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0일 (금)
(백)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북간도를 떠나는 베네딕도회 선교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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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11-12 ㅣ No.727

[역사 한 페이지] 북간도를 떠나는 베네딕도회 선교사들

 

 

1947년 9월 27일, 연길 교구의 유서 깊은 교우촌, 팔도구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공산주의자들이 주동이 되어 열린 청산대회에 팔도구 본당의 레지날도 에그너(Reginald Egner, 王?道, 1906-1975) 주임 신부와 허창덕 치로(許昌德, 1919-1992) 보좌 신부가 끌려 나온 것이다. 두 신부는 죄명과 성명을 쓴 종이 간판을 가슴과 등에 붙이고, 운동회 때 쓰는 터키 모자 같은 마분지로 만든 고깔모자까지 썼다. 청산대회장으로 들어오기 전에 그들은 이미 40-50분 동안 온 동네를 돌며 조리돌림을 당했다. 두 신부는 다른 청산 대상자들과 함께 새끼줄로 목이 묶인 채 열을 지어 돌아다녔고 같은 복색을 한 마을 구장이 꽹과리를 치며 행렬을 이끌었다. 치욕감과 모멸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끌려 나온 신부들의 죄목은 41건에 달했으나 모두 황당무계한 거짓말들이었다. 신부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혹독한 고문을 당했고, 물푸레나무 몽둥이와 가죽 채찍으로 두 번이나 거의 죽을 정도로 뭇매를 맞았다. 팔도구 본당의 모든 재산은 몰수당했고 신부들은 10월 24일에야 병보석으로 가석방되었으며, 11월 9일에는 스스로 노동으로 생계를 해결할 것과 성직자 자격을 박탈한다는 조건으로 3년 동안 지방구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허창덕 신부는 그 후 팔도구를 떠나 남한으로 내려왔고, 레지날도 신부는 산으로 들로 끌려 다니며 강제 노역에 시달렸다. 1948년 9월 26일, 본당을 돌려받은 레지날도 신부는 악착같이 성당을 지켰다.


1950년 11월 2일, 연길에 잔류했던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이 팔도구 본당으로 쫓겨났다. 공교롭게도 그날, 독일로 귀환한 테오도로 브레허(Theodor Breher, 白化東, 1889-1950) 주교 아빠스가 상트 오틸리엔(St. Ottilien) 수도원에서 선종했다. 테오도로 주교 아빠스의 선종 소식은 11월 8일 선교사들에게 전해졌다. 11월 25일 교황사절 리베리 대주교는 라이문도 아커만(Raymund Ackermann, 田, 1898-1983) 신부에게 교황이 그를 연길 교구장 서리로 임명했다고 전달했다. 성탄절 전날 안스가리오 뮐러(Ansgar Muller, 毛安世, 1913-1987) 신부와 스테파노 그난(Stefan Gnann, 具, 1895-1970) 수사가 독일로 귀국하자 팔도구에 남은 선교사들은 모두 일곱 명이었다. 라이문도 아커만 신부, 발뒤노 아펠만(Balduin Appelmann, 裵光被, 1902-1975) 신부, 레지날도 에그너 신부, 미카엘 퓌터러(Michael Futerer, 郭美傑, 1912-1998) 신부, 아르놀드 렌하르트(Arnold Lenhard, 盧道柱, 1905-2003) 신부, 안셀모 벤츠(Alselm Benz, 范安治, 1911-1996) 신부, 베르툴포 메츠(Bertulf Metz, 溫, 1902-1972) 수사, 이들이 북간도에 남은 마지막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이었다.

외양간에 벽을 치고 땅을 파 아궁이를 설치한 다음 일곱 명이 그곳에 살았다. 나무 선반 두 개를 붙여 식탁을 만들고, 저녁에는 식탁을 치워 잠자리를 마련했다. 그들은 소 한 마리에 기대어 농사를 짓고 생계를 이어 가야 했다. 신자들이 눈치를 보아 가며 그들을 도와주고 음식을 챙겨 주려 했지만 공산당 간부들이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사목활동은 제한되었지만 다행히 미사는 금지되지 않았다. 신자들은 밤에나 밭에서 일할 때 선교사들을 찾아왔다. 선교사들은 귀향에는 관심이 없었다.

1951년 5월, 중국 공산당은 혹독한 반종교 선전활동을 시작했다. 이 선전활동을 통해 공산당은 삼자(三自), 즉 교회 행정 자립, 교회 재정 자립, 교회 선교 자립을 강조했다. 외국인 선교사를 추방하려는 속셈이었다. 새로 구성된 사목위원회가 성당 열쇠를 넘겨받고 레지날도 신부의 성당 출입을 막았다. 사목위원회가 신자들끼리 성찬례를 하자고 제안했으나 신자들이 거부했다. 신자들은 신부 없이 성찬례를 거행하라는 무리한 요구에 조목조목 반박했다.

1951년 성탄절에는 몰래 숨어 미사를 드렸다. 사제 숙소를 지키는 경비병 때문에 신자들은 이웃집으로 가서 담장을 넘어 신부에게 왔다. 망보던 젊은이들은 맨 마지막에 들어왔다. 신부 여섯 명이 동이 틀 때까지 차례로 미사를 집전했다. 참석한 신자 모두 판공성사를 보고 미사를 드린 다음 조용히 돌아갔다. 이튿날에는 용정, 두도구, 연길에서도 신자들이 찾아왔다. 1952년 봄에는 몰래 드리는 미사마저 불가능해졌다. 감시의 눈초리가 점점 따가워졌다. 공산당은 신부를 방문하는 사람은 모두 체포하여 처벌하겠다고 위협했다. 7월부터 신자들은 신부들을 고발하라는 강요에 못 이겨 신부들에게 스스로 떠나 줄 것을 요청했다. 공산당은 유럽인 선교사가 떠나면 연길에서 중국인 신부가 정기적으로 팔도구를 방문할 것이라고 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선교사들이 계속 머무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마침내 선교사들은 귀국을 결심했다.

1952년 8월 25일 저녁, 공산당 간부가 선교사들에게 한 시간 내로 30킬로미터 밖 연길역으로 가라고 통지했다. 1921년 처음 북간도에 왔을 때처럼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은 다시 걸어서 이 땅을 떠나갔다. 성 베네딕도회 오딜리아 연합회의 북간도 선교활동은 이것으로 종료되었다. 그러나 끝이 아니었다. 독일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이 지난 30년 동안 뿌려 놓은 신앙의 씨앗은 그 후 30년 동안 불어 닥친 혹독한 탄압과 박해의 광풍을 이겨냈다. 1985년, 오딜리아 연합회 총재 노트켈 볼프(Notker Wolf) 총아빠스가 연길을 방문했을 때, 얼어붙은 땅을 뚫고 피어난 들꽃 같은 신자들 무리를 발견했다.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이 운영하던 연길 교구의 19개 본당 중 연길, 팔도구, 화룡, 도문, 훈춘, 돈화 등 6개 본당이 아직도 명맥을 잇고 있다.

* 자료 정리 편집실, 참고 자료 하느님의 자비를 영원토록 노래하리라(분도출판사, 1993), 芬道通史(분도출판사, 2009)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14년 겨울호(Vol.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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