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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그리스도교 철학자: 오리게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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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5-03 ㅣ No.157

[그리스도교 철학자] 오리게네스


오리게네스의 삶에 대해 전해지는 내용은 그의 가르침에 매료된 교회사가 카이사레아의 에우세비우스(263/4-339/40년)가 전하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그것 역시 상세하지 않고, 유년기와 순교에 대한 내용 등 오류가 있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이름조차 정확하지 않은데 오리게네스 아다만티우스라고 추정됩니다. 이집트 신 가운데 하나인 호로스에서 이름이 유래하는 것으로 미루어 이집트 출신임을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삶과 죽음

오리게네스는 185년경에 알렉산드리아에서 독실한 그리스도인 부모에게서 태어났습니다. 그에게 신앙이 당연시되었던 것은 순교하신 그의 아버지 레오니다스에게서 엿볼 수 있습니다.

오리게네스는 아버지의 순교로 넉넉하지 않은 살림이었으나 영지주의에 심취한 어떤 귀부인의 도움으로 다양한 철학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훗날 이것이 오리게네스를 영지주의자로 의심하는 빌미가 되기도 합니다.

오리게네스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제자였다는 학설도 있지만, 정확히 증명되지는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플라톤주의자로서 신플라톤주의의 창시자라 불리며, 플로티누스의 스승으로 알려진 암모니우스 사카스에게 사사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연으로 오리게네스의 철학은 지극히 신플라톤주의적이며, 이는 자신의 신학적 탐구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러나 플로티누스보다 스무 해 정도 먼저 태어난 오리게네스가 플로티누스의 학파에 몸 담았다기보다는 그 역시 플로티누스와 더불어 스승인 암모니우스와 함께 신플라톤주의를 열어간 철학자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오리게네스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데메트리우스가 후원하던 알렉산드리아의 교리학교에서 203년부터 교수로 일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중 그는 230년에 데메트리우스 주교의 허락 없이 팔레스티나에서 사제품을 받습니다. 이런 이유로 노년에는 알렉산드리아가 아닌, 팔레스티나의 카이사리아로 가서 학교를 설립하고 가르치다가, 데키우스 황제(249-251년)의 박해 때 수감되어 수난을 당하고, 253/4년경에 박해로 허약해진 몸으로 티로에서 순교하게 됩니다.


철학자이자 신학자

고대 그리스도교의 천재적 사상가였던 오리게네스는 이러한 그리스 문화 아래서 플라톤주의와 스토아학파를 수용하고, 당대의 영지주의를 분석하면서 철학적 방법으로 그리스도교의 신앙에 대하여 사유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통하여 모든 가르침을 성경과 연관시키고자 노력한 철학자이자 신학자였습니다.

철학적인 방법을 썼지만 오리게네스는 신학자였습니다. 어쩌면 처음으로 조직신학을 철학의 도움으로 전개시킨 신학자라고 소개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그 덕분에 그리스도교는 학문적 신학의 형태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것이 의미를 갖는 이유는 그리스도교 사상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여기에그리스도교 철학자로서의 오리게네스의 위대함과 의의가 있다고 보겠습니다.


저작들과 논쟁거리

2,000편에 달하는 오리게네스의 수많은 저서 가운데 지금 남겨진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의 역작 가운데 구약성경 전체에 대한 비평서인, 「헥사플라(Hexapla)」 역시, 고작 일부분만 전해질 뿐입니다. 철학적 작품으로 「원리론(Peri archon)」 4권과 「첼수스 논박(Kata Kelsom)」 8권이 있습니다. 이것들도 원본은 모두 사라지고 400년경에 라틴어로 번역된 「원리론」의 번역본이 전해질 뿐입니다.

오리게네스의 탐구분야는 주로 ‘세계 안에서 악의 문제’에 천착하여, 이를 하느님의 섭리와 조화하려는 ‘변신론(辯神論)’만이 아니라, ‘물질과 정신의 조화문제’ 또는 ‘자유와 운명의 문제’를 통하여 세계의 다양성이 발생하는 과정에 대한 ‘창조론’과 피조물이 다시 하느님께로 귀환하는 ‘구원론’에 집중됩니다. 특히 「원리론」(제1권은 하느님과 영적 세계에 대한 논제를, 제2권은 물질적 세계와 타락 및 구원에 대한 주제를, 제3권은 자유문제를, 그리고 제4권은 인식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에서 종교적이며 영적인 문제를 다루며 그리스도교 사상에 입각한 우주론적이며, 존재론적인 자신의 철학을 개괄하고 있습니다.

오리게네스의 ‘창조론’은 앞서 제시한 다양한 문제와 그에 따르는 사유를 모두 담아내려 했기에 매우 어려우면서도 훗날 큰 논쟁거리가 됩니다. 하느님은 영원으로부터 ‘유한한 지성적 존재자’들을 질적인 차이 없이 본질적으로 같게 창조하셨는데 이 존재자들은 하느님을 거역할 수 있는 자유를 지닙니다. 곧 피조물의 자유로부터 하느님을 배반할 가능성은 ‘신적 로고스와의 일치로부터 얼마나 멀어져 있는가?’에 따라 ‘유한한 지성적 존재자’의 다양성을 가능하게 합니다.

여기에서 그는 ‘인간 영혼의 선재’를 하느님과 구체적 세계 사이에 받아들입니다. 이는 세상 안에 있기 전에 하느님께 순명하거나 거역하는 근원적인 결정을 자유롭게 하고, 이로 말미암아 특별한 존재방식과 더불어 전체 창조에 자신들의 자리를 스스로 결정한 창조된 정신의 영원한 실존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곧 정신적 피조물들의 다양성을 하느님의 자유가 아닌 자신들의 자유에 의거하게 하여, 자유의지에 대한 부정적 개념이 도입됩니다.

그러나 오리게네스는 악의 원리를 신에 반하는 자유에 놓음으로써 물질에 대한 플라톤이나 플로티누스적인 부정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그저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있는 아주 낮은 존재원리로 이해합니다. 곧 물질과의 결합 역시 마지막으로 정신적 존재를 보존하려는 하나의 방편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여기서 구원은 다시 물질로부터의 해방을 통한 정신적 존재의 ‘하느님께로 귀환’에서만 가능하며, 이는 지극히 그리스철학의 사유를 그리스도교적 신앙에 연결하여 사유한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오리게네스의 사유 안에서는 육체의 부활에 대한 교리를 설명할 수 없는 난점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교부들의 신학에 기초를 제공

지금까지 살펴본 오리게네스의 사유에는 물론 플로티누스적인 사상적 색채(여러 면에서 그렇지만 특히 플로티누스에게서 ‘완전한 타자에 대한 동경심’이 그의 형이상학적 원리이듯이, 마찬가지로 오리게네스에게 ‘하느님과의 일치’가 그렇게 작용한다.)가 강하게 드러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플로티누스적인 존재론적 이원론(영혼과 육체를 이원화하여 나누고, 모든 선과 미의 근원을 형상인 영혼에만 둔다.)과 달리, 악의 기원을 자유의지로부터 이해하며, 모든 존재자들의 ‘하느님께 회귀’를 통한 구원을 구상하고 있다는 것이 독특합니다. 하지만 오리게네스의 사상 중에 ‘영혼의 선재성’ 문제나 ‘육체에 대한 사유’는 훗날 심각한 논쟁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오리게네스의 이러한 철학을 통한 신학적 사유는 교부들의 신학에 위대한 기초를 제공했으며, 중세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 허석훈 루카 - 서울대교구 신부. 1999년 사제품을 받고, 독일 뮌헨 예수회철학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교구통합사목연구소 상임연구원을 지내고 지금 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있다.

[경향잡지, 2013년 2월호, 허석훈 루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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