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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한국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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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12-15 ㅣ No.396

[특별 기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한국교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 50주년을 회고하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가톨릭교회 역사에 획기적인 개혁과 쇄신의 발자취를 남긴 대단한 업적이었다. 그러나 이 공의회가 요한 23세 교황 한 분의 영감과 결심으로 하루아침에 소집되고 개최된 것은 아니다. 오랜 역사 속에 그리스도 신자들이 겪은 신앙의 체험과 성장과 깨달음이 축적되고 연마된 이후 성령의 특별한 도우심으로 출산된 열매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가톨릭교회가 구원을 향해 오랜 세월 동안 성찰하고 고뇌하고 행동하며 도달한 혁명적인 자아혁신의 위업이었다. 이 공의회를 올바로 이해하고, 공의회의 결실을 제대로 소화하고 우리들의 현실 속에 살려나가려면 이 공의회가 이루어지기 전의 역사적인 과정에 대한 고찰이 전제되어야 한다.


1. 세속의 왕국과 그리스도 왕국의 형성

1.1 세속의 왕국의 그리스도교화

1.1.1 초대 그리스도교는 처음 2세기 동안 많은 박해를 받고 고초를 겪었으나 시련 가운데에서도 꾸준히 성장하였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으면서도 그 제자들의 공동체가 오히려 그 십자가 밑에서 새롭게 발아하였다. 또 초대 예루살렘 공동체에 닥친 박해는 제자들을 이스라엘 타 지역으로 피신하게 하면서 오히려 신앙의 씨앗을 이스라엘 전역과 로마 제국의 여러 지역으로 널리 퍼뜨렸다.

그리고 로마 제국의 박해는 타고 있는 모닥불에 기름을 끼얹듯 더욱 그리스도교를 여러 나라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교에 가해진 박해와 시련은 그리스도 공동체를 더 넓은 지역으로 더 강인하게 생존하게 하였다. 3세기 말에는 이미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가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이탈리아 지역, 프랑스 지역 남부, 독일 지역 남부, 아프리카 북부 지역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었다.

1.1.2 4세기에 들어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로마 제국에 그리스도교의 존재를 합법화하고 종교자유를 공인한 이후, 교회는 비교적 안정적인 성장기를 맞으며 제도화를 통하여 지하에서 지상으로 상승하며 공적인 종교로서의 꼴을 갖출 수 있었다. 하지만 이때부터 교회는 세상 속에 제자리를 잡으면서 세상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곧, 교회가 세상 안에 너무 깊숙이 자리 잡으면서, 교회가 세상을 복음적으로 변화시키는 주역이 되어야 하는데거꾸로 세상의 문화와 가치가 교회를 세속화하게 만드는 단초를 제공하게 되었다. 그로써 교회는 그 정체성 형성에 새로운 문제를 끌어안게 되었다.

5세기 들어가서는 북쪽으로부터 고트족, 훈족 등의 침략으로 로마 제국 붕괴가 시작되면서 가톨릭교회는 다시 박해에 시달리며 많은 어려움에 처했다. 그럼에도 교회는 이 새로운 시대에 대응하며 이방세계로부터 쳐들어온 침입자들에게도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펼치며 위기를 극복해 나갔다.

1.1.3 북방 민족의 남침으로 빚어진 혼란 속에서 북부 갈리아 지역을 다스리던 클로비스 왕은 유럽 대륙 곳곳에서 전투를 벌이며 정치적 안정을 추구하였고, 가톨릭 신자인 클로틸다 공주와 혼인, 496년 부하 3천 명과 함께 세례를 받고 가톨릭 신앙을 수용하였다. 그 후 여러 지역 가톨릭 주교들의 신임과 후원을 받으며 왕국의 영토를 확장해 나갔고 서쪽으로는 피레네 산맥, 동쪽으로는 라인 강 유역, 남쪽으로는 알프스 산맥까지 세력을 넓혀갔다. 주교들의 협력과 인정이 없었으면 그렇게까지 세력을 확장해 나가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라고 역사가들은 평한다. 이로써 클로비스 왕은 이교도들과 로마 제국의 갈리아 지역 모두를 통일하는 프랑크 왕국을 세웠다. 이로써 중세 그리스도 왕국(크리스티아니타스, Christendom)의 초석이 세워지게 된 셈이었다.

그리스도 왕국이란 그리스도 신앙을 토대로 지상에 이상적인 하느님 나라 실현을 꾀하는 구체적인 시도였다. 그러나 실제로 이 그리스도 왕국이 완성된 것은 훨씬 후대인 800년대 샤를마뉴 시대에 이르러서였다. 이 시대의 임금들은 자신이 그리스도 신자로서 지상에 하느님의 뜻을 구현하는 그리스도 왕국을 확립할 책임을 짊어진 사람으로 인식하면서, 자신이야말로 지상의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그리스도 왕국의 성립은 유럽 대륙에서 정치와 종교의 융합, 신정정치 체제의 확립이라는 현상을 초래하였다.

1.1.4 샤를마뉴는 자신이 이 지상 그리스도 왕국의 최고 통치권자로 군림하면서 교황까지도 자신의 지배하에 두고 명령하려고 하였다. 교황은 처음에는 교회를 박해하는 이교도 출신 제왕들에게서 교회를 지키려고,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인 클로비스 이후의 프랑크 왕국의 왕들과 협력하며 그들에게 교황축복을 내리며 협력하는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후대에 가서 샤를마뉴의 권력이 교회 내부까지 장악하려 들자 교회는 더 이상 제왕의 절대권력을 용납할 수 없었다. 교황은 교회 권위의 자유를 유지하려고 교회의 독자적인 관할 영역을 정하고 제왕으로부터의 독립성을 지켜나가려 하게 되었다.

1.2 그리스도교의 세속화

1.2.1 교회는 교회의 독자적인 운영 재량과 자유를 유지하려고 교황령이라는 실제의 지상 왕국을 소유하면서 교황이 그 왕국을 다스리는 실제의 정치적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다. 현실적으로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로마 지역을 다스리는 책임은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파견한 총독에게 있었으나, 총독은 이탈리아 북쪽 라벤나에 머무르면서 이탈리아 지역에 대한 통치를 거의 포기하고 있었다. 따라서 실제로 로마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 중부 지역을 다스린 것은 교황이었고 백성들도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교회는 이렇게 중세 이후 오랜 세월 동안 지상에서 구체적인 영토를 보유하고 다스리면서 신정체제를 확립하게 되었다. 또 실제로 이교도인 야만족의 침략으로 로마 제국의 붕괴까지 이어지면서 지도자를 잃은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자 교회는 백성들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서도 직접 정치에 관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6세기경에는 지금의 독일 남부쪽에 해당되는 지역의 롬바르드 족이 알프스를 넘어 밀라노까지 장악하자 밀라노 주교도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롬바르드 족은 북부 이탈리아를 점령하고 차츰 남하하였고 579년에는 로마까지 포위하였다.

1.2.2 이런 때에 로마에 그레고리오라는 인물이 등장하고 다양한 외교적 노력으로 로마를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그는 원래 고귀한 귀족 가문 출신으로 로마 시장까지 지낸 사람이었으나 독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며 속세를 떠나 수도생활에 귀의하고, 물려받은 유산을 털어서 수도원을 건립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레고리오는 자신의 집까지도 수도원에 기증, 금욕과 고행의 수도생활에 전념하기도 했다. 590년에 교황좌가 공석이 되자 로마 시민 모두가 그를 억지로 교황으로 추대하였다. 대 그레고리오 교황은 교회 안으로는 쇄신을 추진하고 외적으로는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추진하여 명실 공히 중세의 그리스도 왕국의 기초를 다진 교회 측 인사였다.

그레고리오 교황의 업적

1) 교황좌를 이탈리아 중부의 실제적인 통치자로 확립.
2) 서방교회에서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확립(다만 아직 스페인과 프랑스 지역 교회는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3) 이방인(이른바 야만민족)들의 개종과 앵글로색슨의 개종도 추진.
4) 중세 교회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방대한 신학적, 영성적 저작물 씀.

1.2.3 8-9세기에 이르는 시대에 세속 왕국의 제왕들과 교황 사이에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기도 하고 이용도 하는 복합적인 상호협력 관계에 있었다. 제왕들은 그들의 세속 권력에 대한 정당성을 보장받으려고 교황의 축복과 교황과의 원만한 관계를 필요로 했고, 또 교황은 교황대로 외부로부터 침략해 들어오는 이교도 민족들로부터 교회를 지키고 대항하려고 제왕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러나 교회의 이런 입장은 세속을 다스리는 권력층과 끊임없는 경쟁과 긴장관계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19세기까지도 교황은 세속의 제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경쟁과 긴장의 줄타기를 하였고, 또 그들과의 관계에서 비교우위를 차지하며 교황의 정신적 지도력의 절대성을 드러내기 위해서도 교황이 직접 다스리는 지상의 왕국을 유지하였다.

1.3 교회의 탈세속화

1.3.1 그러나 역사가 흐르면서 갈수록 교회가 소유하던 세속적인 지배의 영역이 좁아지고 구체적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정치권력을 포기하는 압력을 받게 되었다. 1848년에는 로마 자체가 혁명으로 혼란에 빠지고 비오 9세 교황은 이탈리아 혁명군에 쫓겨 로마를 떠났다. 프랑스는 그때 이미 혁명정부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은 이념적으로 반가톨릭적이었고, 가톨릭 성직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박해하였다. 혁명의 분위기가 유럽 전체를 휩쓸자, 유럽 대륙은 자유주의 사상이 크게 대두하였고, 여기에 과학기술의 발전이 겹치면서 세상은 탈그리스도적 문화를 형성해 갔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한 교회는 자유주의 사상과 과학기술의 발전을 두려워하고 세상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

1.3.2 19세기의 교황들은 교회를 사회의 중심에서 밀어내려는 정치적, 이념적으로 반가톨릭적인 세력과 정부에 맞서서 교회의 지위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반가톨릭 세력이 유럽 전역에 영향을 증대하는 가운데 비오 9세 교황은 교회의 안전을 지키려고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이것이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년)였다.


2. 제1차 바티칸 공의회

2.1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배경과 목표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유럽에 혁명적인 혼란을 야기한 원인에 대항하려고 개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오 9세 교황은 공의회 개최 목적을 “그리스도교 국가의 지적이고 윤리적인 혼란을 적절히 치료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교황은 반가톨릭적 사조와 자유주의적 현대사상들을 단죄하는 데 세계의 주교들이 공의회에서 합의해 주기를 바랐다.

결과적으로 공의회는 교황이 교회의 대변자로서 신앙과 윤리에 관한 정의를 내릴 때 그르칠 수 없다는 무류성의 교의를 선언했다. 그리고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황이 모든 가톨릭 신자에게 직접적인 권한을 행사하며 가톨릭교회의 모든 개인과 제도를 다스릴 수 있다고 규정했다.

2.2 제1차 바티칸 공의회 우선 과제와 한계

1870년 이탈리아의 민족주의자들이 로마를 점령하자 교황이 직접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대부분의 영토는 사라졌다. 비오 9세 교황은 공의회를 무기한 연기했다. 이 때문에 세상 속에서 수세에 몰리고 위기의식을 갖고 있던 교회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하여 이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교회 전체의 역할을 재평가하고 교회의 위상을 되살리려고 교회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자 하였으나, 교황의 역할에 관해서만 정의를 내리고 끝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세상에 새롭게 등장하는 미지의 문화, 과학기술의 연구와 발전들로부터 자신을 수호하려고 교회의 울타리를 높이 쌓아 올리는 작업에 주로 몰두한 셈이었다. 이 시대의 교회는 현대주의(Modernism)를 제지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모든 사제가 현대주의를 배척한다는 선서를 해야 했고 모든 교구에 감시위원회가 설치되기도 하였다(1967년 폐지).

2.3 제1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교회 변화

그러나 현대의 새로운 학문적 연구의 물결은 교회 안에도 서서히 밀려왔고, 교회 안에도 현대주의 사조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해서도 새로운 질문을 하고 새로운 해답을 추구하게 되었다. 모더니스트인 가톨릭 학자들은 이러한 질문을 제기했다.

“문학작품이 비평의 과정을 통하여 그 정확한 메시지를 해독해 낼 수 있는 것처럼 성경도 그런 문학적 비평의 과정을 거치면서 올바른 해석이 가능하지 않은가? 성경 안의 여러 가지 내용은 현대 과학에서 말하는 것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지 않은가?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태초의 창조 과정을 물리학적으로 규명하는 학술서는 아니지 않는가? 교회는 예수님께서 세우시려고 했던 교회 그대로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교회 안에 이미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싹을 키우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교도권은 처음에는 이러한 질문 자체가 시작부터 잘못된 것이라고 단죄했다. 그러나 20세기를 지내면서 교회 안에도 새로운 학문과 문화에 대한 이해가 차츰 깊어졌고 그러면서 교회는 차츰 이런 의문들을 단죄하고 방어적인 입장에만 서기보다 이러한 질문들에 제대로 응답하기 위해 교회도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가톨릭교회가 믿어온 신앙이 진실이었음을 확립하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질문들에 대한 합리적인 해답을 찾아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났다. 그래서 성경과 전례, 교리교육 분야 등에서 새로운 접근이 시도되었다. 비오 12세 교황은 공식적으로 성경, 전례, 교리교육의 새로운 운동을 인정하였다. 비오 12세 교황의 이러한 인정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촉발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3. 제2차 바티칸 공의회

3.1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태동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신앙의 원천으로 되돌아가 변할 수 없는 신앙의 내용을 확인해 보고, 현대 세계의 변화된 상황 안에서 그 신앙을 새로운 시대의 언어로 새롭게 표현해 보자는 것이었다. 16세기 이후 가톨릭교회는 주로 프로테스탄티즘에 대한 자기 방어에 전념했고, 18-19세기에는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으로 인하여 세상의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의 기존 질서와 시스템이 도전을 받으면서 교회도 그런 기존 질서와 얽혀있었기 때문에 도전받을 수밖에 없었으나 당시에는 교회가 이에 시의적절하게 반응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교회도 세상 속에 살아가기에 어쩔 수 없이 세상의 변화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20세기 들어와서는 교회도 새로운 ‘시대의 징표’를 읽어내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적인 이해를 이끌어내고 현대 문화와 그리스도교 신앙의 접합점을 찾으려고 한 것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목표였다. 이를 가장 민감하게 감지하고 응답하려 한 지도자가 요한 23세 교황이었다.

3.2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초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네 개의 헌장, 아홉 개의 교령, 세 개의 선언, 총 16개의 문헌을 내놓았다. 그런데 그중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전례헌장, 계시헌장, 교회헌장, 사목헌장, 이 네 개의 헌장이다. 다른 교령과 선언들은 네 개의 헌장들을 좀 더 구체적이고 세부적으로 제시하고 해설하는 문헌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네 개의 헌장은 가톨릭교회의 2,000년 역사를 획기적으로 새로운 단계로 도약하게 한 결정적인 지침이 되었다.

3.3 전례헌장

3.3.1 가톨릭 신자들은 1570년 트리엔트 공의회의 지침에 따라 비오 5세 교황이 편찬한 라틴말 미사경본을 그 이후 400년간 사용해 왔다. 트리엔트 공의회 전에는 교구에 따라 좀 다른 예식서를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종교개혁의 영향을 단절하고 교회의 통일성을 유지할 필요성이 절실한 상황에서 교회는 모든 지역교회가 말마디를 통일하고 동작도 세밀히 규정된 획일적인 미사 텍스트를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시대가 흐를수록 라틴말을 사용하는 사람은 아주 소수에 지나지 않았고 어려운 라틴말 미사에 신자들이 심리적으로 육체적으로 멀어져 차츰 방관자로 남게 되었다.

예식 중에 신자들은 아무런 맡은 역할이나 할 말이 없었기에 미사 중에 묵주기도나 개인 기도를 바치는 것으로 만족하게 되었다. 미사가 성직자의 제사와 회중의 개인 기도로 두 쪽이 나 형식적인 종교 의례로 전락해 버렸다. 이렇게 형식화된 전례에서 초대교회의 감사의 전례, 에우카리스티아가 지녔던 역동성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이 전례 전문가들의 공통된 성찰이었다.

3.3.2 전례헌장은 무엇보다도 전례에 모든 신자들이 내용을 알고 능동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방관자나 손님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고, 감사의 축제를 지내는 다양한 역할을 함께 수행하여야 함을 강조한다. 그래서 전례는 일반신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단순해야 하고 모국어를 사용하고, 지역의 문화와 전통을 활용하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더 가깝게 접할 수 있는, 대중의 피부에 와 닿는 예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교구나 본당 차원에서 다양한 재능을 지닌 전문가들을 발탁하여 전례위원회를 구성하고 전례가 백성 전체의 살아있는 축제가 되도록 살려야 함을 강조하였다. 또한 그러기 위해서 전례에 사용되는 음악이나 건축에도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는 점이 부각되었다.

3.3.3 이 전례헌장의 반포로 가톨릭교회의 전례에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되었다. 사제가 회중에게 등을 보이며 드리던 미사가 백성을 향하여 돌아서고 백성과 함께 지내는 미사, 사제는 사제의 역할, 백성은 백성이 할 수 있는 다양한 역할을 공동으로 수행하는 활력 있는 미사로 변화되었다. 전례의 토착화를 위해 나라별로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다양한 시도와 실험이 이루어져서 공의회 이후의 전례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3.3.4 한국교회의 수용 : 그러나 그럼에도 한국교회에서는 아직도 신자들의 재능과 적극적인 참여가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다. 본당 차원에서 전례위원회를 조직 가동하고 있는 사례는 보기 힘들다. 교구 차원에서도 공의회 정신을 살려내는 전례 발전의 적극적인 노력을 찾아보기 힘들다. 음악 분야에서는 이제 조금씩 한국적인 음악성을 바탕에 깔고 신자 모두가 참여하는 전례음악의 작곡이 시작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걸음마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난 50년 동안 한국교회는 수많은 새 성당이 신축되거나 재건축되었지만, 공의회 전례정신에 맞는 공간 처리와 건축이 제대로 이루어진 곳은 보기 힘들다. 성직자들이 전례헌장을 제대로 숙독하지 않고 공의회 이전의 전례 개념에 입각해서 성당을 지었기 때문이다.

또 전례헌장은 성사의 표징을 신자들이 쉽게 이해하는 방향으로 구체화하도록 가르치고 있고, 그래서 다른 나라에서는 세례성사도 머리에 조금 물을 묻히고 끝나는 예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하여 자신의 옛 몸을 십자가에 묻어버린다는 의미를 살리려고 온몸을 물에 담그며 침례를 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으나 한국교회는 여전히 머리에 물을 살짝 붓고 만다.

또 초대교회에서 하던 방식으로 시간을 두고 단계적으로 입교 절차를 밟으며 예비신자가 서서히 신앙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도록 단계적 예식서도 새로 만들어졌으나, 한국교회에서는 예비 기간의 의미를 살리지 못하고 아직도 공의회 이전에 하던 6개월 교리교육으로 서둘러 끝내고 세례를 준다.

3.4 계시헌장

3.4.1 계시헌장 이전의 상황 : 사실은 1564년부터 1897년까지 가톨릭교회에서 신자들은 모국어 성경을 읽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것은 16세기부터 나타나는 프로테스탄트 성경 번역본의 전파를 막기 위해서였다. 가톨릭 신자는 성경을 개인이 마음대로 해석할 수 없으며, 반드시 교회의 공식적이고 전통을 따르는 해석만이 가능하다고 가르쳤다. 개신교에서는 ‘Sola Scriptura’ 곧 성경만이 유일한 계시의 원천이라고 주장했으나 가톨릭교회는 ‘성경과 성전’을 계속 주장해 왔다. 곧 하느님의 계시는 성경만이 아니라 성전을 통해서도 전달된다고 가르쳤다.

성경에 하느님의 계시가 담겨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성경을 개인이 각자 마음대로 해석해서는 안 되므로 교회가 거룩한 전통 안에서 공적으로 읽고 해석하는 성경의 범위 안에서, 곧 교회 교도권이 공적으로 해석하고 가르치는 범위 안에서만 하느님의 계시는 인간에게 올바로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성경을 오랜 전통을 통하여 읽고 해석하며 그 내용을 가톨릭 교리에 담아 모든 이들이 이해하고 믿을 수 있도록 정리하였으니, 신자들은 성경을 직접 읽고 개별적으로 해석하려 하지 말고 교도권이 가르치는 교리를 배우고 익히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3.4.2 계시헌장의 계시관 : 그런데 계시헌장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당신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계시하신다고 본다. 계시의 본질은 교회가 교도권에 의하여 정리한 일련의 신앙개조보다도 더 풍요롭고 넓은 것이라고 본다. 하느님은 넘치는 사랑으로 마치 친구를 대하듯이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인간과 사귀시며, 당신과 공동체를 이루도록 인간을 부르시고 받아들이신다(계시헌장, 2항). 하느님 말씀에 관한 유권적 해석의 임무는 교도권에 맡겨져 있으나 교도권은 하느님의 말씀보다 더 높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봉사할 뿐이다(계시헌장, 10항).

3.4.3 성경 안에 기록된 하느님 말씀은 콘크리트 건물처럼 한 번 꼴을 갖추면 그것으로 영구히 굳어버리는 불변의 건축물이 아니다. 성경에 문자로 쓰여있는 내용은 똑같지만, 같은 성경 구절로도 역사의 여정에서 인간들의 체험과 삶과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은 끊임없이 새롭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은 교회 교도권이 가르쳐온 교리만 받아들이고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끊임없이 직접 하느님 말씀을 읽고 말씀을 통하여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교감을 갖도록 해야 한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일이 모든 교회 활동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3.4.4 한국교회의 수용 : 공의회 이후 성경 분야에서는 한국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었다. 「공동번역 성서」에 이어서 한국 가톨릭교회의 독자적인 새 번역 「성경」이 출간되고, 「주석성경」까지 나왔다. 성경을 공부하고 익히는 성서사도직이 크게 성장하여 가톨릭 신자가 공의회 전과 비교하면 가톨릭 교리만이 아니라 성경에 관한 많은 양성을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아직도 가톨릭 신자 개개인이 정말 성경을 매일같이 자신의 일용할 양식으로 알고 그 영양분을 섭취하려고 애쓰는가 하면 아직 갈 길이 멀다.

사제들도 미사 강론에서 성경을 읽고 텍스트가 전달하려는 의미의 핵심을 찾아내어, 그것을 오늘의 현실과 연결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오늘의 신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려는 데 집중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저 유명한 고전의 명언을 인용하여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거나, 아니면 심리적인 평안과 윤리적인 금령을 소개하는 것으로 그치는 경우가 적지 않다.

3.5 교회헌장

3.5.1 교회헌장 이전의 교회관 : 20세기 초까지의 교회는 완전한 사회(perfect society)로서의 교회, 거짓된 세상 안에서 종교적 진리를 유일하게 보유하고 있는 제도(Institutio)로서의 교회라는 자아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제도로서의 교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갈 책임을 지닌 것은 성직자들이고, 평신도들은 성직자들의 리더십에 순명하고 따르기만 하면 진리에 이를 수 있고 구원으로 나아간다고 정리했다.

그러나 세상의 정치, 경제, 사회의 시스템이 구조적으로 바뀌면서 교회는 평신도들의 수동적인 순명만이 아니라, 능동적인 협력이 필요했다. 1920년 비오 11세 교황이 가톨릭 단체들의 결성을 공식적으로 장려함으로써 교회 안에서도 평신도들의 다양한 활동이 전개되고 교계적 사도직에 평신도가 참여하는 모양새가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3.5.2 교회헌장의 교회관 : 교회헌장은 교회가 처음으로 교회 자신에 대해 길게 서술한 공적인 문헌이다. 교회는 교회헌장을 통하여 오랫동안 교회를 지배해 온 조직체로서의 자기 이해를 벗어났다. 교회가 성직자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교계제도로서의 인식에서 탈피하고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함께 어우러지면서 이 세상의 제도와 조직의 개념을 뛰어넘어 하느님과 일치하고 온 인류와 일치하는 성사적인 존재이며, 하느님의 구원을 향해 함께 걷는 순례자의 신분임을 천명하게 되었다.

그리고 세례를 받은 모든 그리스도 신자가 그리스도의 사제직, 예언자직, 왕직에 참여하며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구현하기 위해 헌신하도록 초대받고 있는 사람들이다. 교회는 교황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며 찾고 있는 사람들과도 결합되어 있음을 인정한다. 곧 예전에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잘라 말했으나, 공의회는 교회의 틀을 좁은 외형적 울타리로만 해석하지 않게 되었다.

3.5.3 교회헌장 이후의 경과 : 공의회 이후세계 교회는 많은 쇄신 여정을 걸어 나갔다. 교회 내의 다양한 은사가 활성화되고 평신도들의 운동이 탄생하였다. MBW, 포콜라레, 카리스마 운동, 매리지 엔카운터, 네오 카테쿠메나토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러 대륙에 등장한 것이 SCC, 소공동체들의 움직임이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교회가 대단히 유연해지고 교회의 여러 지체들, 평신도와 수도자들이 능동적인 참여와 봉사로 자유롭고 생동감 있게 활성화되었다. 그 전에는 경직되고 고착되고 화석화되어 가던 교회가 성령의 다양한 은사를 통해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그리스도의 신비체다운 모습을 띄게 되었다. 한국교회도 그런 면에서 많은 영적인 활기를 얻었다.

3.5.4 한국교회의 수용 : 그럼에도 한국교회는 여전히 성직자 중심의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공의회의 교회관을 통하여 교회 조직에도 교회법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주교회의’가 공식적으로 출범했고, 교황은 공의회의 후속 작업을 위해 정기적으로 세계주교대의원회의, 곧 시노드를 소집하며 주교들의 연대를 통하여 보편교회의 일치를 강화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또 대륙별로도 주교회의들의 연합체가 생겨서 서로 시대와 환경에 부응하는 주교들의 사목적 연대를 꾀하였다. 그리고 교구 차원에서도 사제평의회 외에 사목평의회를 설립하도록 하고, 본당 차원에서도 평신도가 더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사목평의회를 운영하도록 교회법이 개정되었다. 그러나 아직 한국교회는 이 부분에서 공의회 교회관에 입각한 쇄신작업이 충분히 성사되지 못했다.

주교회의도 교회의 법적, 행정적인 차원의 (교도직상의) 협의만이 아니라 시대에 부응하는 예언자적, 사목적 차원의 협의가 더 활성화되어야 하지 않을까? 주교가 한 지역교회의 책임을 지는 일은 주교 개인에게 전권이 주어지는 직무가 아니다. 초대교회로부터 교회는 다른 지역교회와의 친교와 연대 속에서 존재하였다.

교회헌장 21항에는 이런 말씀이 나온다. “주교 축성은 거룩하게 하는 임무와 함께 가르치는 임무와 다스리는 임무도 부여한다. 그러나 이 임무는 그 본질상 오로지 주교단의 단장과 단원들과 이루는 교계적 친교 안에서만 행사될 수 있다.” 곧 주교가 아무리 한 교구의 입법, 사법, 행정의 최고 책임을 지닌다 해도 자기 단독으로 마음대로 해도 되는 일은 아니다. 교황도 다른 주교들과의 연대와일치 속에서 행사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이야기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교구장과 주교회의의 관계로 새롭게 정립되어야 할 것이다. 

교구 차원에서도 사목평의회가 형식적으로 운영되기보다 평신도들의 자질과 은사를 통하여 좀 더 능동적인 참여가 가능하도록 융통성 있는 제도적 보완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본당 차원에서도 되도록 본당 풀뿌리의 많은 신자들의 재능과 은사가 발굴되고 활성화되어 능동적인 참여가 촉진되는 사목평의회 운영이 보장되고 추진되어야 하는데, 현실에서는 주임신부를 최측근에서 보좌하는 엘리트 참모진들에 국한하여 구성되는 사목위원회로 머물고 있다. 한마디로 아직도 평신도들이 세례를 통해서 받는 보편사제직에 대한 인식이 성직자, 평신도 공히 대단히 결핍되어 있다.

3.6 사목헌장

3.6.1 사목헌장의 태동 : 사목헌장은 교회와 현대 세계 사이의 관계를 다루면서 세상을 단순히 죄악으로 가득 찬 어둠의 세계로 보는 부정적 인식에서 ‘창조주의 사랑으로 조성되고 보존되고 발전하는 인간 역사의 무대가 세상’이라는 적극적인 인식으로 전환하였다. 1962년 12월 공의회첫 회기의 마지막에 수에넨스 추기경은 공의회가 교회의 내적인 실재와 본성에 대해 말할 뿐 아니라 동시대의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서도 말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이런 문제는 공의회의 원래 준비된 초안에는 들어있지 않은 의제였다.

그 후 3년간을 두고 많은 논쟁을 거듭한 끝에 사목헌장은 1965년 12월 공의회 마지막 날에서야 인준되었다. 처음에는 추상적인 개념의 영원한 원칙들만을 천명하는 오로지 윤리적인 명령을 강조하였으나 토의가 진전되는 과정에서 현실속의 실질적 행동 지침까지 제시하는 대담하고 구체적인 접근이 이루어졌다.

이 공의회 전에 요한 23세 교황은 이미 1963년 「지상의 평화」를 반포하였는데 이는 1891년 레오 13세 교황의 산업화 사회의 윤리적인 문제를 상세히 다룬 노동헌장 「새로운 사태」를 바탕으로 새롭게 발전시킨 사회적 가르침이었다. 노동문제만이 아니라 개발도상국의 경제와 군비 축소를 연계한 포괄적인 사회교리의 첫 장이었다.

그리고 1965년 바오로 6세 교황은 유엔을 방문하여, 개발도상국에 대한 원조와 전쟁 종식을 간곡히 호소하는 연설을 했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사목헌장이 작성되었고, 현대세계에서 인류가 직면한 모든 문제들에 대한 글로벌한 지침이 제시되었다.

3.6.2 사목헌장의 주요 관심 : 사목헌장은 전반부에서 인간과 그가 살고 있는 세계 사이의 관계에 대한 교의적인 가르침을 소개하고, 후반부에서는 현대생활과 인간사회에서 모두가 직면하고 있는 긴급한 현안 문제들을 거론하며 이에 대한 교회의 윤리적 가르침을 광범위하게 펼치고 있다[가정, 문화, 사회-경제, 정치, 전쟁, 평화].

3.6.3 한국교회의 수용 : 공의회 이후에 한국교회는 가정과 생명에 관한 가르침에 대해서는 많은 교도적, 사목적 노력을 기울인 편이었으나, 그 외의 여러 분야에 대해서는 대단히 소극적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사목헌장이 현대 세계와의 대화를 심화하고 넓히도록 초대하였으나, 한국교회는 현대 세계인들이 당면하고 고뇌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방향과 지침을 제시하는 일에 매우 게을렀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사목헌장이 다양한 현대 세계의 분야와 영역에 대해 관심을 갖고 교회가 복음적인 시각으로 대응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한국교회는 세상일은 평신도들이 교회 밖에서 알아서 대처해야 할 문제로 보고, 이런 문제를 교회 안에 끌어들이는 것을 너무 조심스러워하거나 두려워하고, 방관적이거나 책임회피적인 태도를 이어왔다. 그것은 시대의 징표를 읽으려고 하지 않은 우리들의 나태함과 무관심에서 비롯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오셔서 하느님 나라가 임박하였음을 선포하셨다. 하느님 나라라는 단어가 예수님이 당신 입술에 가장 많이 되풀이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은 인간들이 세상을 다스리며 온갖 불의와 죄악으로 얼룩지게 한 나라를 하느님이 손수 다스리시는 나라, 정의와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는 나라로 바꾸어 나가기를 원하셨다. 그리고 당신 제자들에게도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정의를 실현해 나가기를 원하셨다.

사도들은 이 예수님의 유지를 이어받아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서 구현하기를 원하였다. 사도들은 교회가 당연히 그 역할을 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 속에 자리 잡으면서 세상을 복음적으로 변화시키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교회의 2,000년 역사는 한편으로는 세상을 복음화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가 세상 속에 살면서 세속화되는 위험과 유혹에 끊임없이 시달려온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교회는 하느님 나라를 실현해 가는 과정에서 필요한 세상에서의 잠정적인 역할을 부여받은 존재이지 교회가 곧 하느님의 나라는 아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 식별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역사 속에서 하느님 나라를 구현하려고 하면서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라는 착각에 쉽게 빠지곤 하였다. 세상을 복음적인 나라로 바꾸려고 애쓰다보니까 세상과 같은 눈높이에서 경쟁하거나 대결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교회 자신이 세상에 물들고 말았다.

그러나 그러다가 이게 아니다 싶어서 교회는 세상과 선을 긋고, 세상으로부터 초연하고, 세상에 오염되지 않은 천상적인 본성에 충실하겠다고, 세상과 담을 쌓고 세상과 인연을 끊으려고 하였다. 그러다 보니 이젠 또 교회가 세상을 복음화해야 하는데 세상과 완전히 결별하고 이혼하게 되어 세상을 복음화하려 해도 세상이 이제 교회의 언어를 못 알아듣게 되었다.

그것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게 된 배경이요 동기였다. 교회는 공의회를 통하여 멀찍이 달아난 세상을 쫓아가서 붙잡고, 말을 걸고, 대화를 시도하고, 그들의 언어로 새롭게 복음을 이야기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출범한 지 50주년이 되었고 끝난 지도 47년이 되었으나 현대 교회는, 특히 한국교회는 아직도 그 공의회가 목표하고 시도한 세상과의 새로운 대화와 친교를 제대로 펼쳐나가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공의회 이전의 사고와 교회관, 세계관에 머물며, 아직도 세상을 향한 울타리를 허물지 못하고 울타리 안에서의 친교, 울타리 안에서의 동네잔치에 자족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다른 종교에 비하여 괄목할 만한 외적 성장을 이루었고, 사회에서 가장 신뢰받는 종교의 위상을 자타가 공인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우리들의 동네잔치가 마치 세상 전체와 어우러진 잔치가 된 듯한 착각에 빠져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쯤 해서 우리는 심각하게 교회의 정체성을 자문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교회의 존재 목적은 무엇인가?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펼쳐나가야 하는 원래의 소명을 오늘 이 시대에서 우리는 어떻게 펼쳐야 할 것인가?

오늘도 여전히 인간의 죄악과 불의로 정의와 평화에 목말라하는 억조창생이 있는데 이런 세상을 어떻게 하느님께서 손수 다스리시는 나라로 바꿀 것인가, 또 옛날 교회가 저질렀던 실수, 세상을 복음화하려다가 교회가 세속화된 그 과오를 반복하지 않고, 그러면서 동시에 세상과 담을 쌓아 인연을 끊지도 않고, 오늘 세상과 하느님 나라 사이에 쳐진 팽팽한 외줄을 어떻게 타고 건너갈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막된 지 50년이 흘렀다. 50년째 되는 해는 성경에서 은총의 희년이다. 종살이하던 사람이 해방되고 빚도 탕감받고 모든 굴레가 벗겨지는 은총의 완성이 이루어지는 해다.

이제 한국교회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하여 성령께서 비추어주신 은총의 빛살로 주님이 원하시는 해방과 탕감을 이루어가야 하지 않을까?

주님께서는 이 은총의 해에 우리가 사로잡혀 얽매여 있던 세속의 가치관에서 해방되고, 주님께 진 빚을 탕감받기 위하여, 주님의 가장 작은 형제들, 세상의 불의에 억눌려 가난하고 고달픈 삶을 살아온 이들에게 연대와 일치를 보여주는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로 새로 나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계시지 않을까?

* 이 글은 지난 11월 2일 서강대학교에서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50주년 기념 심포지엄 기조강연 때 발표한 내용을 필자가 보완한 것이다.

* 강우일 베드로 - 주교 제주교구장.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 경향잡지 발행인.

[경향잡지, 2012년 12월호, 강우일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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