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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54: 아비뇽의 교황들 - 교황, 70년간 로마를 떠나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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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1-08 ㅣ No.245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54) 아비뇽의 교황들 - 교황, 70년간 로마를 떠나있었다

 

 

- 아비뇽 교황청 : 아비뇽 교황들의 지나친 친프랑스적 정책들은 영국과 독일의 불만을 샀고 마침내 영국 국교회와 독일에서의 종교개혁의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사진은 아비뇽의 교황청 전경.

 

 

아비뇽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끊어진 채 남아있는 '성 베네제 다리'다. 성 베네제가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 1185년에 세웠다고 하는 이 다리는 이후 론 강이 범람하여 끊어진 이후 복구되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아비뇽의 끊어진 다리가 주는 상징성은 묘한 역사적 여운을 남겨 주었다.

 

교황청이 로마가 아닌 아비뇽으로 옮겨지게 된 것은 이탈리아 내 교황령의 사회정세 불안과 강력해진 프랑스 왕권의 강요에 따른 것이었다. 교황령 안에서는 교황파와 반교황파가 갈려 극심한 내분에 휩싸여 있었다. 특히 글레멘스 5세가 선출된 이후에는 로마의 오르시니 가문과 콜로나 가문의 대립 투쟁으로 내분이 더욱 심화돼 무정부상태에 빠져 도저히 로마에 머물 처지가 못되었다.

 

프랑스의 필립 4세는 교황령내의 이런 상황을 이용해 교황청 내에 영향력을 더욱 높히고자 했다.

 

베네딕도 11세 선종 이후 1년여의 공백 끝에 1305년 6월 보르도의 대주교인 고트의 베르트랑(Bertrand de Got)이 글레멘스 5세 교황이 됐다. 그는 로마의 불안한 정세와 함께 교황좌와 필립 4세와의 화해를 위해 프랑스를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해 11월 리용에서 착좌식을 거행한 글레멘스 5세는 결국 1309년 아비뇽에 정착했다.

 

이때부터 1376년까지 약 70년간 교황들은 아비뇽에 머물게 된다. 교황이 로마를 떠난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지만 이처럼 오랫동안 이탈리아를 떠나 있은 적은 없었다. 사람들은 이를 유다인들이 바빌로니아에 70년간 유배되었던 것에 비유해 「교황청의 바빌론 유배」(Captivititas Babylonica)라고 불렀다.

 

교황청의 아비뇽 정착은 교황직에 대한 프랑스의 영향력이 높아진 것을 의미했고 결과적으로 아비뇽의 교황들 모두 프랑스인이 선출되고 추기경들도 대부분 프랑스인들이 선임됐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들은 교황직이 프랑스 왕권에 봉사하는 기관과 같은 인상을 줌으로써 프랑스 외의 다른 나라와 갈등을 빚기도 했고 결과적으로 교황직의 보편성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런 것의 단적인 예가 성전기사수도회 처리 문제였다. 성전기사수도회는 예루살렘 순례자들을 보호하고 순례에 동행할 것을 목적으로 설립된 수도회로서 급속한 성장을 이뤘고 왕과 귀족들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명성과 부를 쌓았다. 십자군 전쟁이 끝난 후 수도회는 거점을 파리로 옮겼는데 수도회의 자주성과 막대한 경제적 부는 왕권강화에 큰 방해가 됐다. 이에 필립 4세는 이를 이단으로 몰아 재산을 몰수하고 수도자들을 사형에 처했다. 글레멘스 5세는 왕의 강요에 의해 이들의 잔혹한 박해를 묵인했을 뿐 아니라 비엔공의회를 개최해 성전기사수도회를 정식으로 폐지하고 해산시켰다.

 

이러한 왕권에 대한 굴복은 정치적으로 국왕의 절대 독립을 가져왔고 사회법규적으로는 교회도 국왕에 종속한다는 사상을 대두시켰다. 이는 교황들과 독일의 루드비히 황제와의 다툼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하인리히 7세 사후 독일은 바이에른의 루드비히와 오스트리아의 프레드리히가 황제위를 놓고 다투었으나 투쟁과정에서 루드비히가 황제가 됐다. 그러나 교황은 프랑스의 정치적 이해를 고려해 이를 인정하지 않고 교황의 승인이 없었으므로 무효라며 루드비히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루드비히는 반격을 가해 교황권 자체를 공격했다. 독일교회도 왕을 지지했을 뿐 아니라 월리엄 오캄과 마르실리우스 같은 학자들도 교황권 자체를 공격했다. 이어 카알 4세 때인 1356년 황제선출권을 가진 일곱 제후(마인츠, 쾰른, 트리어의 3대주교와 라인궁중백, 작센공,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보히미아 왕)들에 의해 황제가 선출되던 선제후 제도를 계승하면서 교황의 승인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금인칙서'(Golden Bull)를 발표했다. 이 금인칙서는 교황의 보편적 우위성의 상실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아비뇽 교황들의 지나친 친프랑스적 정책들은 결국 프랑스와 경쟁관계에 있던 영국과 독일의 불만을 샀고 이들 나라에서의 반교황적 태도는 마침내 영국 국교회와 독일에서의 종교개혁의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교황청의 아비뇽 정착은 교회 내부적으로도 또다른 문제를 야기시켰다. 우선 화려한 교황청을 건립하고 유지하는데 엄청난 재원을 필요로 했고 이러한 재원들을 마련하기 위해 교황들은 점차 교회내정을 중앙집권화했다.

 

교황들의 이러한 간섭은 주교임명과 관련해 갈등이 증대됐는데 각 지역에서 선출되던 주교들을 교황이 직접 임명함으로써 주교선출의 관습은 점차 사라지고 모든 주교들을 교황이 임명하는 법이 설립되기 시작해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교황에 의해 임명된 모든 주교들은 교황청의 재정을 위해 첫 일년간의 수입을 내놓아야 했다. 주교 임명과 관련해 프랑스의 영향력 아래 있던 교황들은 자주 왕과 상의해야 했으므로 문제가 더 심각했다. 이외에도 빨리움 수여에 대하여 대주교로부터 받던 지불금, 성직자 유산 계승의 납세, 봉토세 등은 마치 성직매매의 인상을 주기도 했다.

 

이러한 것들은 결국 교황좌의 명예를 크게 실추시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스웨덴의 성녀 비르짓다와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등은 로마귀환을 촉구했고 몇몇 교황들도 로마귀환을 추진했다. 200대 교황 복자 우르바노 5세는 프랑스 궁정과 일부 추기경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1367년 10월 로마에 입성했으나 안정감을 보이던 교황령이 다시 불안해져 체류 3년만에 다시 아비뇽으로 돌아왔다. 후임 교황인 그레고리오 11세는 가타리나 성녀의 권고 등에 힘입어 1376년 아비뇽을 떠나 이듬해 1월 17일 로마로 돌아왔다. 이로써 로마귀환은 실현됐고 아비뇽의 교황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레고리오 11세는 마지막 프랑스인 교황이었다.

 

아비뇽의 교황들 중에는 교회의 내적 쇄신과 대외선교 등에 힘을 쏟은 교황들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이른바 「교황의 아비뇽 유배」는 교황좌의 보편적 우위성을 상실하는 결정타가 됐고 세수확보를 위한 각종 방안들은 교회내의 불안과 위기를 조성했다. 이러한 결과로 교황권의 위신은 크게 떨어졌고 중대한 위기를 야기시켜 결국 다음 사건인 서구대이교의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

 

[가톨릭신문, 2002년 6월 9일, 김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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