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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김수근 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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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8-30 ㅣ No.89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33) 김수근 바오로 (상)


한국 현대건축의 지평을 넓힌 김수근

 

 

한국의 로렌조

 

서울 불광동성당, 마산 양덕성당, 서울 경동교회, 자유센터, 타워 호텔, 세운상가, 잠실 올림픽 경기장(주경기장, 자전거 경기장, 체조 경기장, 수영 경기장), 샘터 사옥, 공간 사옥, 동숭동 아르코 예술극장, 아르코 미술관, 서울대 예술대, KIST 본관, 문화방송 사옥, 한국일보 사옥, 인천 상륙작전 기념관, 서울 지하철 경복궁역, 한계령 휴게소, 국립부여박물관, 국립청주박물관, 국립진주박물관, 주미 대한민국 대사관저, 국립과학관, 경찰청, 서울지방법원 종합청사, 강원 어린이 회관, 구미 문화예술회관, 워커힐 더글라스 호텔, 워커힐 호텔 힐탑바, 라마다 르네상스 호텔, 벽산 빌딩, 창암장 등.

 

이렇게 유명한 건축물을 설계한 사람이 김수근(바오로, 金壽根, 1931-1986)이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그를 ‘한국의 로렌조’라고 했다. 로렌조 데 메디치는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보티첼리 같은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를 후원해 인류문화예술을 꽃피게 한 사람이다. 김수근은 한국 현대건축의 아이콘으로 ‘세계 현대 건축가 101인’에 선정되었다.

 

 

한옥집과 건축가의 꿈

 

김수근은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났다. 여덟 살 때 서울로 왔다. 어린 시절을 오롯이 북촌에서 보냈다. 수많은 골목과 기와집이 있는 북촌은 그에게 풍부한 상상력과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북촌은 그에게 ‘마음의 고향’이었다. 그래서 북촌은 그의 삶과 예술세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부친은 사업으로 많은 돈을 벌었다. 그래서 김수근은 비교적 넉넉한 환경에서 자랐다. 어렸을 때 찍은 한 장의 사진이 있다. 한복을 단정히 입은 어머니가 소파에 앉아 공부하는 아들의 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는 사진이다. 책장은 양장본 책들로 가득하고, 책장 옆에는 대형 스피커가 놓여있다. 김수근은 ‘집이란 어머니가 계시는 곳’이며 ‘나의 집은 어머니’라고 할 정도로 어머니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다.

 

해방 이듬해에 중학생이던 김수근은 덕수궁에 관광 나온 한 미군 청년을 만났다. 그에게 영어를 배우려고 그를 가회동 한옥집으로 초대했다. 그는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했다. 김수근에게 건축가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건축가가 되려면 독서도 많이 하고, 음악도 많이 들어야 하고, 그림도 그릴 줄 알아야 하며, 여행도 많이 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건축가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김수근은 ‘미국의 대통령보다도 중요한 사람이냐?’고 물었다.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김수근은 건축가가 되기로 마음을 굳혔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합창반과 문예반에서 활동했고, 사진도 열심히 찍으러 다녔다. 고등학교 시절 그의 별명은 ‘베토벤’이었다. 음악에 대해 해박했기 때문이었다. 고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그런데 그해에 6·25 전쟁이 일어났다. 서울대는 부산으로 이전했다. 김수근은 건축학을 제대로 공부하고 싶었다. 그래서 몰래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여비는 아버지의 악어가죽 가방을 팔아 마련했다. 어머니에게 밀항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여권도 없이 일본에 도착해 불안한 나날을 보냈다. 동네 아이들에게 영어와 수학을 가르치며 어렵게 생활했다. 그러면서도 열심히 공부해 도쿄예술대학 건축과에 합격했다. 재학 중에는 시간 나는 대로 전시와 공연을 구경하러 다녔다. 그러한 경험은 후에 커다란 자산이 되었다. 도쿄대 대학원을 졸업하고는 한국인 유학생들과 함께 대한민국 국회의사당 설계 공모에 지원했다. 우리나라 전통 사찰의 건축 양식(높은 석탑과 낮은 사찰)을 응용한 설계안을 제출했는데 놀랍게도 ‘당선’되었다. 그런데 5ㆍ16군사혁명이 일어나 무산되고 말았다.

 

- 서울 가회동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한 소년 김수근. 출처=「건축가 김수근 공간을 디자인하다」

 

 

워커힐 힐탑바, 세운상가, 박물관 등

 

김수근은 자신의 건축설계사무소를 차리고 본격적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워커힐 호텔 안에 지은 힐탑바를 노출콘크리트 방식으로 지었다. 마치 피라미드를 거꾸로 세워놓은 것 같았다. 힐탑바에는 김수근의 젊은 혈기와 패기가 담겨 있다. 어떤 건축가의 말대로 힐탑바는 그 당시 ‘김수근의 자화상’이었다.

 

그 시기에 남산의 자유센터와 타워 호텔, 그리고 세운상가도 김수근의 설계로 만들었다. 세운상가는 종묘부터 남산 기슭까지 길게 이어지는 건축물로 낮은 층에는 차도와 상가를 배치했고, 높은 층에는 거주지와 인도를 배치했다. 공중에 인도를 배치하는 것은 매우 특이한 건축방식이었다. 세운상가는 국내 최초의 주상복합아파트가 되었고, 국내 최대 전자 상가가 되었다.

 

김수근은 여의도 도시계획에도 관여했다. 당시 여의도는 허허벌판 모래섬이었다. 그곳에 국회의사당, 업무 지구, 상업 지구, 주거 지구를 배치했다. 그러면서 세운상가처럼 건물과 건물을 이어주는 공중 다리도 설치하려 했다. 그런데 여의도가 실제로 개발되면서(특히 대통령 지시로 5ㆍ16광장이 들어서면서) 김수근이 생각했던 설계는 대폭 바뀌고 말았다.

 

그다음으로 설계한 것은 국립부여박물관이었다. 완공을 앞둔 어느 날, 일간 신문에 박물관이 일본식으로 건축되었다는 기사가 크게 보도되었다. 연일 일본 신사(神社)를 닮았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일본에 대한 국민적 감정이 고조되어 있던 때였다. 이에 대해 김수근은 박물관은 우리나라 전통 토기의 선을 지붕에 응용한 독창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비판은 그치지 않았다. 김수근은 거듭해서 자기의 입장을 밝혔다. “건축가는 그의 작품에서 도망칠 수 없다. 부여박물관은 두고두고 내가 죽은 다음에도 산 증거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것이 신사의 표절이면 나는 반민족적 도둑의 죄를 끝까지 고발당하게 될 것이요, 나의 창작이면 지금 나를 규탄하고 있는 ‘소박한 비판’을 ‘에피소드’로 간직하게 될 것이다.”(‘공간’ 1967년 10월호)

 

김수근은 소모적인 논쟁에서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는 한국문화에 대해 새롭게 공부하기 시작했다. 공부에 크게 도움을 준 사람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최순우였다. 최순우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라는 명저를 지은 고고미술학자이다. 김수근은 최순우과 함께 전국에 있는 한국 고유 건축물을 찾아다니며 공부했다. 특히 전남 담양에 있는 소쇄원을 보고는 자연과 잘 어우러진 우리나라 전통 건축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이러한 공부 덕에 건축을 바라보는 안목은 더욱 넓고 깊어졌다.

 

 

스승 최순우, 그리고 건축 일화

 

김수근은 최순우를 ‘나의 건축가로서의 가장 소중한 눈을 길러 주신 스승’이라고 했다. 그 후 김수근은 매우 특별한 공간을 만들었다. 자신의 건축설계사무소 사옥인 ‘공간(空間)’이다. 그 건축물은 한국을 대표하는 현대 건축물이며 건축전문가들이 찬탄하는 ‘김수근다운 건축물’이었다. 그 공간은 엄마의 뱃속 같은 편안함(그래서 김수근은 ‘모태 공간’이라 했다)과 어린 시절 즐겁게 뛰놀던 북촌 골목길의 재미로움으로 조화를 이루었다. 그곳에는 설계사무소뿐만 아니라 화랑과 공연장 그리고 카페와 마당도 들여놓았다. 그 공연장에서 병신춤의 무용가 공옥진과 사물놀이로 유명한 국악인 김덕수가 데뷔했다.

 

김수근에 대한 에피소드는 많다. 워커힐 산 위에 세운 힐탑바 이야기다. 김수근은 워커힐 꼭대기에 워커힐의 상징이 될 ‘W’형의 집을 설계했다. 모든 건축물의 기둥은 수직으로 세워야 무게도 받지 않고 쓰러지지 않는다. 이것은 건축의 기본이다. 그런데 김수근이 설계한 힐탑바는 정방형인데 모서리 기둥 네 개가 모두 밖으로 45도 각도로 기울였다. 설계도를 보는 사람마다 ‘매우 위험’하다고 했다.

 

김수근은 구조전문가와 공사전문가를 설득해 공사를 시작했다. 공사 중에 건축물 밑에 들어가면 건축물이 머리 위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 공사에서 가장 어려웠던 일은 받침대를 떼어내는 일이었다. 받침대는 인부들이 떼어내는데 그들을 이해시키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김수근은 그 건축물이 안전하다는 것을 확신시켜주기 위해 인부들이 받침대를 모두 떼어낼 때까지 그 건축물 밑에 계속 서 있었다. 받침대는 모두 떼어졌고 힐탑바는 무너지지 않았다.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8월 27일, 백형찬(라이문도, 전 서울예대 교수)]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34) 김수근 바오로 (하)


인간과 신이 만나는 공간, 불광동 · 양덕동성당과 경동교회를 짓다

 

 

- 김수근이 설계한 3대 종교 건축물로 서울 불광동성당과 마산 양덕동성당, 경동교회가 있다. 출처=김수근문화재단 홈페이지

 

 

활발한 건축 활동

 

김수근(바오로, 金壽根, 1931-1986)이 아끼던 것 중에 하나가 공간 사옥 담장에 있는 덩굴이었다. 어느 날 김수근은 담쟁이덩굴이 죽어가는 것을 보았다. 김수근은 관리자를 불러 크게 야단쳤다. 마침 그곳에서 근무하던 젊은 건축가가 그 모습을 보았다. 담쟁이 하나 때문에 사람이 저렇게 야단맞고 무시당하는 것을 보고 분노가 끓어올랐다.

 

며칠 후, 그 건축가는 술에 취해 사옥 입구에 있는 담쟁이덩굴을 꽤 많이 뜯어냈다. 다음 날 ‘공간’ 사람들은 흉한 모습을 한 사옥 입구 풍경을 보고 김수근이 그 건축가에게 혹독한 조치를 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 건축가도 자신이 한 행동에 책임을 질 각오를 하고 있었다. 김수근은 이 일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건축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또한 이런 일도 있었다. ‘공간’에서 직원 전체 회의가 열렸다. 사무실 사정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월급도 밀렸고, 직책은 자꾸 늘어만 간다. 회의 분위기는 경직되었다. 김수근은 회의 마무리에 “‘공간’에 들어오려는 사람은 줄 서 있으니 나갈 사람은 언제든지 나가라”고 했다. 이에 대해 그 누구도 말을 하지 못했다. 그때 한 젊은 건축가가 입을 열었다. “밤새워 일하는 우리에게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사기를 알고 하시는 말입니까?” 이에 대해 김수근은 “여기가 군대냐? 사기는 무슨 사기냐?” 그 건축가가 그 말을 맞받았다. “군대보다 더하지요.”

 

우리나라가 올림픽 개최국으로 선정되었다. 김수근은 올림픽 경기장 설계를 맡았다. 가장 흥미로운 경기장은 체조 경기장이었다. 하늘에 커다란 천막을 펼쳐 놓은 것 같은 독특한 구조였다. 더구나 빛을 투과할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해 낮이나 밤이나 경기장은 환하게 빛났다. 김수근은 올림픽 경기장 건축으로 대한민국에도 건축가가 있다는 것을 세계에 알렸다.

 

김수근은 건축방식에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건축재료를 콘크리트에서 벽돌로 바꾼 것이다. 벽돌은 따스하고 포근한 느낌과 함께 강인함을 주었다. 김수근은 그런 특성을 지닌 벽돌을 좋아했다. ‘건축은 빛과 벽돌이 짓는 시(詩)’라고 할 정도로 벽돌을 예찬했다. 그래서 탄생한 건축물이 불광동성당, 양덕동성당, 경동교회, 아르코 미술관, 아르코 예술극장, 샘터 사옥이었다.

 

서울대교구 불광동성당

 

 

서울대교구 불광동성당

 

김수근이 설계한 3대 종교 건축물은 불광동성당, 양덕동성당, 경동교회이다. 종교 건축물은 ‘인간과 신이 만나는 공간’이며 ‘인간 공동체의 공간’이다. 김수근은 교회를 경건한 공간, 조용한 공간, 따듯한 공간이 되도록 했고, 예수님의 사랑과 고통도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이를 위해 붉은 벽돌로 공간을 온통 감쌌다. 불광동성당은 5년 만에 완공됐다. 성전은 기도하는 손을 형상화했다. 경사지의 지형을 그대로 살려 성전 주변을 돌며 기도와 묵상의 공간이 되도록 했다. 또한 성모 동산을 오르며 십자가의 길과 함께 대성전으로 이어지는 안마당은 친교와 나눔의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게 했다.

 

불광동성당은 작은 성미술 전시장이다. 조각가 김세중이 ‘제단의 십자가’, ‘예수성심상’, ‘김대건 신부상’, ‘성모동산 성모상’, ‘대성전 14처’를 조각했고, 서울대 미대 민철홍 교수가 대성전 제단과 감실을 조각했고, 최봉자 수녀가 성체조배실 감실과 담장 십자가의 길을 조각했다.

 

 

마산교구 양덕동성당

 

어느 날, 마산에서 플라츠(한국명 박기홍) 신부가 김수근을 찾아왔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양덕성당을 지어달라고 했다. 김수근은 “나는 크리스찬이 아닙니다”라고 했다. 그렇지만 김수근은 실존적인 측면에서 전지전능한 하느님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신부와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가 지향하는 점이 같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 김수근은 성당을 짓겠다고 약속했다. 신부가 요청한 ‘소박하면서도 우아하고, 단단하면서도 따뜻하며, 신비로우면서도 인간미가 풍기는 성당’을 짓기로 했다.

 

- 마산교구 양덕동성당

 

 

김수근은 나름대로 성당 건축의 이념을 생각했다. 첫째, 교회는 훌륭한 ‘화해의 장’이 되어야 한다. 둘째, 신자들이 하느님과 만나 영적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축제의 장’이 되어야 한다. 셋째, 미사의 기능과 친교의 기능 그리고 선교의 기능과 사회 공익적 기능을 포함하는 ‘다원화의 장’이 되어야 한다. 넷째, 권위주의를 지양하고 주변과 조화를 이루는 ‘환경의 장’이 되어야 한다.

 

양덕동성당 안으로 들어가려면 좁고 긴 계단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 신자들은 이 길을 걸으면서 마음을 경건하게 가다듬으며 하느님을 만날 준비를 한다. 양덕동성당은 불규칙한 다각형 공간이다. 그래서 도면으로 그려내기가 무척이나 까다로웠다. 그런데 다행히 설계 책임을 진 젊은 건축가가 수학과 기하학의 지식을 갖고 있어 도면을 그릴 수 있었다.

 

김수근은 양덕동성당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세계 건축을 다루는 일본 잡지(「SD」) 표지에 성당 사진이 실렸고 김수근의 건축 작품들이 특집으로 다뤄졌다. 어떤 시인은 양덕성당을 이렇게 말했다. “양덕동성당은 건축가 자신의 마음의 감옥 같았다. 내용이 없는 죄의 아름다움처럼 쌓아 올린 벽돌담들은 이 세상의 지친 말들을 말없이 받아주고 있었다. 한마디로 모성의 벽이다.”

 

 

서울 경동교회

 

경동교회는 서울 도심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강원룡 목사는 김수근에게 교회 건축을 부탁했다. 강 목사는 “우리나라 개신교는 청교도의 후예인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전파되었기 때문에 기독교의 예술성이 거의 배제되었다. 집회소가 된 예배당은 상징과 이미지로 된 성경을 도덕 교과서로 도그마하여 ‘오늘 여기서’ 살아 숨 쉬는 진리를 화석으로 묻어 버렸다”라고 했다. 강 목사는 이런 자신의 생각에 맞는 건축가로 김수근을 택한 것이었다.

 

김수근은 경동교회를 불광동성당처럼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모습으로 설계했다. 그리고 교회 입구에서 예배당으로 들어가는 길을 길게 돌렸다.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올라간 골고타 언덕을 표현한 것이다. 교회 안으로 들어서면 마치 성경 ‘요나서’에 나오는 큰 물고기 배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병석에서 세례 받아

 

김수근은 하느님에게서 네 가지 재주를 부여받은 것 같다고 했다. 그 재주는 ‘정치적인 수, 경제적인 능력, 건축적인 재질(才質), 문화적인 식견’이라고 했다. 김수근은 세상을 떠나기 몇 해 전에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당시 병석에 있었는데 자신이 설계한 불광동성당 주임인 정의채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인간의 운명을 깨닫고 하느님을 받아들인 것이다. 김수근은 독실한 불교 신자인 어머니에게 천주교로 개종하도록 간청했다. 어머니도 아들의 뜻을 받아들여 천주교로 개종했다. 아들을 사랑한 어머니는 아들의 종교까지도 사랑했다.

 

김수근의 꿈은 교육을 통해 젊은 건축가를 육성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공간아카데미’를 운영하려 했고, 국민대 조형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또한 새로운 ‘공간(空間)’을 경기도 파주 공릉에 지었다. 이렇게 그의 꿈이 하나씩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병이 찾아왔다. 쉬지 않고 끊임없이 일을 했기에 간에 이상이 왔다.

 

한 소설가가 공릉의 병상을 찾아갔다. 함께 손을 잡고 기도했다. 그때 김수근은 불쑥 “나 같은 죄 많은 사람도 하느님이 용서하실까?”하고 물었다. 그런 그의 얼굴은 마치 아기 같았다고 했다. 서울대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하루하루가 이렇게 신비로울 수가 없어”라고 고백했다. 김수근은 간암 말기였다. 담양 소쇄원으로 내려가 마지막 남은 삶을 정리했다. 그곳 대자연 앞에서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결국 김수근은 쉰다섯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미안하다’였다.

 

“겨레의 아름다운 삶의 공간 만들기에/ 한평생 몸과 마음 오롯이 바치시니/ 이 나라 현대건축에 큰 발자취 남기셨네/ 활달한 그 기상과 푸짐한 인정으로/ 폭넓게 사시면서 이웃예술 돌보시니/ 가시매 크옵신 인품 새록새록 그리워라.”(시인 구상)

 

참고자료 : ▲ 김수근 「좋은 길은 좁을수록 좋고 나쁜 길은 넓을수록 좋다」(金壽根空間人生論). 공간사. 1989 ▲ (재)김수근문화재단 엮음 「당신이 유명한 건축가 김수근입니까?」 공간사. 2006 ▲ 황두진 「건축가 김수근」 나무숲. 2007 ▲ 승효상 「묵상」 돌베개. 2019 ▲ 불광동성당 홈페이지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9월 3일, 백형찬(라이문도, 전 서울예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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