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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연길교구: 민들레 홀씨가 추운 겨울 이겨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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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11 ㅣ No.404

[연길 교구 설정 80주년 기념 특집] 민들레 홀씨가 추운 겨울 이겨내고

 

 

한때 북간도에서 조선인과 중국인은 사이가 좋지 못했다. 북간도에 살았던 조선인은 대부분 순박한 농민들이었는데 문제는 일본 제국주의에 아부하며 중국인을 멸시해온 친일파 조선인들에게 있었다. 그들 때문에 중국인들은 일본인에 대한 울분과 증오의 화살을 조선 사람에게 돌렸다. 교회 내에서도 이런 기류가 흘렀다. 연길 교구의 본당은 대부분 조선인 신자들이 중심이었지만, 돈화에는 한국인과 중국인이 섞여 있었고, 도문과 목단강에는 일본인 신자까지 있었다. 그러나 교회 내의 민족 간의 갈등은 선교사들의 중재로 원만하게 해결되었다. 물론 민족과 언어의 벽을 뛰어넘는 가톨릭 신앙의 특색도 있겠지만, 중용의 덕과 분별의 지혜를 높이 평가하여 이를 추구했던 베네딕도회 영성이 알게 모르게 작용했을 지도 모르겠다.

 

신앙을 통하여 두 민족 사이에 형성된 화합의 정신은 중국 공산화 이후에 닥친 고난의 시기를 이겨낼 힘을 발휘했다. 이 시기 중국인 유유정(劉裕亭, +1999) 베드로 신부와 조선인 감정옥(甘貞玉, 1920-2001) 안나 수녀가 교우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아 훗날 연변 지역에 교회를 다시 일으키는데 원동력이 되었다. 유 베드로 신부는 하북성河北省 열하熱河 교구 소속 사제였다. 그는 33세에 서품을 받았는데, 정치적 상황이 복잡해져 서품 직후부터 사목활동이 불가능해졌다. 오도 갈데없는 그는 만주국 군인이었다가 소련군에게 붙잡혀 연길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동생을 찾으러 갔다. 그는 연길에서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을 만났고, 그들의 도움으로 동생은 풀려났다. 이후 그는 팔도구에 남아 있던 독일인 선교사들과 함께 지냈다. 1952년 마지막 선교사들이 본국으로 귀환한 후 그는 연변 지역에 남은 유일한 가톨릭 사제였다. 그 이후의 세월은 말할 수 없이 괴로운 고통의 연속이었다. 연길 교구장 서리인 라이문드 악커만(Raymund Ackermann, 田, 1898-1983) 신부로부터 견진성사권을 위임받은 그는 가정집 부엌에서 몰래 성사를 집전해가며 신앙의 맥을 이어갔다. 1957년 8월 중국교회가 경제적으로 자립해야 하고(自養), 복음은 중국인 스스로 전파하며(自傳), 자율적으로 다스린다(自治)는 원칙 아래 중국 천주교 애국회가 창립되면서 교황청과 관계를 단절하지 않는 성직자들은 투옥되거나 노동개조형에 처해졌다. 이어서 문화 대혁명이 신앙의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버리려는 듯이 세차게 불어 닥쳤다. 유 신부도 팔도구에서 노동개조형을 살았다. 그의 늙은 아버지가 아들의 성소가 흔들릴까 걱정되어 팔도구로 와서 같이 살았다고 한다. 낮이면 그는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분뇨를 수거했고, 밤에는 생산대生産隊 회계장부를 정리했다. 투쟁대회가 일어나면 그는 어김없이 혹독한 비판을 받아야 했다. 그에게 조금이라도 호의를 보이는 사람은 누구든지 비판을 받았으므로, 지나가다 교우들이 보이면 그가 먼저 외면하였다고 한다. 그의 꺾이지 않는 신앙의 의지와 교우들의 입장을 우선 배려하는 착한 목자다운 태도는 교우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고, 많은 존경심을 불러일으켰다. 1979년 중국 정부가 종교에 관용을 보일 때까지 그는 홀로 그 어둔 밤을 걸어야 했다. 어둔 밤이 끝나자 그는 교우들을 모아 다시 교회를 일으킬 준비를 하였다. 그는 교우들과 함께 임시 성당을 마련하여 1980년 예수 성탄 대축일 미사를 봉헌하면서 가톨릭 신앙의 부활을 당당하게 선포하였다. 1987년 그는 연길로 가서 연길시 천주교회를 세웠다.

 

유유정 베드로 신부가 팔도구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며 신앙을 증거 하는 동안, 감정옥 안나 수녀는 용정에서 홀로 수도서원을 지키며 꺼져가는 신앙의 불꽃을 지키고 있었다. 명월구에서 태어난 그는 연길 수녀원에 입회하여 1944년에 첫 서원을 하였다. 1945년 수녀원이 해산되어 수녀들이 남한으로 피신하는 와중에 조선인 수녀 중 가장 언니였던 함정선 스콜라스티카(咸正善, +1971) 수녀와 가장막내였던 그가 월남을 포기했다. 그는 박해가 심하더라도 한 사람은 남아서 교우들과 생사고락을 같이 해야 한다는 함 수녀의 결단을 따랐다. 두 수녀는 숨어서 활동하다가 일시 북한 회령으로 넘어 가서 3년을 살다가 다시 용정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북한에서 취득한 국적이 빌미가 되어 중국 정부로부터 출국명령이 떨어졌다. 함 수녀는 북한으로 되돌아가 사망하였으며, 감 수녀는 계속 숨어 다니며 교우들과 접촉했다. 그 후 공장에서 그리고 채소밭에서 온갖 강제노역에 시달리면서도 신앙과 수도서원을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허름한 방에서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리면서도 장애가 있는 조카 손자를 데려다 기르며 애덕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인고의 시간을 보낸 뒤 감 안나 수녀는 신자들과 함께 공소를 만들어, 용정시 천주교회의 기반을 다졌고, 나중에 연길로 가서 성소자를 모아 수도 공동체를 꾸려 연길 수녀원의 명맥을 이었다.

 

이렇게 선교사들이 떠나간 북간도 땅에 남은 두 낱의 민들레 홀씨가 폭풍이 몰아치는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봄을 맞아 고운 꽃을 피워냈다. 1989년 10월 엄태준 아브라함 신부를 시작으로 동포 사제들이 잇달아 배출되었고, 이제 연변 지역 본당 사목은 5명의 동포 사제들이 도맡아 한다. 현재 연길延吉, 화룡和龍, 훈춘琿春, 안도安圖, 돈화敦化 등 6개 본당에 3,000여(한족포함) 명의 교우를 가진 연변 조선족 자치주 천주교회는 최근 들어 성모신심 단체 등을 결성하고 신자 재교육과 함께 영성을 심화하는 데 힘을 쏟으면서 사제 및 수도성소 발굴을 통해 복음화의 길을 힘차게 걷고 있다.

 

[분도, 2008년 겨울호, 글 편집실, 사진제공 역사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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