란 공의회는 모두 다섯 차례 개최됐는데 그 중에서도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이 소집한 제4차 공의회가 가장 중요하다.

 

 

배경과 경과

 

제4차 라테란 공의회는 12차 세계 공의회로 트리엔트 공의회 이전의 중세 공의회 중 가장 중요한 공의회로 「대 라테란 공의회」 혹은 「대 공의회」로 불렸다.

 

당시 교회는 성지 탈환과 교회 재일치라는 큰 포부를 안고 떠난 4차 십자군이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돌아온 상태였고 알비파와 피오레의 요아킴 수도원장의 이단들이 성행한 시기였다. 뿐만 아니라 독일의 프레드리히 2세에 대한 서방의 황제로의 승인문제, 교황이 임명한 캔터베리 대주교를 거부한 영국의 존왕 문제 등의 정치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

 

또한 교회 내부적으로는 아직도 성직매매가 완전히 근절되지 않았고 성직자들의 문란한 생활도 계속된 상태였다. 따라서 교황은 여러 그리스도 국가에서 발생한 분쟁들을 해결한 뒤에 일치를 도모한 후 이스라엘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 운동을 더욱 효과적으로 추진하여 교회 전체의 개혁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신앙으로 일치된 서구 사회의 지도자로 자처한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자신의 이러한 소임을 공의회를 통해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교황은 스스로 공의회 소집 이유를 『교회 내의 모든 결점을 제거하고 성덕을 심으며,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윤리를 쇄신하며, 이단을 제거하고 신앙을 굳건히 하며, 불화를 없애고 평화를 정착시키고 압제를 없애고 자유를 신장하며, 모든 제후들과 신자들이 성지를 돕게 하기 위해서 공의회를 소집한다』고 밝혔다.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1213년 4월 19일 공의회 개최를 선언하고 보다 보편적인 공의회가 되게하기 위해 동서방의 모든 주교들과 성직자 및 그리스도교 국가의 제왕들에게 초대장을 보냈다. 2년간의 준비 끝에 1215년 11월 11일 400명 이상의 주교들을 비롯하여 각국의 사절 등 8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라테란 대성당에서 공의회가 개최됐다. 교황의 개회사에 이어 예루살렘 총대주교는 이스라엘 성지의 불행한 상황을 설명하는 동시에 프랑스 남부 지방에서 일어난 알비파 이단에 대해 연설했다. 이 두가지문제는 공의회의 중점 논의사항이 됐다.

 

11월 30일까지 3번의 회기로 나뉘어 개최된 공의회는 처음에 공의회를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하려는 군주들의 갈등으로 힘들게 진행됐으나 결국 70조항에 이르는 공식문헌과 1217년 6월 1일 십자군을 출발시킨다는 십자군에 관한 교령이 발표됐다. 공의회에서 결정된 개혁 규정들은 교회를 내적으로 쇄신시키는데 크게 기여했고 오랫동안 후대 관구 교회회의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결의 내용

 

70개 조항으로 이뤄진 공의회 공식문헌은 교회의 개혁과 정비라는 당시 교회의 과제에 대한 범교회적 의견의 일치를 이끌어 낸 결론이었다.

 

공의회는 그 개최 배경에서 보듯 개인의 영성 보다는 교회 조직에 대한 지침의 필요성에서 개최됐으므로 먼저 교회 조직의 생활지침을 다루고 있다. 해당지역의 사목적 유익을 위해 개최되는 지역공의회에 대한 지침을 정하는 한편 수도회는 3년마다 정기 총회를 개최하여 수도회 내의 문제들을 점검하고 개혁 조치들을 하도록 명했다. 또한 지나치게 많은 수도회의 설립으로 인한 혼란을 우려해 새로운 수도회 설립을 금하기도 했다.

 

교회 조직에 대한 지침에 뒤이어지는 것은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생활에 관한 지침이다. 정결에 위배되는 성직자의 교회록을 박탈하며 술집을 출입하거나 향연장에서 밤을 새는 행위나 평신도 권력자에게 한 충성 서약을 금지시켰다. 또한 주교의 가장 중요한 직무는 설교임을 강조하면서 성직자들을 지혜롭고 열성적으로 돌보면서 성직자들의 잘못을 교정하는데 열성을 다할 것을 권고했다.

 

성직자들에 의한 규범에 이어지는 것이 교회 구성원들에 대한 규정이었다. 모든 신자는 최소한 1년에 한번, 즉 매년 부활대축일에는 반드시 고해성사와 영성체를 해야 할 의무가 규정됐다. 또한 혈통을 보존하고 가문의 부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근친결혼이 빈번하던 시기였으므로 혈족간의 혼인을 금하고 혼인에 있어서 서약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재판을 공평무사하게 처리하도록 하기 위해 15개 조항에 걸쳐 약자들을 보호하고 정당한 재판을 위한 규정들을 만들었다.

 

제4차 라테란 공의회는 이전의 파리 교회회의나 루앙 교회회의 등 지역 교회회의에서 논의되었던 내용을 많이 다루었지만 이들을 성문화하여 반포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지고 있으며 특히 혼인법과 소송법 등 교회의 법적인 측면에서 큰 공헌을 했다.

 

[가톨릭신문, 2002년 5월 19일, 김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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