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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교회 안 상징 읽기: 중세기 대성당은 하느님 나라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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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11-02 ㅣ No.817

[교회 안 상징 읽기] 중세기 대성당은 하느님 나라의 상징

 

 

그리스도인들은 일찍부터 한데 모여 하느님을 예배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인 사람들이 햇빛에 노출되지 않고 비와 바람을 맞지 않도록 벽으로 둘러싸이고 지붕으로 덮인 구조물이 필요했다. 이것이 성당이라는 건축물의 물질적 기능적 목적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리고 중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목적에만 부합하는 건물 이상의 성당을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차츰 성당을 지을 때 믿는 이들이 그 안으로 들어가거나 그 곁을 지나갈 때면 하느님 나라를 연상하고 묵상할 수 있게 하려는 의도와 기획이 곁들여졌다.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를 미루어 추측할 수 있고, 미리 맛볼 수 있게 해주는 건축물을 짓고자 한 것이다. 그러한 성당을 지으려니 그 성당은 어느 면에서는 하느님 나라와 유사한 면모를 보이는 건축물이어야 했다. 그리하여 드디어는 엄청난 노력과 재원이 투입된 대성당(cathedral)들이 세워졌다. 그러했기에 중세기의 대성당들은 풍부한 상징성을 품은 진정한 예술 작품이 되었다. 그리고 대성당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대성당: 천상 예루살렘을 반영하는 지상 예루살렘

 

성당(대성당)의 상징성들 중 하나는 성당이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장소라는 점이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오늘날의 우리도 성당 안에 있을 때면 하느님의 현존 안에 머문다고 생각하고 느낀다. 어느 새인가 자연스레 그처럼 믿고 느끼게 된 것이다. 그렇게 성당은 하느님 나라, 천상 예루살렘, 낙원을 상징하는 모상(模相)이 되었다.

 

구약성경에는 가톨릭교회의 정체성을 드러내 주는 세 가지 상징성이 있다, 선택된 백성, 예루살렘 도성,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상징성이 그것이다. 첫째, ‘선택된 백성’은 가톨릭교회 신자들의 예형(豫型)이 되었다. 둘째, ‘예루살렘 도성’은 선택된 백성의 도성이자 또한 가톨릭교회의 제도적 상징이 되었다. 셋째, 하느님께 제사를 바치는 곳이던 ‘예루살렘 성전’은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유일한 장소인 가톨릭교회를 상징한다.

 

이런 맥락에서 중세기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대성당은 먼저 하느님 나라, 곧 천상 예루살렘의 반영이었다. 예루살렘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거룩한 도성이자 가톨릭교회가 이 세상에서 구현해야 할 하느님 나라를 표현하는 상징이었다.

 

 

교회라는 건축물

 

건축물로서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서 하느님을 예배하는 장소다. 그리고 이 건축물은 여느 건축물과 마찬가지로 벽, 지붕, 창문, 들머리 입구 등으로 구성된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특히 대성당을 지으면서 차츰 교회 건물의 여러 부분들 또는 구조물들에 각각 나름의 의미와 상징성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가령, 대성당 좌우 측면의 두 벽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내리신 계시를 담은 두 근간인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나타낸다고 보았다. 그리고 쿠폴라(둥근 모양의 작은 지붕; 돔)는 교회의 중심이신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쿠폴라를 떠받치는 기둥들은 구약시대의 예언자들과 신약시대의 사도들을 나타낸다고 보았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성당에 들어갈 때면 으레 이런 상징성들을 마음에 새기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성당 안으로 들어가는 들머리의 출입문과 통로는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입구라고 여겼다. 그래서 돌을 쪼아 만든 성상들, 돋을새김으로 조각하여 황금을 입히거나 색을 칠한 부조들, 장엄하고 화려하게 만든 청동문들로 꾸몄다. 또한 청동 외에 참나무며 다른 값진 목재들로도 문을 만들었으며, 그 문들에는 여러 가지 형상과 문양들을 새겨 넣었다. 이내 대성당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진 이 문들은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입구라는 상징성이 강조되었다. 이로써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그 문들을 통해서 자신이 하느님의 영광 안으로 들어가도록 초대받는다는 점을 되새기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이 그 문들을 통과하여 지상 예루살렘인 대성당으로 들어서는 순간, 그곳에서는 하느님 나라에서 우리를 맞이하며 환호하는 천사들의 노래인 양 오르간 소리가 울려 퍼지기도 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집은, 마치 하느님 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사랑으로 눈부시게 빛나는 것처럼, 태양의 광선에 의해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빛, 존재하는 모든 것을 비추는 광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성당으로 들어와 그 안을 비추는 빛은 커다란 아치형 창틀 아래에서 꼭대기까지 그리고 쿠폴라에 이르기까지 모든 가능한 곳에 될 수 있는 대로 크게 만들어 놓은 창들을 통해 증폭될 필요가 있었다.

 

이에 중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대성당에는 빛이 있어야 마땅하고, 그것도 여느 일상적인 빛이 아니라 가능한 한 색유리를 통과하며 걸러진 빛을 최대한 많이 들어오게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기에 고딕 양식 건축의 장인들은 건축물의 안정성을 해치지 않으면서 최대한 창호를 넓히고자 고민하고 분투했다.

 

이 고민과 분투는 거의 모든 벽이 스테인드글라스 창으로 이루어진, 프랑스 파리의 생 샤펠(Saint-Chapelle) 성당이라는 진정한 보석이 완성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건축물에서 돌은 지붕을 지탱하는 기둥의 형태로만 존재한다. 돌기둥을 제외한 나머지는 온통 빛이 들어오는 창이다. 이를테면 생 샤펠 대성당은 그야말로 빛의 상자다. 훌륭한 디자인이 가미되어서 영원한 하느님 나라의 빛을 상기하게 해주는, 이를테면 빛의 온갖 색상을 재현하는 수정 상자다.

 

 

교회 건물을 통해 키우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소망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이 대성당에서 기둥들을 보면서 사도들과 예언자들을 연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성당의 문들을 열고 들어가거나 나올 때면 언젠가는 자신도 하느님 나라의 문을 통과하여 사도들과 예언자들을 만나게 될 것임을 기약하고 기대할 것이다. 그리하여 마치 이 세상에서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들을 통해 들어오는 빛에 온몸이 에워싸이듯이, 언젠가 저 세상에서는 하느님의 거룩한 빛에 감싸이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향한 나그넷길을 가는 그리스도인은 더러는 억압받고 박해당하고 미움 받기도 한다. 그럴 때 그리스도인에게는 눈길을 돌려 바라보고 갈망할 곳이 있다. 그곳, 하느님 나라에서는 그러한 불행들을 겪지 않아도 될 것이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들을 더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이고, 나아가 끝없이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누군가는 이 세상에서 행복을 누리고 싶어 한다. 그래서 “나는 100살까지 완벽한 행복을 누리며 살 거야.”라는 말을 한다. 중세기의 그리스도인들도 애초에는 그러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들은 이 세상에서 누림직한 ‘100년의 행복’에 집착하기보다는 ‘영원히 누리게 될 행복’을 염두에 두고 소망했다. 그리고 그 영원한 행복을 천상 예루살렘, 곧 하느님 나라에서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마지 않았다.

 

중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영원한 행복을 이 세상에서 미리 맛보고 싶어 했다. 그리고 성당을 지으면서 거기에다 그러한 희망을 반영했다. 그러고는 그 성당을 드나들면서 충분하게는 아니지만 아쉬운 대로 그 행복을 느꼈고, 언젠가는 충만하게 누릴 것이라는 희망을 확신하고 되새기고 키워나갔다. 그런 점에서 대성당은, 성당이라는 건축물은 그리스도인이 망덕이라는 덕성을 함양하는 곳이 되기도 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1년 10월호, 이석규 베드로(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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