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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자] 거룩함과 사제 성화: 사제가 변하면 정말 교회가 변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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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6-18 ㅣ No.1103

[경향 돋보기 - 거룩함과 사제 성화] 사제가 변하면 정말 교회가 변할까


우리가 함께 생각해야 할 ‘사제 성화의 날’

 

 

사제가 변하면, 정말 우리 교회는 변할 수 있을까? 사제만 잘하면, 한국 천주교회는 과연 만사형통일까?

 

이른바 성직주의, 성직자 중심주의가 공고한 우리 교회에서 이 말은, 적어도 일그러진 권위와 위계 구조의 얼굴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열쇠인 듯하지만, 필자는 이 말에 다소 회의적이다. 게다가 이 말은 무익한 언어유희에 빠뜨릴 수 있는 위험도 지니고 있다.

 

만일 그것이 오로지 사제를 겨냥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입술과 생각의 푸념으로만 그치는 것이라면 말이다. 사실 그렇게 됨으로써 이 말은 그저 성직주의를 고착화하는 것으로 작용해 온 것이 아닐까?

 

또한 그것은 다만 성직주의를 지속시킬 뿐인 자기 합리화와 순응의 논리로서 역할을 해 온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것일까? 이 말이 우리 교회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고, 상당한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할지라도 말이다.

 

사실 사제가 변하면 모든 것이, 적어도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다. 한 사람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는 빛이 되었던 것처럼(요한 1,9 참조), 그 빛으로 사제 한 사람이 아름다운(착한)목자(요한 10,11 참조)가 되면, 우리 교회의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어째서 사제만으로 국한되어야 할까?

 

사제 성화의 날은, 그런 면에서 교회의 모든 구성원을 거룩함으로 초대하는 것이라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물론 ‘사제 성화의 날’이 일차적으로 사제의 정체성과 거룩한 직무를 독려하려는 것이라 할지라도(요한 바오로 2세 교종, 1995년 성목요일 교황 서한 참조), 그것은 곧 교회 전체가 거룩함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지평에서만 비로소 역동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사제와 그의 직무는 ‘공동체’(삼위일체 하느님과 교회)로부터 유래하기 때문이다(교황청 성직자성, 1995년 사제 성화의 날 서한 참조).

 

 

사제 성화의 날, 왜 생겨났나?

 

사제 성화의 날은 교회 공동체 전체가 사제직의 소중함을 공유하고, 새로운 복음화의 주역인 사제의 거룩한 봉사를 고양하고자 생겨났다(교황청 성직자성, 1995년 사제 성화의 날 서한 참조). 새로운 복음화는 복음 선포의 주체인 사제의 새로움, 곧 그의 새로운 열정과 새로운 방법, 새로운 표현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그렇다면 사제의 열정과 그의 직무의 새로움은 어디에서 비롯할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마저도 내놓는 아름다운 목자이신 예수의 거룩한 마음’(요한 10,11 참조)에서 비롯하고 그 마음을 간직하고 닮아가는 데서 구체화된다(필리 2,5 참조).

 

이처럼 사제의 정체성과 봉사 직무의 본질이 바로 예수님의 거룩하신 마음으로부터 비롯한다면, 사제는 애초에 이런 마음을 어떻게 얻게 되는 것일까? 사제가 예수님의 거룩하신 마음을 닮은 마음을 지니게 된다면 과연 그것은 어떤 수행 과정을 통해 가능할까?

 

예수님의 거룩하신 마음을 닮아가는 사제 마음의 텃밭은 일차적으로 사제 혼자가 아니라 공동체이며, 고립된 사제 개인의 수련과 노력이 아니라 나와 너의 관계 체험에서 비롯한다. 곧 사제는 예수님의 거룩하신 마음을 닮은 그 누군가와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서 그 마음을 닮아간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는(우리 공동체는, 우리가 속한 단체는, 우리가 서로 맺는 관계는, 우리가 함께하는 일은, 우리의 직무는) 과연 그런 인격적 만남이 발생하는(또는 인격적 만남을 발생시키는) 거룩한 곳인가?

 

사제 성화의 날에 우리 교회가, 사제만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이런 물음을 던져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사제 성화의 날이 왜 생겨났는지, 왜 오늘도 여전히 필요한 것인지, 또 누구와 무엇을 위해 이런 날이 요구되는 것인지 함께 답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아름다운 사제, 아름다운 사제직?

 

바오로 사도는 “어떻게 해서든지 …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1코린 9,23)라고 고백한다. 사제 지망생들이 한 번쯤 마음속에서나마 되뇌었을지도 모를 다짐이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는 것’, 그런데 지금, 그 다짐은 어떻게 되었는가. 이제는 그것이 더는 나의 다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바오로 사도가 여전히 부럽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남은 다짐은 거의 없을 정도가 아닐까 싶다. 어쩌면 더는 바랄 수조차 없는 이상, 더는 이루어질 수 없으리라는 것을 실토해야 하는, 정말이지 벌거숭이가 된 심정이다.

 

사제품을 받은 지 20년이 훌쩍 넘은 지금 나에게 아직 남아 있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말일까를 생각해 본다.

 

“성화는 한 인간이 자신을 몽땅 하느님께 바치는 것입니다”(베네딕토 16세 교종).

 

“사제직은 소유권의 이전, 곧 세상에서 뽑혀 하느님께 바쳐진 존재를 의미합니다”(베네딕토 16세 교종).

 

지극히 아름답고 멋진 말이다. 그런데 현혹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말 자체가 아니라 그 말에 대한 관념적인 도취일 것이다. 다행인 것은, 이제는 적어도 이전과 달리 관념적으로만 도취되는 것은 하등 쓸모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건 아름다운 말이 아니라 아름다움의 육화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사제, 아름다운 사제직은 우리 자신의 말과 행위 사이의 엄연한 차이, 사제인 지금의 나와 되어야 할 사제 사이에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차이 사이에 거룩한 다리를 놓는 것, 곧 마음의 가난함, 온유와 겸손, 이웃의 슬픔과 연대, 정의를 향한 갈망, 자비, 순수한 사랑, 평화, 날마다 복음의 길을 걷는 것(프란치스코 교종,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3장 참조), 그것이 바로 사제와 사제직의 아름다움을 훼손하지 않고 빛나게 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변하면 교회와 세상도 달라진다!

 

사제 성화의 날을 지내는 핵심적인 이유는 교회의 변화요 새로움이다. 사제의 변화와 새로움은 두말할 나위 없고 교회 구성원 모두의 변화와 새로움을 의미한다. 새로운 복음화의 사명 또한 교회 전체 구성원의 변화와 새로움 없이 온전히 수행될 수 없다는 것도 자명하다.

 

‘사제가 변하면 교회가 변할 수 있다.’는 말이 나의 변화를 제외하는 말이 아니어야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나의 변화 없이 사제만 변하면 교회가 변한다는 논리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그다지 유익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나의 변화와 새로움을 추구하지 않고서는 그 무엇도 달라지지 않고, 그 어떤 것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교회의 모든 변화와 새로움은 오로지 나의 변화와 새로움을 통해서만 비로소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토록 자명한 말을 되풀이하는 까닭은 사제의 변화를 주제로 정하며 정작 자기 자신은 변하지도 않고, 변할 생각조차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 말을 경계해야 하는 까닭은 그 논리가 마땅하게 이루어져야 할 교회의 변화를 견인하지 못하고 어떤 면에서는 변화되어야 하는 교회 현실을 방치하거나 오히려 소극적이고 무비판적인 체제 순응의 논리를 강화하는 쪽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나의 변화는 공동체의 변화를 함께 추구해야 하는 것을 전제한다. 나의 변화는 공동체의 변화와 함께 이루어질 때 진정한 결실을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제가 달라지면 교회가 달라진다!

 

사제 성화의 날의 초점이 우리 사제들의 정체성과 사제 직무의 새로운 인식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사제들이 우리 시대의 징표를 살피고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변화와 새로움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바람직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거시적으로 우리 한국 사회가 이론적이며 실천적으로 오랫동안 형성해 온 삶의 문화와 관계의 문화를 전적으로 새롭게 구성하고자 하는 기획은 무척 요긴하고 절실한 것 같다.

 

특히 상호 존중의 문화, 양성평등의 문화, 다른 사람에 대한 관용과 배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적극적인 연대, 이를 위한 교육과 철학의 변화를 위해서는 더 근본적인 접근이 필요할 것 같은데, 이 점에서 교회가 추구하는 가치와 관계의 문화를 바탕으로 실질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교회 내적으로 부당한 권위주의와 배타성에 근거한 관계 문화의 변화를 추구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는 점을 명확하게 직시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교회 또한 복음의 문화를 확산시키기보다는 세상의 굴절된 문화에 복음의 가치를 종속시키는 경우도 적지 않았으며, 특히 교회와 신앙의 가치가 우리 신앙인들의 사고와 행위 방식에 실질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에 미흡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면에서 복음의 선포가 사회의 맥락과 깊은 관계 속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교회의 신앙 교육 시스템을 본당과 교구 차원에서 체계적이고 새롭게 구성하는 것도 필요하리라 여긴다.

 

이와 관련하여 사제 성화의 날 계획으로 사제들이 사제와 사제, 사제와 수도자, 사제와 평신도 등 상호 관계 문화를 더 쇄신할 방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하여 실행하는 방법을 찾는 것을 제안하고 싶다. 이를 통해 사제들이 먼저 관계 문화를 쇄신하고, 나아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관계 문화의 왜곡과 폐해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면 바람직할 것이다.

 

* 김정용 베드로 - 광주대교구 신부. 교구 사목국장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8년 6월호, 김정용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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