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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창조와 해방의 의미로 본 안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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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6-04 ㅣ No.1544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창조와 해방의 의미로 본 안식일

 

 

오경은 히브리어로 ‘토라(Torah)’라고 불린다. 토라는 ‘율법’이라고 번역되지만 본래 뜻은 ‘가르침’이다. 토라를 율법이라고 번역할 때 흔히 복음과 반대 개념으로 알아듣는 경우가 많다. 이는 율법과 복음을 대조하여 전자를 율법주의로 해석한 종교 개혁의 영향을 받은 결과이다. 토라는 두 가지 사건에 기초한다. 첫째는 ‘창조 사건’이요 둘째는 이집트 탈출이라는 ‘해방 사건’이다. 창조는 하느님의 원초적 복으로 선언되었고, 탈출은 억압에서의 해방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므로 토라의 근본은 복음이다. 창조는 원복의 기쁜 소식이요 탈출은 해방의 복음이다. 이 두 가지 근원적 사건을 바탕으로 토라가 인간에게 주어졌다. 창조 후에 아담에게 허용과 금령(창세 2,16-17 참조)이 동시에 주어졌고, 탈출 사건 후에는 계약의 법전이 주어졌다.

 

특히 그 가르침이 법의 형식으로 집대성되어 ‘십계명’, ‘계약 법전’, ‘성결 법전’, ‘신명기 법전’으로 나타났다. 이런 점에서 토라는 하느님의 복음적 사건과 이에 상응하는 인간의 올바른 길(신명 30,16 참조)을 제시하는 서사적 복음이라 하겠다.

 

유다교가 613개의 계명으로 정리한 토라 가운데 하느님, 인간, 자연을 연결시키는 생태신학적 가르침을 담은 것이 바로 안식일, 안식년, 희년에 관한 규정이다.

 

그럼 안식일에 대해 살펴보자. 안식일법은 십계명(탈출 20,8 참조)과 계약 법전(탈출 23,12 참조), 성결 법전(레위 19,3 참조), 신명 5,12에 등장한다. 그중에 십계명은 사제계 학파의 창조 신학을 배경으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내야 한다고 가르친다. “주님이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안식일에 강복하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한 것이다”(탈출 20,11).

 

하지만 신명기가 말하는 안식일의 동기는 이와 다르다. “주 너의 하느님이 강한 손과 뻗은 팔로 너를 그곳에서 이끌어 내었음을 기억하여라. 그 때문에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는 것이다”(신명 5,15). 그리하여 유배 시대 이후의 창조 신학을 전제하는 탈출 20,8의 안식일 계명이 이집트 탈출을 배경으로 하는 계약 법전(탈출 23,12 참조)과 신명 5,12의 안식일 규정보다 후대에 속한다고 평가된다. 유배 이전의 안식일은 본래 보름날에 해당하는데, 이 단어(안식일)는 항상 달의 초하룻날과 연결되어 등장한다(2열왕 4,23; 이사 1,13; 호세 2,13; 아모 8,5 참조). 안식일은 유배 이전에는 보름날, 유배 이후에는 지금의 이렛날로 정착되었다.

 

계약 법전은 안식일의 본 목적을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라고 밝힌다. “너희는 엿새 동안 일을 하고, 이렛날에는 쉬어야 한다. 이는 너희 소나 나귀가 쉬고, 너희 여종의 아들과 이방인이 숨을 돌리게 하려는 것이다”(탈출 23,12).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하여 주신 것처럼 안식일도 모든 이를 노동에서 해방시키는 날인 것이다. 계약 법전에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잘 드러나는데, 약자의 범주에 종뿐 아니라 소나 나귀 같은 짐승이 포함된다. 이로써 계약 법전의 안식일은 동물까지 망라하는 생태신학적 전망을 지닌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으로 유배된 뒤에 사제계 학파는 안식일을 창조의 관점에서 새롭게 이해했다. 안식일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여 하느님 중심으로 안식일의 의미를 전개했다. 창조는 단지 하늘과 땅만의 창조가 아니라 역사의 혼돈에서 이스라엘이 다시금 땅을 회복하고 다스리는 것을 암시한다. ‘안식(shabbat)’은 글자 그대로 ‘쉬다, 일을 그만두다, 파업하다’는 의미를 갖는다. 하느님의 휴업 또는 파업의 의미는 지대하다. 하느님께서 엿새간의 창조를 마치고 이렛날 쉬신 행위는 우주의 건설을 기념하고 이스라엘을 카오스(혼돈)에서 해방하신 행위를 기념하는 것이다.

 

사제계 학파는 이집트 탈출 사건도 하느님 중심으로 재해석했다. 탈출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스라엘은 무엇을 위해 이집트에서 해방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내 백성을 내보내어 나를 예배하게 하여라”(탈출 9,1)는 하느님 말씀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사제계 학파는 탈출 사건의 목적이 역사적 해방 그 자체가 아니라 주님께 드리는 예배임을 천명한다. 해방의 사회적 목적이 종교적 목표로 드높여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안식일이 종교 차원에서만 강조되면 율법주의로 흐를 수 있다. 탈출 31,15은 안식일의 거룩함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안식일에 일하는 사람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하신 행위를 바리사이들이 단죄한 것도 안식일의 종교성을 강조한 결과이다(마르 3,1-6 참조).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걸어 갈 수 있는 거리도 2천 암마(약 1km)로 제한했다(탈출 16,29; 민수 35,5; 여호 3,4; 사도 1,12 참조). 오늘날에도 유다인들이 회당 주변에 모여 사는 이유는 안식일에 회당까지 걸어 갈 거리 안에 집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안식일에 승강기 버튼을 눌러서는 안 된다고 교육받은 어느 유다인 할머니가 다른 사람들(비유다인)이 승강기를 타러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탔다는 이야기는 과도한 안식일 규정이 얼마나 형식주의에 빠질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유다인들은 안식일을 잘 지키면 모든 토라를 잘 지키는 것과 같고, 안식일을 못 지키면 다른 모든 토라를 못 지키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안식일에 관한 에피소드를 하나 더 들어 보자. 20세기의 이스라엘에서 무신론자가 된 어떤 유다인에게 한 라삐가 “너는 하느님의 존재를 믿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무신론자 유다인은 “다음날 대답해 주겠다”고 대답했다. 다음날이 되자 그는 라삐에게 “나는 하느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라삐가 “왜 바로 대답하지 하루 뒤에 대답했느냐?”고 물으니 그 유다인은 “어제가 안식일이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 유다인은 하느님을 믿지 않았지만 안식일에 하느님을 부인하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과도한 규정은 율법주의로 나아가기 마련이다. 사제계 학파가 강조하는 안식일의 본래 의미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니 좋았다”에 나타나는 원초적 복음이다. 신명기계 학파가 강조하는 안식일은 탈출 사건에 근거하여 자신과 이웃과 동물을 일상의 노동에서 해방시키는 휴식과 복의 시간이다. 그러기에 안식일은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의 예배를 드리며 창조와 해방을 경축하는 날이다. 그래서 이사야서는 “네가 안식일을 ‘기쁨’이라고 부르고 주님의 거룩한 날을 ‘존귀한 날’이라 부른다면 네가 길을 떠나는 것과 네 일만 찾는 것을 삼가며 말하는 것을 삼가고 안식일을 존중한다면 너는 주님 안에서 기쁨을 얻고 나는 네가 세상 높은 곳 위를 달리게”(이사 58,13-14) 하리라고 말한다.

 

사제계의 안식일이 강조하는 종교적 차원과 신명기계의 안식일이 강조하는 사회적 차원은 상호 보완되어야 한다. 하느님 없는 안식일은 인간의 휴식에 불과하다. 인간의 사회적 조건을 무시하는 하느님 경배는 율법주의로 흐를 수밖에 없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주일에 쉬면서 가족과 함께 보내는 것이 행복의 십계명”이라고 강조했다. 레위 19,3은 부모 공경과 안식일 준수를 함께 언급한다. 안식일에 쉬는 것은 부모를 모시고 온 가족이 하느님 안에서 함께 보내는 것을 내포한다. 일에 지친 현대인에게 안식일은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인 것이다. 이 가족에 동물도 포함될 수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애완견의 지위를 ‘반려견’이라는 말로 격상했다. 사람과 짐승이 함께 쉬면서 창조와 해방의 기쁨을 나누는 날이 유다인들에게는 ‘안식일’이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주일’이다.

 

* 백운철 신부는 1985년에 사제품을 받고 파리 가톨릭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에서 신약성경을 가르치며, 신학대학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4년 11월호(통권 464호), 백운철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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