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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영정미사와 평생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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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11-17 ㅣ No.554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영정미사와 평생회원


부모는 죽어서도 말한다고 한다. 평소 귓등으로 스쳤던 말들이 돌아가신 다음에 시시때때로 곳곳에서 가슴에 꽂힌다는 말이리라. 그래서 우리는 먼저 가신 부모님을 단 5분만이라도 다시 뵐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 모두는 돌아가신 부모님께 단번에 터져 나올 거 같은 말을 품고 사는지도 모른다, “사랑했어요, 용서하셔요~!” 그런데 그 부모님이 당신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연옥에 계신다면 우리는 모든 힘을 다해 무엇이든 하게 된다.


영정미사와 그 예물

대구교구청은 1964년에 큰 불이 났다. 이때 많은 사료들이 교구청 건물과 함께 타버렸다. 대구대교구는 초기 한반도 남쪽을 전부 관할하였으므로, 이 화재에 대해 전주교구, 광주대교구, 심지어는 부산교구, 마산교구, 안동교구도 안타까워한다. 뿌리가 되는 사료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 화마에서 살아남은 사료 중에 아슬아슬하게 남은, 가장자리는 그슬리고 본체는 온전한 장부가 있다. 바로 영정미사 장부이다.

영정(永定) 미사는 신자가 토지나 전답을 교회에 기증하고 교회는 거기서 나오는 수익금을 예물로 하여 생미사나 연미사를 봉헌하는 제도이다. 논이나 밭과 같은 토지는 매년 고정적으로 수익이 생긴다. 그래서 이를 교회에 기증한 신자는 따로 미사예물을 준비할 필요 없이 자신을 위한 생미사나 위령미사를 봉헌하게 된다. 이 때문에 신자들은 생전에 토지나 전답을 교회에 기증하고 자신을 위한 위령미사를 부탁했다. 성당의 제의방에는 날짜별로 정리된 영정미사 대장이 있었다. 사제는 미사를 드리기 전에 이를 보고 그날의 미사 봉헌자를 기억했다.

교구는 초기부터 영정미사를 운영했다. 영정미사의 접수는 반드시 교구장의 허락을 얻어야 하며, 그 기금은 토지를 원칙으로 했다. 「대구대목구 사목지침서」(1912년) 86항에는 ‘기금을 받을 경우 오직 밭이나 논 같은 토지 재산으로 한정하며 집이나 다른 건물은 받을 수 없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물론 그 토지는 확실한 수익이 보장되어야 한다. 가령 논이 비 피해나 가뭄의 피해를 쉽게 당하는 곳에 있어서는 안 된다. 교회에서는 현금자산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를 기증받은 신부는 주교의 동의하에 가능한 빨리 적당한 토지를 구입해서 등기해야 했다. 사정이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돈을 당가신부에게 보내고 토지를 구입할 때까지 교회가 정한 규정에 따라 그 이자를 미사예물로 사용했다. 이 경우 미사 집전은 신부가 증여자에게서 돈을 받았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후임신부들이 미사를 집전할 의무는 토지가 등기된 이후부터였다.

영정미사 예물의 액수는 사목지침서 발간 당시 자산 100엔 이상이었다. 그때 100엔은 교구행정상 재무평의회와 주교의 허락을 얻어야만 사용할 수 있는 액수였다. 예를 들면, 신부가 교구청에 청하는 대출금이 100엔을 넘는 경우에는 재무평의회와 주교의 허락을 얻어야했다. 또 당가신부가 물품을 구입할 때 100엔이 넘는 경우는 주교의 허락을 얻어야 했다. 보통 현장미사 금액이 1엔인 시절이었다. 영정미사 예물은 토지에서 나오는 수익금으로 운영되므로 당시 토지의 가격과 그 넓이, 소출을 다시 계산해야 하지만 어떤 조건이든 100엔이란 적은 액수는 아니었다. 일제시기 이를 기부할 수 있는 신자는 많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자신의 재산을 임종시에 기증할 수도 있었으므로 그 가능성이 확대되었다. 그래서 교회는 기증된 토지가 증여증서면 그것은 기증자의 이름으로 등기되었을 때에서야 기증이 실행된다는 규정도 가지고 있었다. 현실적으로는 자신의 위령미사를 마련한 사람이 적지 않아서인지 영정미사 장부는 두툼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영정미사 기금은 적지 않은 액수이고, 또 생미사와 연미사를 포함하는 긴 시간의 예물이기 때문에 중간에 변동도 생겼다. 어떤 이는 토지를 교회에 기증하고서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 수익금을 자신이 쓰고, 자신이 죽은 뒤부터 그 토지수익금으로 자신을 위한 위령미사를 드려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은 1936년부터는 허락되지 않았다. 또 맡긴 토지나 재원을 다시 찾아가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해당 토지는 변경되었으므로 영정미사 의무 없음’이라는 부기가 붙어있는 대장들도 있다. 드망즈 주교는 이 기금에 대해 철저히 정리하도록 부탁했고, 담당신부들은 이를 정례적으로 보고했다.

한편, 해방이 되면서 교구에서는 영정미사로 바친 재산이 혹시 미사대수가 변경되거나 혹은 변화가 있다 하더라도 이를 인정한다는 신자들의 허락서를 받아서 대장에 붙여 놓았다. 영정미사 예물 자체가 주교의 허락 아래 이루어진 것이므로 이 허락서도 주교 앞으로 되어 있다. 이 날짜가 대부분 해방직후인 것으로 보아 토지개혁을 염두에 둔 조처였다.

또 가톨릭대사전에는 ‘8.15광복 후 토지개혁이 실시되면서 이러한 영정미사는 없어졌다.’라고 하지만 이 제도의 존속기간은 지역마다 달랐다. 새로 미사 예물을 받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그 처리는 매우 길었다. 대구대교구내에서도 이 제도의 운용은 지역에 따라 차이가 난다. 일반적으로 김천이나 상주 등지의 왜관 베네딕도 수도원이 관리했던 지역에 영정미사 제도가 오래 남았다. 1988년 이문희 대주교는 본당신부가 단독으로 영정미사 예물을 수락하거나 계약하는 일을 금했다. 또 이미 영정미사 계약을 단독으로 했거나 교구의 지시를 받아 행했을 경우라도 총대리 신부에게 다시 보고한 후에 그 지시를 따르라고 명했다. 이렇듯 일부지역에서는 1980년대까지도 영정미사가 존속했다.


기도서, 전례서의 연옥

영정미사는 바로 연옥영혼과 관계가 깊다. 한국 신자들은 일찍부터 연옥영혼에 대한 이해가 있었다. 천국에는 흠결 없는 사람만이 들어가는데,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영혼의 흠집, 흠결을 정화하는 데가 연옥이며, 연옥에서 단련을 받고 있는 영혼이 곧 연령(煉靈)이라고 생각했다.

연옥에 대한 교리는 1784년 교회창설 전후로 읽혀지던 한문서학서를 통해서 조선에 전래되었다. 박해시대의 대표적 기도서인 『천주성교공과』 기도문 가운데는 신자들이 매일 저녁에 바치는 ‘만과(晩課)’가 있다. 만과의 한 부분에는 새로 죽은 이가 있을 경우 “성모께 간절히 비나니 전차로 천주께 구하사, 새로 죽은 (아무)의 영혼이 연옥 형벌을 면하고 기리 평안함을 누리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게 했다. 또한 공과에서는 ‘추사이망(追思已亡) 첨례’, 즉 현재의 ‘위령의 날’에는 ‘연옥도문’을 바치도록 했고, ‘죽은 부모를 위한 기도문’이나 죽은 이를 위한 ‘찬미경’을 통해서 연옥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확인시켜 주고 있다. 또 『성경직해』에서는 연옥의 존재를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연옥영혼들은 천당영복을 알되 누릴 수 없고, 천주의 영광을 생각하고 바라지만 얻지를 못하는 고통을 당하는 존재로 규정했다. 그러나 이 고통은 친척과 친우들의 기도와 희생을 통해서 단축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연옥의 고통은 지옥의 고통과 동일하지만, 그 고통에서 벗어날 기한이 있어 지옥의 고통과 다르다고 설명했다. 『성교예규』에서도 같은 설명을 했다. 교회에 대한 공식적 박해가 끝난 1880년대에 이르러서는 연옥에 관한 교리가 교리서를 통해 신자들에게 직접 교육되기 시작했다. 1884년에 간행된 『성교백문답』이나 1894년 르장드르 신부가 지은 『사후묵상』과 같은 교리서의 단계에 이르러 연옥은 본격적으로 설명되었다.

한편, 박해시대 신자들이 불렀던 노래인 ‘사향가(思鄕歌)’, ‘피악수선가’ 등의 “천주가사”에서도 연옥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별가’에서는 〈반생반사 임종시에 못가본게 웬일인가 / 미묘사정 남아있어 연옥으로 가셨는가 / 질둔하온 이인생이 공경못한 한이로다 / 주대전에 꿇어안자 형의영혼 위로할제 / 연옥도문 제성할제 찬미경을 살펴보니 / 이세상을 어서떠나 천당으로 어서가서 / 천주대전 하례하고 우리형님 다시만나 / 미요하온 형제사정 무궁세에 하여보세.〉라고 하여 애끓는 형제애와 함께 연옥영혼을 걱정하고 있다.


평생회원을 위한 연미사

교회의 여러 제도나 관습도 시대와 함께 변한다. 영정미사는 요즈음 신자들에게는 그 단어조차 낯설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연옥영혼을 위한 신심은 이어져 오고 있다. 그래서인지 요즈음은 평생회원, 특히 죽은 이들이 회원이 되는 제도가 나타나고 있다. 현재 대구대교구 단체로 평생회원을 받고 있는 곳은 한티순교성지, 관덕정 순교성지 등이 있다. 그런데 한티성지는 평생회원이 선종하면 그 회원을 위한 연미사를 석 대 드려주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한편, 관덕정 순교성지의 순교자현양후원회원의 회원은 일단 평생회원으로 가입하면, 살아서는 생미사, 죽어서는 연미사를 드려준다. 그런데 최근에는 죽은 이를 대신하여 그의 이름으로 가족이나 친지들이 평생회원으로 가입하기도 한다. 관덕정에서는 매월 첫째 토요일 후원회원을 위한 미사 중 신입회원을 위한 후원회원증 수여가 있다. 이때, ‘고 아무개 씨’라고 부르면 살아있는 사람이 회원증을 대신 받는다. 또한 진목정 성지에서는 현재 진행 중인 납골당이 완성되면, 그 영혼들을 위해 매일 미사를 드린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이처럼 연옥영혼을 위한 미사는 가톨릭의 또 하나의 지극한 신심이다. 원래 연미사는 연옥영혼을 위한 것이지만, 우리 경우에는 추모의 의미도 담고 있다. 조상이 연옥단련을 끝내고 이미 천당에 갔을지라도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애틋한 마음의 표현이다. 연옥영혼을 위한 기도는 산 이와 죽은 이의 통공과 죄의 용서를 믿는 또 하나의 실천적 행위이다. 또 그것은 잠깐만이라도 한 번 더 보고 싶은 망자들을 생각하는 마음이기도 하다.(도움 : 조광, 「연옥단련에 대한 생각」, 『경향잡지』, 한티성지와 진목정성지의 사무장, 관덕정성지, 상전재)

* 김정숙 교수는 영남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관덕정순교기념관 운영위원, 교구 100년사 편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월간빛, 2012년 11월,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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