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 (토)
(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연길교구: 주님 포도밭의 일꾼들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11 ㅣ No.401

[연길 교구 설정 80주년 기념 특집 기사] 주님 포도밭의 일꾼들

 

 

옛 연길 교구의 자취는 보잘 것 없었다. 연길 교구 옛 본당 터를 일일이 돌아보았지만, 황량한 빈터 아니면 공사장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세월의 무게는 어쩔 수 없었다. 최근까지 남았던 교회 건물들은 도시개발로 인하여 도로로 편입되거나, 허물어져 그 자리에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는 실정이다. 당시 건물 중에 합마당 본당(왕청현汪淸縣 대흥구진大興溝鎭) 성당이 거의 원형 가까운 모습으로 남아있고, 대랍자 본당(용정시 지신진 龍井市 智新鎭) 사제관 일부가 남아있을 뿐이다. 명월구 본당 성당과 사제관이 가장 완벽하게 남아있었지만, 우리가 한국에 돌아온 직후에 아파트 건설 업체에 매각되어 헐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연길 교구 내에는 19개의 본당이 있었다. 본당사목 측면으로 본다면 연길 교구는 총 11개의 본당을 가지고 있던 함흥 대목구와 덕원 면속구를 훨씬 앞선다. 1928년 연길 지목구 설정 당시 북간도에는 8개 본당에 12,257명 교우가 있었고, 함경도에는 6개 본당 2,922명의 교우가 있었다. 오딜리아 연합회의 북간도 선교는 본당 사목이 위주가 되었다. 1929년 연길 지목구에는 삼원봉三元峰(=영암촌英岩村, 대랍자大拉子로 이전), 용정(=용정상시龍井上市), 조양하朝陽河(=팔도구八道溝), 연길(=국자가局子街, 연길하시延吉下市), 대령동大嶺洞(차조구茶條溝로 이전), 훈춘琿春, 육도포六道泡, 돈화敦化에 본당이 있었다. 본당은 계속 늘어나 1936년까지 연길상시延吉上市, 두도구頭道溝, 옹성라자甕城石習子(=명월구明月溝), 합마당蛤?塘, 목단강牧丹江(조선인), 왕청汪淸(=百草溝) 등 6개의 새로운 본당이 세워졌다. 그리고 1946년 연길 교구가 폐쇄될 때까지 용정하시龍井下市, 신참新站, 도문圖們, 삼도구三道溝, 목단강(중국인) 본당이 차례로 들어섰다.

 

본당 사목이 연길 수도원 성직수사들의 몫이라면 교회건물 건축은 주로 평수사들의 몫이었다. 연길 수도원에는 목공소와 철공소가 있었으므로 건축공사를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어디든지 새로운 본당이 설립되면 수사들은 필요한 건물을 짓기 위하여 벽돌공으로, 목수로, 철공장으로, 소목장으로 즉시 그 자리에 배치되었다. 예를 들어 라쏘 페쯔(Rasso Petz, 栢,  1901-1974) 수사는 대목장大木匠이었고, 안스가 뮐러(Ansgar Muller, 穆, 1905-1939) 수사는 소목장小木匠이었다. 그들은 기술자와 인부들을 직접 끌고 다니면서 건축현장을 지휘했다. 이들 평수사들은 숙련된 일솜씨와 전문지식으로 주민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리하여 건설현장 공사장에서 지방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선교활동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선교활동에서 평수사들이 특수한 몫을 맡아 수행하리라고 예견한 연길 지목구장 테오도르 브레허 신부는 이미 독일로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여기서는 수사님들의 역할이 아프리카와는 다른 중요성을 가집니다. 수사님들이 초등학교 외에 최소한 실업학교나 사범학교 졸업장을 가졌거나 아니면 다른 어떤 고등교육을 받지 않았다면 이곳에서의 선교활동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신부들도 중국말과 조선말을 어느 정도 구사하려면 적어도 3-4년이 걸릴 만큼 어려움을 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곳 연길 교구는 모든 일에서 전문적으로 숙련된 수사님들을 필요로 합니다. 아시아에는 본국에서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현대적인 민족들이 살고 있습니다.”

 

어떤 평수사들은 본당에 상주하며 선교활동을 돕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엥엘마르 젤너(Engelmar Zellner, 1904-1945) 수사는 팔도구 본당에 대장간을 차려놓고 교회에 필요한 기물들을 만들어 내었다. 이들 말고도 본당에 연길 수녀원에서 파견된 수녀들이 상주하면서 본당 신부들의 선교를 도왔다.  연길 수녀원은 1931년 9월 14일 스위스 캄Cham의 성 십자가 수녀원에서 파견된 수녀들이 세웠다. 그들은 1934년부터 방인邦人수녀들을 양성하기 시작하여 1944년까지 20명의 수녀를 배출하였다. 초창기부터 이들은 연길에서 병원을 운영하였는데 1935년에는 17,500명의 환자를 진료하였다. 연길 수녀원은 1933년 3월 용정하시 본당을 필두로 하여 모두 9개의 본당에 분원을 설립하였다. 그들은 훈춘, 팔도구, 용정, 명월구에 진료소를 세워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하였다. 대다수 본당에 있었던 해성학교, 해성학원 혹은 유치원에서 아이들도 가르쳤다. 물론 본당 사목을 도와 예비자 교리를 가르치거나 여성 신심 단체를 지도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들 말고도 교구 설정 초기부터 관심 있게 키워온 방인사제들과 평신도 협력자들도 있었다. 김충무(金忠武, 1910-1986) 끌레멘스 신부와 한윤승(韓允勝, 1911-1949) 필립보 신부를 시작으로 1936년부터 1946년까지 배출된 7명의 교구 사제들은 본당에서 선교사들을 보좌하며 착실히 사목활동을 배워나갔다. 1942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후 평양 대목구에서 활동하던 메리놀 외방 전교회 소속 미국인 신부들이 구금되자,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2명의 방인사제가 평양 대목구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각 본당과 공소의 회장과 전도부인들이 물심양면으로 선교 사업을 후원하였다. 특히 용정 본당의 김병화金炳火 제랄도 회장 같은 분은 평생을 교회발전을 위해 몸 바쳤던 분이고, 그밖에 많은 회장과 복사(사무장)들은 헌신적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평신도들의 적극적인 협조는 1937년부터 용정 본당이 교구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지 않고도 자체 운영을 할 수 있게 만들기도 하였다. 말하자면 연길 교구가 짧은 시간 내에 많은 결실을 맺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선교활동은 본당 신부들의 힘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일선 본당에서 사목하는 신부들과 연길 수도원의 유기적인 협조와 전폭적인 지원 그리고 전교수녀들과 교우들의 열성이 합쳐진 결과이다.

 

선교활동에 있어서 가장 주목할 사항이 바로 연길 수도원의 역할이다. 연길 수도원은 수도원 구내에 연길 교구청과 연길하시 본당이 있었으므로 이를테면 복합 선교센터 구실을 하였다. 연길 수도원은 단순한 선교 본부가 아니라 성 베네딕도의 수도규칙이 참되게 실행되는 수행의 장이기도 했다. 선교활동에 있어서 수도원의 특별한 역할은 월례 모임에서 잘 드러났다. 각 본당에서 살고 있던 신부들은 매월 수도원으로 모여 며칠씩 함께 보냈다. 며칠 동안이나마 온전히 수도자로 머물며, 내적이고 영적인 삶의 기도 그리고 성찰에 더욱 전념하게 되는 것이다. 대체로 이 기간 동안에는 선교활동에 관한 현실적 문제들에 대한 강의도 들었다. 이렇게 수도원은 그들이 언제고 다시 되돌아와서 육적으로나 영적으로 원기를 되찾을 수 있는 보금자리가 되어 주었다. 수도원에서 배양된 영적인 기운은 나중에 닥칠 시련을 이겨낼 밑거름이 되었다.

 

1946년 5월 26일 먹구름이 연길 교구를 덮쳤다. 연길수도원과 각 본당의 건물이 만주를 장악한 소련군에 의해 몰수되었다. 갖은 횡포를 부리던 소련군은 팔도구 본당을 습격하여 엥엘마르 젤너 수사를 살해했다. 소련군으로부터 권력을 물려받은 중국 공산당은 동맹국(독일, 이탈리아, 일본) 국적을 가진 선교사들은 모두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다. 이들 중 대부분은 두만강 가에 있는 남평南坪이라는 마을로 보내졌고, 일부는 팔도구에 머물렀다. 공산당군과 국민당國民黨군이 치열하게 접전하고 있던 신참에 본당 신부로 있었던 세르바티우스 루드빅(Servatius Ludwig, 柳世煥, 1907-1946) 신부가 공산군 손에 총살되었다. 30명의 연길 수도원 수사들과 3명의 연길 수녀원 수녀(나머지 수녀들은 중립국인 스위스 국적이거나 조선인이었음)들이 남평에서 강제노동을 하며 고초를 겪었다.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주님의 포도밭을 가꾸었던 주님의 일꾼들이 받은 삯은 너무나 가혹했다. 보니파쯔 쾨스틀러(Bonifaz Kostler, 高世恩, 1897-1947) 신부가 고된 수용소 생활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다행히 수용소 생활은 1947년 5월에 끝이 났지만, 상황은 더 나아질 게 없었다. 선교사들은 1949년부터 본국 귀향길에 오르게 되었다. 말이 귀향이지 실질적으로 추방이나 다름없었다. 1952년 8월 24일 팔도구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선교사들이 떠났다.

 

“하느님께서 잊으신 황량한 땅, 삭풍한설이 뼛속까지 사무치던 땅이건만 나는 그곳을 잊지 못하리니! 저기 아득한 동쪽 한 끝에 중국인과 조선인 낯선 두 민족이 섞여 사는 곳, 익히기 힘들었던 언어와 풍속, 득실거리던 마적들의 패거리, 뜬 눈 으로 지새운 길고 긴 공포의 밤, 입에 맞지 않았던 된장국과 김치찌개, 빈대, 벼룩, 바퀴, 모기에 뜯기던 산간의 공소집. 한 달 반을 앓았던 죽음의 병 장티푸스, 잔인한 살인마 일제의 더러운 군화 소리, 흉탄에 쓰러진 주님의 용사 박 곤라도 신부님, 핏빛처럼 빨갛게 물들어간 대지, 바빌론의 드발 강을 닮은 한탄의 두만강, 남평에서의 비통한 유배생활, 목구멍에 걸리던 거친 고량밥. 거기 주님의 종은 사랑을 뿌렸고 가시덤불을 뚫고 길을 가르쳤으며, 화전을 일구어 생명을 심었었지!” 복음 선포를 위해 청춘을 바쳤던 어느 선교사가 제2의 고향 같은 북간도를 떠나며 남긴 회한이 아직도 듣는 이의 마음을 저민다.

 

[분도, 2008년 겨울호, 글 편집실, 사진제공 역사자료실]



2,035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