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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ㅣ기타

추기경 정진석 회고록8: 책과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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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7-17 ㅣ No.386

[추기경 정진석] (8) 책과 신앙


질풍노도의 시기 신앙의 위기 겪지만…

 

 

- 1948년 중앙고 재학 시절 백운대 정상에서 김형석 선생님과 함께한 정진석(뒷줄 왼쪽에서 여섯 번째). 서울대교구 홍보국 제공.

 

 

진석은 계성보통학교를 마치고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4년 중앙중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중앙중학은 세칭 일류 중학이던 경기중학과 어깨를 겨루는 명문학교였다. 특히 중앙중학은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학교였다. 나라의 운명이 존망의 위기에 있을 때 전국 각지의 민족 선각자들이 교육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여 나라를 구하겠다는 구국 정신으로 설립한 학교였기 때문이다. 중학교 2학년이던 진석은 이 학교에서 나라의 해방을 맞았다. 학교의 역사는 진석에게 큰 자랑거리였다.

 

밝고 겸손한 성품의 진석은 친구들이 많았다. 공부도 잘했지만 무엇보다 친구들 사이에서 굉장한 효자로 유명했다. 가장 친한 친구였던 최창락(전 동력자원부 장관)은 입학 때 키가 작았던 진석과 나란히 앉은 옆자리 짝꿍이었다. 함께 공부하고 놀며 친해졌던 둘은 이내 이별하게 됐다. 방학을 지낸 후 다시 만나니 진석의 키가 훌쩍 커버렸기 때문이었다. 학급 앞자리에서 뒷자리로 가게 된 진석은 그때부터 운동도 열심히 했다. 그리고 키 큰 아이들뿐 아니라 예전에 사귄 키 작은 아이들과도 잘 어울려 다녔다. “너 참 의리 있다!” 친구들은 여러 친구와 허물없이 지내고 공부를 잘한다고 잘난 척하지도 않는 진석을 좋아했다.

 

 

책벌레, 독서동아리도 가입 

 

진석은 중학교에 진학한 후에도 하루에 한 권씩 책 읽기를 계속했다. 에디슨에 푹 빠져 있던 진석은 중학교 때부터는 주로 과학책을 읽었다. 과학에 대한 호기심으로 관련 서적에 심취하다 보니 진석이 중학교 때는 이미 텔레비전 이론을 훤히 알게 되었다. 라디오도 귀하고 신기해하던 시절에 텔레비전에 관해 알게 되니 과학에 대한 흥미는 더욱 높아졌고,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과학의 세계에 몰입했다. 책을 읽는 순간에는 세상에 근심 걱정도 없었고 새로운 지식을 얻는 기쁨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혼자 있어도 행복했다. 그런 체험은 처음이었다. 그가 어려서부터 책 읽는 취미를 가진 것은 평생의 벗을 사귄 것과 같았다. 책벌레답게 중앙중학교 석조 본관 3층 오른편 도서관에는 진석이 잘 앉는 자리가 있었다. 매일 앉아 책을 읽다 보니 다른 사람들이 자연히 그 자리에 앉지 않아 진석의 지정 좌석이 되었다.

 

- 정진석 추기경이 다닌 중앙고 본관(서울 계동).

 

 

진석이 중앙중학교 독서동아리에 가입하게 된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많은 학생이 독서동아리를 중심으로 학생운동에 참가했다. 이때 진석은 신앙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당시에는 학생들 사이에 사회주의 이론과 무신론의 사조가 유행하던 시기였다. 책이나 학교 강의 등에서 유물사관에 입각한 ‘하느님은 없다. 종교는 아편이다’라는 학습을 받고 나니 신앙에 대한 믿음이 흔들렸다. 진석은 어려서부터 아무런 의심 없이 믿어온 신앙이 흔들리고 교리에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그러니 마음속에서부터 갈등이 생겼다. 한마디로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신앙의 위기가 닥친 것이었다. 

 

그즈음 명동성당에서 윤형중(尹亨重) 신부의 사순 특강이 열린다는 소식을 접했다. 중학생 진석은 홀로 성당을 찾아 강연을 기다렸다. 윤 신부의 특강은 당시에 지식인들에게 큰 인기가 있었다. 성당을 가득 채운 이들 사이에 중학생은 진석 하나였다. 

 

윤형중 신부는 가톨릭청년사, 경향잡지, 경향신문 사장을 역임하면서 언론 활동과 저술을 통한 천주교 교리 전파에 전 생애를 바쳤던 가톨릭을 대표하는 지성이었다. 특히 지성인들을 위한 교리 강좌를 열어 수많은 지성인을 천주교에 입교시키는 데 최선을 다했던 인물이다. 진석은 윤 신부의 첫 강의에서부터 감동을 받았다. 

 

“…사람이 무엇을 위해 났습니까? 사람이 천주를 알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세상에 났습니다. ‘영혼을 구한다’는 말은 사람이 죽은 다음 그 영혼이 지옥의 영벌을 면하고 하늘 나라의 영복에 들어감을 뜻합니다. ‘무엇을 위하여 세상에 났는가?’란 인생의 최후 목적을 묻는 말입니다.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할 때는 언제든지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즉 무슨 목적으로 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까? 그런데 사람은 자기가 나고 싶어서 난 것도 아니요, 자발적으로 생겨난 것도 아닌 만큼, 자기가 자기의 목적을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창조하신 하느님께 무엇 때문에 사람을 창조하셨는지 알아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목적 없이 행동하실 리는 만무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는 당신을 공경하며 당신의 계명을 따라 살다가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인생의 목적입니다….”

 

 

가슴 깊이 감동, 모든 의문 풀려 

 

윤 신부는 해박한 신학과 철학을 바탕으로 교리와 성경을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쉬우면서도 이해하기 쉬운 이론으로 교리를 설명하니 재미도 있고 가슴 깊이 감동도 생겨났다. 이때서야 비로소 진석은 모든 의문을 풀게 됐다. 가슴 한구석에서 느끼던 갑갑함이 점차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특강이 끝날 때면 마침성가로 ‘한 많은 슬픔에’를 불렀는데 강의가 끝난 성당에서 진석은 이 성가를 부르며 많이 울었다. 이후에도 그는 그 성가를 부를 때마다 눈물이 났다.

 

“한 많은 슬픔에 탄식만 하오며/ 십자가 우러러 구슬피 우오니/ 인자한 우리 구세주/ 내 영혼 위로하소서/ 오 주 예수 영혼의 빛이여/ 불쌍한 죄인 돌보사 위안해 주소서.”

 

윤형중 신부의 강의에 감화된 진석은 이때 사회주의 사상을 넘어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하였다. 성소에 대해서도 생각이 없지 않았지만 외아들이었던 진석은 아무 내색도 하지 못했다. 

 

믿음을 다시 굳건히 하니 학문에 정진하는 데도 거침이 없었다. 당시에 중앙중학교에는 훌륭한 선생님들이 많았다. 특히 윤리를 가르쳤던 철학자 김형석 선생님은 청년 정진석의 미래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직업이 무엇일까’를 생각한 끝에 발명가가 되면 좋겠다고 결심한 진석은 이후 중앙고를 1950년 4월에 졸업하고, 같은 해 5월 서울대 공대(화학공학과)에 진학했다. 6·25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다.

 

[평화신문, 2016년 7월 17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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