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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과학칼럼: 저에게는 그러한 가설이 필요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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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4-03 ㅣ No.482

[과학칼럼] 저에게는 그러한 가설이 필요치 않습니다

 

 

고등학생 때 일입니다. 당시 저희 학교에는 과학 이야기나 토론을 즐기는 괴짜(?)들이 많았습니다. 과학에 관련된 거라면 온갖 소재가 등장했는데, 한번은 우주의 창조와 신(神)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격한 논쟁이 될 법한 주제였지만,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자 장래 희망이 사제라는 저를 배려해서인지, 토론은 진지하지만 제법 점잖았습니다. 정확히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지금은 뚜렷이 떠올릴 수 없지만, 역시 천주교 신자였던 어떤 친구가 토론을 마무리하며 했던 말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좋아, 빅뱅부턴 과학이 설명할 수 있다고 쳐. 그런데 빅뱅 이전은? 그건 과학이 모르잖아. 그래서 나는 창조주를 믿어.”

 

비슷한 이야기가 이백여 년 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물리학자 라플라스 사이에 오간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결말은 정반대입니다. 우주의 창조주에 대해 묻는 나폴레옹에게 라플라스는 답하길, “폐하, 저에게는 그러한 가설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신앙인의 눈에 언뜻 오만해 보이는 이 말에는 실제로 과학에 대한 자부심이 담겨 있습니다. 우주의 모든 현상들은 다 자연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자신감입니다. 또한 이 말에서 전형적인 과학자의 태도, 나아가 자연과학 자체의 특성이 드러납니다. 나는, 과학자는, 자연을 탐구할 때 초월적이거나 초자연적인 모든 것을 다 배제하고, 오직 양(量)으로 관측하여 수학으로 계산하고 실험으로 확인할 수 있는 요소만 다루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을 따른다면,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말하는 많은 것들, 곧 구원, 죄, 영혼, 천사, 거룩함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하느님마저 과학의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어려운 말로 이를 ‘방법론적 자연주의’ 혹은 ‘방법론적 무신론’이라 합니다. 정말로 “신이 없다.”는 주장이 아니라, 과학 탐구를 위해 신이라는 존재에 일단 괄호를 치는 것입니다.

 

철학의 관점은 다릅니다. 철학은 인간과 우주 만물의 근거를 묻고, 그것을 계속하다 보면 결국 신에 대한 물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거의 모든 철학자들은, 그들이 신을 믿든 그렇지 않든 간에, 신에 대해 묻고 이야기합니다. 고대 철학자들은 물론이고, 수학자이자 과학자이기도 했던 근대의 철학자들, 곧 데카르트, 칸트, 뉴턴도 저마다 신에 대해 말했고 심지어 그들 중 일부는 독실한 신자였습니다.

 

물론 신에 대한 철학자들의 물음과 말(言)이 언제나 신을 긍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근대 자연과학이 탄생하기 전부터 있어 왔던 무신론은, 이제 자연과학을 새로운 무기 삼아 많은 이들을 설득하기 시작합니다. ‘과학적’이라는 말이 주는 힘 뒤에 숨어, 그들은 적극적으로 신앙과 종교를 공격하고 부인합니다.

 

하지만 존재의 근거, 궁극적 존재인 신에 대한 물음을 놓아두고 떠난 자연과학을 향한 그들의 철 지난 구애는, 어디까지나 과학 탐구의 방법으로서만 ‘무신론’을 전제하는 자연과학의 성격을 잘못 이해한 데서 옵니다. 혹은 철학의 ‘반쪽’을 가지고 떠난 과학에 대한 애절한, 그러나 잘못된 짝사랑의 발로일 수도 있겠습니다. 많은 철학자들이 이미 비판하고 반박한, 하지만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망령처럼 떠돌며 많은 사람을 혼란스럽게 하는 이 과학주의적 무신론에 대해 다음에 좀 더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2023년 4월 2일(가해)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서울주보 6면, 조동원 안토니오 신부(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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