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6일 (월)
(백) 부활 제6주간 월요일 진리의 영이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사목신학ㅣ사회사목

[사목자] 거룩함과 사제 성화: 오직 하나의 거룩함, 그리고 그 다양한 길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6-18 ㅣ No.1102

[경향 돋보기 - 거룩함과 사제 성화] 오직 하나의 거룩함, 그리고 그 다양한 길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자신을 거룩하게 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1,44). “하느님의 뜻은 바로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1테살 4,3).

 

구약의 하느님 백성에게도 신약의 새로운 백성에게도 거룩함은 공통적으로 요청된다. 이 백성이 ‘거룩하신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거룩해지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우리는 거룩함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해 보자.

 

 

거룩함의 의미를 찾아

 

구약 성경에서 거룩함의 의미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그리고 사람들에게 나타나시거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시련이나 벌, 재앙을 내리시면서까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보호하실 때에 드러난다(탈출 19,3-20; 호세 11,9 참조). 하느님은 인간이 감히 바라볼 수 없는 분으로, 세상과는 전적으로 다르시기에 세상과 구별되신다. 세상을 초월하시는 분으로서 거룩함 자체이시다(레위 19,2; 이사 31,1; 이사 60,9 참조).

 

따라서 하느님께 속해 있거나 하느님에 대한 것에는 ‘거룩한[聖]’이라는 형용사가 붙는다. 곧 그분께서 선택하신 백성은 거룩한 백성이며, 하느님과 관련이 있는 장소는 성소,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집은 성전, 하느님에 대한 예배는 거룩한 전례이다. 한마디로 구약 성경에서 거룩함이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맺으시는 관계라는 전망 안에서 이해된다.

 

신약 성경에서는 이러한 구약 성경의 의미가 지속되는 가운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의미가 더욱 풍요로워진다. 성령으로 잉태되시고, 도유되셨으며(마태 3,13-17 참조), 성령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로마 8,11 참조) 하느님과 같은 거룩함을 지니신 ‘거룩하신 분’으로 고백된다(로마 1,4; 묵시 3,7; 6,10 참조).

 

구약에서 하느님께 속한 백성이 거룩한 백성으로 불리는 것처럼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 곧 그분을 믿고 세례를 통해 그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생명에 참여한 이들은 성도라 불리며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백성을 이룬다(1코린 1,2; 3,16-17; 필리 1,1 참조).

 

 

거룩하게 하는 근본적 원인은 하느님

 

여기에서 우리는 거룩함과 관련하여 중요한 몇 가지 점들을 볼 수 있다. 곧 개인이든 하느님 백성이든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근본 원인은 하느님 자신이다. 이들은 거룩하신 하느님, 거룩하신 그리스도께 속하기 때문에 거룩해지는 것이지, 자신들이 거룩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소유가 된 사람들이 아니다. 가톨릭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교회는 흠 없이 거룩하다고 믿어진다. 성부와 성령과 더불어 ‘홀로 거룩하시다’고 칭송받으시는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당신의 신부로 삼아 사랑하시고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당신 자신을 내어 주셨으며(에페 5,25-26 참조), 교회를 당신과 결합시켜 당신 몸이 되게 하시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성령의 선물로 가득 채워 주셨기 때문이다”(교회 헌장, 39항).

 

교회가 거룩한 이유는 사람들을 당신 것으로 삼아 주신 하느님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룩함은 인간 편에서 노력으로 성취되는 무언가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을 선택하심으로써 받게 되는 ‘선물’이다.

 

“그들을 움직이시는 성령을 모든 사람에게 보내 주셨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자기 업적 때문에 하느님께 불린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계획과 은총에 따라 부름받고, 주 예수님 안에서 의화되고, 믿음의 세례 안에서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하느님 본성에 참여하였기에 참으로 거룩하게 된 것이다”(교회 헌장, 40항).

 

 

오직 하나의 거룩함

  

하느님께서는 이미 당신의 것이어서 거룩한 이 백성에게 다시 ‘거룩해져라.’ 하고 명하신다. 거룩함은 선물이자 동시에 명령인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거룩함의 의미를 좀 더 살펴보자.

 

하느님이 거룩함 자체이시라면 거룩함의 근본적 의미는 하느님 자신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지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6).

 

이러한 고백을 하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며,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기꺼이 아버지 뜻에 순종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났기 때문이다(1요한 4,9 참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더 이상 능가할 수 없는 방식으로 충만하게 드러났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요한 14,9.11).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과 같은 한 하느님이시고 거룩한 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본질이 사랑(caritas)이라면, 그리고 거룩함이 하느님과의 관계로 하느님에게 속함을 말하는 것이라면 거룩함이란 사랑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교회의 이 거룩함은 성령께서 신자들 안에서 맺어 주시는 은총의 열매로 끊임없이 드러나며 또 드러나야 한다. 그 거룩함은 자기 삶에서 사랑(caritas)의 완덕을 지향하며 남들을 감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개인들에게서 여러 가지 형태로 표출”된다(교회 헌장, 39항).

 

거룩함은 우리의 체험적 언어로 말하면 사랑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의 거룩함이 있다.

 

한편 완전히 거룩한 이는 거룩함 자체이신 하느님 자신뿐이시다. 비록 우리가 거룩함을 선물로 받았지만 사실 완전히 거룩하지는 못하며, 충만한 거룩함이신 하느님께로 나아간다. 그리고 하느님은 ‘언제나 더 크신 하느님’이시기에 우리의 여정은 지상 생애 동안 계속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거룩하니 거룩해져라.’ 하고 명하신다. 그런데 거룩함은 인간적 노력으로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선사라는 것을 앞서 보았다. 그렇다면 ‘거룩해져라.’는 이 명령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선사와 명령의 이 역동성은 사랑의 계명에서도 나타난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우리는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았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한다. 거룩함 또는 사랑이 선물이자 명령이라는 역동성의 의미와, 거룩해지려 하거나 사랑하려는 우리 노력의 의미는 성경 말씀에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성도들에게 걸맞게, 여러분 사이에서는 불륜이나 온갖 더러움이나 탐욕은 입에 올리는 일조차 없어야 합니다”(에페 5,1-3).

 

신자들은 하느님의 자녀답게, 거룩한 이에게 부합하는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선택된 하느님의 백성이며, 거룩한 사제직의 백성임을 선언하는 베드로의 첫째 편지도 그에 걸맞은 생활 방식을 요청하고 있다(2,9-12 참조).

 

그러므로 거룩하게 살라는 명령은 이미 받은 거룩함의 선사에 대해 응답하라는 요청이다. 사랑을 받았으므로 그에 맞갖게 살아가라는 명령이다. 이러한 응답은 그리스도인을 사랑의 완전함과 완전한 거룩함으로 더욱 이끌 것이다.

 

 

거룩함의 길로 부름받다

 

거룩함은 자기 삶에서 사랑(caritas)의 완전함을 지향하며 남들을 감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개인들에게서 여러 가지 형태로 표출된다는 교회 헌장 39항의 말씀으로 돌아가 보자.

 

오직 하나의 거룩함이 있고, 완전한 거룩함은 오로지 하느님에게만 있으며 모든 이는 그 완전한 거룩함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앞에서 보았다. 그 여정은 매우 다양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은 교회 안에 있는 다양한 구성원이 이 거룩함을 어떻게 성장하게 하는지 구체적으로 열거한다(교회 헌장, 41항 참조).

 

어떤 사람은 교회 안에서 주교와 사제, 부제로 부름받아 하느님 백성을 위한 봉사 직무를 수행하면서 이 여정을 간다. 또 어떤 사람은 수도 생활 안에서 자신의 전 실존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의 표징을 보여 줌으로써, 어떤 이들은 결혼 생활을 통해, 또는 미혼 생활을 통해 충만한 거룩함으로 나아간다. 노동 또한 그 길 가운데 하나이다.

 

이렇게 다양한 길이 있지만 그 목표는 동일하다. 곧 하느님 자신, 사랑 안에서의 완전함이다. 교회 안에서 공적 직무를 맡은 이들은 그 직무 수행을 통하여 하느님 백성의 거룩함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봉사하지만, 그들 또한 거룩함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직무를 ‘사랑을 가지고’ 수행할 때 그렇게 할 수 있다. 결혼한 이들은 사랑으로 서로 돕고 자녀들에게 너그러운 사랑의 모범을 보여 주며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사랑의 표징이 될 때 거룩함으로 나아갈 수 있다(교회 헌장, 41항 참조).

 

공의회는 다양한 삶의 조건과 직무들 안에서 드러나는 거룩함에 대하여 동일하고 단일한 거룩함(una sanctitas)의 다양한 형태일 뿐이라고 강조한다(교회 헌장, 41항 참조). 그러므로 성직자이든 수도자이든 평신도이든 그들은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데에 다양한 삶의 형태로 살아간다. 하지만 결국 그들의 삶을 거룩하게 하고, 그들의 삶을 거룩한 제물로 만드는 것은 ‘자신들이 하는 모든 일을 하느님 안에서 얼마나 사랑으로 행하는지’이다.

 

굳이 누가 더 높은 상태의 거룩함에 도달하는지 궁금하다면, 누가 더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지를 보면 된다. 달리 말하면 누가 더 하느님의 사랑에 가까이 다가가는지, 누가 더 자신의 모든 시간과 공간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채우고 있는지를 보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혼 생활은 결코 약한 사람들이 택하는 방법도, 성직 생활이나 수도 생활보다 덜 거룩한 것도 아니다. 공의회는 결혼 생활을 비롯하여 자녀 양육과 노동, 심지어 가난과 고통까지도 거룩함에의 소명에 2차적이거나 덜 중요한 삶의 자리가 아니라 다른 모든 생활 신분과 마찬가지로 이 거룩함을 실현하는 장임을 선언한다(교회 헌장, 41항 참조). 그리고 이 가르침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선언한 ‘보편 사제직’에 대한 가르침과 맥을 같이 한다.

 

“그들(평신도들)의 모든 일, 기도, 사도직 활동, 부부 생활, 가정생활, 일상 노동, 심신의 휴식은, 성령 안에서 그 모든 일을 하고 더욱이 삶의 괴로움을 꿋꿋이 견뎌 낸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이 되고(1베드 2,5 참조), 성찬례 거행 때에 주님의 몸과 함께 정성되이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된다”(교회 헌장, 34항).

 

결론적으로,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길은 거창하고 어려운 길이 아니며, 특정 생활 양식에 국한되어 있지도 않다. 무엇을 하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하는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방법대로, 얼마나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삶의 모든 순간을 채우고 있는지가 그 답일 것이다.

 

* 최현순 데레사 - 서강대학교 신학연구소 선임 연구원이며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 대우 교수이다. 교황청립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교의신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8년 6월호, 최현순 데레사]



1,729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