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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연길교구: 악몽의 193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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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11 ㅣ No.402

[연길 교구 설정 80주년 기념 특집] 악몽의 1932년

 

 

그해는 유난스러웠다. 가뭄이 계속되고 무서운 흉년이 닥쳐왔다. 그러고는 끔찍한 돌림병이 북간도 지역을 휩쓸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이태 전에 일본 관동군은 만주를 장악하고 만주국을 세웠다. 방방곡곡에 일본군이 주둔하였고, 패잔한 중국군은 마적이 되어 재산약탈과 양민학살을 일삼았다. 공산 빨치산이 날뛰었고, 조선 독립군의 의거가 잇달았다. 불안한 정세는 조선인, 중국인 할 것 없이 모든 주민들을 전전긍긍 밤낮으로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비극의 전주곡은 팔도구八道溝에서 시작되었다. 1932년 3월 5일 만주, 특히 간도 지방을 휩쓴 장티푸스가 앞날이 창창한 하느님의 소중한 일꾼 하나를 앗아가 버렸다. 팔도구 본당 피우스 엠머링(Pius Emmerling, 嚴威明, 1886-1932) 보좌신부가 병마에 쓰러졌다. 그리고 석 달 후 대령동大嶺洞 본당에서 사목을 펼치던 두 젊은 신부가 장티푸스로 목숨을 잃는다. 5월 27일 엥엘베르트 뮐러(Engelbert Muller, 穆, 1901-1932) 보좌신부가 사망하였고, 6월 4일 실베스터 아쇼프(Silvester Aschoff, 安, 1900-1932) 주임신부가 뒤를 따랐다. 선교지로 파견된 지 3-4년 밖에 안 되었던 이 두 신부는 인자한 성품으로 교우들의 사랑을 한 몸으로 받아왔다. 대령동 마을은 통곡의 골짜기로 바뀌었다. 장상인 테오도르 브레허(Theodor Breher, 白化東, 1889-1950) 신부는 속수무책으로 그들의 죽음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가슴이 찢어지는 괴로움 속에 장례를 치렀다.

 

뒤이어 연길 교구 전체를 뒤흔들어 놓을 사건이 벌어졌다. 아마도 교구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꼽힐 것이다. 아쇼프 신부의 장례식에 참석하러 대령동으로 오던 콘라드 랍(Konrad Rapp, 朴敎範, 1896-1932) 신부가 6월 5일 차조구굮條溝에서 일본군에게 살해되었다. 랍 신부는 용정龍井 본당 주임이면서 연길 지목구 부감목副監牧(총대리)을 맡고 있었다. 그는 교구 내 모든 신부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고 활기차게 전례운동을 펼치고 있었으며 언젠가는 교구장인 브레허 신부를 대신 할 인재였다. 사건의 전모를 살펴보면 더욱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다. 용정에서 말을 타고 대령동으로 오던 랍 신부가 차조구에 당도한 시각은 해거름이었다. 대령동 인근 차조구에 철도를 경비하기 위하여 일본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말을 탄 채 일본군 부대 앞을 지나가던 그를 일본군 초병이 나와 제지하자, 그는 잠깐 말을 멈추고 명함을 건넸다. 그런데 초병이 명함을 집어 던지고 다짜고짜로 그를 말에서 끌어내리고 다른 군인들과 함께 폭행하였다. 이를 목격한 교우 청년 하나가 대령동으로 급히 달려와 이 사실을 알렸다. 우선 브레허 신부가 일본군 부대로 가서 랍 신부가 폭행당하는 현장을 확인했지만 손을 쓸 도리가 없어 돌아왔다. 그는 다시 발두인 아펠만(Balduin Appelmann, 裵光被, 1902-1975) 신부와 꼬르비니안 슈레플(Corbinian Schrafl, 周聖道, 1901-1990) 신부와 함께 일본군 부대로 갔다. 일본군 측에서 총을 쏘며 위협했으므로 그들은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동이 틀 무렵 노심초사하고 있던 그들에게 랍 신부가 총살당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고 브레허 신부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석 달 사이에 교구 내 많지도 않은 신부 중에 네 명을 잃었다. 더구나 아끼던 부감목 신부를 잃었기에 비통한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일본군은 콘라드 랍 신부의 시신을 부대 근처에 있는 강가 모래밭에 파묻어 사건을 은폐하려고 하였다. 시신은 기적적으로 발견되었다. 랍 신부가 한 교우의 꿈에 나타나 자신이 묻혀있는 곳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연길 수도원으로 시신이 운구 되는 도중에 일본 경찰이 나타나 일방적으로 검시檢屍하였다. 많은 교우들이 운구행렬을 따라가려고 했지만, 일본 경찰은 네 사람 말고는 따라가지 못하게 하였다. 브레허 신부는 사건의 전모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보고하였고, 봉천(奉天=瀋陽) 주재 독일 대사에게도 같은 내용을 통보하였다. 두 주 후 독일 영사가 연길로 와서 브레허 신부를 동행하고 용정에 있는 일본 총영사관에 가서 항의하였지만, 그들은 “도저히 근거가 없는 이야기다. 천황의 군대는 절대로 그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라며 일축해 버렸다. 콘라드 랍 신부 살해 사건은 종결되지 않은 채 남았고, 되려 브레허 신부가 일제당국으로부터 요시찰 제1호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북간도 천주교회를 책임졌던 브레허 신부에게 1932년 한 해는 길기만 했다. 앞서 세 명의 신부들의 목숨을 앗아간 장티푸스는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집집마다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모든 신부들은 종부성사와 노자성체를 주기에 바빴으며, 따라서 그들은 병에 완전히 노출되어 살았다. 예방약도 없었던 시절이므로 이 병에 걸리면 체력으로 이겨내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 해 9월, 명월구明月溝에 있는 꼬르비니안 슈레플 신부가 장티푸스에 걸려 쓰러졌다. 브레허 신부는 슈레플 신부를 용정에 있는 제창병원濟昌病院에 입원시키고 꼬박 24일 동안 그의 병상을 지켰다. 그러고는 다시 훈춘으로 달려갔다. 엑베르트 되르플러(Egbert Dorfler, 鄭默德, 1898-1986) 신부가 같은 병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되르플러 신부가 회복하자마자 그는 팔도구에 있는 아도 트라볼드(Ado Trabold, 張, 1904-1983) 신부에게 달려가야 했다. 참으로 눈물겨운 장상의 십자가 길이었다. 너무나 소중한 주님의 일꾼들이었기에 브레허 신부는 한 명이라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는 온갖 정성을 다하여 신부들의 병구완을 했다. 그의 애틋한 마음을 하늘이 아셨는지 신부들은 차도를 보였다. 앓던 신부들이 병상에 일어나 사목 현장으로 다시 나갈 무렵, 다사다난 했던 1932년은 어느덧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악몽에서 벗어난 테오도르 브레허 신부가 올렸던 그해 성탄절 미사는 그 어느 때보다 절절했을 것이다.

 

[분도, 2008년 겨울호, 글 편집실, 사진제공 역사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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